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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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에반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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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76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폴 블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조 루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릭 매닝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조 루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칼 야스트렘스키
(보스턴 레드삭스)
알 코웬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후안 베니케스
(텍사스 레인저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7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칼 야스트렘스키
(보스턴 레드삭스)
알 코웬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후안 베니케스
(텍사스 레인저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릭 밀러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식스토 레즈카노
(밀워키 브루어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7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릭 밀러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식스토 레즈카노
(밀워키 브루어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윌리 윌슨
(캔자스시티 로열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프레드 린
(보스턴 레드삭스)
윌리 윌슨
(캔자스시티 로열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리키 헨더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데이브 윈필드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2년 ~ 198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리키 헨더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데이브 윈필드
(뉴욕 양키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데이브 윈필드
(뉴욕 양키스)
게리 페티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데이브 윈필드
(뉴욕 양키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드웨인 머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데이브 윈필드
(뉴욕 양키스)
게리 페티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제시 바필드
(토론토 블루제이스)
커비 퍼켓
(미네소타 트윈스)
게리 페티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득점왕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리키 헨더슨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출루율왕
마이크 하그로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드와이트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


웨이드 보그스
(보스턴 레드삭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40번
빌리 코니글리아로
(1969~1971)

드와이트 에반스
(1972~1973)


릭 와이즈
(1974~1977)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24번
듀웨인 조셉슨
(1971~1972)

드와이트 에반스
(1973~1990)


케빈 미첼
(1996)
{{{#ffffff [[볼티모어 오리올스|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24번}}}
존 미첼
(1990)

드와이트 에반스
(1991)


릭 뎀프시
(1992)



파일:Dwight Evans.jpg
드와이트 마이클 에반스
Dwight Michael Evans

생년월일
1951년 11월 3일 (72세)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신지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
포지션
우익수, 지명타자[1]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69년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109번 (BOS)
소속 구단
보스턴 레드삭스 (1972~1990)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1)
지도자 경력[2]
보스턴 레드삭스 타격 코치 (2002)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1. 초기 (1972~1980)
2.2.2. 후기 (1981~1990)
3.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4.1. 타격
4.2. 수비
5. 이모저모
5.1. 그간의 저평가 및 명예의 전당 가능성
5.2. 영구결번 가능성?
6. 연도별 기록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Dwight Evans 개요.jpg

Dewey

드와이트 에반스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레드삭스의 우익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자니 페스키(Johnny Pesky), 보스턴 레드삭스 영구결번자

미국의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소속 야구 선수. 선수 시절의 주 포지션은 우익수였다.

보스턴 레드삭스 프랜차이즈 최고의 우익수이자 1980년대 MLB 최고의 우익수로 꼽혔던 선수로,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모두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20년 가까이 펜웨이 파크의 우측 외야를 책임졌던 레드삭스의 레전드 선수다. 별명 겸 애칭은 이름(Dwight)에서 따 온 듀이(Dewey). 이 별명은 마이너 시절 팀의 감독이 지어줬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준수한 통산 성적과 꾸준함에도 불구하고 꽤나 저평가되어있는 선수이기도 한데,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만일 세이버메트릭스가 대중화된 현재에 와서 뛰었다면 평가가 더욱 올라갔을 선수로 자주 꼽힌다. 하필이면 그의 전성기 때 함께 뛰었던 동료들이 칼 야스트렘스키, 칼튼 피스크, 짐 라이스, 웨이드 보그스레드삭스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역사 전체에 길이 남을 대선수들이었던 데다 이들에 비하면 성적이 조금 밀렸던 탓에 더욱 저평가받는 감이 있다.

통산 성적은 20시즌 2,606경기 10,569타석/8,996타수 2,446안타 385홈런 1,384타점 483이루타 .272/.370/.470 .840OPS/127OPS+ 1,391BB/1,697K 129wRC+ 67.1bWAR.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출생지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가족들이 하와이로 이주해 8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후 1959년 하와이가 주로 승격되자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이주해왔고, 마침 1959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며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경기를 보고 흥미를 느껴 야구인의 길을 걷게 된다.[3] 그렇게 야구를 시작하게 된 에반스는 리틀 리그에서 투수3루수로 활약하며 리그 올스타에도 선정되는 등 야구에 소질을 보인다.

