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삼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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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방식


1. 개요[편집]


독서삼품과()는 통일신라 원성왕 때부터 국학에서 시행한 공무원 시험이다. 다만 이건 선발 시험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격 시험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졸업자가 대나마, 혹은 나마 관등을 얻는 걸로 되어 있는데 4두품은 절대 결코 나마 관등을 얻을 수 없었기에, 5두품 이상 자제만 입학할 수 있었던 걸로 보인다.
5경, 3사, 제자백가에 모두 능통한 자는 3등급으로 나누어 등용하였다.

2. 배경[편집]


삼국 시대의 신라는 주변국들과의 계속되는 전쟁 탓에 무예를 우선시하였으나, 삼국통일 후 전쟁이 거의 사라져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성골, 진골) 계통을 견제하고자, 학문적 소양도 없는 자가 진골이란 이유만으로 높은 관직에 취임하는 걸 막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하였다.

독서삼품과를 수료한 자는 나마, 우수자는 대나마 관등을 얻는 제도였는데, 일단 이 독서삼품과 수료자를 문적이 있는 자로 일컫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즉 진골이라 하더라도 독서삼품과를 수료하지 못하는 자는 나마보다 높은 관등을 얻을 수가 없어, 오늘날 1급 공무원(일명 차관보)에 해당하는 대사 직책 이상은 결코 얻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차관보 바로 아래 자리 정도면 꽤 높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독서삼품과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진골 자제라는 이유만으로 높은 자리로 죽죽 올라가던 관행에 나름 큰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뜻이었고, 이 제도 아래에서 열심히 분발한 건 다름아닌 6두품, 5두품 자제들이었다.

이 시험은 국학의 졸업생들이 치는 것이었다.[1]

시행 이전까지 신라는 골품제에 따라 타고난 혈통이 있어야 관리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었고, 앞서 진흥왕 때부터 화랑제도 정비를 통해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공동생활을 거친 후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는 시스템을 일정 정도 갖추어 놓았지만 앞서 중국에서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이 그랬듯 검증 과정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는 천거제도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중국수나라, 당나라부터 시험을 쳐서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시행되어 왔고,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통일 신라에서 시행했던 제도였으나, 완강한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적 한계에 좌절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고려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과거의 초보적 단계라고 부를 수 있으며 진골 귀족의 관료 독점을 대단히 완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 독서삼품과는 결코 유명무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라삼최처럼 당나라 유학가서 빈공과에 응시해 벼슬 해온 이들에게, 독서삼품과 수료생들과 같은 대우 해주는 것에 대해 대단한 이의가 제기되었을 정도. 한편 유학파 이외에도 전통적 인재 등용 제도였던 화랑 제도 역시 통일 이전처럼 여전히 남아있었고 예전처럼 화랑도 공동생활을 통해 인재를 천거하는 것도 계속되었으나, 이런 사람들은 '문적' 있는 사람을 우선하는 풍조가 확실히 잡힌 원성왕 때 이후엔 대사 이상 직급에는 오를 수가 없게 되어 독서삼품과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어도 알 수 있듯 대사 바로 직책인 사지(舍知)도 대단히 높은 데 이건 현대 한국 기준으로 하면 중앙 관서 국장급이다. 조선 시대 때는 아무리 대가집 자제라하더라도 학문적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과거 시험 급제를 해내지 못하면 9품관도 정말 하기 힘들어 별볼일 없는 미관말직으로 빠지는 길 밖엔 없었으나, 신라 시대에 비슷한 환경에 처한 진골 자제들은 적어도 2급 공무원 직책까진 합법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제도의 도입은 자체로 큰 효과를 거두었고 광종의 과거제 도입 이전에는 이름만 바꾸어 태봉과 고려가 여전히 답습했던 걸로 보이지만, 그 후에도 신라의 관리 등용 관행이 진골 위주였던 건 변하지 않았다.

3. 방식[편집]


유교 경전으로 시험을 쳐서 단순히 성적을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눠 관리 임용에 참고하는 방식이었다. 원성왕의 의도는 수문제과거 제도를 했던 것처럼 성적순대로 관리 임용을 하고 성적순대로 직급을 배치하는 작업에 직접 도입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공부머리가 딸려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진골 자제들을 고위 직책에서 배제한 정도 효과에서 멈추고 말았다. 원성왕은 진골들이 기세등등한 현실에서 최대한 노력한 것이기에 이걸 갖고 그를 비판할 순 없지만, 후기 통일신라가 처한 진골 편향적인 현실이 정말이지 임금들 입장에서 극복하기 어려웠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시험 과목: 2~3가지 경전을 읽기만 하면 중품까지되고, 5가지 경전에 능통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여기서 '읽은'의 경우 정확하게 암송을 하는 것이다. 당시 유학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훈고학이었다. 따라서 사서삼경을 완전히 입으로 외워야 하는 것이다. 특품 정도면 신라 전체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암송왕이다.
특품: 오경(五經:《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삼사(三史:《사기》·《한서》·《후한서》)·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에 모두 능통한 사람
상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예기(禮記)》·《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효경》에도 밝은 사람
중품: 《곡례》·《논어》·《효경(孝經)》을 읽은 사람
하품: 《곡례(曲禮)》·《효경》을 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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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독서삼품과가 국학 졸업생만 대상으로 하는 졸업시험이 아니라는 설도 존재한다. 국학에서 배우는 과목과 독서삼품과의 시험과목이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