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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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 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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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34

올스타
1934
1935
1936
1937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Dean%20Dizzy%20Plaque_NBL_0.png
디지 딘
헌액 연도
1953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9.17% (9회)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3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디지 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개비 하트넷
(시카고 컵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34년 ~ 193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디지 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32년 ~ 193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빌 할라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디지 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반 멍고
(브루클린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번호 17번
결번

디지 딘
(1932~1937)


가이 부시
(1938)
토미 크루즈
(1973)

영구결번


시카고 컵스 등번호 22번
커트 데이비스
(1937)

디지 딘
(1938~1941)


에밀 커시
(1942)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등번호 31번
버드 스와츠
(1947)

디지 딘
(1947)


브라이언 스티븐슨
(1948)




파일:Dizzy Dean.jpg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o. 17
제이 해나 "디지" 딘
Jay Hanna "Dizzy" Dean

출생
1910년 1월 16일
아칸소 주 루카스
사망
1974년 7월 17일 (향년 64세)
네바다 주 리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88cm / 82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30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STL)
소속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30, 1932~1937)
시카고 컵스 (1938~1941)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1947)
가족
동생 폴 딘

1. 소개
2. 유년 시절
3. 선수 시절
4. 은퇴 후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6. 이모저모



1. 소개[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출신 야구선수, 해설가. 1930년대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이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최후의 30승 투수이기도 하다.[1] 또한 닉 스위셔, 마크 피드리치 등과 더불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독특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본명은 제이 해나 딘(Jay Hanna Dean)이었지만 평소 주변 사람들 속을 뒤집어 놓는 어처구니 없는 행실 때문에 디지(Dizzy, 띵하다, 어지럽다, 정신없다 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2. 유년 시절[편집]


1910년 아칸소 주 루카스에서 태어난 디지 딘은 16살 때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나이를 속여서 군대에 들어갔다.(...)[2] 하지만 이후 그가 나이를 속여 군대에 입대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딘은 강제로 전역당했다.

군대에서 쫒겨난 딘은 18살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의 눈에 띄어 카디널스에 입단하면서 프로야구계에 발을 들였다.[3]


3. 선수 시절[편집]



선수시절 영상자료
2년 간 마이너 리그에서 뛰던 딘은 1932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콜업되어 풀타임 메이저 리거로 자리잡았다. 딘이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을 때 기자들이 그에게 이름을 물어 봤는데,딘은 한 쪽에는 본명인 제이 해나 딘, 다른 한 쪽에는 별명인 디지 딘이라고 알려줬다(...)는 속설이 있다. 이것은 틀린 속설이지만 절반은 맞는데, 한 쪽에 제이 해나 딘이라 한 건 맞지만 다른 쪽에는 제롬 허먼 딘이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딘은 풀타임 첫 해인 1932년 18승 15패 3.30 191탈삼진을 기록하며 이닝, 완봉, 탈삼진 부문 1위에 올랐다. 다음해인 1933년에는 20승 18패 3.04 199삼진을 기록하며 탈삼진과 완투 부문에서 1위에 올랐으며 당시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이었던 16탈삼진을 17탈삼진으로 경신하기도 했다.

