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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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미로 2세.jpg
Ramiro II de Aragón
가문
히메네스 왕조
생몰년도
1086년 4월 24일 ~ 1157년 8월 16일
출생지
아라곤 왕국 하카
사망지
아라곤 왕국 우에스카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의 국왕
1134년 - 1137년
아버지
산초 라미레스
어머니
루시의 펠리시아
형제
페드로 1세(이복 형제), 페르난도 산체스, 알폰소 1세
배우자
푸아투의 아그네스
자녀
페트로닐라
종교
기독교 (가톨릭교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아라곤 왕국 5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라미로 2세', 아라곤어로는 '레미로 2세'이다.

2. 생애[편집]


1086년 4월 24일 아라곤 왕국의 수도 하카에서 아라곤 왕국 2대 국왕 산초 라미레스와 몽디디에 백작 힐두앵 4세의 딸인 루시의 펠리시아 사이에서 출생했다. 이복 형제로 페드로 1세가 있었고, 친형제로 페르난도 산체스, 알폰소 1세가 있었다. 그는 3명의 형이 있었기에 일찌감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간주되었고,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산 폰세 데 토메라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이후에는 우에스카의 산 페드로 엘 비에호 수도원장으로 발탁되었고, 마지막에는 로다의 주교를 맡았다.

그러던 1134년 9월 7일,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알폰소 1세가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알폰소 1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왕국을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성묘 기사단에 양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들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아라곤 귀족들은 알폰소 1세의 동생이며 수도 생활을 하던 라미로를 속세로 꺼내 왕으로 추대했다. 대관식은 1134년 9월 29일 사라고사에서 거행되었다.

한편, 산초 라미레즈 이래로 아라곤 국왕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팜플로나 귀족들은 이참에 독립하기로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아타레스 가문의 일원인 페드로 데 아타레스를 왕으로 추대하려했지만, 그가 무척 거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들을 깔보자 마음을 바꿔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라미로 2세가 이에 반대하면서 양국간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지만, 1135년 1월 양자는 바돌루엥고 조약을 통해 화합했다. 가르체아는 아라곤 왕국이 팜플로나 왕국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며 라미로를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고, 라미로 2세는 그가 팜플로나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르체아는 1135년 7월에 입장을 바꿔 자신이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의 봉신이라고 선언하고 알폰소 7세의 보호를 받았다. 알폰소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가르체아에게 사라고사를 봉토로 내줬다.

한편, 아라곤 왕국내 귀족들은 오랜 수도원 생활로 인해 통치 경험이 전무한 왕이 막 즉위한 터라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로 인해 왕위를 잃을 위기에 몰린 그는 베살루 수도원으로 피신한 뒤 그곳의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왕국의 미래를 위해 잡초를 뽑아라"라는 조언을 받고 돌아온 라미로 2세는 왕국 전체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종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귀족들이 그의 어리석은 행위를 비웃기 위해 그 종을 보러 오자, 왕은 종이 있다는 방으로 한 명씩 들어오게 했다. 잠시 후, 방안에서 귀족들이 목 베이면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울러퍼졌다. 왕은 충격으로 얼어붙은 귀족들을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들어보라, 들어봐! 종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들어보라!"


이날 학살된 귀족들은 휴전 기간에 무슬림 캐러밴을 공격해 약탈을 일삼고 사병을 길러서 왕의 명령을 무시한 자들이었다. 이후 귀족들은 다시는 라미로 2세를 거역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미로 2세는 수도자로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아라곤 왕위가 후계자 없이 남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1135년 11월 13일 자카 대성당에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1117년 투아르 자작 아이메리 5세와 결혼해 1127년 에이메리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기욤 1세, 가이, 제프리 4세를 낳았다. 라미로는 출산 경험이 많은 그녀가 후계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녀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공식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육체적 욕망 때문이 아니라 왕실의 혈통을 잇기 위해 아내를 얻었다."


1136년 8월, 아그네스는 딸 페트로닐라를 낳았다. 그 후 아그네스는 1136년 10월 산 페드로 데 안테프 루엔초 수도원에 남편과 함께 방앗간과 말을 공동으로 기증한 것을 끝으로 더이상 기록에서 전해지지 않는데, 얼마 안가 죽었거나 남편의 권유에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1137년 8월 11일, 당시 1살이었던 페트로닐라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약혼했다.

이때 작성된 약혼 계약문서가 현재까지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라미로 2세는 왕권을 라몬 베렝게르에게 넘기고 베렝게르가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되 아라곤 국왕은 딸 페트로닐라가 선임되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페트로닐라는 퇴위하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로 했다. 이는 여성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왕국의 소유나 양도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은 아라곤 왕국의 법을 준수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이리하여 왕위를 딸에게, 권력을 예비 사위에게 넘긴 그는 1137년 11월 13일 산 페드로 엘 바에호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 생활에 전념하다가 1157년 8월 16일 우에스카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산 페드로 엘 바에호 수도원 예배당에 있는 2세기 또는 3세기에 조성된 로마 석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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