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즈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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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오사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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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이스너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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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북미판 국제작품[1]
제16회
(2003년)


제17회
(2004년)


제18회
(2005년)

제리 크람스키, 로렌조 마토티
(지킬 박사와 하이드)

데즈카 오사무
(붓다 Vol. 1-2)


데즈키 오사무
(붓다 Vol. 3-4)

제17회
(2004년)


제18회
(2005년)


제19회
(2006년)

데즈카 오사무
(붓다 Vol. 1-2)

데즈카 오사무
(붓다 Vol. 3-4)


조안 스파르
(랍비의 고양이)
최우수 북미판 국제작품 - 일본
제21회
(2008년)


제22회
(2009년)


제23회
(2010년)

마츠모토 타이요
(철콘 근크리트)

데즈카 오사무
(도로로)


다쓰미 요시히로
(극화표류)
최우수 북미판 국제작품 - 아시아
제26회
(2013년)


제27회
(2014년)


제28회
(2015년)

우라사와 나오키
(20세기 소년)

데즈카 오사무
(지저국의 괴인)


미즈키 시게루
(코믹 쇼와 역사 1939-1944, 1944-1953)





{{{#white 데즈카 오사무
(
(づか(おさ( | Osamu Tezuka[1]

파일:top_img1.jpg

본명
데즈카 오사무 (((づか (おさむ)
출생
1928년 11월 3일
일본 제국 오사카부 도요나카시
사망
1989년 2월 9일 (향년 60세)
일본국 도쿄도 치요다구 코지마치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직업
만화가, 애니메이션 감독, 의사, 기업인
수훈
서보중수장 (1989년 사후 추서)
서명
파일:데즈카 오사무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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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오사카제국대학 (부속 임시의학전문부 / 졸업)
나라현립의과대학 (의학박사)
배우자
데즈카 에츠코 (1959년 결혼)
자녀
슬하 1남 2녀
데뷔
마아짱의 일기장 (1946년)
장르
소년만화
순정만화
청년만화
활동 기간
1946년 1988년
묘소
도쿄도 토시마구 스가모5초메 32 소젠지(総禅寺)


1. 개요
3. 작품과 스타일
3.1.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시초
4. 데즈카 오사무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저임금의 원인이라는 설에 대한 고찰
4.1. 발단
4.2. 진실
4.3. 다른 이야기
6. 어록
7. 작품 목록
8. 여담과 비화
9. 관련 인물
10. 관련 문서
11.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일본만화가이자 데즈카 프로덕션을 창업한 기업인, 애니메이션 감독. 일본 만화 역사의 초창기부터 활동했고, 일본 만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아 전후 일본 대중문화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데즈카 오사무/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작품과 스타일[편집]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거의 맥이 끊어진 일본 만화를 전후에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다. 당시 개그 위주인 4컷 만화, 신문 만평이 주류였던 만화 장르를 잡지에 매회 연결된 연작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스토리 만화'라는 장르를 확립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린이가 읽는 만화에 비극을 최초로 집어놓은 인물로도 평가받기도 하다.

일본 만화계에 어시스턴트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는 만화는 미술 화가의 작품과 같다는 인식이 있어서, 만화가 혼자서 스토리를 짜고 인물이며 배경까지 다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이 감히 작품에 손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데즈카 오사무는 워낙 인기가 많고 데즈카 본인이 연재 의뢰를 거절하지 못해서 한 달에 연재해야 할 작품 갯수가 10편이 넘었다. 당연히 데즈카 오사무 혼자서 이것을 다 그릴 시간이 없다 보니, 데즈카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토키와 장 멤버)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화실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었다. 어시스턴트는 배경을 그리고 먹물로 검게 칠하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다만 인물 캐릭터만은 데즈카가 직접 그렸다. 1954년에는 데즈카 오사무가 지방에 살고 있던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시노모리 쇼타로를 불러서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시노모리가 데즈카가 부재한 상황에서 연필로 구상한 콘티를 들고가서 캐릭터까지 그려버리자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그린 에피소드도 있다. 이후, 사이토 타카오는 아예 스토리 전담팀과 작화팀을 따로 두고, 작화도 인물, 소품, 배경 담당이 각각 따로 있는 영화사의 프로덕션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2]
거슬러 올라가면 데즈카는 의전을 졸업하고 의사 시험에 합격해서 면허를 따고 인턴으로 병원에서 일할 때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병원의 숙직실에서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간호사를 꼬셔서 만화 그리는 일을 도와주면 댄스홀에 놀러갈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숙직실로 불러서 지우개로 연필 스케치 밑선을 지우는 일 등을 시켰다고 한다. 이게 들켜서 선배인 의사 높으신 분한테 "보니까, 자네는 사람을 죽이는 의사가 될 것 같으니까 의사 일을 당장 때려치라"고 혼줄이 났다고 한다.