이 해 메이저리그팀 올스타전에도 나갔고 니그로리그의 교류전에서도 선발투수로 두 번이나 등판했으나 둘 다 졌다. 그 당시 니그로리그의 선발투수는 다름 아닌 사첼 페이지였는데, 사첼의 공을 본 뒤로 사첼 페이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1934년 딘은 자신의 동생이었던 폴 딘(1912~1981)과 함께 45승을 만들어 내겠다고 호언장담 했다. 딘은 9월 22일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더블헤더에서 1차전 선발투수로 올라와 완봉승을 따내며 시즌 27승을 거두었다. 2차전에는 동생 폴이 나와 다저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 시즌 18승을 챙기며 약속대로 45승을 만들어내는데에 성공했다. 이후 디지 딘과 폴 딘은 각각 3승과 1승씩 더 따내며 디지 딘은 30승 7패, 동생 폴 딘은 19승 11패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또한 이들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각각 2승씩 따내며 카디널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디지 딘은 6차전에 대주자로 나왔다가 머리에 타구를 직격당하는 바람에 의식불명 상태로 실려 나갔지만 7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쯤 되면 사람인지 의심스러워진다 디지 딘은 그해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다음 해에도 딘 형제는 각각 28승, 19승을 따냈다.디지 딘은 다승, 탈삼진, 이닝, 완투 부문에서 1위에 올랐고, 2년 연속 MVP수상을 노렸으나 시카고 컵스개비 하트넷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다음 해인 1936년 동생 폴은 연봉협상으로 인해 구단과 마찰을 빚다가 시즌을 늦게 시작했고, 무리하게 던지다가 어깨가 망가져 이후 데뷔 후 2년간 냈던 성적의 절반도 못거두고 7년후 은퇴했다. 하지만 디지 딘은 승승장구해서 그 해 24승 13패 3.17 190탈삼진으로 다승 2위, 이닝과 탈삼진 1위에 올랐고 칼 허벨에 이어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37년 디지 딘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내셔널 리그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의 얼 애버릴의 라인드라이브 타고에 맞아 발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딘은 부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무리하게 던지다가 어깨까지 부상을 입었다. 이후 딘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걸 인지한 카디널스는 딘을 시카고 컵스에 트레이드 시켰다. 딘은 이적 첫 시즌에 7승 1패 1.81을 기록하며 컵스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하지만 이후 딘은 전성기 때의 기량을 되찾지 못하고 2년간 9승을 거두는 등 부진하다가 1941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 딘의 나이는 31살이었다.


4. 은퇴 후[편집]


딘은 은퇴 이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전속 해설가가 되어 모두까기 인형+거성 식 호통 해설과 문법과 어법, 철자가 맞지 않는 엉터리 영어를 구사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4] 브라운스 선수들을 '야, 시바. 내가 지금 던져도 그것보다 잘한다.'라고 엄청 까대는 말을 했는데, 이에 열받은 브라운스 구단에서 '말로만 털지 말고 와서 한번 던져보시져?'라고 반응하여 은퇴 6년 후인 1947년 브라운스의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한 적도 있다. 그리고 딘은 그 경기에서 4이닝 3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호투했다(...).[5]

디지 딘은 1953년 79.17%의 득표율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6]

그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17번은 영구결번 되었다.

이후 딘은 해설가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1974년 7월 17일 네바다리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디지 딘
52
137
112
33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114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디지 딘
44.9
42.9
43.9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6. 이모저모[편집]


위에서 서술했듯이 딘은 선수시절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아래는 딘이 남긴 일화들이다.

해당 내용 중 일부분은 김형준의 레전드 스토리를 참고한 것.

  • 1932년에 니그로리그와 교류전을 할때 선발투수로 두 번 오른 적이 있었는데 두 번 다 패전투수가 되었다. 참고로 니그로리그 선발투수는 둘 다 사첼 페이지였는데, 사첼의 공을 보고 나서는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본 선수 중에 가장 최고의 선수라는 극찬을 했다.

  • 1934년 월드 시리즈에서 딘은 상대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수들에게 공을 어떻게 치는지 보여주겠다며 날카로운 타격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보고 있던 행크 그린버그는 껄껄 웃으며 입이 벌어질 정도의 타구를 날렸고, 데꿀멍한 딘은 "그래. 그렇게 치는거야!"라고 말하고는 도망갔다.


  • 1935년, 어린이 병원에 방문한 딘은 어린이들 앞에서 다음 경기 때 뉴욕 자이언츠의 선수 겸 감독 빌 테리[7]만루 상황에서 삼진으로 잡아내겠다고 약속했다. 딘은 9회말 2사 상황에서 테리가 대기타석에 들어오자 1할 타자인 휴이 크리츠를 고의사구로 거르고 진짜 만루를 만든 다음 빌 테리와 대결했다. 결과는 삼진아웃.

  • 1936년, 딘은 포수 사인 보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사인 없이 경기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상대팀 감독에게 찾아가 "나 오늘 직구만 던질거니까 그런줄 아셈"이라고 했다. 기밀누설 그랬음에도 딘은 그 경기에서 4피안타 완봉승을 거두었다.

