랜디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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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로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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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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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랜디 로즈
RANDY RHOADS

헌액 부문
음악적 우수상 (Award for Musical Excellence)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2021년







랜디 로즈
Randy Rhoads


파일:랜디 로즈.jpg

본명
랜덜 윌리엄 랜디 로즈
Randall William "Randy" Rhoads
출생
1956년 12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
사망
1982년 3월 19일 (향년 25세)
미국 플로리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음악가
소속
콰이어트 라이엇
오지 오스본
신체
170cm, 48kg
종교
기독교 (개신교)[1]
활동 기간
1972년 – 1982년
사용 악기
일렉트릭 기타, 클래식 기타
장르
헤비 메탈, 하드 록, 글램 메탈, 클래식 음악
레이블
에픽, CBS, 제트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데뷔 이전
3.2. 콰이어트 라이엇
3.4. 죽음
3.5. 사후
4. 평가
5. 스타일
6. 사용 장비
6.1. 일렉트릭 기타
6.1.1. 1974 Les Paul Custom
6.1.2. Karl Sandoval Polkadot Flying V
6.1.3. Jackson RR-1
6.2. 기타 앰프
6.3. 이펙터
7. 여담



1. 개요[편집]


섬광보다 강렬한 기타 소리, 불꽃같은 삶

정일서[2]


미국의 기타리스트. 콰이어트 라이엇(Quiet Riot)과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밴드에서 활동했으며, 대부분 오지 오스본 밴드에서의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3]


2. 상세[편집]


오지 오스본과 함께 'Blizzard of Ozz', 'Diary of a Madman' 2장의 앨범을 만들었으며, 사후에 라이브 앨범이자 헌정 앨범인 'Tribute'가 발매되었다.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작고 갸냘픈[4] 체격에 곱상한 외모의 샌님이었지만[5] 무대에서 절대 작지 않은 연주력을 보여주었고, 게다가 짧고 굵게 불태웠던 전성기, 비극적인 요절까지... 드라마틱한 요소란 요소는 다 갖춘 짧게나마 한시대를 풍미한 기타리스트였다.

'I Don't Know', 'Crazy Train', 'Goodbye to Romance', 'Revelation', 'Mr.Crowley', 'Flying High Again', 'Over the Mountain', 'Diary of a Madman' 등 오지 오스본의 실질적인 대표곡들은 모두 이 시기에 집약되어 있으며, 오지의 보컬 멜로디를 따 랜디가 기타 리프를 완성하고 밥 데이슬리, 리 커슬레이크와 같이 편곡하는 방식으로 여러 명곡들이 만들어졌다.

3. 생애[편집]



3.1. 데뷔 이전[편집]


랜디 로즈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산타 모니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랜디 로즈는 현재 헤비 메탈의 상징이 된 것과는 상반되게 당시 음악 학원[6]을 경영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클래식 기타를 배우게 된다.[7] 이때 랜디 로즈는 어머니에게 여러 음악 이론들을 배웠다고 한다.


3.2. 콰이어트 라이엇[편집]


랜디 로즈는 이후 클래식 기타에서 벗어나 헤비 메탈 기타리스트로 거듭나서, 학교 친구와 콰이어트 라이엇을 결성한다.

콰이어트 라이엇은 캘리포니아의 여러 음악클럽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였는데 생각보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때 밴드를 눈여겨 본 CBS 소니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두 개의 앨범을 발매하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느정도 이름은 알려졌는지, 슬래쉬는 이 시절 콰이어트 라이엇을 듣고 랜디 로즈의 플레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적이 있다고 한다.


