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로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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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누벨아키텐 문장(틀전용) 500px 2016.svg.png누벨아키텐의 데파르트망
(위에 있는 괄호는 Insee 코드, 아래에 있는 괄호 안은 중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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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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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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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셸

파일:Blason_de_La_Rochelle.png
문장
국가
프랑스
레지옹
누벨아키텐





파일:La_rochelle,_Le_vieux_port.jpg
파일:La_rochelle_de_nuit.jpg
1. 개요
2. 역사
2.1. 상업적 번영과 템플 기사단
2.3. 위그노의 도시
2.4. 종교 전쟁
2.4.1. 제1차 포위전(1572~1573)
2.4.3. 제2차 포위전(1627~1628)
2.4.4. 가톨릭의 승리
2.5. 근대
2.5.1. 도시의 쇠퇴
2.5.2. 오리엔탈리즘과 산업화
2.6. 근현대
3. 교통
4. 스포츠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프랑스 서부 누벨아키텐 레지옹, 대서양비스케이 만에 접한 항구 도시. 중세 후반에 한자 동맹과 교역하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까지 가는 항로가 개발되면서 번영했다. 라 로셸은 16세기까지 보르도를 제치고 프랑스 서부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16~17세기에는 위그노 (프랑스 신교도)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으며, 위그노 전쟁 시에 공성전이 일어났다. 지금도 위그노들이 많았던 시기의 개신교 교회 건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1600년 기준으로 라 로셸은 프랑스에서 2번째 혹은 3번째로 큰 도시였으나, 현재는 국제 요트 경기가 열리는 인구 8만의 중소 도시이다. 라 로셸은 가톨릭절대왕정의 밑거름이 된 중앙집권에 제일 강력히 반발한 곳으로서, 프랑스 근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2. 역사[편집]


신석기 때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로마 지배 이전에는 갈리아 부족인 산토네스족이 이 지역을 점령해 거주했다. 로마 시대에는 염전으로 쓰였고, 빌라가 듬성듬성 있던 해안가였다. 현재의 도시는 서프랑크 왕국 시절인 10세기에 지어졌다. 12세기경 아키텐 공작이던 기욤 10세는 1130년에 샤티플라이옹 플라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며 항구를 황폐화시켰고, 새로운 항구 도시로 라 로셸을 지목하여, 개발했다. 1137년 공작은 도시에 상업 특권과 코뮌의 지위를 주었다. 12세기 후반에는 그의 딸이자 여공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리처드 1세의 어머니이신 그분)가 상업 특례를 갱신시켜 주었다.

2.1. 상업적 번영과 템플 기사단[편집]


1139년, 엘레오노르[1]는 당시 십자군에서 가장 열심히 싸우던 기사단으로서 주로 프랑스 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성전기사단(템플기사단)에게 면세 혜택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제분소(방앗간)를 붙여주었다. 따라서 라로셸은 성전기사단이 대서양 연안에 소유한 가장 큰 거점이 되었고, 자체 함대도 소유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 플랑드르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그리고 1307년 10월에 화형된다

한편, 엘레오노르는 1152년에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앙주 - 노르망디 공작이자 곧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와 결혼하였고 그가 1154년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2세로 즉위하자 도시는 플랸테저넷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1214년 2월에는 존 왕이 실지 회복을 위해 상륙, 아키텐에서 존엄왕 필리프 2세와 맞서기도 했다. 결국 1224년, 루이 8세의 공격으로 도시는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 100여년간 별일 없이 지내던 도시는 1337년에 백년전쟁이 발발하며 다시 요동치게 된다.

