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릉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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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토비 소탕
3.2. 도굴 준비
3.3. 서태후릉 도굴
3.4. 건륭제릉 도굴
4. 결과
5. 매체에서
6.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중 '도굴장군'으로 불리는 군벌 쑨뎬잉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청나라 황릉을 도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


2. 배경[편집]


쑨뎬잉은 원래 봉천군벌의 일원인 '개고기 장군' 장쭝창의 부하로 장쭝창과 저옥박의 직로연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쑨뎬잉은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될 무렵 하남성 방어를 맡고 있었으나 펑위샹, 옌시산 등의 대군벌들이 모두 장제스에게 복종을 선언하고 봉천군벌에 다굴을 때리자 버티지 못하고 하남성은 물론, 장쭝창의 본거지인 산둥성도 버리고 북방으로 도주길에 올라야 했다. 5월 30일 바오딩 전투에서 봉군이 패배하면서 수도 베이징도 국민혁명군에게 함락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이 와중에 봉군의 대원수인 장쭤린관동군 장교고모토 다이사쿠 일본 육군 대좌의 음모로 폭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6월 29일 역시 장쭝창의 부하인 서원천과 함께 계현으로 퇴각한 쑨뎬잉은 더 이상 봉천군벌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장제스의 심복 하성준으로부터 국민정부에 투항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이에 쑨뎬잉은 봉천군벌을 배신하고 국민혁명군에 투항하여 국민혁명군 육군 6군단 1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서원천은 6군단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계현의 사찰에 12군 사령부를 설치한 쑨뎬잉은 군량미 문제를 논하기 위해 준화, 옥전, 계현의 관료와 유지, 상인들을 불러 식량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척박한 하북 지역에 많은 군벌군을 먹일 식량이 없었던지라 이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이에 성난 쑨뎬잉이 이들을 윽박지르며 식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이때 준화현에서 온 사람이 토비 마복전이 동릉을 도굴해서 12만 원어치나 되는 금은보화를 훔쳐 베이징에 팔아 막대한 돈을 챙긴 일이 있다고 말했다. 원래 이 사람의 의도는 이 정도로 토비가 설쳐대서 준화현 사람들이 식량을 댈 수 없다는 의미였지만 쑨뎬잉은 무덤 하나를 파헤쳐서 무려 12만 원이 나왔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동릉을 지키는 군사가 있는지 여부를 물은 쑨뎬잉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우리 군이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내일부터 우리 군이 지역의 소요를 막고 토비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겠습니다. 여러분은 군량만 조금 협조해주면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유지들은 알았다고 하고 물러났다.

쑨뎬잉은 즉각 휘하 사단장 담온강을 불러 동릉 근처 마신교에 병력을 배치하고 동릉을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담온강은 휘하 연대장 조종경 등 10여명과 함께 말을 타고 동릉을 둘러보았다. 원래 동릉에는 북양정부가 파견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북양정부가 와해된 후 관할권이 국민정부로 넘어갔으나 대혼란 와중에 아직 국민정부는 동릉을 수비할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릉을 둘러싼 나무는 죄다 베어진 후였고 건물들은 헐려 값진 것은 죄다 약탈당했다. 담온강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쑨뎬잉은 개같은 놈들이 죽은 사람에게서 돈을 벌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욕을 퍼부었는데 담온강은 땅 위의 것은 죄다 털렸지만 땅속의 것은 남아 있으니 도굴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쑨뎬잉은 자신들이 손을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털리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동릉을 철저히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3. 전개[편집]



3.1. 토비 소탕[편집]