이후 에반스는 챗스워스 고등학교(Chatsworth High School)[4]에 진학했고, 처음에는 유니폼조차 받지 못하는 등 실력적으로 열세를 보이며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고등학교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보여준다. 그런 에반스를 눈여겨본 구단이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였고, 1969년 드래프트에서 그를 5라운드 전체 109번으로 지명하며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2.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편집]



2.2.1. 초기 (1972~1980)[편집]


파일:Dwight Evans Red Sox 1st.jpg
보스턴 레드삭스 초기 시절(1978년).
입단 후 3년간은 루키 리그와 싱글 A에서 시즌을 보내며 담금질을 이어갔고, 1972년 처음 올라간 트리플 A에서 .300의 타율과 17홈런, 95타점을 기록하는 등 호성적을 보이며 리그 MVP에 올랐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시즌이 다 끝나갈 무렵인 9월 16일에 처음으로 메이저의 부름을 받았고, 시즌 종료 때까지 18경기에 나와 타율 .263에 15안타, 6타점과 홈런 1개를 기록하며 갓 올라온 신인치고는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긴다.

이듬해(1973년)에는 주전 우익수로 나서며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타율은 비록 .223으로 좋지 못했으나 10개의 홈런을 치며 파워 면에서 가능성을 보여줬고, 수비에서는 단 1개의 에러만 범하며 이때부터 절륜한 수비력을 뽐냈다. 1974년에는 타율도 .270 정도까지 끌어올리며 주전으로서 합격점을 받았고, 1975년부터는 외야진에 짐 라이스프레드 린이라는 걸출한 선수들이 합류하며 이들과 함께 리그 최강급 외야진을 구축한다. 한편 1975년에는 커리어 첫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기도 했는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ALCS에서는 10타수 1안타로 침묵하며 좋지 않았지만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와 맞붙은 월드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서 9회에 극적인 동점 투런을 날리는 등[5] 타율 .292(7안타)에 1홈런, 5타점을 기록하며 제 몫을 했다. 하지만 이 월드 시리즈에서 에반스가 가장 빛났던 모습은 다름 아닌 수비에서 나왔다.


1975년 월드 시리즈 6차전 연장 11회 초 조 모건의 홈런성 타구를 점프해서 잡아내는 에반스
시리즈 2승 3패로 몰려있던 6차전, 연장 11회 초 1사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신시내티 레즈조 모건이 힘껏 쏘아올린 타구가 펜웨이 파크 우측 외야 깊숙한 곳으로 향했고, 이 타구를 우익수였던 에반스가 온 집념을 다해 따라가 펜스 바로 앞에서 점프 캐치로 잡아냈다. 그리고 미처 돌아오지 못한 1루 주자 켄 그리피 시니어까지 아웃시키며 순식간에 이닝 종료. 분위기를 끌어올린 레드삭스는 이후 12회 말에 터진 칼튼 피스크의 그 전설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6차전을 가져가는 데 성공한다. 만일 에반스의 수비가 아니었다면, MLB 역사에 남을 명승부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드삭스는 이렇게 힘들게 6차전을 이겨놨건만 7차전에서 3:0으로 이기던 경기를 뒤집히며 패배, 밤비노의 저주를 끊지 못했다.[6]

준우승의 아픔을 뒤로 하고 에반스는 1976년 첫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수비 능력을 인정받았고, 1977년에는 시즌 개막 후 5월까지 45경기에서 .303/.365/.564의 슬래시라인에 11홈런, 24타점을 기록하며 거의 40홈런에 육박하는 페이스로 전성기를 구가할 기세였다. 하지만 6월 들어 찾아온 무릎 부상으로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부상자 명단을 들락날락한 끝에 8월 말에 시즌을 조기 마감하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1977년 최종 성적은 .287/.363/.526, 14홈런 36타점.

1978년에는 부상을 털고 전반기까지 .286/.386/.523의 슬래시라인과 16홈런을 기록하는 등 다시 활약하며 생애 첫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 8월까지 타율 .208이라는 부진에 빠졌고, 설상가상으로 8월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빈볼을 맞는 바람에 타격감이 더욱 악화되고 만다. 안 그래도 해당 경기에서 간만에 멀티 히트를 때려내며 감을 조율해가던 터라 에반스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부진은 결국 시즌 끝까지 이어져 9월 타율 .161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고, 뉴욕 양키스와의 1978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타이브레이커 게임에서도 대타로 딱 1타석 들어서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애초에 이 타이브레이커 게임 자체가 에반스의 부진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수도 있던 경기였기에 마냥 그를 감쌀 수만도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그나마 시즌 종료 후 또 한 번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이후 1979년과 1980년에는 별 탈 없이 시즌을 소화하며 2년간 각각 21, 18홈런을 쳐내며 제 몫을 다했고, 골드 글러브도 한 개 더 타갔다(1979년).