3.3. 오지 오스본[편집]






Mr. Crowley
I Don't Know
콰이어트 라이엇 1기 시절의 1, 2집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방황하던 랜디 로즈에게 슬로터(Slaughter)의 베이시스트 데이나 스트럼이 블랙 사바스의 초대 보컬이었던 오지 오스본이 솔로 밴드 멤버를 모집하고 있으니 이 오디션에 참가해보라고 권유해서 오디션에 참가했고, 오지 오스본 솔로 밴드의 초대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살아 생전 랜디의 인터뷰에 따르면[8] 오디션 당시 앰프에 기타를 꽂고 몇 초간 웜 업을 하고 있는데 오지 오스본이 "OK 잘 치네, 합격이요."해서 랜디 로즈가 "아직 연주도 시작 안 했는데?"하며 당황했다고 한다.[9]

이후 오지 오스본의 랜디 로즈의 오디션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당시 데이나 스트럼이 랜디 로즈에게 집요하게 오지 오스본의 오디션을 보라고 부탁했고 오지 오스본에게도 아주 재능있는 기타리스트가 있다고 랜디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블랙 사바스에서 쫓겨나듯 탈퇴하여 알코올 중독에 빠져있던 오지는 평소같이 만취해있었고 집요한 부탁에 화가 나서 "그래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보기나 하자." 하는 생각으로 랜디 로즈의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 랜디가 오지 오스본에게 뭘 하면 좋을 지 물었고 오지는 자신있는 거 아무거나 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때 랜디 로즈는 리프 몇 개를 연주 했는데 오지의 회고에 따르면 만취상태였음에도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만난 기타리스트들 중 가장 재능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오디션에 지원했던 기타리스트 중에 조지 린치 같은 당대 유명 기타리스트도 있었음에도 오지가 무명인 랜디 로즈를 선택했다는 것은 오지 오스본의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지가 몇 초의 웜 업을 본 것 만으로 랜디를 뽑은 건 사실이나 단순히 랜디의 외모만으로 뽑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랜디 로즈는 오디션에서 채용된 후에 오지와 같이 음반 작업차 영국으로 떠나는데, 당시 오지 오스본의 프로듀서나 레코드 관계자들은 미국 출신의 키도 작고 샌님같이 생긴 무명 기타리스트를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디션을 다시 보라고 오스본에게 강요했지만 랜디의 끝내주는 리프에 논란은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랜디 로즈가 오지 오스본에 들어간 이후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마치 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랜디가 하루는 기타를 켜고 손가락으로 한번 쭉 슬라이드 했는데 이를 들었던 오지가 영감을 받아 멜로디를 읊었고 랜디가 그걸 듣고 바로 노래의 코드를 만들어 Suicide Solution이라는 곡이 나왔다. (슬라이드 부분은 곡의 도입부로 쓰였다.) 이 곡의 작사는 오지의 아내이자 매니저인 샤론 오스본, 베이시스트 밥 데이즐리가 공동으로 했는데 가사의 내용은 당시 오지의 알콜 남용 습관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한다.[10] 내한했던 전 오지 오스본 밴드의 드러머 토미 앨드릿지(Tommy Aldridge)는 랜디 로즈가 Over the Mountain을 작곡할 때 드럼 라인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제시하면서 곡 작업을 했다고 회고하며, 자신이 같이 작업해본 모든 뮤지션 중 랜디 로즈가 단연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오지 오스본 또한 랜디 로즈와의 만남을 '신이 내 인생에 들어왔다'라고 하며 최근까지도 그의 추모행사 등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오지 오스본은 랜디 로즈를 포함한 밴드 멤버들을 고용된 세션 수준으로 대우했다고 한다. 월급도 매우 짜게 주고...[11]

랜디 로즈는 굉장히 감성적이고 여린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당시 락 음악 씬에 퍼져있던 여러 문란한 문화에 굉장히 지쳐있었다고 한다. 또한 오지 오스본과의 굉장한 친밀함이 있었지만, 당시 오지 오스본이 가지고 있던 알코올 중독 문제라던가 히스테릭한 성격 때문에 잘나가던 시절에도 밴드에서 탈퇴하고 기타리스트로서의 삶을 은퇴하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실제로 당시에 락 밴드를 그만두고 클래식 기타 연주가가 되기 위해 투어 중에도 근근히 클래식 기타 강사들에게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랜디는 결국 오지에게 밴드를 그만두고 UCLA에 가서 클래식 기타 학위를 받고 싶다고 밝혔다. 랜디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샤론과 오지는 소송으로 그를 위협했고, 랜디 로즈는 2집 투어가 끝날 때 까지는 탈퇴를 보류해두기로 했다.


