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슬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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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24대 국왕
라슬로 4세
IV. Lászl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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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62년 8월 5일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290년 7월 10일
헝가리 왕국 쾨뢰셰그[1]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1272년 ~ 1290년 7월 10일
배우자
나폴리의 엘리사베타
(1276년 결혼)
아버지
이슈트반 5세
어머니
쿠만의 에르제베트
형제
언드라시, 커털린, 마리어, 에르제베트, 헝가리의 언너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 제24대 국왕. 10살 때 아버지 이슈트반 5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요아킴 펙타르(Joakim Pektar ?~1277)에게 납치된 후 그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 허수아비 왕으로 지냈다. 1277년 성년이 된 뒤 쿠만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가톨릭 강요 정책에 대한 쿠만인들의 반발과 헝가리 귀족들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믿었던 쿠만인들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편집]


1262년 8월 5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이슈트반 5세와 몽골 제국군의 침략을 피해 헝가리로 이주한 쿠만족 지도자 쾨텐의 딸 에르제베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실로 고달팠다. 2살 때인 1264년, 이슈트반 5세가 누이 언너의 영지를 몰수해버리자, 이에 분노한 언너가 아버지 벨러 4세를 부추겨서 이슈트반을 공격하게 했다. 언너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샤로슈퍼터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이슈트반의 아내 에르제베트와 라슬로를 포함한 아이들을 사로잡아 투로크 성에 투옥했다.

1265년 3월, 이슈트반은 아버지를 상대로 이사제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헝가리를 도나우 강을 따라 양분하기로 결의했다. 라슬로는 그때서야 가족과 함께 풀려났지만, 이후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일가족이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1269년, 나폴리 왕국 국왕 카를루 1세의 딸 엘리사베타(Elisabetta di Sicilia 1261~1303)와 약혼했고, 1270년 엘리사베타가 헝가리에 도착한 뒤 수년간 약혼자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1272년 늦봄, 이슈트반 5세는 결혼 동맹을 맺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와 협상하기 위해 달마티아로 향했다. 그런데 그해 6월 24일, 비하크에서 요아킴 펙타르라는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영주가 라슬로를 납치해 코프리브니차 성에 연금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슈트반 5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코프리브니차 성으로 달려갔지만, 도중에 중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도나우 강변의 체펠 섬으로 간 뒤 1272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그 후 에르제베트 왕비는 라슬로를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데려온 요아킴과 서둘러 협상한 뒤, 함께 대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5세의 측근들은 엘리자베트 왕비가 어린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요아킴과 짜고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했다. 이슈트반 5세의 재무관 에기디우스 모노즐로는 여러 인사를 포섭한 뒤, 우선 라슬로를 빼돌린 후 왕비의 숙소를 공격했다. 하지만 요아킴의 지지자들이 이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모노즐로는 포조니로 후퇴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후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투항했다. 오타카르 2세는 모노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막대한 선물을 제공했다.

1272년 9월 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 피포가 주관하는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10살 소년 라슬로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지만, 실제로는 헝가리 귀족들이 왕국을 통치했다. 그해 11월, 귀족들이 퀼락 섬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을 때 유력 귀족 중 하나인 쾨세그 공작 헨리크가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와 이슈트반 5세의 누이 언너의 아들인 벨러를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벨러가 이에 격하게 항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헨리크가 검을 뽑아 벨러를 찔러 죽였다. 당시 퀼락 섬의 수녀원에 지내던 이슈트반 5세의 누이 머르기트와 다른 수녀들이 유해를 수습한 뒤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었다. 이후 마초 공국은 헨리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최고 권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쾨세그 공작 헨리크와 요아킴 펙타르가 한 무리를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카사크 공작 마테가 이끌었다. 양측은 서부 헝가리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헝가리 정부는 수 년간 두 권력집단간의 경쟁과 대립으로 점철되었고, 라슬로 4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사표현조차 하지 못했다. 이중에서 그나마 라슬로를 지원하는 귀족인 페터르 카사크마저 정쟁에서 밀려 낙향해야 했고, 그의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1273년 4월, 오스트리아 공국과 모라비아의 군대가 지난날 이슈트반 5세가 자국을 침공하여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죄르솜버트헤이를 공략하고 헝가리 서부 일대를 약탈했다. 요아킴이 두 달 후에 두 요새를 탈환했지만, 얼마 후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죄르와 쇼프론을 포함한 많은 요새를 공략했다.

