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스 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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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54년
라이너스 폴링




라이너스 칼 폴링
Linus Carl Pauling


파일:external/www.wikitree.co.kr/img_20100817171819_5c294cd6.jpg

출생
1901년 2월 28일
오리건주 포틀랜드
사망
1994년 8월 19일 (향년 93세)
캘리포니아주 빅서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화학
학력
오리건 주립대학교 (화학공학 학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물리화학/수리물리학 Ph.D.)
배우자
에바 헬렌 폴링 (1923년 – 1981년, 사별)
자녀
4명
수상
ACS 순수 화학 상 (1931)
어빙 랭뮤어 상 (1931)
국립과학원 회원 (1933)
데이비 메달 (1947)
노벨화학상 (1954)
노벨평화상 (1962)
로블링 메달 (1967)
레닌평화상 (1968–69)
국가과학 메달 (1974)
로모노소프 황금 메달 (1977)
NAS 화학 과학 상 (1979)
프리스틀리 메달 (1984)
버니바 부시(1989)
서명
파일:Linus Pauling signature.png

1. 개요
2. 반핵운동
3. 비타민C 메가도즈 요법
4. DNA에 관련된 일화
5. 준결정 부정



1. 개요[편집]


오로지 나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미국의 화학자로 노벨화학상노벨평화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그리고 소련 레닌 평화상까지 수상한 위대한 과학자다.[1] 아울러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문이과 통합

20세기 과학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화학결합론의 기초를 구축한 천재 과학자이자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사회운동가로 굉장히 다대한 활동을 해왔었다. 노벨화학상은 전기 음성도 연구로 탔다.

1901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1918년 오리건 주립대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화학공학과 학사과정을 졸업하였다. 그는 당시 학생 신분임에도 강의 조교를 할 만큼 화학에 우수한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1925년 물리화학수리물리학 분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28살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20대에 양자물리학을 복잡한 분자 연구에 응용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올랐으며 화학결합에 관한 그의 이론은 현대 과학에 중요한 부분으로 반드시 거론된다.


2. 반핵운동[편집]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뛰어나지만 이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앞장나섰던 점이다. 그가 느꼈던 사회와 인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핵무기 반대와 핵실험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데 평생을 헌신케 만들었다. 그 때문에 당시 미국 내에서 매카시즘 열풍이 불었을때, 그는 오펜하이머와 같이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반대 운동을 벌여 전 세계 1만명이 넘는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반대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1963년 미국과 소련의 핵협정이 맺어진 이후, 반핵운동에 활동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3. 비타민C 메가도즈 요법[편집]


노벨상 수상자의 이상한 믿음 - 비타민 C 요법과 진실 게임

말년에 '비타민C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해 이게 논쟁의 중심에 있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2]

영장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체내에서 비타민C 합성이 가능했고 그러한 동물들이 체내 합성해내는 비타민C의 양을 사람의 몸무게를 대입해 계산했더니 상식적인 권장량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비타민C가 인간에게는 필요할 것이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메가도스로 비타민C를 매일 과량으로 섭취했다. 그냥 탁자 위에 비타민C 통을 두고 보이는 대로 집어먹었다고 한다. 하루에 수–수십g(mg이 아니다. 보통 일일권장량은 80–100mg = 0.08–0.1g 정도로 책정한다.)[3]을 복용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비타민C 효과를 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본인은 90이 넘도록 장수했으며 죽기 2주 전까지 대학에서 열성으로 강의를 했다고 한다. 현재 기준으로도 오래 산 편이고, 당시 기준으로는 확실한 장수다.[4] 뭣보다 오래 살기도 했지만 건강하게 살았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1994년 8월 19일 향년 94세로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4. DNA에 관련된 일화[편집]


거기다 생화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DNA의 구조를 연구했다. 그때 당시 라이너스 폴링은 화학 결합에 대한 이론을 완성시킨 최고의 화학자였으므로 분자구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폴링이 사용한 시료는 손상된 DNA 시료였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된 DNA 구조를 밝혀내지 못했다. 게다가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탓에 출국이 금지되어 해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었고, 결국 DNA 구조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인 DNA X선 회절 사진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세운 이론에 위배되는 구조를 만들고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주장하던 DNA는 삼중나선 구조였는데 이 구조로는 염기가 어떻게 정보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원자들이 너무 가깝게 붙어있다는 단점(이러면 DNA가 불안정해져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이 있었다. RNA의 일부분에선 삼중나선이 나타날 수 있긴 한데 폴링이 생각하던 삼중나선과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 최근에는 다른 설이 등장했다. 비록 라이너스 폴링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회절 사진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조교가 영국에 가서 사진을 보고 왔고, 또한 폴링도 얼마 뒤에 출국 금지가 풀려 영국에 갔다고 한다.