1928년 7월 1일 담온강은 부하들에게 쑨뎬잉의 지시를 전달하고 지역 경찰서와 민단에게 연락해 토비들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주변의 정세를 살폈다. 당시 동릉 근처에는 봉천군벌의 패잔병, 국민혁명군 3군 휘하 사단, 마복전의 토비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담온강은 마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날 밤 마복전의 토비들이 황릉을 도굴하기 시작했다. 놀란 담온강은 15연대, 계현 민단, 서23보위대, 권총부대를 파견해서 토비들을 격퇴했다. 마복전은 중과부적으로 달아나 버렸고 담온강은 사로잡은 토비들을 총살하고 효수하여 석패루 앞에 내걸었다. 이어 쑨뎬잉은 토비를 막고 능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담온강과 유월정의 2개 부대를 동릉에 배치하고 능원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봉쇄하는 한편 능원 지구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알림. 마란욕에 토비들이 창궐해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고 강간에 살인까지 저질러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본 군단장은 지역민의 요청으로 특별히 군대를 파견하여 토비들과 일전을 벌였다. 용맹한 병사들 덕분으로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토비를 죽였고 사로잡은 일당 30여명도 군법에 회부하여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아직 잔당이 적지 않으므로 마을과 산속을 샅샅이 뒤져 이번 기회에 그들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 주민들은 토비가 은닉한 장소를 발견하거나 그에 관한 정보를 들으면 즉시 인근 부대로 신고해주기 바란다. 본 군단장은 머리를 자르고 입대한 이래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히 하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토비가 남아 있는 한 백성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없다. 본 군단장이 토비를 일망타진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토비 소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통지문의 내용을 서로 알려주기 바란다. 이상.
국민혁명군 제12군 군단장 쑨뎬잉
중화민국 17년 7월 3일

동릉을 완전히 장악한 쑨뎬잉 부대는 동릉의 폐허에 남은 금은과 쇠붙이를 수거하는 한편 토비의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100개 촌락을 뒤져 닥치는대로 물건을 빼앗았다.

3.2. 도굴 준비[편집]


그런데 동릉 인근에 혁명군 8군 7여단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군대가 나타나면서 쑨뎬잉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쑨뎬잉은 휘하에 담온강, 풍양전, 양랑선 등을 소집하여 도굴 시기에 대해 논했다. 담온강은 입안에 들어온 고기를 뱉을 수 없다는 이유로 즉시 도굴하자고 주장했으나 양랑선은 어디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어느 능에 보물이 제일 많은지, 제일 값진 보물은 어느 능에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도굴이 끝나는 대로 철수하면 토비와 지역 주민들이 드잡이를 할 것이니 죄를 토비들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쑨뎬잉과 풍양선, 담온강은 모두 양량선의 주장에 감탄하였으나 어느 무덤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상부의 명령 없이 철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양랑선은 예전에 능원을 지키던 묘지기들과 능묘의 공사를 맡은 기술자와 일꾼들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으니 이들을 족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며 서원천에게 뇌물을 주면서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소연하면 철수 허락을 맡는 것도 쉬울 것이라고 하였다. 양랑선은 효율적인 약탈을 위해 능묘 부장도까지 구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쑨뎬잉은 담온강에게 능묘 지하궁을 수색하게 하고 결과 여부와 상관없이 베이징의 서원천을 만나 철수 허락을 맡기로 하였다.

그날 밤 담온강은 10여명의 호위병과 함께 동릉을 뒤져 묘지기 노인 두명을 찾아냈다. 담온강은 묘지기들을 위협했으나 묘지기들은 순치제의 무덤은 텅텅 비었지만[1] 강희제, 건륭제, 서태후의 무덤은 그들의 위세에 걸맞게 값진 물건이 많다고 들었다는 썰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러자 담온강은 원대두 은화 두 닢을 주면서 묘지기들에게 지하궁 입구와 부장품을 잘 아는 사람을 알고 있지 않냐고 구슬렀다. 그러자 묘지기들은 낭중을 지낸 함풍제의 정릉지기 출신의 소필탈림이라는 자가 잘 알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담온강은 군사를 파견하여 소필탈림의 거처를 감시하게 하는 한편 계현의 쑨뎬잉 사령부로 돌아가 쑨뎬잉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양랑선 역시 서원천을 만나고 온 일을 보고하고 장제스군축을 실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렸다. 게다가 마복전이 달아나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토비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도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양랑선은 여기저기에 봉천군벌의 패잔병이 많으니 이들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라면서 조속히 도굴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날 오후 3시 쑨뎬잉은 긴급 장령회의를 소집하여 편견회의 소식을 전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을 모욕한 지가 근 300여년이다. 그들의 황릉을 무너뜨리는 것은 곧 한족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손중산이 만청의 운명을 바꾸고 풍옥상선통제운명을 바꿈으로써 산 자의 청나라는 이미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황릉을 무너뜨림으로써 죽은 자의 운명을 바꾸려고 한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어 혁명을 완수할 것이다."