1274년, 헨리크 쾨세그는 라슬로 4세를 납치해 자기들 입맛대로 부려먹으려 했다. 카사크 가문이 왕을 구출하자, 쾨세그 가문은 라슬로 4세의 남동생 언드라시를 왕으로 추대했다. 1274년 9월 26일과 29일 사이에 페제르의 폴가르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터르 카사크가 헨리크와 요아킴의 군대를 격파했다. 헨리크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언드라시를 계속 왕으로 내세웠다. 1274년 말, 합스부르크 가문독일왕 루돌프 1세는 보헤이마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헝가리와 동맹을 맺었다.

1276년 루돌프 1세와 오타카르 2세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헝가리 정부는 그해 가을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쇼프론은 곧 라슬로 4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오타카르 2세 역시 헝가리 서부의 모든 도시를 포기할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1277년 에르데이에 거주하는 작센인이 반란을 일으켜 줄러페헤르바르를 파괴하고 에르데이의 주교좌도 파괴했다. 귀족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고, 그저 권력을 놓고 분쟁을 벌이기만 했다.

1276년 정식으로 나폴리의 엘리사베타와 결혼한 라슬로 5세는 이듬해인 1277년 5월 라코스 인근 들판에서 소집된 회의에 출석했다. 컬로처의 이슈트반 대주교, 바츠의 풀룹 주교, 바러드의 라도메르 주교, 자그레브의 티모트 주교 등 회의를 주도한 주교들은 왕이 법적 연령이 되었으니 모든 국정을 스스로 이끌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라슬로 4세는 이에 호응하면서, 국가의 불명예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라슬로 4세는 친정할 수 있게 되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귀족들은 여전히 강대한 권세를 누리며 국정에 간섭했고, 왕에게는 독자적으로 정책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허수아비 왕으로 살다가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외가인 쿠만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자기 편으로 삼고, 왕실의 통제에 따르지 않은 영주들은 하나둘씩 물리쳤다. 우선 세페세그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여기에 지난날 자신을 납치한 뒤 허수아비 군주로 부려먹었던 요아킴이 헝가리 남부에서 이슈트반 바보니치와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하는 행운이 겹쳤다. 그는 여세를 몰아 1277년 가을에 트란스다뉴비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쾨세그 가문을 공격했지만, 그들의 군세가 강력해서 쉽사리 꺾지 못했다. 1278년 초 반란군 지휘관 니콜라스 제레기의 요새인 아도리안을 공략한 그는 그해 초여름에 티서 강변의 7개 주를 다스리는 영주들을 소집하여 2명의 반항적인 지역 귀족들을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입지를 어느정도 다진 뒤, 그는 독일왕 루돌프 1세와 힘을 합쳐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를 정벌하러 출진했다. 1278년 8월 26일, 양군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오타카르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돌프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라슬로 4세에게 "당신 덕분에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신성 로마 제국의 품에 무사히 돌아왔다."며 감사를 표했다. 이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등에 업게 된 그를 두려워한 쾨세그 가문은 그동안 왕으로 받들던 언드라시를 베네치아로 보내고 1279년 초 라슬로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그는 모든 영주, 귀족, 주교들이 참석한 회의를 소집하여 파편화된 왕실 영지를 회수하고 헝가리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지원 정책을 검토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상당량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1279년 9월 22일,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사절단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교황은 헝가리 왕국이 내전에 시달리느라 교회 조직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 우려를 표하며, 왕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모의 피포 주교를 헝가리의 교황 사절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피포는 교회 문제 외에도 세속 문제 전반에 간섭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제 막 통합 작업을 벌이던 라슬로 4세 입장에서는 왕권이 교권에 저해될 우려가 있었기에, 사절단이 도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예정대로 도착했고, 피포는 왕에게 교황권의 수위를 인정하고 모든 주와 왕에 관한 법령을 포함하는 상세한 제안서를 왕실 회의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중에는 쿠만인들에 관한 법령도 있었다. 당시 쿠만인들은 집단촌에 모여살면서 고유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피포는 쿠만인들이 기독교를 아직도 수용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라슬로 4세에게 쿠만인들이 이교 관습을 버리고 진정한 기독교도가 되도록 권고하라고 촉구했다. 교황 사절의 압박에 굴복한 그는 모든 쿠만인들이 천막을 떠나 "땅에 붙어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며 기독교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고 규정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쿠만인들은 법을 따르지 않았고, 라슬로 4세는 쿠만인들의 지지 덕분에 여기까지 온 만큼 그들을 차마 어찌하지 못했다.