2.2. 백년전쟁[편집]


1360년의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아키텐을 회복하였고 따라서 라 로셸도 136년만에 플랜태저넷 가문령이 되었다. 그리고 1372년, 프랑스의 동맹인 카스티야 왕국은 함대를 파견하여 아키텐 해안을 공략했는데, 라 로셸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2]에서 펨브룩 백작이 이끈 잉글랜드 해군이 대패했다. 이 전투는 개인 화기가 쓰인 첫 해전이자 프랑스의 반격의 상징이었다. 이후 프랑스는 카스티야의 도움으로 1340년의 슬로이스 해전 이후로 빼앗겼던 채널 (도버 해협)의 제해권을 회복하였다.[3]

그리고 라 로셸은 그해 9월 7일에 자유를 얻었는데, 프랑스 사령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입성을 거절하였다. 도시는 국왕 샤를 5세가 상업 특권을 인정해 준 1372년 11월에야 프랑스 영토로 복귀하였다. 1402년에는 포르투갈의 항해 열풍에 탑승한 프랑스의 탐험가 장 드 배렝쿠르가 라 로셸에서 출항하여 카나리아 제도로 향해 항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1419년 12월 30일에 잉글랜드는 한자 동맹의 전함까지 빌려 카스티야 함대와 다시 라 로셸에서 격돌했는데, 이번에도 카스티야 왕국의 승리였다. 카스티야 측은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승기를 잡았다.

2.3. 위그노의 도시[편집]


1453년 잉글랜드 최후의 거점이던 보르도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자 백년전쟁도 끝났다. 15세기까지의 라로셸은 프랑스의 대서양 항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고 플랑드르 등의 지역과 포도주와 소금, 치즈 등을 주로 거래하였다. 한편,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유럽을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활발했던 지역들 (플랑드르, 스위스 등)에서는 장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칼뱅의 신교가 퍼지게 되었다. 라 로셸도 그 예외가 아니었고 상업적 특례가 보장된 자치도시였기에 영주, 주교 등 봉건적 잔재도 없어 위그노 비율이 매우 높아졌다. 이에 프랑스 중앙정부(빌루아 왕조)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552년, 두 명의 '이단'이 시내 광장에서 화형당한 것이 시초였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원인 중 하나는 상인들에 대한 프랑스 발루아 왕실의 무리한 과세로도 볼 수 있다. 탄압이 심해지자 1555년에서 1567년까지 위그노들은 현재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쪽에 국가를 세워 종교적 자유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포르투갈에게 추방되며 실패하였다. 1560년에 도시에서는 프랑스의 첫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났는데, 동시에 노르망디루앙에서도 일어났다. 1562년, 돌을 맞아 빡친 기즈 공이 바시에서 63명의 비무장한 위그노를 죽이자 라 로셸에서 폭동이 일어나 가톨릭 수도사 13명이 살해되었다.

2.4. 종교 전쟁[편집]


파일:external/www.romorantin.com/richelieu.jpg
라 로셸의 포위를 지휘하는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17세기 초의 프랑스 재상이던 리슐리외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으며 버티던 라 로셸을 결국 함락시켰다. 이후 프랑스가 신교 측으로 30년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2.4.1. 제1차 포위전(1572~1573)[편집]


파일:La_Rochelle_1573.jpg
요새화 된 라 로셸. 인구 수에 비해 상당히 잘 요새화된 경우에 속한다.

1568년, 도시는 제네바의 신정 정치를 모방한 독립을 선포하였다. 시민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빌럼을 도우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전함들은 라 로셸을 기지로 삼아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했다. 1571년부터 도시는 프랑스 해군의 봉쇄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20,000명이었다. 1572년 8월에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도시는 프랑스 서부 위그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공성전(1572.11~1573)은 독일이나 영국 등지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일만큼 치열했다. 1573년 2월 11일부터 포위전은 프랑스의 차기 왕위 계승자인 앙주 공작(미래의 앙리 3세)이 맡게 되었고, 근위대장 몽고메리의 함대가 해상 봉쇄를 강화했다.

