똣동-쭉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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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봉기
藍山起義

시기
1418년 2월 ~ 1428년
장소
베트남 전역
원인
명나라의 대월 지배
교전국
대월(大越)
명(明)
지휘관
레러이
딘레
응우옌씨
리찌엔
도비
왕통
참장
마영
진흡
이량
병력
3만 5천명[1]
약 10만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여리 세력의 대승, 대월의 독립.
영향
대월 재건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영향
5. 의문점
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똣동-쭉동 전투(Trn Tt Đng Chúc Đng / 陣崒洞 祝洞)는 베트남 대월이 명나라의 통치에 맞서 일으킨 람선기의(람선 봉기) 중 주요 전투의 하나이다. 1426년 10월(일설에는 11월)에 발발하였다.


2. 배경[편집]


레러이가 응에안(乂安)을 점령한 이후 연이어 주변 지역을 공격해 위세를 드날렸다. 이후 레러이는 직접 기의군을 이끌고 동관성[2]을 포위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이에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왕통(王通), 참장(參將) 마영(馬瑛)으로 하여금 병사 5만을 이끌고 동관성을 구원하게 하였고, 왕통이 5만의 병력으로 그곳의 군사와 합치니 병력이 10만에 달하였다. 이후 왕통은 상서(尙書) 진흡(陳洽)과 병사를 좌군, 우군, 중군으로 구분해 세 갈래로 나누어 레러이를 공격하였다. 왕통은 병사를 고소도(古所渡, 현재의 탁텃현에 위치)에, 방정(方政)은 사퇴(沙堆, 현재의 뜨리엠현에 위치)에, 내관(內官) 마기(馬騏)는 타인우이(靑威)에 병사를 주둔시켰고, 군영을 서로 이어 설치하였다. 명군이 10만의 대군이라는 소식에 기의군의 장군들은 당황했다. 그래서 기의군의 리찌엔(李篆), 도비(杜秘)는 정찰을 보내서 파악한 결과 좌군을 지휘하는 마기가 군재가 없으며[3] 그가 지휘하는 명나라 좌군이 형편없다는것을 알고는 병사를 보내 이들을 유인하였고, 숨겨둔 복병으로 공격하여 마기를 대패시키니 마기는 겨우 몸만 빼내어 방정의 중군에게 달아났다. 기의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중군 진영까지 쳐들어왔고, 방정은 수습하거나 반격하기는 커녕 마기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소도로 달아나 왕통과 합쳤다. 그런데 여기서 리찌엔이 큰 실수를 저지르는데 승리에 도취되어 도주한 명군을 추격해서 섬멸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군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선다.


3. 전투[편집]


왕통은 기의군이 반드시 고소도까지 추격해 올 것이라고 여기고 먼저 복병을 설치했다. 예상대로 리찌엔은 고소도로 추격해 왔으나 왕통이 설치한 복병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고부(高部, 현재의 미르엉현, 쯔엉득현 일대에 위치)로 달아났다. 리찌엔은 사람을 타인담(淸潭, 현재의 타인찌현)에 보내 딘레, 응우옌씨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딘레와 응우옌씨는 병사 3천과 전투용 코끼리 2마리를 이끌고 리찌엔을 구원하러 갔고 리찌엔과 병력을 합친다. 이때 왕통도 리찌엔을 추격해 와서 영교(寧橋)에 병사를 주둔시킨 뒤 비밀리에 리찌엔의 기의군의 후미로 군사를 보내 포성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양쪽이 리찌엔을 동시에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왕통이 보낸 척후병이 딘레에게 사로잡혔고, 명나라군의 계획이 기의군에게 넘어가는 보안 실패가 발생하고 말았다. 딘레는 왕통의 계략을 역이용하기로 하여, 똣동(崒洞, 현재의 미르엉현에 위치)과 쭉동(祝洞, 현재의 쯔엉득현에 위치)에 복병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오경(五更) 때가 되자 신호가 되는 대포를 쏘아 울렸고 명나라군이 즉시 대거 출격하였다. 당시 큰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가 질퍽거려 행군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왕통은 여기서 큰 실수를 저지르는데 보안이 실패하여 작전이 누설된것도 모르고 대포 소리만 듣고는 무턱대고 병력을 출동시킨것이다. 특히 곁에 있던 병부상서 진흡이 혹시 적이 기만 전술을 하고 매복을 할수도 있으니 정찰병을 보내서 상황을 파악하자는 의견까지 한가한 소리라며 무시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명나라군은 똣동에 도착했는데 명군은 도로가 질퍽거려 행군이 어렵다보니 왕통이 도로를 벗어나 길 옆의 논밭으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로 인해 경계대형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때 기회를 잡은 딘레의 기의군이 사방에서 나와 공격해오자 명나라군은 경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부대간의 구분도 되지않은 상황에서 기의군의 기습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한다. 왕통은 당황하여 대처도 못하다가 나중에는 도주하였고 진흡만이 지휘하며 싸웠지만 병사들이 도주하여 대응할수도 없었다. 명군은 쭉동으로 도주했으나 사전에 배치해둔 기의군이 쏟아져 나와 공격했고 결국 명군은 대패하여 7만여 명이 죽고 3만여 명이 사로잡혔다. 또한 병부상서 진흡과 내관 이량(李亮)은 전사하였다. 왕통 또한 부상을 입고 방정, 마기와 함께 동관성으로 달아났다.


4. 영향[편집]


전투 이후 기의군은 더욱 우세해졌고, 지위가 더욱 튼튼해졌다. 왕통은 기가 꺾여 이전에 영락제가 내린 쩐 왕조의 황족 자손을 찾으라는 명령의 조서를 몰래 레러이에게 보내며 타인호아 이남의 지역 전부는 기의군에게 할양하는 대신 쩐 왕조의 자손을 왕으로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레러이는 이에 쩐까오를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는 위국공(衛國公)을 칭하며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요구하였다. 왕통은 철군하겠다고 응답했으나 베트남의 토관(土官) 르엉니으홋(梁汝笏), 도주이쭝(杜維忠), 쩐퐁(陳封)의 권유를 받고 철군 생각을 버렸다.


5. 의문점[편집]


베트남 사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기의군은 겨우 수천 명이었지만 명나라군은 총합 10만 명이었다. 다만 이는 상당히 의문이 많은 사료로 근대 베트남의 역사학자 쩐쫑낌도 "기의군이 수천 명의 병력으로 명나라군을 대파하고 5만을 참하며 1만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난해한 설명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명나라군은 어찌 매우 나약하고 무능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이 때문에 쩐쫑낌은 해당 자료가 후 레 왕조의 사관이 '한 쪽 편을 들어 사실과 맞지 않게 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마디로 베트남 측이 주장한 이 전투의 병력이 과장에다 왜곡이라는 것.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베트남 독립군은 결코 수천명이 아니며 정규군과 민병을 포함한 3만 5천의 병력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전투는 한 차례의 큰 전투로서 명나라군이 대패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다.


6. 참고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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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천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허위이며 이 정도의 병력으로 추정한다. 당시 베트남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을 모두 동원한 총력전이었다.[2] 東關城, 현재의 하노이 [3] 환관으로 군대에 있어보지도 않았고 지휘관이 된것도 장군들을 감시하는 정치장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