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스라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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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독일인 탄압
2.2. 손해배상 협정
2.3. 불편한 공존
2.4. 21세기
3. 문화 교류
4. 교통 교류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독일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독일인 탄압[편집]


유대인 대학살의 정보를 입수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민정청과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맞이한 프랑스 공화국의 선례를 본받아 나치 독일에 속한 자연인법인들의 동산부동산적산으로 선언했으니, 영국과 이슈브가 즉시 국유화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은 멸망했고, 유대인 대학살의 피해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의 절대 다수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하거나 미국영국프랑스에 앞다투어 이민하기 시작했다.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전쟁을 맞이한 유대인 공동체들은 이슈브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여 이스라엘 임시정부를 출범했는데, 그들은 영국이 석방한 독일인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여 아랍인들과 함께 즉결처분했고,[1] 1948년 8월 18일부터 1948년 10월 1일까지 화폐개혁[2] 단행하면서 약590억 파운드를 약2700만 파운드로 교환했으니, 이스라엘 본토의 도매물가 인하를 촉진하면서 이스라엘 적대국들의 도매물가 폭등을 도모했으며, 가상적국에 속한[3] 외국인들의 동산을 하루아침에 알거지로 만들어버렸다. 곧이어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드루즈인베두인체르케스인)이 직선으로 뽑은 이스라엘 국회가 긴급방위율령부재자재산법침투방지법을 입법하자, 이스라엘 경찰신 베트이스라엘 방위군헌병대군사정보국불법체류자반동분자제5열(아랍인아르메니아인독일인오스트리아인)을 체포했는데, 그들의 부동산을 모두 접수한 유대 민족 기금[4] 농장목장에 대하여 토지개혁실행하는 한편으로 주택공장에 대하여 적산불하실행하는 방식으로 경제민주화(?)를 실천했으니, 떡고물을 넉넉하게 얻어먹은 이스라엘 국민들 가운데 마르틴 부버에드워드 사이드의 집을 불하받은 일화는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2.2. 손해배상 협정[편집]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이스라엘은 동독과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비해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1960년대 이후의 모습이고, 1950년대의 동독과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힘없는 약소국이었다. 주권을 되찾은 동서독 양국은 군대가 없었고, 미국과 프랑스 및 영국과 소련은 총칼의 힘으로 내정간섭을 자행했으며, 동독과 서독에서 독일인 노동자는 저임금으로 먹고 사는 처지였으며, 외교정책도 남유럽남아메리카북아프리카서아시아에서 미래를 개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는 1945년부터 1955년까지 연합국의 점령지였고, 이스라엘국의 높으신 분들표리부동한 오스트리아 자치정부를 철저하게 푸대접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에 중립국으로 분리독립했지만, 연합국들의 집요한 압력에 굴복하면서 20세기 내내 외세가 파견한 간첩을 1명도 못 잡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외교, 군사, 경제의 측면에서 리즈시절을 맞이했는데, 1948년 5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파나마,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우루과이, 남아프리카 연방,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헝가리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프랑스, 쿠바, 스위스,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이스라엘국의 주권을 승인했으며, 이스라엘국의 외교사절단은 1949년에 유엔 총회원년 멤버로 가입했으니, 외교무대의 겹경사였다. 게다가 동유럽체코슬로바키아서유럽프랑스와 공수동맹을 체결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둘러 빠르게 양성한 이스라엘 방위군은 최소한 서독의 절반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가 있는 무력을 갖췄다.

국민경제의 측면에서도 독일어권 나라들보다 꽤 잘 살기는 했다. 1948년 시점에서 이스라엘 파운드의 실질 가치는 파운드 블록에 힘입어 이스라엘 1파운드=영국 1파운드=미국 10달러=서독 100마르크=동독 100마르크였으니, 동서독 양국과 이스라엘 본토에서 공장 직공의 최초 일당은 1마르크~10마르크(동독과 서독) VS 1리라~10리라(이스라엘)의 구도를 형성했다. 이스라엘 리라는 영국돈과 등가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선진국의 외환시장에서 외화(파운드 스털링, 미국 달러, 스위스 프랑)로 교환했고, 이스라엘 국채는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해외동포 유대인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많이많이 팔렸으며, 미국수출입은행에서 거액의 저리차관을 빌릴 수가 있었다. 당연히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및 북유럽과 서유럽을 겨냥한 이스라엘 법인들의 무역로는 독일어권 나라들을 일부러 피하고, 친이스라엘 우방국들만 지나가는 항로(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터키↔이스라엘)를 마르고 닳도록 잘 써먹었다.