데뷔 이후 1980년까지의 에반스는 주로 하위 타선의 첨병 역할을 하며 매 시즌 10개 후반 정도의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전형적인 중장거리 유형의 타자였다. 하지만 1980년 이후, 에반스는 한 층 더 진화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2.2.2. 후기 (1981~1990)[편집]


파일:Dwight Evans Red Sox 2nd.jpg
수염을 기르며 각성한 보스턴 레드삭스 후기 시절(1986년).
1981년 시즌을 앞두고 팀의 중심 타자였던 프레드 린릭 벌레슨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이적하며 타선에 구멍이 생기자 신임 랄프 후크 감독은 에반스의 출루 능력에 주목해 하위타선에서 나름 잘 치고 있던 그의 타순을 1~3번으로 상향 조정했고, 감독의 믿음을 등에 업은 에반스는 새로운 타순에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이 선수노조 파업으로 6주 간(6월 12일~8월 9일) 중단되기 전까지 에반스는 전기리그 56경기에서 .341/.453/.578, 13홈런 39타점이라는 MVP 컨텐더급 성적으로 자신에게 중책을 맡긴 감독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록 2달간의 실전 공백으로 인해 후기리그에서는 .249/.376/.463으로 주춤하며 시즌 성적을 많이 깎아먹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최종 성적은 .296/.415/.522, OPS 0.937(리그 1위), 22홈런[7] 71타점으로 개인 최고의 해를 보냈다. 당연히 골드 글러브실버 슬러거 외야수 부문의 한 자리는 그의 몫이었고 리그 MVP 투표에서도 3위까지 올랐다. 이 시즌 에반스의 WAR은 6.7(bWAR)/6.6(fWAR)으로 각각 리그 1위/2위였고, 만일 시즌이 정상적으로 162경기로 치러졌다면 단순 계산으로 10에 육박하거나 그 이상의 WAR을 기록할 수도 있었을 기록적인 시즌이었다.

이어진 1982년에는 지난해의 성적이 단순한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며 .292/.402/.534, OPS 0.936에 32홈런을 때리며 생애 첫 30홈런 고지를 밟았고, 통산 5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전매특허인 수비 또한 여전했다. 비록 1983년은 잠시 주춤했지만 여전한 수비로 또 한 번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고, 1984년에는 30홈런-100타점 고지와 리그 득점왕에 오르면서 부활, OPS도 리그 1위(0.920)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8] 이듬해인 1985년에도 29홈런을 쳐내면서 레드삭스의 2번 타자로서 제 역할을 해준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시즌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것은 물론이다.

한편 1986년에는 정규시즌 성적은 조금 하락했으나(.259/.376/.476, 26홈런 97타점), 팀이 지구 우승을 거두며 11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에 복귀한다. 1986년의 에반스는 1975년의 풋풋한 빅리그 4년차 외야수가 아닌 산전수전 다 겪은 34세의 베테랑 외야수가 되어있었고, 그 덕인지 그때와는 달리 챔피언십 시리즈월드 시리즈에서 비교적 좋은 모습을 보이며 우승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특히 월드 시리즈에서는 홈런 2개[9]를 포함, 타율 .308에 9타점을 쓸어 담으며 맹활약[10]했으나 6차전에서 나온 빌 버크너의 끝내기 실책으로 인해 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운되어버렸고, 7차전에서도 3:0의 리드를 불펜진의 방화로 날리면서 역전패를 당하며 또 한 번 저주에 울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11년 전의 월드 시리즈에서도 7차전에서 3: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며 역전패했다. 데자뷰 거기다 7차전에서 에반스는 2점 홈런 하나를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활약하며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에 더욱 처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월드 시리즈가 그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가 되었다.

두 번째 준우승의 쓴잔을 마신 에반스는 1987년 어느새 35세의 노장이 되어있었고, 마이크 그린웰, 엘리스 버크스 등 외야 유망주들의 출전 기회를 늘리기 위해 우익수로서의 출장을 줄이고 1루수로도 자주 출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웬걸, 수비 부담이 줄면서 타격이 더욱 만개해 커리어 유일의 3할 타율(.305) 시즌을 보냈고, 홈런/타점/OPS 등 모든 공격 지표에서 커리어하이를 쓰며 나이 따위는 장식으로 보이는 활약을 펼친다. 덕분에 통산 3번째 올스타전 출장+통산 2번째 실버 슬러거를 수상하는 등[11] 1981년에 버금가는 최고의 해를 보냈고, MVP 투표에서도 4위에 올랐다. 이후 1988년부터는 다시 우익수 자리에 복귀, 2년 연속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한편 1988년에는 다시 포스트시즌 무대에 서지만 이전만큼의 활약은 보이지 못했고, 팀도 ALCS에서 서부 지구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밀리며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그도 세월의 힘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1990년에는 허리 부상으로 지명타자로만 출장했음에도 출전 시간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여기에 3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한 노쇠화까지 겹치며 성적도 사실상의 데뷔 시즌인 1973년 이후 가장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249/.349/.391, 13홈런 63타점). 거기다 커리어 마지막 포스트시즌이었던 1990년 ALCS에서도 굉장히 부진했던 탓에 레드삭스 프런트는 이미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 활약도 안 좋았던 에반스를 탐탁치 않아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10월 24일 재계약하지 않고 그를 방출하면서 19년 간 팀에 헌신했던 프랜차이즈 스타를 한순간에 토사구팽해버리고 만다.


