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덤프버전 :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شەرقىي تۈركىستان ئىسلام جۇمھۇرىيىتى
Sherqiy Türkistan Islam Jumhuriyiti
Шәрқий Түркистан Ислам Җумһурийити

파일: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국기.svg
파일: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국장.svg
국기
국장
위치
파일: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위치.png
1933 ~ 1934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중화민국
중화민국
수도
카슈가르시
정치체제
대통령 중심 공화제
언어
위구르어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
2. 성립 배경
3. 멸망
4. 한계
5. 긍정적 평가



1. 개요[편집]


파일:22521F54-8051-445A-BC56-B9EA91A57387.jpg
1933년 11월 12일, 카슈가르에서 수립되는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동부 일부를 중심으로 유지된 위구르인의 독립 정권이었다.


2. 성립 배경[편집]


신장 동부의 하미(쿠물)는 19세기 중반 야쿱 벡 봉기 당시 청나라의 진압군을 지원했고 그 대가로 하미의 칸들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하미의 칸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하여 하미의 다른 위구르인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세금을 매겼는데, 20세기 초 하미의 칸이었던 막수드 칸은 주민들에게서 수탈한 돈으로 베이징의 정원을 모방하여 궁전의 정원을 설계할 정도로 사치가 낭비가 심했다. 한술 더 떠서 막수드는 청나라 정권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신장으로 새로 이주해오는 한족 빈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줬는데, 새로 이주해온 한족 이주민들에게는 기존 위구르인들보다 더 적은 세금만 부과되고 봉건적 요역 의무마저 면제되자 하미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30년 폭정을 일삼던 막수드 칸이 사망하자 신장성을 지배하던 군벌 진수런은 하미 칸국을 폐지하고, 이 지역에 고대 한나라에서 붙인 지명을 딴 행정구역을 설정한다. 하미, 이허, 이우가 그것인데 이는 위구르인들과 그 조상 토하라인들이 한족의 후예라는 장제스의 사이비 역사학에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그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진수런은 하미 칸국이 폐지된 첫해 그동안 과도한 세금에 짓눌려온 하미의 위구르인들에게 농업세를 이중으로 늘리는 비상식적인 정책을 시작으로 현지 원주민 말살 정책을 실시했다. 수구 중화주의자였던 진수런은 하미 농민들이 휴경하고 있는 농지를 강제로 수탈하여 한족 이민자들에게 개간해야 할 '황무지'로 주었으며, 더욱이 이들 한족 이민자들에게는 농기구와 종자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첫 2년 동안은 세금을 연기해 주었다. 토지를 빼앗긴 위구르인들에게는 사막과 인접하고 카레즈도 뚫리지 않은 토지가 새로 배정됐다.

1931년 2월 하미 인근 농촌에서 한족 경찰서장이 위구르인 소녀에게 집적거렸다가 맞아죽은 것을 계기로 하미 전역에서 위구르인들이 일제히 봉기하기 시작했다. 막수드 칸의 전임 재상이었던 호자 니야즈와 율바르스 칸은 하미 위구르인 봉기의 지도자로 추대됐다. 진수런 군벌정권은 한족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위구르인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고, 항복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인근 지방의 위구르인들까지 어쩔 수 없이 호자 니야즈와 율바르스 칸의 봉기군에 합류하면서 봉기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말았다. 이듬해 반란은 신장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다른 한편 율바르스 칸은 동쪽에서 활동하던 후이족 군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가군벌 내에서 권력다툼을 하던 젊은 군인 마중잉이 이에 호응하여 신장으로 들어와 진수런 군과 전투를 벌였다. 마중잉의 도움을 받은 위구르 봉기군은 투르판을 해방했고 그동안 위구르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구 학살하던 송파유를 붙잡아 처단했다.

1933년 1월부터 3월에 이르기까지 봉기군들이 우루무치를 공격해오기 시작했고 한족 난민들이 도시로 밀려들었는데,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고 질병이 창궐했다. 결국 1933년 4.12 디화 정변을 거쳐 진수런이 실각하고, 같은 해 6월 하미 봉기의 지도자 니야스 호자는 우루무치를 방어하던 중국인 군벌 성스차이의 지원을 받아, 함께 싸우던 마중잉의 후이족 군대를 배신한 후 성스차이 군에게 합류한다.