항상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아서 어떤 새로운 물건을 보면 꼬치꼬치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들보다 먼저 해냈다.' '일본 최초' 이런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는 것을 좋아해서 '일본 최초' TVA 연속극 철완 아톰을 제작한 것도 이런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데즈카 오사무 자신은 디즈니[3]땡땡과 같은 서양 애니메이션/만화 작품들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서양의 것과는 구별되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만의 연출과 작법을 도출했다는 점과 그것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깊다. 서구권에서도 일본의 것을 망가아니메란 단어로 구별하며, 이를 연구할 때 항상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이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들이다.

진지한 극화는 물론, SF 만화, 추리 만화, 학습만화, 개그만화, 순정만화, 심지어 상업지까지 현재 일본 만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또 그 모든 분야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거장. 철완 아톰, 정글대제, 블랙 잭 등의 명작을 수없이 남겼다. 특히 그 자신이 의사였기 때문에 블랙잭의 디테일한 수술 묘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살면서 그의 커리어에 모든 장르는 다 해봤고, 그 장르에서 정점에 이른 작품을 냈기에 "만화의 신"이라는 호칭이 붙은 듯 하다.[4]

유일하게 취약했던 분야가 스포츠 만화. 특히 카지와라 잇키로 대표되는 소위 열혈 근성 스포츠 만화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런 만화의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건지 누가 제발 설명 좀 해줘!'라며 답답해하며 심지어 눈물까지 보였다는 루머가 전해진다.[5] 스포츠 만화를 안 그렸을 뿐이지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며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톰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전신인 산케이 아톰즈의 마스코트였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마스코트로 사용했던 백사자는 정글대제의 레오다.[6]

아톰이나 정글대제 레오 등과 그의 그림체 때문에 아동 만화나 그런 쪽을 자주 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톰도 의외로 어두운 면이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아돌프에게 고한다 같은 심각한 분위기의 작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MW, 아야코(만화) 같은 작품을 보면 살인, 시체유기, 수간, 근친애 등 충격적이고 어두운 소재도 안 나오는 법이 없다. 이런 계열을 블랙 오사무라고 부른다. '일본 만화는 데즈카 오사무에게서 꿈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고, 나가이 고에게서는 특유의 성적 개방성과 폭력성을 배웠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면을 보면 성적 개방성과 폭력성에 데즈카가 기여한 바도 있다. 그리고 불새(만화), 붓다(만화) 등의 작품은 소재부터 생명이나 죽음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내용도 어린이용이라 보기 어렵다.[7]

거기다가 리본의 기사(사파이어 왕자)나 도로로에서는 남장여자 캐릭터들도 적극 사용하며 블랙 잭에서는 네코미미를 연상시키는 캐릭터[8]를 등장시킨다거나 로리처럼 보이나 실은 성인인 캐릭터(피노코)를 최초로 제시해 보이는 등 몇몇 모에 장르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죽은 후에, 작업실 책상 서랍에서는 여성의 에로틱한 포즈의 나체 스케치 등의 그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명한 만화들을 많이 만들어냈지만 범작 역시 많았다. 특히 1960년대 말, 데즈카 만화가 재미없다는 어린이들의 말도 많았고 무시 프로덕션의 부도로 1970년대는 데즈카 오사무에게 있어서 굉장히 힘든 나날들이었다. 딱히 내용이 재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극화체 그림이 유행하면서, 데즈카의 동글동글한 만화체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구닥다리 스타일로 인식되어 인기가 급락한 것이다. 이런 그에게 출판사에서 유행하는 극화풍 스타일로 그려달라고 주문해서, 1973년 11월 주간 소년 챔피언에 내본 실험적인 단편이 큰 성공을 거두어 장편화되는데 그게 바로 블랙 잭이다. 이 만화로 데즈카는 슬럼프에서 벗어나서 재기에 성공했다.