2.3.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편집]


파일:Dwight Evans Orioles.jpg
말년을 보낸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레드삭스에게 버림받은 에반스를 은퇴의 기로에서 구해준 팀은 같은 지구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였다. 오리올스 구단은 기존 주전 우익수였던 조 오설락을 좌익수로 포지션 변경까지 하면서 에반스에게 주전 우익수 자리를 맡겼지만, 비율 스탯은 1990년보다는 나았으나 이전 해부터 안아왔던 허리 부상의 여파로 누적 스탯에서는 그닥 만족스럽지는 않은 성적을 거뒀다(.270/.393/.378 6홈런 38타점). 그래도 39세의 나이를 감안하면 나름 괜찮은 편이었고, 오리올스 구단도 재계약을 맺으며 1992년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를 괴롭혀 왔던 허리 부상은 여전히 위험요소였고, 이 부상이 1992년 들어 심해지면서 오리올스 구단은 그의 몸 상태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 1992년 시즌 시작 전 그에게 방출을 통보한다. 에반스는 이후 새 팀을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은퇴하며 20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끝냈다.


3. 은퇴 후[편집]


파일:Dwight Evans Coaching.jpg
레드삭스의 스프링캠프 특별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는 모습(2019년)
은퇴 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마이너 팀에서 코치 생활을 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1994년 콜로라도 로키스 타격 인스트럭터로 선임되며 본격적인 메이저 리그 지도자 생활에 들어간다. 이후 2001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 타격 인스트럭터로 친정팀에 컴백했고, 이듬해(2002년)엔 타격 코치로 승격돼 1시즌을 보냈다. 코치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주로 선수 육성 컨설턴트로 레드삭스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중.

한편 1997년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자 자격을 얻었으나, 예상 외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3년차에 광속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에반스의 탈락은 팬들 및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라는 반응이 많은데, 자세한 것은 '이모저모' 항목의 '그간의 저평가 및 명예의 전당 가능성' 문단 참조. 그나마 2000년에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 자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현역 시절의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4.1. 타격[편집]



펜웨이 파크에서 그린 몬스터를 넘기는 홈런을 때려내는 에반스[12]
배트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극도로 방망이를 눕힌 채 타격을 하는 독특한 타격폼[13]을 지녔으며, 통산 스탯(타율 .272/출루율 .370/장타율 .470)에서 알 수 있듯 컨택이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이를 만회할 수 있는 파워와 선구안을 가진 전형적인 OPS 히터 유형의 타자였다. 하지만 에반스는 OPS 히터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성적을 기록했는데, 통산 볼넷은 1391개로 MLB 통산 29위에 올라 있고, 통산 385개의 홈런[14]은 역대 아메리칸 리그 우타자들 중 10번째로 많은 홈런이자 MLB 통산 66위로 단순한 OPS 히터라고 취급하기엔 차고 넘치는 선구안과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활동 무대였던 펜웨이 파크가 타자 친화 구장에 속하긴 하지만 조정 스탯인 wRC+도 통산 129나 될 정도고, 단일 시즌 wRC+ 150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3번이나(1981~1982, 1987) 된다. 이는 에반스의 전성기가 리그 OPS가 0.7도 채 안 되거나 겨우 넘기는 시즌이 수두룩했던 투고타저의 극을 달렸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에반스의 장점은 바로 '꾸준함'인데, 데뷔 후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1973년부터 레드삭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0년까지 18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고, 비록 고질적인 무릎 및 허리 부상으로 150경기 이상 나온 시즌이 생각보단 많지 않지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시즌은 1973년과 1977년 두 번 밖에 없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 덕분에 칼 야스트렘스키의 뒤를 이어 대부분의 레드삭스 프랜차이즈 공격 기록에서 2위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1980년~1989년 사이 265홈런을 치며 1980년대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선수로 남아있기도 하다.

또한 브레이크아웃 시즌이었던 1981년을 전후로 성적이 큰 폭으로 변화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점인데, 1973~1980년까지는 연평균 .262/.344/.449에 16홈런 정도를 기록해주던 중장거리 타자가 1981~1990년까지는 연평균 .279/.385/.489에 25홈런 정도를 기록하는 거포형 타자로 탈바꿈한다. 이는 초창기에는 하위 타선을 맡다가 1981년을 기점으로 상위 및 중심 타순에 출장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자신감을 얻고 스윙 방식도 어느 정도 타순에 맞춰 변화한 것이 주 요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처럼 여러 타순을 종횡무진 누빈 탓에 1~9번까지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날린 경험이 있기도 하다.