애초에 포위는 프랑스 측에 유리하였다. 포위군은 28,000명인데 반해 수비군은 1,500명에 그쳤다. 포위군 측에는 고위 귀족, 왕족들(나바라의 앙리, 미래의 앙리 4세 포함)이 많았고 그중 일부는 전사하기도 했다. 2월부터 6월까지 국왕군은 8번의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다. 3월 26일에는 성벽을 파괴할 갱도에서 화약이 잘못 터져 공격군 150명이 때죽음당하기도 했다. 5월 23일에 지원군으로 스위스 용병 6,000명이 도착, 26일에 재차 공세를 펼쳤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4개월간 이어진 8번의 공세에서 20,00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155명의 장군 중 66명이 죽었으며, 47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수비 측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1572년에 체결된 블루아 조약(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한 영-프 동맹)을 의식하여 7척의 비정규군을 보내는데 그쳤다.[4] 한편, 1573년 5월 말에 앙주 공작은 자신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끝냈다. 6월 24일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7월 6일에 포위군이 후퇴했다. 그리고 7월 중순에 내전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국왕 샤를 9세는 <불로뉴 칙령>(라로셸 조약)을 반포하여 세 도시(라로셸, 몽토방, 님스)에서의 신교도의 예배와 믿음을 엄격한 조건하에 허용했다.

2.4.2. <낭트 칙령>[편집]


위그노 전쟁을 종결시키고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군주로 즉위한 앙리 4세는 <낭트 칙령>를 내려 프랑스 전역의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다. 따라서 프랑스 서남부는 재차 빠르게 신교도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군주로 즉위한 루이 13세는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영향으로 <낭트 칙령> 대신 이전의 <불로뉴 칙령>으로 되돌아가려 했고, 남부 도시들에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 관리들은 전부 가톨릭 신도였고, 이에 반발한 일부 도시들이 1620년에 재차 봉기했다. 이 반란은 1622년에 극에 달하는데, 그 와중에 라 로셸의 함대가 일부 도시들을 돕다가 프랑스 함대에게 패배했다. 2년간의 혼란은 1622년 10월 18일에 루이 13세가 부왕의 <낭트 칙령>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한 몽펠리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다.

2.4.3. 제2차 포위전(1627~1628)[편집]


1622년의 몽펠리에 조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624년에 재상이 된 리슐리외는 다시 신교도들을 탄압하였다. 1625년 2월에 재차 반란이 일어났고, 라 로셸 인근의 레 섬이 신교도령이 되었다. 레 섬은 긴 전투 끝에 그해 9월, 다시 왕당파가 소유하였고, 1626년 2월 5일에 파리 조약이 맺어지면서 라 로셸은 다시 평화를 찾는 듯했다. 다만 도시는 함대 소유가 금지되었고, 시가지 서쪽 바다 건너의 프랑스 요새는 '적정 기한' 내에 철거되기로 했다.

한편, 1572년에 맺어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대합스부르크 동맹은 1624년에 갱신되지 못했다. 그리고 1626년, 리슐리외는 비밀리에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개신교 측에 가담하기 전에 국내의 개신교 세력을 일소하기로 했다. 이러한 기류를 파악한 라 로셸은 재무장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27년 6월, 찰스 1세의 명령으로 파견된 잉글랜드 함대는 버킹엄 백작의 지휘로 도시 근처 레 섬에 상륙하였다. 라 로셸의 시민들은 잉글랜드 함대의 입항에 반대하였다. 프랑스 국왕 측에 빌미를 주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이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슐리외의 국왕군이 도시를 공격하자 시민들은 어쩔수 없이 잉글랜드군을 수용하여 제2차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백년전쟁이 종결된 1453년 이후 174년만에 잉글랜드-프랑스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627~1628년의 제2차 포위전 당시 라 로셸


결사항전을 결의하는 시민들

1627년 8월부터 도시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9월 10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프랑스 공병들은 육지쪽 성벽을 완전히 둘러싼, 11개의 탑을 갖춘 포위 성벽을 만들었고, 이 작업은 1628년 4월에 끝났다. 포위군은 30,000명에 이르렀다. 1627년 11월부터는 바다 쪽에도 방조제 형식의 벽을 만들었고, 1628년 3월에 완공되어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동맹이어서 그 배들로 병력 수송까지 했다. 그리고 스페인 전함들도 해상 봉쇄에 참가하였다.