1970년대 중후반 당시에는 혁신자유연합이라는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는데 데즈카 오사무는 공산당원인 미야자키 하야오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진보적인 정치 스탠스를 가졌음을 알수있다.

그런만큼 인간 곤충기에서는 과거 일제의 주요인물과 동행하던 주인공이 한국의 요원들에게 자신은 전후 태생이니 죄가 없다고 하자 "몇 년도에 태어났든 간에!"라고 일갈한다거나(#) 세 눈이 간다에서 비슷한 대사를 한 인물에게 원주민의 유령이 "모른다고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재일교포가 주인공인 <긴 땅굴>@[9]이란 작품도 있을 정도로 깨어있던 인물. 긴 구멍의 경우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다른 스타일의 연출이 사용되기도 했다. 한편으론 블랙잭의 '박선장' 에피소드에서는 70년대 당시 한국의 독재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


3.1.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시초[편집]


오늘날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부분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 잡지에서 연재되는 만화가 인기를 얻어 애니메이션화되고 관련 캐릭터 상품의 판매로 수익을 얻는 구조는 데즈카 오사무가 시작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 대상의 하이타겟의 애니메이션을 최초로 시도한 것도 데즈카 오사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위 아니메라마(아니메+드라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69년에 개봉된 '천일야화'는 69년 일본 박스 오피스 5위에 들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이어서 '클레오파트라'와 '슬픔의 벨라돈나'도 만들었다.

데즈카 오사무 콘티의 철완 아톰 (1980) 1화. 잘 만들었는데 편집이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연출 및 감독을 직접 하기도 했는데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전혀 다른 영역이란 걸 실감하고 몇 번 하고 그만두었다. 그가 연출까지 담당했던 에피소드를 보면 명성에 비해서 참담하다. 표정과 동작은 만화처럼 매우 풍부하고 자연스럽게 잘 그리고 액션도 잘 하는데 장면과 장면이 그냥 휙휙 넘어간다. 만화는 장면과 장면 사이를 상상력으로 메꾸지만 애니는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위해선 움직임을 넣어주거나 장면 전환 이펙트를 넣는 등 궁리를 해야되는데 이걸 전혀 안 한다. 린 타로는 데즈카 오사무의 이런 버릇 때문에 영화 편집에서 쓰이는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 개념을 애니메이션에 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직원들이 이러는 걸 보면 배워서 따라할 법도 한데 그 후로도 전혀 안 한다. 이쪽으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 이후로는 스기이 기사부로, 토미노 요시유키, 린 타로, 데자키 오사무 같은 후배 직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하지만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도 힘이 넘치는 연출 기법을 만들어내는 업적을 남겼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사용한 리미티드 기법의 응용을 극대화한 것이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의 1초당 컷의 프레임(24~30)에서 하프 프레임(12~16)을 도입한 것. 사실 그것도 많이써야 하프 프레임이고 실제 무시 프로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은 4~8프레임 밖에 쓰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프레임 수가 적으므로 화면이 휙휙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져 디테일한 묘사는 불가능하지만 반면 속도감이나 박진감 같은 묘사는 기존 애니메이션보다 뛰어나게 된다. 아톰의 실질적인 감독이었던 스기이 기사부로 말로는 이러한 작화 매수 줄이기 연출은 데즈카 오사무가 시조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 토에이 동화에서도 TV용 애니메이션을 시도할 생각은 있는데 그 제작비 때문에 주저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는 그래서 애니메이션도 아니라고 '테레비 망가'라고 조롱받은 그림 연극 수준의 작품을 만들었다. 다만 그림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만화 연출을 대거 도입했고 제작 중에 토미노 요시유키, 린 타로와 같은 연출력 있는 신인 연출가와 애니메이터를 대거 영입해서 방영 중에 품질이 높아졌다. 그래서 작화와 움직임보다는 연출을 중시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또 하나의 트랜드를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본디 데즈카 오사무는 월트 디즈니의 열혈팬이라서 제대로 된 24프레임 풀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풀 애니메이션이 뭔지 개념 파악을 못했다. 그저 프레임만 많이 넣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가 명성을 얻은 뒤에 나온 애니메이션은 투자금을 많이 받아 프레임을 많이 넣었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되었다. 그가 감독한 풀애니메이션 불새 2772 사랑의 코스모존은 동화만 1초에 24장을 그려넣으면 되는 줄 알고 인물이 가만히 서있는데도 부들부들 떠는 기괴한 작품을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일본 아니메의 특유의 기법은 데즈카 오사무 이후의 후배 애니메이터들이 개발한 것으로 데즈카 오사무가 아니메의 연출이나 기술 발전에 공헌한 것은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연출은 일본 애니메이션 발전사에 도움이 안 되고 자신이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도 돈 문제로 본의 아니게 만들었던 저예산 리미티드 기법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때문에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유일의 만화의 신이라는 칭호는 얻었지만 애니메이션의 신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했다.[10]