4.2. 수비[편집]




1975년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의 점프 캐치
한 경기에서 연거푸 2루로 향하는 주자를 보살로 잡아내는 모습[15]
그의 진가는 타격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드러났다. 위 두 번째 영상에서 볼 수 있듯 엄청난 강견이라서 추가 진루를 노리는 주자들의 최대의 적으로 등극했고, 실제로 외야수로 나와서 두 자릿수 보살을 기록한 시즌이 6번이나 있을 정도였다.[16] 일부 매체에서는 그의 송구를 대포알(Cannon)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발은 빠르지 않은 편이었으나 타구 판단 능력이 뛰어났기에[17] 수비 범위도 펜웨이 파크 특유의 해괴망측할 정도로 광활한 우측 외야를 감안하면 상당히 준수한 편이어서 다이빙 캐치 등의 호수비도 심심찮게 만들어내곤 했다.

이렇다 보니 그 외야 수비하기 어렵다는 펜웨이 파크가 홈구장+강견으로 계속 보살을 잡아냄+타구 판단이 좋아서 호수비도 종종 적립 이 세 가지가 시너지를 내면서 그가 통산 8번의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에반스보다 더 많은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외야수는 윌리 메이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알 칼라인, 켄 그리피 주니어라는 올타임 레전드 급 외야수들뿐이다.


5. 이모저모[편집]


  • 이색적인 기록이 하나 있는데, 1986년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개막전에서 잭 모리스를 상대로 1회 초 선두타자 초구 홈런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의 첫 공을 홈런으로 장식한 선수가 되었다.[18]

파일:Dwight Evans Shaved.jpg
파일:Dwight Evans Growing a Beard.jpg
파일:Dwight Evans Beard.jpg
수염이 없던 시절(1975년 경으로 추정)
수염을 기르며(1980년)
완성된(...) 콧수염(1983년)
  • 특유의 콧수염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실 1979년까지는 말끔히 면도를 한 맨얼굴로 플레이를 했는데, 1980년부터 수염을 조금씩 기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아예 콧수염만 따로 기르고 다녔다. 그래도 1980년대에 찍힌 에반스의 모습들을 보면 가끔씩 말끔히 면도를 한 상태의 사진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여담으로 콧수염을 기르고 나서부터 성적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혹시 성적 향상의 비결은 콧수염? 대신 그 등가교환으로 얼굴이 급격히 늙어 보이게 되었지만(...).

  • 슬하에 자녀 셋(아들 둘, 딸 하나)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신경섬유종증이라는 유전병 때문에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19] 특히 상태가 안 좋았던 첫째 아들은 16살 때 이미 16번의 수술을 받은 몸이었고, 한 쪽 눈의 시력마저 잃은 상태였다고. 하지만 외부에는 혹시라도 걱정을 끼칠까 이 상황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아내와 함께 조용하게 아들들의 뒷바라지를 했다.[20] 이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리게 된 계기 또한 신경섬유종증 관련 연구 및 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공개한 것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대인. 안타깝게도 둘째 아들은 2019년 4월에 향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첫째 아들도 2020년 2월 47세를 일기로 숨지고 말았다.

  • 그의 손자인 라이언 버라디노(Ryan Berardino)가 벤틀리 대학교 재학 도중 201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34라운드(전체 1037순위)에서 지명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만 지명 순위가 워낙 낮다 보니 바로 프로로 가진 않고 2021년에도 계속 대학 무대에서 뛰고 있는 중. 포지션은 1루수라고 한다.


5.1. 그간의 저평가 및 명예의 전당 가능성[편집]


  •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야구계에 자신의 업적을 남긴 선수지만, 그에게 항상 들러붙는 수식어는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선수', '소리없는 강자' 등 저평가와 관련한 것들이 많다.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는 아예 야구 역사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수 중 하나라고 평할 정도.[21]

  • 이런 저평가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투표 결과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첫 투표였던 1997년에는 고작 28표(5.9%)밖에 받지 못하며 겨우 탈락을 면했고, 2년차인 1998년에는 49표(10.4%)를 받으며 득표율이 두 자릿수까지 올랐지만, 1999년에 18표(3.6%)로 다시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탈락해버렸다. 그때야 세이버메트릭스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이었으니, 에반스는 수비는 확실히 잘했지만 공격은 홈런 좀 치는 그냥저냥 준수한 타자[22]라는 인식이 강했고, 수상 실적도 골드 글러브 8번과 실버 슬러거 2번이 전부라서[23] 다른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과 비교하면 다소 모자라다고 느껴질 여지가 있었다. 누적 스탯 또한 명전급이라고 하기엔 뭔가 약간씩 아쉬운 구석이 있기도 했고.[24] 거기다가 개요에서 상술했듯 하필 동 시기 같은 팀자기보다 치는 타자들이 널려 있었던 것도 저평가에 한 몫 했다.