1628년 4월, 잉글랜드의 구원 함대가 포츠머스를 출항하였으나 해상에 세워진 방벽에 막혀 회군하였다. 그해 8월에 출발한 30여척의 구원대가 9월경에 도시에 접근하였으나 프랑스 함대에 포격을 가하는 것에 그친 후 돌아갔다. 해상 방벽의 위력은 막강하였다. 두 차례의 시도가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본 시민들은 결국 1628년 10월 28일에 국왕군에 항복하였다. 27,000명에 달하던 도시의 인구는 5,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2.4.4. 가톨릭의 승리[편집]


파일:The_surrender_of_La_Rochelle-1-1.jpg
라 로셸의 항복

도시는 군사, 정치, 영토적 권리를 모두 잃었으나 신앙만은 <낭트 칙령>에 따라 보장되었다. 종교전쟁의 측면 외에도 라 로셸의 항복은 프랑스의 중앙 집권과 절대왕정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중앙 집권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여담으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1627년 말에 포위의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한편,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배경이 바로 라 로셸의 포위전으로, 주인공 다르타냥과 삼총사는 물론 리슐리외 추기경 또한 후반부에 포위전에 참가하는 모습이 나온다.

2.5. 근대[편집]


17세기 후반의 루이 14세갈리아주의를 주장하며 신교를 더욱 탄압하였다. 1661년, 마자랭이 죽고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자 300여 개에 이르는 신교도 가족이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1685년에 내려진 <퐁텐블로 칙령>은 명목상으로나마 남아 있던 믿음의 자유마저 빼앗았다. 그러자 위그노들은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떠났고, 현재 뉴욕 인근에 뉴로셸을 세웠다. (1689년)


18세기의 라 로셸

16세기부터 프랑스의 아프리카, 아메리카 무역의 중심이었던 로셸에서는 노예, 설탕, 모피 등이 거래되었다. 한편, 1684년에 로베르 뒤 잘리에는 로셸에서 출항, 미시시피 강 하류에 세인트 루이스를 세웠다. 현재 미국 텍사스에 위치한다.

2.5.1. 도시의 쇠퇴[편집]


위그노의 유출 이후 정체되었던 도시는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으로 기존의 교역 상대였던 누벨 프랑스가 영국 영토로 넘어가며 결정타를 맞았다. 동시에 프랑스의 해군력도 쇠퇴하였다. 노예 무역도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793년에 중단되었다. 1794년 2월, 프랑스 국민 공회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지시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9년에는 영국 해군이 도시 앞바다에서 프랑스 대서양 함대를 격파[5]하기도 했다.

2.5.2. 오리엔탈리즘과 산업화[편집]



한편, 18세기 말부터 유럽을 덮친 차이나 열풍과 오리엔탈리즘은 라 로셸의 도자기 산업을 육성시켰다. 그리고 산업화도 라 로셸을 바꾸어 놓았다. 1864년에는 로셸의 항구에서 세계 최초의 기계화된 잠수함이 시연을 보이며 프랑스의 기술력을 세계에 홍보하였다. 이에 런던 만국박람회 이후 우쭐해있던 영국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881~1891년간의 공사 끝에 도시의 서쪽에 신항인 라팔리스 항을 개항한 이후, 많은 선박이 드나들게 되었다.

2.6. 근현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도시의 주항에 유보트 기지를 만들었다. 이후 라 로셸은 보르도와 더불어 나치 독일의 최전선 유보트 기지로 활동하였다. 도시는 노르망디 상륙 (1944년 6월) 이후로도 3개월이나 지난 1944년 9월 12일에야 연합군이 접근하였고, 포위가 시작되었는데, 독일군은 무려 8개월이나 버텨내어 1945년 5월 7일에야 항복하였고 다음날 해방되었다. 이는 나치가 소유한 마지막 프랑스 도시였다.