라슬로 4세가 좀처럼 쿠만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자, 필리프는 1279년 10월 헝가리 전역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왕을 파문했다. 라슬로 4세는 교황청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쿠만인들은 자신들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교황 사절에게 짜증이 난 나머지 1280년 1월 초에 피포를 체포했다. 그 직후,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인 핀타 어버가 라슬로 4세를 사로잡아 보르사 가문의 지도자인 롤랑에게 넘겼다. 2달 후 교황 사절과 국왕 모두 석방되었고, 라슬로 4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쿠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재정하기로 서약했다.

쿠만인들은 상황이 갈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교황 사절의 요구에 복종하는 대신 헝가리를 떠나기로 했다. 라슬로 4세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살란케멘[2]까지 따라갔지만, 쿠만인이 국경을 넘어 가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헝가리에 남기로 한 쿠만인 역시 기독교 강요에 불만이 가득했다. 1282년 여름, 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라슬로 4세는 호드메죄바샤르헤이 인근 호드 호수에서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쿠만인들에게 가하는 징벌을 최소화함으로써 그들을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애썼다.

1285년 1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2달간 도나우 강 동쪽 일대를 파괴했지만, 현지 민병대와 귀족 사병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이때 많은 귀족들은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자신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라슬로 4세가 몽골인을 선동해 헝가리를 침공하게 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라슬로 4세는 1285년 9월 세페세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몽골군 포로를 대거 고용했다.

이렇듯 기독교 강요 정책에 대한 쿠만인의 반발과 귀족들의 거센 저항, 교황의 압력에 직면한 그는 심각한 심적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 마지막 몇년 동안 기행을 벌였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점점 덜 수행했고, 쿠만인의 의상과 머리를 본따고 천막에서 사는 등 쿠만족의 삶의 방식을 선호했다. 또한 수많은 쿠만 여인들을 첩으로 들이고 나폴리 출신 왕비 엘리사베타를 학대하게 했다. 1286년 엘리사베타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헝가리를 탈출하려 하자, 그는 군대를 보내 그녀를 체포한 뒤 머르기트 섬에 3년간 유폐했다. 그러다가 1289년에 풀어주고 궁정에 머물게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장 좋아하는 첩 아이두아(Aydua)와 함께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가 헝가리를 침공해 서쪽 변경지대의 30개 요새를 공략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헝가리 국왕이 완전히 이교도가 되어버렸다고 여기고 헝가리를 향한 십자군을 선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던 1290년 7월 10일, 라슬로 4세는 쾨뢰셰그 성에서 아르부즈, 토르텔, 케멘스라는 이름의 세 명의 쿠만인에게 암살당했다. 이들 전원이 현장에서 라슬로 4세 애첩의 형제였던 미즈와 니콜라스에게 주살되었기에, 왕을 죽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니콜라오 4세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왕이 가톨릭 신자로서 죽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조사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유해는 처나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엘리사베타 왕비를 박대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유일한 형제인 언드라시는 1278년에 10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에 귀족들은 언드라시 2세가 말년에 들였던 왕비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낳은 이슈트반의 아들인 언드라시를 언드라시 3세로서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3. 기타[편집]


  •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연도를 맞추면 플레이할 수 있다.
  • 게임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2에서 헝가리의 장수로 나온다. 능력치는 정치/전투/지모 순서로 61/54/6이며 말년의 기행을 반영했는지 지력이 한 자리라서 전투에는 못 써먹는다.[3] 라슬로가 군주가 됐을 경우 전장에 내보내지 말고 콘스탄티노플처럼 문화 수치가 높은 도시에서 왕비들과 연회를 돌려서 자식농사만 짓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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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루마니아 크리샤나주 비호르현 토볼리우.[2] 현재 세르비아 시르미아주 스타리 슬랑카멘.[3] 부왕인 이슈트반 5세는 53/57/43으로 지력이 라슬로보다는 높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