  • 그러나 그가 후보에서 탈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이버메트릭스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그의 통산 비율 성적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세이버메트리션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선수상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통산 순출루율(ISOD) 0.098, 순장타율(ISO) 0.198로 각 비율 스탯이 3푼씩만 더 높았다면 통산 3-4-5의 자타공인 강타자가 될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OPS 히터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다가 WAR 등의 새로운 스탯들이 등장하면서 에반스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는데, 에반스가 기록한 통산 bWAR 67.1은 역대 MLB 투타 통합 128위에 위치해 있고, 타자로만 한정하면 88위로 어지간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과 견줘도 부러울 것 없는 수준이다.[25]

  • 또한 명예의 전당 통계라는 명예의 전당 입성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면서 에반스의 꾸준함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는데, 각 부문에서 리그 1위를 해야 점수가 부여되는 블랙 잉크는 15점에 불과하지만 각 부문에서 리그 10위 이내에 들면 점수가 부여되는 그레이 잉크는 113점으로 그가 얼마나 꾸준한 타자였는지를 입증했다.[26]

  • 아무튼 지금까지 에반스가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리하면 대충 아래의 요소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 타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에 비해 전체적인 성적이 다소 부족하다.
    • 하필 활동 시기가 투고타저 시대와 겹쳤다.
    • 팀에 자기보다 잘 하는 선수가 꼭 한 명씩 껴 있어서 다소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 그러나 위의 요소들이 세이버메트릭스의 대중화와 함께 하나하나 걷어지면서 늦게나마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에반스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높아져 왔다. 특히 2018년에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해롤드 베인스[27]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면서 점점 희망의 불씨가 커져갔고, 2020년 투표에 드디어 베테랑 위원회 추천 후보에 오르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득표수가 모자라 헌액에는 실패했지만, 그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인 만큼 현지에서도 빠른 시일 내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5.2. 영구결번 가능성?[편집]


  • 한편 에반스의 영구결번에 대해서도 상당히 이야깃거리가 많은데, 다른 팀에서야 이 정도 성적을 찍어준 외야수라면 바로 영구결번행이겠지만 그가 뛰었던 보스턴 레드삭스는 영구결번 받기가 정말정말 까다롭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지금껏 영구결번이 안 돼 있었다. 이 영구결번 조건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가 하면 아래와 같다.
    • 1. 10년 이상 레드삭스에서 선수/감독으로 있었어야 할 것.
    • 2. 은퇴를 레드삭스에서 해야 할 것.
    • 3.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야 할 것(...). 사실 이게 핵심이다

  • 상황이 이랬다 보니 레드삭스에서 10년 넘게 뛰긴 했지만(1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도 아닌데다 레드삭스가 아닌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은퇴했던 에반스는 2번 조건부터 충족이 안 되는 바람에 영구결번과는 영원히 연이 없어 보이는 듯 했다.

  • 그런데 FA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해 그곳에서 은퇴했던 칼튼 피스크가 2000년 영구결번을 받았고, 2008년에는 명예의 전당 미헌액자인 자니 페스키도 영구결번을 받으면서[28] 2, 3번 조건을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거기다가 2015년 2월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여 탬파베이에서 은퇴한 웨이드 보그스도 영구결번을 받았다. 물론 이 셋은 어디까지나 저 위의 3가지 조건 중 2가지는 충족한 상황[29]이라 1번 조건밖에 충족되지 않는 에반스와는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지만, 마찬가지로 3번 조건 하나만 충족한 페드로 마르티네스[30] 영구결번됨에 따라 영구결번 가능성이 꽤 높아졌다. 마침 에반스의 등번호였던 24번을 사용하던 데이비드 프라이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하면서 공석이 되기도 했고.

  • 이 때문에 레드삭스 네이션에서 영구결번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할 때면 항상 차기 영구결번 1순위로 에반스가 꼽힐 정도로 팬들 사이에서도 꽤 인지도 있는 문제다. 심지어 2020년 4월에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더스틴 페드로이아, 로저 클레멘스[31], 루이스 티안트 등의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영구결번 1순위에 꼽히기도 했다. # 이 정도로 기대치가 크다 보니 팬들은 에반스의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명예의 전당 헌액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만 된다면 영구결번도 쉽게 될 테니까.