4. 데즈카 오사무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저임금의 원인이라는 설에 대한 고찰[편집]


일본에서도 데즈카 오사무의 팬들이 주장하는 데즈카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짓 루머 헛소문이라는 주장과 애니메이션 팬들의 주장이 충돌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통적인 의견은 데즈카가 전적으로 모든 문제의 원흉이거나 데즈카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식의 그런 극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데즈카가 지금의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가 열악한 노동 환경이 된 데에는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 참고영상: 데즈카 오사무가 비판받는 이유를 설명하는 유튜브 영상

데즈카 오사무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만성적인 저임금을 유발했다는 루머가 기정 사실처럼 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데즈카는 오히려 임금을 다른 회사보다 더 많이 줬던 사람이다.

그 당시는 숙련된 애니메이션 기술자가 부족한 시절이라서 윗돈을 주고 스카웃을 해오는 상황이었다. 데즈카 오사무가 비판받는 이유는 자신의 회사였던 사원들한테 임금을 적게 줘서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TV 시장을 철완 아톰같은 저예산 리미티드 테레비 망가로 만들어서, 그게 표준이 되고 저예산으로 만들려다보니 작화 기술이 없는 초보 애니메이터 동화맨은 1장당 얼마씩 받는 비정규직 4대 보험도 없는 아르바이트같은 저임금 막노동자가 되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계속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만드는 최초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 참고글@그리고 데즈카가 창립한 무시 프로덕션은 그가 도입한 제작비를 스폰서인 방송국에게서 적게 받아도 좋았고, 저작권 로얄티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제작 시스템 때문에 망했다. 본인 회사만 망하고 끝났으면 좋았는데 이후로도 그것이 관행으로 남아서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저예산으로 그림이 움직이지 않는 리미티드 기법으로 만드는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4.1. 발단[편집]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연예계와 같아서 인기 애니메이터는 고임금을 받지만 말단에서 일하는 신인들은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고 있으며 [11] 애니메이터중 월수입 18만 엔 이하가 37%에 달한다. 비록 성공하면 돈을 벌 수 있다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고 말단이 이렇게 돈을 못 받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가장 말단인 동화, 채색 등의 작업은 하청을 돌리기 때문에 프리랜서의 몸값 경쟁도 일어나기 힘들고, 스튜디오에 직접 소속되지 않아 노조조차 못 만들고,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노동착취를 당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이러한 말단 노동자에 대한 푸대접은 신인 3년 이내 이직률 80%라는 수치와 인재부족이라는 형태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비교하자면 미국 등의 애니메이터들은 대개 (2015년 기준) 일년에 3000~5000만원 정도가 평균이다.

그리고 여러 사정으로 [12] 정직원으로 고용하지 않고 프리랜서를 계약으로 기용하는 환경이 정착되었으며 미래가 불안정한 업계가 되어버렸다. 2015년 일본 문화청 자료를 근거로 70%가 프리랜서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4대보험이 적용이 안 되는 프리터 아르바이터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소비세는 10%로 올라서 개인 부담은 더 커진 것이 지금의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내몰린 애니메이터들은 "누군가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고 거기서 찍혀버린 것이 일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시조인 데즈카 오사무였다. 데즈카 오사무는 당시 TV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보다 한참 낮은 금액인 회당 50만 엔 정도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는 소리가 있었다. 1960년대 50만엔의 가치가 1990년대 이후의 50만엔의 가치보다는 크게 높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의 물가나 인건비로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수지가 남지 않는 장사였다. [13]