이어 참모장 풍양전이 구체적으로 계획을 발표하여 담온강이 서태후릉을, 시운승이 건륭제릉을, 정발정이 강희제릉을 도굴하게 하고 유월정이 봉천군벌 패잔병 소탕을, 양명경이 능원의 경계를, 전손자유가 능묘 도굴 작업을 지원하게 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각 부대는 즉시 동릉으로 이동하여 동릉 주변 30리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3~5걸음마다 보초를 배치했다. 그리고 능원 사방에 따발총, 박격포 등 중화기를 두어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쑨뎬잉은 부하들이 보물을 빼돌릴 것에 대비해서 심복들을 각 부대에 투입했으며 능묘에서 나온 일체의 보물은 값어치를 막론하고 마신교의 임시사령부에 보내서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이 보물을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


3.3. 서태후릉 도굴[편집]


담온강은 먼저 소필탈림을 동릉으로 데려왔다. 난데없이 끌려온 소필탈림을 병사들은 국민혁명군 부사관 제복으로 갈아입히고 상사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소필탈림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담온강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늙은 여우 서태후에게 혁명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라면서 지하궁 입구를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소필탈림은 여전히 넋이 나가서 대답을 하지 못했고 이에 담온강은 협조한다면 섭섭치 않게 보물을 챙겨주겠다고 하였다. 청나라가 망한 후 가난하게 살던 소필탈림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명루 아래의 유리벽 앞쪽만 파면 된다고 즉시 지하궁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병사 수십명이 달려들어 유리벽 아래를 파기 시작했는데 단단한 석판이 나타나면서 더 이상 굴착이 불가능해졌다. 병사들이 괭이와 삽으로 철판을 두들겨댔지만 철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필탈림은 그것이 지하궁 입구를 막고 있는 '금강장'이라고 설명했고 공병대장 전손자유가 폭탄을 설치해서 금강장을 날려버렸다.

연기가 가라앉고 시야가 확보되자 쑨뎬잉은 20명의 병사를 지하궁으로 투입했다. 병사들은 2열 종대로 전진했는데 앞쪽 8명이 장총으로 무장했고 뒤의 12명은 도끼, 삽, 괭이,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경사로가 매우 가팔라서 병사들은 무릎을 반쯤 꿇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했다. 경사로 끝에 다다르자 대리석 대문이 앞을 막았는데 병사들이 힘껏 밀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수십분간의 실랑이 끝에 통나무를 구해서 문을 부수는데 성공했다. 몇걸음 후에 대리석 대문이 또 나타나자 전손자유는 그 대리석 대문도 부숴버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서태후의 관이 드러났는데 전손자유는 담온강의 지시를 받기 위해 지하궁에서 철수했다. 이때가 7월 9일 심야였다. 담온강은 즉시 관을 부수라고 지시했다.