6. 연도별 기록[편집]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bWAR
fWAR
1972
BOS
18
64
15
3
1
1
2
6
0
7
13
.263
.344
.404
.747
0.4
0.3
1973
119
328
63
13
1
10
46
32
5
40
52
.223
.320
.383
.703
0.9
0.4
1974
133
514
130
19
8
(3위)
10
60
70
4
38
77
.281
.335
.421
.756
4.5
3.9
1975
128
470
113
24
6
13
61
56
3
47
60
.274
.353
.456
.809
5.1
4.4
1976
146
571
121
34
(2위)
5
17
61
62
6
57
92
.242
.324
.431
.755
3.8
3.1
1977
73
265
66
9
2
14
39
36
4
28
58
.287
.363
.526
.889
2.0
2.1
1978
147
572
123
24
2
24
75
63
8
65
119
.247
.336
.449
.784
3.1
2.5
1979
152
563
134
24
1
21
69
58
6
69
76
.274
.364
.456
.820
3.7
3.9
1980
148
542
123
37
(5위)
5
18
72
60
3
64
98
.266
.358
.484
.842
3.0
3.1
1981
108
(4위)
504
(1위)
122
19
4
22
(1위)
84
(2위)
71
(4위)
3
85
(1위)
85
(4위)
.296
.415
(2위)
.522
(3위)
.937
(1위)
6.7
(1위)
6.6
(2위)
1982
162
(1위)
727
(2위)
178
37
7
32
(5위)
122
(3위)
98
3
112
(2위)
125
(5위)
.292
.402
(1위)
.534
.936
(3위)
6.4
(5위)
6.5
(3위)
1983
126
544
112
19
4
22
74
58
3
70
97
.238
.338
.436
.774
1.2
1.3
1984
162
(1위)
738
(1위)
186
37
(4위)
8
32
121
(1위)
104
3
96
(3위)
115
.295
.388
.532
(3위)
.920
(1위)
5.4
5.3
1985
159
744
(2위)
162
29
1
29
110
(4위)
78
7
114
(1위)
105
.263
.378
.454
.832
4.1
4.0
1986
152
640
137
33
2
26
86
97
3
97
(2위)
117
.259
.376
.476
.853
4.4
4.5
1987
154
657
165
37
2
34
(3위)
109
(5위)
123
(2위)
4
106
(1위)
98
.305
.417
(3위)
.569
(4위)
.986
(4위)
4.8
4.9
1988
149
645
164
31
7
(5위)
21
96
111
(4위)
5
76
99
.293
.375
.487
.861
3.2
3.5
1989
146
630
148
27
3
20
82
100
3
99
84
.285
.397
.463
.861
3.0
3.4
1990
123
522
111
18
3
13
66
63
3
67
73
.249
.349
.391
.740
0.9
0.4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bWAR
fWAR
1991
BAL
101
329
73
9
1
6
35
38
2
54
54
.270
.393
.378
.771
0.6
0.8
MLB 통산
(20시즌)
2606
10569
2446
483
73
385
1470
1384
78
1391
1697
.272
.370
.470
.840
67.1
65.1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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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 한정.[2] MLB에서의 경력만 기재.[3] 여기에는 경기장에 자주 에반스를 데리고 갔던 아버지의 공이 컸다고 한다.[4] 이 학교 출신의 메이저리거는 에반스 외에도 마이크 무스타커스, 맷 도밍게스 등이 있다.[5] 다만 이 경기는 연장 10회 조 모건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패하고 만다.[6] 이 월드 시리즈가 끝난 후 에반스는 '우리는 앞으로의 5년 중 3~4번은 이 자리(=월드 시리즈)에 다시 설 것이다'라며 설욕을 다짐했지만, 그의 두 번째 월드 시리즈는 그 해로부터 11년이 지난 후에야 그에게 찾아왔다.[7] 에디 머레이, 바비 그리치, 토니 아르마스와 함께 공동 1위.[8] 이 해 6월 28일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힛 포 더 사이클도 기록했다.[9] 2차전에서는 무려 그 드와이트 구든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냈다.[10] 다만 4차전에서 레니 다익스트라의 홈런성 타구를 잡으려고 시도했다가 타구가 글러브에 맞고 그대로 담장 밖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홈런을 막지 못하며 수비 장인으로서의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11] 참고로 이 실버 슬러거는 외야수 부문으로 수상했는데, 정작 출장한 경기와 소화 이닝 수는 1루수가 조금 더 앞섰다(...).[12] 영상 속 경기는 1987년 4월 15일 텍사스 레인저스전.[13] 초창기에는 방망이의 끝도 3루 쪽이 아닌 포수 쪽을 향할 정도로 더 독특했다. 그나마 연차가 쌓이면서 점점 3루 쪽으로 변하긴 했지만.[14]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펜웨이 파크는 좌측 외야에 커다란 그린 몬스터가 버티고 있어 우타자가 홈런을 치기 꽤나 껄끄러운 형태다. 그렇다고 우측 외야가 괜찮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기형적인 외야 구조로 인해 오히려 좌타자가 더 홈런이 안 나올 정도로 그냥 홈런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다. 