다른 한편 타림분지 서남부의 카슈가르에서는 위구르인, 키르기스인, 한족, 후이족들이 서로 난투극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러한 와중에 위구르인 출판업자 사비트 다물라는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여러 인사들을 끌어모아 1933년 9월부로 동튀르키스탄 독립협회를 설립했고, 카슈가르에서 일어나는 난투극을 막아달라며 니야즈 호자를 카슈가르로 불렀다. 1933년 11월 사비트 다물라가 이끄는 위구르인 지식인들은 니야즈 호자를 종신 총통으로 선포하는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세워 독립을 선언한다.


3. 멸망[편집]


니야즈 호자에게 배신당한 마중잉의 후이족 군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34년 2월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설립된 카슈가르로 쳐들어가 위구르인 4,500명을 학살했고, 이 과정에서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지도부는 마중잉의 복수로 뿔뿔이 흩어졌다.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의 종신 총통이던 니야즈 호자는 다시 우루무치의 성스차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성스차이가 이를 받아주면서 니야즈 호자는 신강성 정부 부주석으로 임명됐다.

여담으로 카슈가르의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정부를 무너트렸던 마중잉은 같은 해 6월 소련에 투항했다가 몇 년 후 소리소문없이 증발하고 말았다.


4. 한계[편집]


냉정하게 말하지면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사실상 신장성을 장악한 군벌 성스차이의 지배를 받는 괴뢰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사비트 다물라는 영국령 인도 제국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 냉각을 우려한 영국은 지원을 거부했다.

성스차이는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호자 니야즈를 받아주면서 한동안 위구르족과 한족의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했으나, 1937년 성스차이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와중에 호자 니야즈를 비롯한 위구르 민족주의자 5~10만여 명을 반란 혐의로 숙청하면서,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과 그 주도 세력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5. 긍정적 평가[편집]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주도한 사람들 중에서는 호자 니야즈처럼 기회주의적인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1910~1920년대 당시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터키인, 볼가 타타르인[1] 교사들이 초빙되어 신장의 부유층 자제들에게 서구 학문과 이슬람 신학을 병행하여 가르친 덕분에, 1930년대 동튀르키스탄 공화국을 지도하던 위구르인들은 헌법과 민주주의, 교육을 중시했다. 이들은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실권이 별로 없었으나, 1년여간의 짧은 기간동안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위구르인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했다.

1933년 11월 12일의 독립 선언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의 창립자들이 공화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비전을 더 잘 보여 준다. 주로 지역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약 7000여 명의 군인들과 1만 3000여 명의 사람들이 투만 강 기슭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참석했다. 이 지역 주위의 거리들은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라고 쓰인 파란색 현수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비트 다물라는 주요 대신들이 연설한 그 집회를 주재했다. 정오에 대포가 44번에 걸쳐 발사됐고 군중들은 동튀르키스탄 깃발을 흔들며 "아민, 아민"이라고 합창했다. 사범대학의 학생들은 "우리의 깃발은 푸른색 깃발, 우리의 나라는 금색 나라, 튀르키스탄은 우리 튀르크 민족의 고향, 우리 것이 됐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집회 후 사비트 다물라는 마을로 되돌아가는 행렬을 이끌었으며 군중들은 카슈가르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이드 카 모스크 앞의 광장에서 재집결했다. 동튀르키스탄 공화국의 공식 선포가 포함된 이날 행사가 인쇄된 일정표에서 새 정부는 평화와 치안 회복이라는 목표에 서약했으며 카슈가르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인들에게는 새 정부가 이들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다. 성명서는 처음과 끝에 하나님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으나 평균적인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보다는 그 빈도가 다소 낮다. 어조는 전반적으로 종교적이지 않았다. 신멘 야스시는 여기에서 이용된 대중 동원 기술이 이 지역의 역사에 전례가 없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도 지역 주민들이 봉기와 지하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인쇄된 연설문과 정치적 약속의 공표, 학교 학생들 및 군인들의 가두 행진 그리고 국기와 국가의 도입은 모두 근대 민족주의의 래퍼토리로부터 차용된 것이다.

유라시아의 교차로 신장의 역사 / James. A. Millward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위구르인들만의 정권은 아니었다. 새 정부는 위구리스탄 공화국(Uyghuristan Jumhuriyiti)라는 이름으로 첫 주화를 발행했으나 이후 발행한 주화나 여권에는 동튀르키스탄이라는 국명을 표기했다. 공화국 정부는 신장과 새롭게 수립된 정부에 위구르인 외에도 다른 튀르크계 민족들도 있다는 이유로 국명을 동튀르키스탄 공화국이라고 결정했다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4 07:56:27에 나무위키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러시아의 카잔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퍼져사는 튀르크계 민족으로 러시아에 기병으로 복무하면서 중앙아시아 무역을 병행하며 많은 부를 축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