그런데 1950년대의 이스라엘은 농림어업이든 상공광업이든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중진국이었다. 당대에는 오래 전부터 넉넉하게 비축한 이스라엘국의 외화보유고를 밑천으로 삼아 파운드화를 최대한도로 찍어내서 지불했는데, 스털링 잔고를 활용한 통제경제산물이었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이스라엘 재무부와 이스라엘은행(이스라엘국의 중앙은행)은 화폐정책을 변경하면서 이스라엘 리라의 안정화를 도모했는데, 처음에는 통일환율(영국돈과 등가교환)을 유지했지만, 한참 뒤에 복수환율로[5] 변경했으며, 영국돈의 실질 가치가 연속으로 하락하는(£1=$10→$5→$2→$1) 현실을 반영하여 평가절하(파운드 스털링과 등가교환→미국 달러와 등가교환→프랑스 프랑과 등가교환)를 연속으로 실행했다.

그래서 초창기의 이스라엘은 동독이든 서독이든 오스트리아든 상관없이 독일인들을 푸대접했다. 예를 들어 서독과 이스라엘의 무역과 교류는 1950년대의 전반기까지 전혀 없었는데, 극소수의 서독 국민들과 이스라엘 국민들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터키를 경유하여 서독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으니, 1950년대의 전반기에 이스라엘 본토를 최초로 방문한 서독 국민은 헤르만 마스[6] 유일했다. 동서독 양국을 방문한 이스라엘 국민들은 동서독 양국에 입국하여 머무르는 해외동포 유대인들을 최대한 빨리 탈출로 시켜 미국과 브라질 및 프랑스와 이스라엘로 보내기 위해서 친이스라엘 우방국들의 여권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입국한 이스라엘 유대인 관리청공작원들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일꾼들만 방문한게 고작이었다. 이들은 연합군 군정청들과 협력하면서 연합군 군정청들의 내정간섭을 요청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동독과 서독을 다스리는 자치주정부자치경찰청을 찍어눌렀는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에 깊이 관여한 독일인들이 자치주정부와 자치경찰청에서 워낙 많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 공포에 시달리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1950년대의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국의 외화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에 이르렀다.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유대인들이 탈출하여 이스라엘국에 귀순했으니,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기 위해서 복지비의 지출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친이스라엘 우방국들의 해외동포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호소하면서 이스라엘 국채를 대량으로 매각했지만,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가장 빨리 해소하는 최상의 대책은 외국의 무상원조로 조달하는 거액의 외환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국의 중앙정부는 동독과 서독에 손해배상을 정식으로 요구했는데, 만약에 대비해 동서독 양국을 둘러싼 동맹국들(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과 해외동포 유대인 공동체들을 움직였으니, 반이스라엘을 표방하겠다면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손발이 다 묶인 서독 연방정부는 관광이든 무역이든 금융이든 차질이 생겨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마침내 아데나워 연방총리가 서독 연방의회의 석상에서 유대인 학살을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협상의 시작을 뜻했다. 양국을 대표한 밀사들이 독일 본프랑스 파리를 왕복했다.

서독과 이스라엘의 협상은 룩셈부르크에서 차관급 회담으로 진행했다. 마침내 1952년 룩셈부르크에서 배상 협정을 체결하여 나치 독일 정권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약속하였다. 서독-이스라엘 배상협정은 서독 연방정부가 자국 화폐(서독 마르크화)를 약 10년간 분할하여 입금하는 방식으로 독일연방은행의 특정 계좌에 예금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그것을 인출해 독일산 공산품들과 반이스라엘 적대국들의 원유를 수입하고, 사전에 예약한 이스라엘 기업들에게 매각하면서 자국 화폐(이스라엘 파운드화)를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마르크화 현금을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에게 매우 유리한 특별환율로 계산하여 리라화 연금으로 지급했다.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 가운데 동유럽을 벗어나 서유럽에서 재정착한 유대인들과 북아프리카에서 탈출하여 이스라엘국에 귀순한 유대인들이 받아야 마땅한 몫으로 플러스알파 배상금(마르크화 현금→서독 공산품→파운드화 현금)을 10년에 1회꼴로 지급했다.