대신 그 반작용으로 2루타가 굉장히 잘 나오지만.[15] 영상 속 경기는 레드삭스 시절인 1986년 7월 27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전.[16] 1975, 1976, 1979년에는 무려 15개의 보살을 기록했는데, 2021년 현재까지도 레드삭스 소속으로 이 기록을 넘은 외야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2016년 무키 베츠가 14개로 간신히 따라간 정도.[17] 위 첫 번째 영상 속 점프 캐치도 왠지 조 모건이 그 쪽 방향으로 타구를 칠 것 같아서 타격음이 나자마자 냅다 뒤로 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더블 아웃.[18] 에반스 이후 이 기록을 달성한 타자는 32년 뒤에나 나왔는데, 2018년 개막전에서 시카고 컵스이안 햅이 기록했다.[19] 한국에서는 2016년 SBS에서 방영된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한 故 심현희 씨(2018년 사망)의 사연으로 이 병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20] 레드삭스에서 16년을 함께 뛰었던 짐 라이스조차 2008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고 할 정도다.[21] 나무위키 또한 이 선수에 대해 굉장히 무심했던 터라 다른 레드삭스 출신 선수들의 문서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별 움직임이 없다가 2021년 6월에야 문서가 생겼다. 반성합니다(...)[22] 특히 강타자의 덕목인 3할 타율을 1987년 딱 한 번밖에 기록하지 못한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23] 홈런왕(1981)과 득점왕(1984), 출루율왕(1982)을 한 번씩 해보긴 했는데 홈런왕은 단축시즌에 오른 거라 평가절하되는 분위기였고 득점왕과 출루율왕은 다른 타격 부문들 중에서는 주목도가 다소 떨어지는 부문이다.[24] 명예의 전당 입성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 불리는 통산 2,500안타-400홈런 모두 간발의 차로 달성에 실패했다(통산 2,446안타-386홈런).[25] 에반스와 비슷한 통산 bWAR을 기록한 타자는 라인 샌드버그(67.9), 어니 뱅크스(67.7), 로베르토 알로마(67.0)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투표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물론 이들은 내야수들이라서 외야수인 에반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WAR이라는 스탯은 다른 포지션에 있는 선수들을 편하게 비교하려고 만들어진 것인 만큼 큰 의미는 없다.[26] 다만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의 평균 그레이 잉크는 144로, 평균에 비하면 다소 모자란 것은 사실이다.[27] 이쪽은 아예 공식 수상 기록이 실버 슬러거 1회 외에는 전무하고, 통산 성적도 에반스와 유사하지만 선수시절의 대부분을 지명타자로 보낸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 아래라고 봐도 될 정도다.[28] 다만 페스키의 영구결번은 그가 1946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안일한 수비 플레이로 인해 결승점을 내준 사건으로 인해 밤비노의 저주가 풀린 2004년까지 무려 50여년을 밑도 끝도 없이 비난했던 과거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커서 명예의 전당 헌액 조건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1, 2번 조건을 충족했으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한 더스틴 페드로이아의 15번, 제이슨 배리텍의 33번, 팀 웨이크필드의 49번은 아직 영구결번되지 않았고, 2023년 기준으로도 3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영구결번자는 페스키가 유일하다.[29] 피스크와 보그스는 1, 3번 충족, 페스키는 1, 2번 충족.[30] 페드로는 레드삭스에서 뛴 기간이 7년뿐(1998~2004)이고, 은퇴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했다.[31] 도핑 경력이 있음에도 영구결번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 다소 의아할 수 있는데, 클레멘스의 약물 복용 스토리는 그에게 약물을 제공해준 브라이언 맥나미 재판과 맞물려 꽤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물을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 처음으로 구입했다는 말이 거의 사실로 드러나면서 적어도 레드삭스에서의 13년은 약물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평이 지배적으로, 레드삭스에서 올린 성적만 해도 충분히 압도적이기에 영구결번 자체에 대해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팬들이 꽤나 있다. 거기다 또 다른 약쟁이인 데이비드 오티즈가 은퇴 후 바로 영구결번되면서 약물 복용 때문에 영구결번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당위성을 잃어버린 상태다. 물론 이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은 별개의 문제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