3.4. 죽음[편집]




랜디 로즈의 사망을 보도하는 BBC 라디오 뉴스
오지 오스본의 2집 투어 중, 이들이 다음 투어지로 이동하면서 어느 한 작은 비행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버스 운전사가 자신에게 경비행기 운전 면허증이 있다고 하면서 차에 타고 있던 일행들에게 비행기를 같이 타자고 제안한다. 원래 비행 공포증이 있던 랜디였지만, 이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버스 운전사의 제안을 승낙했는데, 당시 오지와 샤론은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랜디는 그들을 깨워서 함께 비행기를 타려다가 그냥 내버려둔 채 밴드 멤버들 중 유일하게 이 경비행기에 탑승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비행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세 번째 비행 때는 비행기가 그 전과는 달리 굉장히 비정상적으로 낮게 날다가 결국 한 쪽 날개가 인근에 주차되어 있던 버스에 부딪히면서 박살나버린다. 비행기는 그대로 중심을 잃은 채 인근 민가에 추락해버렸고, 이렇게 한 젊고 재능있는 기타리스트가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수습된 랜디의 시체는 산산조각이 나고 불에 타버리기까지 해서 신원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착용하고 있던 악세사리를 통해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비행기 사고에 대해서는 운전사가 마약에 취했다거나 자기 아내를 죽이기 위한[12] 계획적인 동귀어진이었다는 등의 여러 설들이 있는데, 무엇이 진실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해외 유명 기타 잡지들을 소스로 기고된 로즈 추모 기사가 있다.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글로 국내 대부분의 랜디 로즈 사고 관련 자료가 있다. (기사 출처)

3.5. 사후[편집]


오지 오스본과 랜디 로즈는 형제와도 같이 지냈고 영혼의 친구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오지는 랜디의 죽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슬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늘 오지 스스로 얘기 한다.[13] 그래서 이미 솔로 3, 4집의 성공을 이끈 제이크 E. 리라는 훌륭한 기타리스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랜디 로즈의 추모 앨범을 제작하기까지 한다.[14] 1987년 발매됐던 랜디 로즈의 추모 앨범 커버(#)는 아마 랜디의 가장 유명한 사진이라 할 수 있는, 오지가 랜디를 들어올리는 사진이다. 하지만 이는 오지 오스본의 언플일 뿐이고 실제로는 랜디에게 금전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그저 세션 기타리스트 취급을 했다고 한다.

랜디 로즈 사후 그의 전 소속 밴드였던 콰이어트 라이엇은 그의 별명이었던 Thunderbird를 제목으로 한 추모곡을 내기도 했다.[15] 게리 무어(Gary Moore)가 코지 파웰(Cozy Powell)과 함께 한 앨범인 TILT 수록곡 중 Sunset이라는 연주곡도 랜디 로즈 추모곡이다.[16]

사후 20년이 지나도 개인 트리뷰트나 커버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조지 린치, 알 피트렐리, 다임백 대럴, 제이크 E. 리, 마크 슬로터, 조 린 터너, 로니 제임스 디오, 잉베이 말름스틴, 세바스찬 바흐, 랍 락 등 참여 뮤지션 면면도 거창하다. Randy Rhoads Remembered라는 추모공연이 2014년 NAMM (National Association of Music Merchants)에서 처음 열린 뒤 매년 열리고 있으며 엄청난 네임 밸류의 뮤지션들이 참여하고 있다.


4. 평가[편집]


"In a way, Randy Rhoads is the Robert Johnson of metal. It's such a small catalog of stuff that has been so incredibly influential,"

"어떤 면에서 랜디 로즈는 메탈계의 로버트 존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업물의 수는 적더라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끼쳤지요."