2.3. 불편한 공존[편집]


서독-이스라엘 배상협정의 발효와 동시에 이스라엘 정부는 독일 자연인들의 통제된 여행을 허용하면서 이스라엘 법인들의 통제된 무역을 허용했지만, 나치 독일을 여전히 추종하는 반이스라엘 세력들이 서독의 전역에서 강성했기 때문에 수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1965년 서독과 이스라엘은 마침내 수교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류는 최소한도로 유지했으며, 이스라엘 시민사회의 반독일 여론은 둘째치고 서독의 정계와 재계는 반이스라엘을 표방하는 나치 독일의 추종자들이 아직도 엄청나게 많아서 서독과 이스라엘의 외교는 1980년대까지 냉랭했다. 이런 탓에 이스라엘 본토를 방문한 동독 국민들과 서독 국민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수상한 행동은 밀고되거나 감청되었다. 동서독 양국을 방문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사전 교육을 받은 다음에 출국했으며, 동서독 양국을 방문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평범한 일반인은 거의 없었고,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과 정보기관원 및 학자들과 신문기자와 무역상사원처럼 공무출장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서독과 이스라엘의 외교가 잘 되던 시절은 콘라드 아데나워 정권과 빌리 브란트 정권 시절이었다.

한편 동독은 서독과 이스라엘의 배상협정 체결에 깜짝 놀라 이스라엘과 접촉했지만, 소련의 강력한 압력으로 부득이하게 중지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동독은 외교무대에서 서독과 경쟁하기로 마음먹었고, 반이스라엘을 표방한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이슬람권 나라들과 수교하면서 PLO와 손잡기로 마음먹었다. 1970년대에는 서독과의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변경했으니, 동독 정부는 자국에서 거주하는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에게 특별연금을 지급했다. 1980년대에는 아라파트와 끈끈한 관계를 다짐했으니 동독 건국 40돌 축하행사에 고르바초프야루젤스키아라파트를 초청했다. 1990년에 들어선 동독의 로타르 데메지에르 정권은 이스라엘에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동독 정부가 손해배상 협상에 대하여 이제 막 논의를 시작한 마당에 갑자기 화폐개혁(동독 1마르크=서독 1마르크)을 진행했으니, 동독 정부에 사망 선고가 내려진 꼴이라 손해배상을 포함한 모든 외교정책들을 종결하는 절차만 남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통일 독일을 대표하는 독일 연방정부가 서독-이스라엘 배상협정의 플러스알파 배상금으로 지급하면서 마무리했다.

동서독 양국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서독과 이스라엘의 외교관계를 통일독일이 계승했는데, 6자 회담[7]을 개최하여 통일 주권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논하게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과 프랑스를 로비로 움직여서 동서독 양국과 통일 독일의 이스라엘에 대한 최고위층의 사죄를 요구했으며 독일 국민이든 외국 국민이든 반이스라엘 언동은 강력한 탄압을 요구하여 기어코 관철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사죄하는 독일 정치인들의 모습은 생각보다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1950년대 한정으로 대단히 유리한 환경을 최대한 활용한 덕택에 경제제재와 무력시위를 실행하는 오늘날의 러시아와 중국처럼 힘으로 찍어눌러 관철한 것이지 한국인들의 말마따나 무슨 도덕 윤리를 중시해서 사죄받고 배상받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2.4. 21세기[편집]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양국 간에서 화해로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의 교류와 협력은 2000년대 이후로 늘어나고 있다.

2015년 5월 11일, 이스라엘은 독일로부터 초계함정 4척을 구매하기로 했다.#

2022년 1월 27일, 독일을 방문한 이스라엘의 미키 레비 국회의장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기억은 모든 세대의 책임이라며 밝혔다.#

3월 1일에 숄츠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9월 5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뮌헨 올림픽 참사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사과했다.#

3. 문화 교류[편집]


그리고 양국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며 독일인들이 이스라엘로 관광하러 자주 오고 있다.


4. 교통 교류[편집]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이 존재한다. 그리고 양국은 무비자협정을 체결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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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임시정부의 비유대인 소탕작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일란 파페 박사베스트셀러(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시군구 도서관과 대학교 도서관에 직접 찾아가 빌려 읽을 것.[2] 팔레스타인 1파운드(영국돈과 등가교환) = 이스라엘 1파운드(영국돈과 등가교환) [3] 동독서독오스트리아아랍연맹의 회원국들과 프랑코 정권[4] 이스라엘 본토의 나무심기 운동을 거국적으로 실천하면서 휴양림국립공원키부츠토지를 관리하는 재단법인 관변단체다.[5] 예를 들어 통일환율 체제에서 1파운드=1파운드=5달러인데, 복수환율 체제에서 수출입 방면은 수입전용 1파운드=1파운드 및 수출전용 1파운드=1달러로 규정하며, 출입국 방면은 입국전용 1파운드=1파운드 및 출국전용 1파운드=1달러로 규정하는 방식[6] 나치 독일유럽 대륙을 제패한 시절에 유대인들을 해외로 피신시켰던 개신교 목사였는데, 나중에 야드 바솀에서 열방의 의인으로 기념했다. [7] 동독서독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