결국 DNA 구조를 밝혀낸 공로는 제임스 왓슨프랜시스 크릭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폴링의 DNA 구조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만약 폴링이 그 단서(DNA X선 회절 사진)를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을 것이고, 생리의학상까지 수상하며 세상에서 가장 많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재밌는 것은 사실 제임스 왓슨도 폴링과 같이 DNA를 삼중나선구조로 생각하였는데 폴링의 가설을 가지고 월킨스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폴링이 못봤던 위의 그 결정적인 단서인 X선 회절 사진을 보았고 이중나선임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노벨상도 받은데다가, 그 위대한 폴링이 조롱거리가 되자 겁이 없어졌는지 DNA 구조를 밝히려고 노력한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책을 썼는데, 당연하지만 여기에는 폴링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폴링은 이들을 파티에 초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일깨워준 둘을 칭송하는 성인군자에 필적하는 마음씨를 선보였다.


5. 준결정 부정[편집]


There is no such thing as quasicrystals, only quasi-scientists.

준결정은 없고 준과학자만 있다.

- 라이너스 폴링이 다니엘 셰흐트만을 조롱한 말.


생전에 일정한 구조를 이루지만 규칙성은 없는 물질인 준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력 부정하였다. 특히 다니엘 셰흐트만이 준결정을 주장하자, 그에 대해 위의 발언으로 모욕을 준 사건이 있다. 쉽게 말해서 과학자 자격도 없다고 말한 것. 폴링을 중심으로 해서 화학계 전체에서도 셰흐트만 교수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보기에 논문은 굉장히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지만, 그 저자인 셰흐트만 교수는 교과서(결정학 입문서)부터 다시 읽으라는 말까지 듣는 등 심각한 왕따를 당했다.[5]

그러나 수학을 통해 준결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셰흐트만뿐 아니라 다른 과학자들도 잇달아 준결정을 발견하면서 폴링이 죽을 때까지 없다고 우기던 준결정이 마침내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결국 201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다니엘 셰흐트만이 선정되면서 사후에 그의 오류로 확정됐다. 준결정은 공학적으로 유용한 성질들을 갖고 있어, 신소재 개발에서 중요한 발견이므로, 준결정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폴링이 저지른 큰 실수 중 하나이다.

물론 준결정의 이론적 토대가 된 펜로즈 타일로저 펜로즈 또한 자연적으로 준결정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자연에서 보기 힘들 거라 생각했던 것이 대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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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 판본에는 '개인으로서 노벨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사람은 폴링 뿐이다'라고 나와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장 마리 퀴리만 하더라도 노벨물리학상노벨화학상을 각각 1번씩 받아 총 2번을 받았다. 나머지 인물은 노벨상 문서의 기록 참고.[2] 정작 자신이 암으로 사망했으니 효과가 없지 않느냐는 얘기도 있지만, 오히려 당시 평균연령보다 압도적으로 오래 생존했으며(94세) 애당초 고령에서 암의 발생률은 매우 높아지므로 단순히 라이너스 폴링 개인의 결과만 보면 효과가 없었다는 추정보다는 효과가 있었다고 추정하는게 맞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았다. 물론 장수의 결정적 이유가 비타민C 때문인지 다른 생활습관 때문인지 유전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3] 사먹는 비타민C 정제가 보통 한 알에 0.5g–2g이다. 1000mg 짜리 비타민C 정제에는 약 100mg정도의 고형제가 포함되어있다.[4] 1990년 경의 평균 기대 수명은 전세계 기준으로 남성 61세 정도였고, 비교적 보건 및 생활수준이 높았던 유럽과 북미로 한정해도 남성 69세 정도였다.[5] 참고로 다니엘 셰흐트만은 서울대 물리대학원 특강이 이스라엘 대통령 출마로 취소되었다는 그 사건의 주인공이다. 낙선된 이후 다시 서울대에서 특강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