톰 모렐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오지 오스본 솔로 밴드의 1기 멤버 겸 초대 기타리스트로, 오랫동안 활동하지 못했지만 단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모든 걸 불태우고 떠난 불세출의 천재라고 평가받는다.[17]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으며, 수많은 후대 헤비메탈 기타리스트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다. 오죽하면 조지 린치, 잭 와일드 등 랜디 이후의 실력 있는 후임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빈 공간을 채우려 했지만 대다수는 역시 원조만 못하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이다.


5. 스타일[편집]


플레이 스타일은 기타 플레이만 튀는 '기타리스트'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리프, 곡 전개, 솔로까지 전체적인 어레인지를 고려한 '작곡가' 스타일이었다. 한국 발라드 씬에서 유재하가 갖는 존재감처럼,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당시 하드 록, 헤비 메탈 씬에서 랜디처럼 대학물은 아니어도 클래식을 제대로 배워서 기본기를 다진 연주자는 그 당시 흔치 않았다.

즉흥적이라기 보다는 잘 계산된 클래시컬하고 유려한 멜로디 라인 전개가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이 분야에 있어서는 거의 레전드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의 기타리스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8] 레코딩시엔 특이하게 대부분의 솔로를 더블 트래킹으로 레코딩해뒀다고 한다.[19] 또한 오지 오스본과 함께했던 투어 기간 동안에는 이미 굉장한 수준의 기타리스트였음에도 리허설 이후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공연하는 지역의 클래식 기타리스트를 찾아가 꼬박꼬박 레슨을 받았다고 하는 등 대단한 노력가였다.


6. 사용 장비[편집]


랜디 로즈의 장비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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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ig-diagram-Randy-Rhoads-Ozzy-Osbourne-1981@3000x11017px.jpg




6.1. 일렉트릭 기타[편집]



6.1.1. 1974 Les Paul Custom[편집]



파일:Randy_Rhoads_with_Gibson_LPC.png


파일:Gibson_Randy_Rhoads_Signature_Les_Paul_Custom.jpg
깁슨 커스텀 샵에서 나온 시그니처 모델
위의 'I Don't Know' 라이브 영상에서도 볼 수 있는 기타로, 1974년에 생산된 깁슨 레스폴 커스텀 화이트 모델이다. 본래는 일반적인 흰색 커스텀 모델이었으나, 오랜 사용으로 피니쉬가 황변되어 노란색에 가까운 색이 되었고 여기에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스피드 노브를 금색 탑 햇 노브로 교체하고, 픽업 셀렉터 링 또한 브라스 재질로 교체되어 있는 등 여기저기 모디파이까지 되어있는 모습이다. 2010년에 깁슨 커스텀 샵에서 그가 사용하던 레스폴 커스텀을 복각한 시그니처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1974년식 레스폴 커스텀은 놀린 시대(Norlin Era)라는 깁슨의 암흑기에 나온 모델로, 메이플 탑 밑에 마호가니/메이플/마호가니 목재를 겹친 샌드위치[20] 바디가 사용되었다. 당시 이러한 변화로 인해 전통을 파괴한다며 평가가 좋지 못했고, 지금도 놀린 시대 레스폴 제품들에 대한 깁슨 유저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6.1.2. Karl Sandoval Polkadot Flying V[편집]



파일:랜디 로즈.png

칼 샌도발이라는 기타 루티어가 만들어준 물방울 무늬 커스텀 플라잉 V로, 바디 모양은 일반적인 플라잉 브이와 같으나, 펜더에서 주로 사용하던 싱크로나이즈드 트레몰로 브릿지를 사용했고, 헤드스톡 모양도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폴카닷이라는 이름처럼 전체적으로 검은 바디에 흰색 물방울무늬가 박혀있는데, 이 특징적인 모습 덕에 폴카닷 플라잉 V는 사실상 랜디 로즈를 상징하는 악기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오지 오스본은 이 기타가 튜닝이 쉽게 틀어진다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했었다.