3. 교통[편집]


지역 공항으로는 라로셸 일드레 공항이 있다.


4. 스포츠[편집]


지역 연고인 스타드 로셸레(Stade Rochelais) 럭비팀이 프랑스 최상위 리그 TOP 14에서 경쟁하고 있어 상당한 강세를 보이는 편이다. 라로셸 지역 대표 팀이라 줄여서 ”라로셸“이라고 부른다. 이 팀은 2022년, 2023년 유러피언 럭비 챔피언스 컵[6] 결승에 올라 매우 막강한 아일랜드의 렌스터 럭비팀을 두 번 연속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2022-23시즌 유러피언 럭비 챔피언스 컵 결승전


라로셸에서 우승 축하 퍼레이드 (2022년)

지역 축구구단으로는 ES 라로셸이 존재한다. 70년대 초반에 리그 2까지 올라간적도 있었으나 점점 쇠락하면서 지금은 6부리그에서 뛰는 별볼일 없는 팀이다.


5.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라로셸(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포켓몬스터 X·Y : 가라마을의 모티브.
  • UBOAT에서 기항할 수 있는 군항으로 등장[7] 한다. 특이하게도 인게임상에서는 라 로셰로 번역되었다.[8] 또한 게임시작시 유보트 U-96을 선택하면 라 로셸이 모항인 상태로 게임을 시작하고, 다른 유보트를 선택하더라도 라 로셸로 이동하라는 임무를 받으면 이곳을 모항으로 변경할 수도 있다. 지리적 요건을 감안하면 영불해협을 거쳐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빌헬름스하펜이나 킬보다 여러모로 대서양으로 진출하는 것에 최적화되어있는 군항이다. 아프리카 원정은 라 로셸이나 이탈리아 북부의 군항인 라 스페르차랑 거리가 비슷하지만 라 스페르차는 지중해에서 나갈때마다 악명높은 영국의 요새 지브롤터좆브롤터를 계속 통과해야 되는 점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라 로셸이 편하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인게임상에서 등장하는 가장 좋은 군항 중 하나. 다만 할거 다한 고인물들은 지브롤터를 통과하는 라 스페르차나 암초를 피해다녀야 하는 노르웨이에 비해서 귀항 과정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라 로셸을 기피한다.
  • 겁스 무한세계: 에스칼리 평행계 - 흑사병의 창궐과 몽골의 유라시아 정복으로 유럽이 망하고, 신대륙에서 테노치티틀란이 메소아메리카를 석권한 테노치카 제국을 세우면서 유라시아의 지배자 몽골 제국을 위협하면서 유럽에 식민지를 확장하고 백인 노예를 인신공양 등의 용도로 활용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라 로셸은 나와틀어(?) 지명인 ("크나스고르드")라고 불리며, 이 도시에서 벌어지던 인신공양 현장이 센트럼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병력에 의해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현지 테노치카인 왈,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악마들이 나타났다고...)
  • 문명 5/시나리오/신대륙 개척에서는 프랑스의 유럽 측 도시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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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37년에 프랑스 왕자 루이와 결혼, 그해 말에 왕비가 됨[2] Battle of La Rochelle. 6/22-23[3] 라 로셸을 잃은 잉글랜드는 보르도와 그 남쪽의 가스코뉴를 영유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4] 다만 제2차 포위전때, 이것을 기억한 리슐리외가 바다에 거대한 구조물을 세워 지원 선박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5] Battle of the Basque Roads[6] 유럽과 남아공 통합 컵 대회[7] 따라서 임무도 대부분 영국 근해나 대서양으로 배정받는다. 간혹 아프리카가 나오기도 하는데, 거리가 다소 먼 탓에 연로조절을 잘 해야 한다.[8] 참고로 게임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보트 승조원들의 휴가지 목록에도 라 로셸이 있는데, 게임이 완성형을 채택한 탓에 라 로로 찍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