이를 본 사람들은 "저렇게 싸게 일을 받았으니 직원에게도 돈을 덜 줬겠구나." 라고 생각하기 충분했고 모든 원인과 증오를 전부 데즈카 오사무에 덮어쓰기 해버린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죽었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추도문도 루머를 부채질했다. 당신이 너무 낮은 돈을 받고 만들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망가졌다는 뉘앙스의 추도문이었고, 이는 곡해되어 데즈카 오사무가 직원에게 급여를 낮게 주고 학대했다는 루머로 재생산되었다.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 또한 하청업이 대부분이라 일본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건 없는 상황이었고 그 불만을 누군가에게 돌리려고 하던 중 일본 등에서 수입된 데즈카 오사무 만악의 근원 루머를 그대로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루머는 한국에서도 오래전부터 나와 영화월간잡지인 키노나 로드쇼나 스크린을 비롯한 잡지들에서부터 애니 정보를 싣던 월간 게임잡지 애니 코너라든지 펨코, 웃대, 루리웹은 물론, 온갖 사이트(####)로 지나치게 넓게 퍼졌고 이는 결국 팩트 체크도 안 하고 기정 사실화가 되어 매일경제에서마저 이런 (낮은 월급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은 사실 싸게 만든 만큼 손이 덜가는 저질이었고 직원들의 급여는 다른 회사보다 더 많이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즉 팩트 체크도 안 하고 유명한 사람에게 다 몰아서 화풀이를 한 것에 가깝다.

참고로 일본 회사가 채용하는 '프리랜서를 기용하고, 잘하는 사람에겐 고임금을 주고, 말단과 하청은 저임금으로 학대하는' 경영은 월트 디즈니가 만든 것이므로 깔 거면 차라리 데즈카 오사무가 아닌 월트 디즈니를 까는 것이 맞다. 데즈카 오사무는 오히려 저러한 경영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사람이다.


4.2. 진실[편집]


이러한 루머 때문에 데즈카 오사무의 인품에 대해서까지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음해에 가깝다. 애니메이션 쪽에서 데즈카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14]도 '사업을 하기엔 너무 착했다.'라고 평하고 있으며, 만화계에서 같이 일했던 후지코 후지오 등도 그의 인품을 찬양할 정도로 인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은 이야기만 나돌고 있을 정도. 만화 편집자들은 그가 마감 때 자주 도망간 걸 두고 욕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회고하는 편이다. 생전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사리사욕보다도 작품 욕심이 훨씬 강하던 인물로 돈에 미친 사업가가 아닌 작품에 미친 의욕적인 창작가로서 보는것이 맞다. 실제로 데즈카는 꾸준히 'JUMP', '인어' 등의 실험적이고 비상업적인 단편 애니메이션들 역시 꾸준히 제작하였다.

또한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로 번돈을 애니에 쏟아붓고, 스스로 도산해가면서까지 애니메이션 시장 구조 자체를 만들어낸 인물임은 분명하다.# 만화 연재 → 애니메이션화라는 방식은 물론, 애니메이션의 대중화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애니메이터들의 대우 역시 인프라가 구축되고 일본 경제가 안정되어가면서 점차 개선되었다.

애초에 데즈카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인력과 돈이 덜 들어가는 염가형 작품이었다. 데즈카가 사용한 대안은 제한된 제작비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리미티드 기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리미티드 기법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모든 사물과 캐릭터의 움직임을 극도로 간략화하는 기법이다. 예를 들자면 화면 내의 모든 그림이 고정된 상태에서 캐릭터의 입만 뻥긋뻥긋 움직이는, 일본 TV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묘사가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반대의 개념인 풀 애니메이션은 대표적으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서 단순한 대화 장면에서도 캐릭터의 입, 눈, 눈썹, 머리카락 등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배경 역시 쉬지 않고 움직인다. 또한 TV 영상을 초당 24프레임으로 잡아야 하는데 61/4, 81/3, 121/2프레임으로 움직임을 때움으로써 컷 수를 줄였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임을 가까스로 성립시키기만 하여 양산형 작품을 빠르게 유통시키는 것이 데즈카의 방식이었다.[15] 리미티트 기법으로 최대한의 애니메이션다운 표현을 궁리했던 것은 이후 애니메이터들의 업적이었고 철완 아톰은 당시에는 '테레비 망가'라고 불리는, 즉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작품이었고 토에이 동화를 비롯한 기존의 애니메이션 업계의 사람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었다. 직원을 학대해가면서 만든 작품이 아니고, 정말 저예산에 걸맞는 퀄로 적당히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당시 일본 경제 상황으로는 리미티드 애니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시피 하였고,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액션에서 큰 강점을 보이는 리미티드만의 기법들이 만들어졌다. 카나다 요시노리의 스타일이나 이타노 서커스, 이소 미츠오의 풀 3콤마 등등. 예를 들어 거대로봇물 같은 장르는 로봇의 디테일적인 면에서 풀 애니메이션을 전부 그리는 서양 애니메이션에서는 힘들고, 리미티드의 적은 장수로 많은 효과를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만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데즈카가 50만엔을 받고 아톰을 만들었다는 게 허구였다는 주장도 있다. 2007년에 출판된 '津堅信之『アニメ作家としての手塚治虫-その軌跡と本質' 라는 책에는 당시의 관계자들이 증언이 적혀있다. 이를 토대로 말하자면 애당초 50만엔이라는 방송사 요구도, 50만엔의 제작비 따위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관계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데즈카 오사무는 대외적으로는 50만엔을 받았다는 것으로 하고, 몰래 뒤로는 150만엔을 받았으며, 데즈카는 "편당 50만엔으로 팔아라. 그 이상은 올리지 말아라. 이런 낮은 가격이라면 다른 데에서는 못 만들 테니까" 라면서 저가 덤핑 전략으로 TV 아니메 시장를 독점을 시도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영업부 차장은 "까놓고 제작비는 얼마를 받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로얄티(캐릭터 상품 등)로 수백만 엔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요.[16]