랜디 로즈를 우상처럼 여기는 걸로 잘 알려진 후임자 잭 와일드 또한 라이브에서 해당 기타의 레플리카를 연주하는 모습을 간혹 보여준다.


6.1.3. Jackson RR-1[편집]



파일:Randy_Rhoads_Jackson_Guitars.webp


파일:Jackson_USA_Select_RR1_Snow_White_with_Black_Pinstripe.jpg
랜디 로즈가 당시 설립된지 얼마 안되었던 샤벨 기타 공장에 방문하여 당시 샤벨 사장이었던 그로버 잭슨과 함께 디자인한 비대칭형 플라잉 V 스타일 일렉트릭 기타. 이 때 나오게된 이 급진적인 모양 탓에 비교적 얌전한 방향성으로 회사를 운영하던 그로버 잭슨이 브랜드 이미지에 해가 갈 것이라는 판단 하에 헤드에 본인의 성인 잭슨(Jackson)을 필기체로 헤드에 적어주었는데, 이게 잭슨 기타의 시작이 되었다. 랜디 로즈가 이 악기를 사용하여 유명해진 것을 계기로 잭슨은 1980년대 메탈 열풍의 수혜를 그대로 받아 당시 가장 잘나가는 일렉기타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


6.2. 기타 앰프[편집]




6.3. 이펙터[편집]




7. 여담[편집]


  • 오지 오스본의 첫 앨범 Blizzard of Ozz가 1980년 9월에 발표되었고, 랜디 로즈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게 1982년 3월이니 오지 오스본 밴드에서의 활동 기간이 2년도 채 되지 않으며, 랜디 로즈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상 및 스튜디오 녹음, 라이브 등의 자료가 상당히 빈약하다. 특히 영상 자료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다.

  • 랜디 로즈는 작은 체격에 손 크기도 평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010, 011 게이지의 GHS사 Boomers를 즐겨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 판테라(Pantera)의 다임백 대럴(Dimebag Darrel)은 어렸을 때 Flying High Again의 솔로를 듣고 감동해서 '헐 시발 나도 기타 쳐야겠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21] 잭 와일드(Zakk Wylde)는 같은 오지 밴드의 기타리스트라 대놓고 랜디 로즈와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위치임에도 진성 로즈 빠돌이로 유명하며 아직도 차고에 랜디 로즈 포스터를 붙여놓고 있으며 인터뷰 때마다 랜디 로즈가 언급되는데 거의 신으로 묘사한다. 이쯤 되면 중증에 가깝다(...). 심지어 아들 이름을 "헨드릭스 헤일런 마이클 로즈 와일드"로 지어놓기까지 했다.

