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독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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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나치당이 통치하던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전 후 연합군의 동서 분할 점령으로 독일이 분단되면서 생긴 경계선이었다. 1990년에 독일이 재통일되면서 현재는 유적지가 된 곳이다. 지금도 주(州) 경계선으로 기능하고 있다. 철의 장막을 이루던 것 중 하나.
베를린 장벽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있는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 독일어로는 "Innerdeutsche Grenze"라고 하며, 직역하면 '독일 안의 경계선'이다. Grenze는 국경 외에 단순히 경계라는 뜻도 있다. 사실 동독을 별개의 나라로 생각하지 않았던 서독 입장에서는 경계라고 번역하는 쪽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1952년 이전에는 통과가 비교적 쉬웠으나, 그 이후에는 통과가 어렵게 넓은 도랑을 설치했다. 1967년 이후부터는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동독 측의 빌무트하우젠(Billmuthausen) 마을은 1978년에, 에를레바흐(Erlebach) 마을은 1986년에 "경계선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동서독 통일 3개월 전 1990년 7월 1일에 철폐되었다. 철폐 후의 변화는 그뤼네스반트 참고.
치헤리에 세워진 표석: "독일은 나뉘어질 수 없다. 치헤리, 1958년 6월 17일"[3]
니더작센(서독)의 치헤리(Zicherie) 마을과 작센안할트(동독)의 뵈크비츠(Böckwitz) 마을은 각기 다른 주에 속해 있었지만, 한 생활권인 사실상 하나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동서독이 분단되면서 이 두 마을도 강제로 갈라졌다. 1987년판 <LIBRARY OF NATIONS - 독일편>에서 이 마을을 소개한 바를 보면, 1945년 7월 1일 소련군이 뵈크비츠로 들어와 치헤리 마을과의 사이에 경계선을 세웠다. 그날 이후로 두 마을 사이에는 사실상 자유 통행이 어려워졌고 당분간 학생들의 통학만 허용되었으나, 그마저도 끝내는 중단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외진 길로 돌아가거나 소련군에게 술을 뇌물로 주면 통과할 수 있었지만 동독 경비대가 배치되면서는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고, 1952년 5월에는 두 마을 사이에 높이 3m의 나무 담이 쳐졌다. 그리고 뵈크비츠 마을의 거주민 중 스무 가족은 후방 작센으로 쫓겨났는데, 추방된 가족 중 한 가족만 빼고는 이후 동독을 탈출하여 치헤리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장벽은 더욱더 단단해졌다.
이 장벽으로 당연히 이산가족도 생겼지만, 독일 재통일로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되면서 두 마을은 다시 합쳐졌다.#
지도를 보면 동독 국경이 서독 쪽으로 튀어나온 곳이 있다. 여기는 풀다 갭(Fulda gap)이라고 해서 소련군 기갑부대가 프랑크푸르트로 최단거리로 밀고 내려와 서독을 관통, 전선을 양분하고 프랑스까지 진격할 것이 우려되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서독 수도 역할을 맡지 못한 한 이유이기도 하며, 미 육군 제5군단이 상시 주둔하여 소련군을 감시하는 요주의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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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45년 나치당이 통치하던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전 후 연합군의 동서 분할 점령으로 독일이 분단되면서 생긴 경계선이었다. 1990년에 독일이 재통일되면서 현재는 유적지가 된 곳이다. 지금도 주(州) 경계선으로 기능하고 있다. 철의 장막을 이루던 것 중 하나.
베를린 장벽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있는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 독일어로는 "Innerdeutsche Grenze"라고 하며, 직역하면 '독일 안의 경계선'이다. Grenze는 국경 외에 단순히 경계라는 뜻도 있다. 사실 동독을 별개의 나라로 생각하지 않았던 서독 입장에서는 경계라고 번역하는 쪽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2. 역사[편집]
1952년 이전에는 통과가 비교적 쉬웠으나, 그 이후에는 통과가 어렵게 넓은 도랑을 설치했다. 1967년 이후부터는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동독 측의 빌무트하우젠(Billmuthausen) 마을은 1978년에, 에를레바흐(Erlebach) 마을은 1986년에 "경계선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동서독 통일 3개월 전 1990년 7월 1일에 철폐되었다. 철폐 후의 변화는 그뤼네스반트 참고.
3. 구성[편집]
4. 접경지역: 치헤리-뵈크비츠 마을의 경우[편집]
치헤리에 세워진 표석: "독일은 나뉘어질 수 없다. 치헤리, 1958년 6월 17일"[3]
니더작센(서독)의 치헤리(Zicherie) 마을과 작센안할트(동독)의 뵈크비츠(Böckwitz) 마을은 각기 다른 주에 속해 있었지만, 한 생활권인 사실상 하나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동서독이 분단되면서 이 두 마을도 강제로 갈라졌다. 1987년판 <LIBRARY OF NATIONS - 독일편>에서 이 마을을 소개한 바를 보면, 1945년 7월 1일 소련군이 뵈크비츠로 들어와 치헤리 마을과의 사이에 경계선을 세웠다. 그날 이후로 두 마을 사이에는 사실상 자유 통행이 어려워졌고 당분간 학생들의 통학만 허용되었으나, 그마저도 끝내는 중단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외진 길로 돌아가거나 소련군에게 술을 뇌물로 주면 통과할 수 있었지만 동독 경비대가 배치되면서는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고, 1952년 5월에는 두 마을 사이에 높이 3m의 나무 담이 쳐졌다. 그리고 뵈크비츠 마을의 거주민 중 스무 가족은 후방 작센으로 쫓겨났는데, 추방된 가족 중 한 가족만 빼고는 이후 동독을 탈출하여 치헤리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장벽은 더욱더 단단해졌다.
이 장벽으로 당연히 이산가족도 생겼지만, 독일 재통일로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되면서 두 마을은 다시 합쳐졌다.#
5. 관점[편집]
지도를 보면 동독 국경이 서독 쪽으로 튀어나온 곳이 있다. 여기는 풀다 갭(Fulda gap)이라고 해서 소련군 기갑부대가 프랑크푸르트로 최단거리로 밀고 내려와 서독을 관통, 전선을 양분하고 프랑스까지 진격할 것이 우려되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서독 수도 역할을 맡지 못한 한 이유이기도 하며, 미 육군 제5군단이 상시 주둔하여 소련군을 감시하는 요주의 지역이었다.
6. 갤러리[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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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군사분계선에도 이런 말뚝이 일정 간격으로 박혀 있다.[2] 한국으로 치면 남방한계선과 유사하다.[3] DEUTSCHLAND IST UNTEILBAR. ZICHERIE 17.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