물론 경리상에는 처음부터 150만엔으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가격인상을 교섭해서 아톰은 방영된 4년간에 최종적으로는 1편당 350만엔이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 당시 무시 프로덕션의 영업부 차장의 증언.[17]


또한, 당시 무시 프로덕션의 애니메이터는 여타 애니메이터들보다 꽤 좋은 대우를 받고 일했다. 블랙잭 창작비화의 인터뷰에 의하면, 제작 진행 중 한명이 연극을 한다고 나가자 독립할 때까지 매달 데즈카의 사비로 돈을 부쳐줄 정도, 현재의 애니메이터의 수익이 쪼들리는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인데, 첫번째로는 1990년대 버블경제가 터진 이후 20년이 넘도록 일본의 애니메이터 임금이 동결됐다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현대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고전애니에 비해 그림체가 매우 디테일한 편인데, 1장당 얼마 하는 식으로 수익이 되는 애니메이터 특성상 많은 장수를 그리기가 어려워진 것. 1989년에 돌아가신 데즈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음해에 가깝다. 실제로 당시의 애니메이터는 작업 환경은 열악하고, 퇴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근무 환경은 좋지 않은 직업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으로 여겨져서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직업이다. 아라키 신고, 카나야마 아키히로는 만화가였지만, 애니메이션이 더 돈이 된다는 이유로 데즈카의 무시 프로덕션에 애니메이터로 들어간 사례였다. 데즈카가 직원들을 착취했다면 그들은 만화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있던 린 타로가 무시 프로덕션으로 옮긴 것도 데즈카가 토에이 보다 돈을 더 준다고 해서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신생 애니메이션 제작사로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토에이보다 돈을 2배 더 주겠다. 라는 조건으로 애니메이터와 연출가를 모집했다고 한다. 스즈키 요시타케 말로는 직원들이 1만 엔 정도 돈을 받고 일하는 게 안쓰러워서 데즈카에게 "이건 더 줘야 한다." 라고 말을 했더니 다음 달 직원 봉급이 3배로 올라 3만 엔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시 프로덕션 직원들은 대부분 자가용 차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무시 프로덕션이 망하고 직원들은 선라이즈, 매드하우스 같은 회사를 차려서 독립을 했는데 이건 직원들이 회사를 차릴 정도로 돈을 벌었음을 의미한다. 대신 철야가 기본 조건이었다고.# 오카다 토시오도 예전의 애니메이터는 고 수입 직종이었으며, 무시 프로는 돈을 많이 줘서 집을 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의 애니메이터가 가난해진 건 무시 프로가 망한 이후로 업계가 물가가 올랐는데도 임금을 올려주지 않아서라고.# 일본에서 데즈카 오사무가 이 문제로 까이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가 이거다. 애니메이터들에게 저임금을 준 건 오히려 후대의 회사이지 데즈카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비판도 '데즈카는 존경하지만 아쉬운점도 있다'는 취지로 한 발언이며, 업계인들 중에도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는 반론이 나오는 등 상당히 평가가 갈린다. 무엇보다도 미야자키는 아톰이 첫 방영하고 무시프로가 잘 나갈 당시 애니메이터 데뷔도 안 했으며 애초에 토에이 애니메이션 출신으로 데즈카랑 같이 만나보고, 무시 프로의 사내 복지 같은 거는 경험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정작 무시프로 군단이라 불리는 무시프로 직원들은 대부분 무시 프로가 망하는 순간까지 회사에 남아있었고, 데즈카에게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연락하고 지냈다. 데즈카 사후에 나온 철완 아톰 3기, 블랙 잭, 불새, 메트로폴리스, PLUTO를 애니로 만들 때는 무시 프로덕션 출신 연출가와 애니메이터들이 은혜를 갚는다면서 자진해서 참가했다. 정말 악덕 사장이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데즈카 추도문 원문 자체가 한국에서 왜곡되기도 했다. 원문은 일본 최초의 (장편)TVA 아톰을 50만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만든 '그 전례 때문에 이후 애니메이션의 제작비가 항상 낮다는 폐해가 태어났습니다[18]'이고, 여기엔 저임금화, 생활고, 애니메이터의 수입 등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회사가 낮은 가격을 받아들였다는 내용뿐이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하냐면 데즈카 오사무가 일하는 사원들의 월급을 직접 후려쳐서 비용을 절감했다는 주장이 아니라, 데즈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에 들어가는 작화량을 줄여서 비용을 절감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19][20]