  • 유명 음악평론가이자 팝 칼럼니스트, 경인방송 소속 DJ 및 제작팀장인 성우진이 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뇌성마비 후유증으로 인해 다리를 절게 됐던 성우진은 이로 인해 학창 시절 많은 불이익을 봤었는데, 어느날 친구네 집에서 비디오테이프로 접하게 된 콰이어트 라이엇의 공연 영상에서 랜디 로즈를 본 뒤 자신과 같이 다리를 저는 처지의 기타리스트에 흥미를 느껴 기타를 연습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다. 랜디 로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좌절에 빠진 성우진은 다시는 기타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래도 음악에 대한 지식을 계속 쌓으면서 지금의 입지를 쌓아올렸다. 지금까지도 그가 쓰는 영문 ID에는 'randy' 아니면 'rhoads'가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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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외로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2] 더 기타리스트의 저자이다.[3] Mr. Crowley의 기타 솔로 파트에서 오지 오스본이 그를 들어올리는 모습은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잊지 못할 장면이다.[4] 공식적으로는 170cm 48kg, 5피트 7인치 105파운드의 체격으로 생각보다 작진 않았다. 다만, 아래 라이브만 보면 작은 바디로 유명한 플라잉 V를 들고도 팔뚝굵기가 기타 넥 정도 밖에 안될 만큼 작아 보여서 실제 키는 165cm 정도로 보인다. 또한 몸무게를 보면 50kg를 안 넘는 마른 체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5] 오지 오스본은 그를 처음 보고 여자로 착각했다고 했다.[6] 이 음악 학원(Musonia School of Music)은 현재에도 운영중이며 현재는 랜디 로즈의 형인 켈리 로즈가 운영하고 있다.[7] 랜디 로즈 추모 앨범에 수록된 Dee에서 랜디 로즈는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8] 1982년 기타월드지와의 인터뷰이다.[9] 여담으로 이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와전되어 오지가 랜디를 보자마자 뽑았다는 루머가 돌았었다. 이 루머에 대해 오지 오스본은 오히려 부인하며 호리호리한 체형에 작은 키를 가진 랜디를 처음 보고 게이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10] 그러나 자살한 청소년의 집에서 이 노래가 담긴 Blizzard Of Ozz 앨범이 나와서 이 곡이 자살을 조장했다고 소송하여 재판이 열린 적이 있었다. 지금도 몇몇 주에서 이 곡은 연주 금지곡이다.[11] 오지 오스본과 같이 활동한 멤버들 중에서 이러한 수익 분배가 문제가 되어 탈퇴한 사람이 밥데이즐리를 비롯 여럿 있다. 사실 잭 와일드를 제외한 거의 전부라고 봐도 될 정도.[12] 당시 옆에는 운전사의 아내도 타고 있었다.[13] 오지의 새 앨범 <Ordinary Man>에 실린 동명의 수록곡 뮤직 비디오에서 오지는 자신이 일생 동안 여러 곳에서 찍힌 사진의 슬라이드 쇼를 보는데, 자신과 랜디가 같이 나오는 사진이 투영되자 머리를 살짝 싸매고 침통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14] 제이크는 여기에 큰 불쾌감을 느낀데다 평소 오지와의 불화까지 겹쳐 밴드를 탈퇴한다.[15] 근데 한국 밴드 부활의 "희야"가 이 곡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다.[16] 인기 카피곡이기도 하다. 사실 곡이 처음 발표될 때는 랜디 로즈의 추모곡이 아니었다. 에초에 TILT의 발매일은 1981년으로 랜디 로즈가 사망하기 전에 발표된 곡이다. 랜디 로즈 사후에 라이브에서 게리 무어가 랜디 로즈에게 바친다고 말했던 게 라이브 앨범에 그대로 실렸고 그 다음부터 이 곡이 랜디 로즈의 추모곡이 되었다.[17] 실제로 생전 오지 오스본 밴드 멤버로 참여한 것은 스튜디오 앨범 2장에 라이브 앨범 1장이 다다. 사망 나이도 그렇고 여러모로 지미 헨드릭스의 생애와 유사하다.[18] 잭 와일드, 조지 린치, 마이클 안젤로 바쇼, 믹 톰슨, 폴 길버트, 버킷 헤드 등 레전드 기타리스트들이 영향받은 기타리스트로 랜디 로즈를 언급하고 있다.[19] 보통 더블 트래킹은 솔로보다는 리프를 녹음할 때 사용하는데, 랜디 로즈가 솔로 때 더블 트래킹을 고집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다임백 대럴은 타이트함과 느슨함이 동시에 있는 플렌저 효과가 나타난다며 극찬했다.[20] 영미권에서는 팬케이크(Pancake)라고 부르기도 한다.[21] 2003년 발매된 Guitar World Presents - Dimebag Darrell's Riffer Madness에서 다임백 대럴의 멘트에 의하면 기타를 치게 된 계기는 KISS의 에이스 프레일리라고 한다. 다임백 대럴이 가장 좋아하는 랜디의 기타 솔로는 1집의 'Revelation Mother Ea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