다시 지하궁으로 들어온 전손자유는 도끼곡괭이로 서태후의 관을 박살내 버렸다. 바깥의 외곽과 내관이 부서지고 관이 드러났는데 공병들이 도끼로 관을 부수려고 하는 순간 담온강의 부관이 보물이 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저지했다. 병사들은 도끼와 총검으로 관에 구멍을 낸 후에 관뚜껑을 엎어버렸다. 관뚜껑이 열리자 서늘하고 음산한 회색 기체가 쏟아져나오자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연장을 떨어뜨리고 물러서야 했다. 서태후의 시신이 덤빌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던 병사들은 오줌까지 싸면서 패닉 상태가 되었고 전손자유와 유 부관은 시신이 덤벼들면 총으로 쏘면 그만이라고 다시 병사들에게 관뚜껑을 열라고 했다. 관을 열자 이번에는 매캐한 냄새만 나고 연기는 나지 않았다. 서태후의 시신은 살아 있는 듯했으나 잠시 후 외부의 공기를 쐬면서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이때 병사 한 명이 서태후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환영을 보고 기절해버렸다. 놀란 전손자유는 소총과 연장으로 관뚜껑을 막아버렸으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서태후의 시신을 바깥으로 던져 버리라고 했다. 그리고 서태후가 살아있다고 넋을 놓은 병사를 분풀이로 걷어차더니 그 병사를 서태후의 시신 위로 던져 버렸다. 이어 전손자유는 서태후 관곽에서 다음과 같은 보물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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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보물 중 배추 조각. 정식 명칭은 취옥백채(翠玉白菜). 현대에는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쏟아져나오는 보물들을 보고 병사들은 넋을 잃었으며 보석으로 만든 과일들이 쏟아져나올 때는 모두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유 부관이 엄청난 보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담온강과 쑨뎬잉에게 보고했고 상자에 보물을 담아 쑨뎬잉에게 보여주었다. 쑨뎬잉은 군수처장 이덕록, 부관 유씨, 그리고 호위병 2명을 제외한 병사들은 더 이상 지하궁에 출입할 수 없다고 명령하고 조심스럽게 보물을 꺼내 오게 했다. 잠시 후 양랑선이 자희릉 부장도를 가져왔는데 서태후가 자랑하던 진주 팔찌가 없다고 지적했다. 병사들이 관을 치워버리자 보물이 더 숨겨진 우물이 드러났고 밑에서 18할의 진주가 박힌 팔찌, 옥 여의, 산호 염주, 금불, 옥불, 황금 상감 주전자, 옥잔, 벽옥 노리개, 황금 팔찌 등 진귀한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지하궁에서 쏟아져나온 보물을 보고 흥분한 쑨뎬잉과 담온강은 직접 내려가서 지하궁을 살폈다. 쑨뎬잉은 정신을 잃은 병사를 보고 '저놈은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고 유 부관과 이덕록이 '서태후가 살아있는 줄 알고 미쳐버린 병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쑨뎬잉은 미친놈이라고 욕하면서 병사를 걷어찼는데 병사가 서태후의 시체 위로 쓰러지면서 서태후의 입에서 강력한 쪽색 빛깣이 뿜어져나왔다. 빛이 워낙 영롱하여 지하궁 전체를 비추고 30걸음 바깥까지 환하게 했다. 놀란 유 부관이 빛의 정체가 야명주라고 소리쳤고 담온강이 흥분하여 그런 귀한 물건을 죽은 할멈에게 맡길 순 없다고 유 부관에게 서태후의 입에서 야명주를 꺼내라고 지시했다. 유 부관이 손가락을 집어넣자 야명주는 식도로 굴러들어갔는데 유 부관은 다급한 마음에 초검을 가져와서 서태후의 입 안으로 쑤셔넣고 목구멍까지 찢어버렸다. 유 부관은 서태후의 시신을 넋나간 병사의 등 위에 올린 후 서태후의 머리를 잡고 수차례 후려쳤다. 그러자 달걀만한 야명주가 서태후의 입에서 떨어졌고 지하궁 안이 다시 환해졌다.

3.4. 건륭제릉 도굴[편집]


건륭제릉도 마찬가지로 털렸는데 건륭제와 같이 묻혀 있던 2명의 황후와 2명의 황귀비 중 효의순황후(가경제의 생모) 위가씨의 시체는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4. 결과[편집]


도굴 소식이 전해지자 경진위수사령관 옌시산톈진경비사령관 푸쭤이를 파견하여 동릉을 보존하게 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게 했다. 이후 쑨뎬잉의 부하 담온강이 체포되면서 범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한 쑨뎬잉은 옌시산, 진군 총참모장 주수광, 베이핑 시장 하기공, 허베이성 정부주석 상진 등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면서 자신이 무죄라고 로비하였다. 이에 옌시산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군대가 대규모 도굴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싫고 청나라도 그다지 좋지 않은 판에 담온강을 석방시켜 주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과 유신들이 들고 일어나고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이 일은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결국 쑨뎬잉의 탈영병인 장기후가 칭다오에서 체포되어 자초지종을 고변하면서 쑨뎬잉과 부하들을 재판정에 서게 되었으나 막대한 뇌물을 사방에 뿌려서 도굴을 한게 아니라 사실 비적들이 도굴을 하고 남은 것을 주운 것이라고 얼렁뚱땅 넘어가게 되었다.

이 두 건의 도굴로 인해 청나라 황제였던 선통제는 국민당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어 등을 돌렸고 일본에 협조하여 1931년 천진사변을 계기로 만주행을 택해 괴뢰국만주국의 황제가 되었다.


5. 매체에서[편집]


마지막 황제에서 카와시마 요시코의 입으로 언급된다. 문수가 떠나 충격을 받은 상태였던 선통제가 일본에 붙는 계기가 된다.


6. 참고 문헌[편집]


  •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 웨난, 돌베개.
  • 구룡배의 전설 1,2권, 웨난, 일빛.
  • 황제에서 시민으로 상권, 선통제, 문학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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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치제가 천연두로 죽고 아끼던 후궁이 출가해서 무덤에 신발과 부채밖에 없다는 야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