같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즈키 토시오 발언(19분 9초쯤부터)을 보면, '타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을 좀 더 제대로 된 물건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톰은 자신이 중학교 때 봤을 땐 재밌었지만 돌이켜보면 원동화 1800장밖에 안 되는 조악한 물건이었고, 좀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원동화 8000장)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회상한다. 만화가로서는 훌륭하지만 그 사고방식이 애니메이션에는 조금 안 맞지 않았나 하는, 미야자키 추도문과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 중의 언급이다. 미야자키는 원래 원동화를 많이 쓴 디즈니나 초기 토에이 애니메이션 극장판 같은 거창한 작품을 만들려는 꿈이 있었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저예산 제작 작품을 많이 배출하게 되자 방송국이나 극장계에선 '저렇게 대충 내도 팔리는데 굳이 공들여 대단한 걸 만들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제작 지원을 줄이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미야자키는 토에이에서도 퇴직을 당했고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앞길도 보이지 않은 절망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욕을 굉장히 많이 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저 추도문도 그것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작비 후려치기로 애니메이션의 또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못 만들게 한 것에 대한 원망이지 저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이다.

이걸 회사가 받는 금액이 아닌 애니메이터 저임금 관행으로 연결하려면, 무시 프로덕션이 아톰 제작시기에 이전 애니회사에 비해 임금을 덜 줬다는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톰 이전의 애니메이터는 돈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애니메이터가 먹고 살만하게 된 건 데즈카가 무시 프로덕션을 설립한 이후였다.[21]