  • 1937년, 딘은 조 디마지오의 형 빈스 디마지오 정도는 항상 삼진으로 잡을 수 있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실제 경기날, 앞선 3타석까지 빈스를 삼진으로 잡고 마지막 4타석. 빈스가 포수 파울플라이를 날리자 딘은 포수에게 "놓쳐! 놓쳐!!" 라고 외쳤다(...) 결국 어이가 없던 포수 오그로돕스키는 일부러 공을 놓쳤고, 딘은 기어이 빈스를 삼진으로 잡았다.

  • 1937년, 딘은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 시작 전에 주심으로부터 세트 포지션에서 양손을 모으고 일시정지를 하지 않으면 보크를 주겠다는 지침을 받았다. 하지만 딘은 그답게 그 지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던 대로 공을 던졌는데 심판은 딘의 행각을 한동안 눈 감아주다가 포수에게는 경고를 주었다. 그럼에도 딘이 일시정지 명령을 또 무시하자 정말로 보크 판정을 내렸다. 이에 딘은 심판에게 항의하다 '나 안해!'라고 배짱을 부렸지만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일로 정신줄을 놓은(...) 딘은 2번 타자부터 8번 타자까지 모두 맞춘 뒤 9번 타자인 투수를 거르고 다시 1번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딘의 빈볼을 바보가 아닌 이상 예상했던 자이언츠의 1번 타자 지미 윌슨은 그것을 피했고 다음 공에 회심의 기습번트를 날렸다. 그리고 베이스커버를 들어온 딘과 1루에서 만난 윌슨은 서로의 얼굴에 장렬한 죽빵을 날렸다(...) 결국 벤치 클리어링.

  • 위 사건의 바로 다음 경기에서 딘은 이전 경기에서 나왔던 보크에 대한 경고를 너무나도 잘 지켰다. 2회 주자가 출루하자 3분 멈춰 있다가 공을 뿌린 것. 그 다음 공은 4분간의 일시정지 후 던졌다. 지금이라면 타자가 타임을 요청할 수 있지만 그 시대에선 그게 안 돼서 타자는 꼼짝없이 타석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주심이 그러면 보크를 주겠다고 하자 딘은 '도대체 어쩌란 말이오?'라는 식으로 또 항의를 했다. 감독이 대신 주심에게 비는 모습에 슬그머니 화를 누그러뜨린 딘은 그 경기를 완투승으로 이끌었다.

  • 같은 시기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던 강타자 에노스 슬로터와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딘이 은퇴하고 해설가로 활동할 때 현역으로 뛰고 있던 슬로터가 타석에 들어서자 이 경기를 중계하던 딘은 "지금 타석에 있는 에노스 슬로터는 내 둘도 없는 친구죠. 이봐 에노스! 저 투수놈 공을 뭉개버려!!" 라면서 마음껏 사심 가득한 해설을 했다고 한다.

  • 딘이 뛰던 시절 세인트루이스는 딘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한 성깔하는 선수들로 구성되어서 '가스하우스 갱'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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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후의 시즌 30승은 196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데니 맥클레인이 기록했다. 하지만 맥클레인은 전성기가 짧아 저조한 통산 성적을 남긴 채 은퇴했고,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하지 못했다.[2] 훗날 본명보다 더 유명해지는 '디지'라는 별명은 군대에서 얻은 것이다.[3] 카디널스와 계약 당시 계약을 하러 딘을 찾아온 브랜치 리키에게 한 말이 압권인데, 그 말은 "내가 베이브 루스보다 더 많은 관중을 모아주겠다."라고..[4] 하지만 전국의 교사들에게 많은 항의 편지를 받았다. 심지어는 월드 시리즈 해설을 맡으려다가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에 의해 저지당하는 일도 있었다.[5] 그래서 한 번 등판해 보았습니다.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 물론 나이도 있었던데다 오랜만에 뛴 여파로 타격 후 주루를 하다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교체되어 승리투수 요건은 채울 수는 없었다. 사실 이 부상으로 즉각 교체되지는 않았고 3회말 공격에서 부상을 당한 후 1이닝을 더 던져서 4회초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6] 딘의 150승은 선발로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 중 가장 승수가 낮다. 딘과 비슷한 승수로 헌액된 투수는 160승의 에디 조스, 165승의 샌디 쿠팩스 정도가 있다.[7] 내셔널 리그 최후의 4할 타자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