추가로 일본어 위키에 의하면, 철완 아톰은 저작권 표시를 붙여 상품화 권한을 확립한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라고 한다. 이전엔 저작권자 허락도 없이 해적판이 나와도 막을 수도 없는 시대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못 했던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작품이 성공할수록 로열티 수입을 더 가져가는 구조를 처음으로 만든 부분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 당시엔 상품화에 대한 비판도 일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주변에선 이 개념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일 위키에 적힌, 「話の特集」1979年7月号 瀕死のアニメーション에서 인용된 부분을 통해 1979년에도 애니메이터의 급료와 데즈카의 저가수주를 연결하는 비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데즈카 오사무의 항변을 보면 1979년 시점에서 애니메이션 제작비 중 최소한도가 500만, 보통 600~700만 엔 정도는 스폰서가 내는 정도로 시장이 회복되었다고 밝히고 있고, 이 역시 어디까지나 회사가 받는 비용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뿐, 무시 프로덕션이 직접 급료를 후려쳤다는 이야기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또 나오는 이야기가 데즈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의 제작비 단가를 후려쳐서 애니메이션의 제작비가 전체적으로 줄어들었고, 저임금으로 이어지게 된 게 아니냐는 주장도 따라오게 된다. 하지만 이건 잘못본 것이다. 아톰은 비용을 싸게 만들어주는 대신 저작권을 데즈카 오사무가 가졌다. 방송국은 추가 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아톰 이후의 애니메이션은 방송국이 돈을 주는 대신 권리를 방송국이 가지고 추가 수익을 얻는 경우도 있다. 제작위원회에도 방송사가 많이 참가한다. 그걸 방송국이 데즈카 오사무에게 넘기는 대신 싸게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이건 단가 후려치기라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작품이 히트하면 할수록 방송국에게 불리한 조건이다. 이게 단가 후려치기라면 방송국은 많은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싼 단가로 만들어주는 무시 프로덕션에게 맡겨야 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토에이 애니메이션, 에이켄 스튜디오, 타츠노코 프로덕션 등 다른 회사는 무시 프로덕션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받고 작품을 만들었다. 대신 이들은 로얄티와 같은 권리를 일부분 포기했다. 데즈카 오사무는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든 거지 단가를 후려친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는 아톰 이후로 꾸준히 올랐다. 오카다 토시오 회상에 따르면, (신생 제작사 가이낙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퀄리티 OVA를 만들어낸 '톱을 노려라'의 경우가 1편당 제작비 1260만엔 정도였던 상황에서) 1990년 제작된 나디아는 NHK에서 편당 1200만엔 정도가 제작비로 책정되었고, 오프닝음악, 한국작화예산일부 등 따로 편성된 예산을 빼고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거친 가이낙스에 최종적으로 떨어진 금액은 TVA 1화당 1000만엔~1100만엔~1200만엔 정도였다고 한다. 대신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라 저작권 로열티 수입은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구조였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받는 제작비는 그 정도로 빠르게 상승되었다. 심지어 무시 프로덕션의 애니메이션도 꾸준히 제작비가 올랐다. 아톰과 비교하면 후기 작품인 도로로와 햐키마루내일의 죠는 여전히 리미티드이긴 해도 상당히 동화의 사용량이 늘어났음을 체감할 수 있다. 아톰 이후에 울트라맨 같은 특촬물의 시대가 열렸고 아톰 수준의 저질 품질 애니메이션은 여러 특수효과로 무장한 특촬물과 경쟁할 수 없었다. 실제로 데즈카의 작품인 W3울트라 Q에 밀려 시청률에서 참패했다. # 그 이후로는 데즈카 오사무도 마냥 저가 애니메이션만 만들지 않았다. 철완 아톰 (1980년 판)은 데즈카 본인이 제작에 참여했는데 상당한 돈을 들여서 만들었다.

그리고 애니메이터들이 데즈카 시절부터 계속 가난했던 것도 아니다. 1980년대 버블 경제 시절에만 해도 스다 마사미사사카도 노부요시처럼 손이 빠른 애니메이터들은 꽤 부유하게 살았다. 오히려 그때는 화학물질이 가득한 작업 환경[22], 과로로 의문사[23]하는 애니메이터들이 많았던 것이 더 문제였지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이 가정을 가질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었다. 문제가 된 건 199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야마사키 오사무 감독 블로그에 의하면, 디지털 시대가 된 이후에 동화 작업 과정이 좀 더 번거로워졌음에도[24] 동화가의 급여가 셀화시대 그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업계는 가난하지 않지만 애니메이터만이 유독 가난해진 것이라고 한다. 디지털화가 계기가 돼서.

정리하면 데즈카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를 줄여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체적인 질이나 연출에 있어 퇴보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일본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데즈카가 애니메이터들의 만성적인 저임금의 근원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런 루머가 간간이 있었다. 2007년의 이런 글이나 アニメーターの給料 手塚治虫로 검색하면 나오는 이런 글도 그런 루머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사실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고, 공통적으로 아톰 제작 시기에 무시 프로덕션은 기존 애니 회사보다 더 높은 급여를 줬다는 증언 등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1963년 아톰의 흑백 TVA 때에 정해진 것들이 악습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정말로 그때의 관성이 그대로 이어져서 제작위원회같은 새로운 관성도 생기지 않았어야 하고, OVA 황금기에서부터 시작된 DVD, BD 판매시장도 생겨나지 않았어야[25] 하고, 신생 제작사가 고퀄리티 OVA를 만들 정도의 편당 평균 제작비를 방송사가 TVA1화당 제작비로 내놨던 전례도 없었어야 한다. OVA도 아직 안 생겼던 1979년이면 모를까[26], 수익구조 변화, 제작구조 디지털화를 포함한 각종 구조적 변혁을 겪은 지금 시대에 유독 '1963년 방송사에서 받은 제작비'의 영향력만이 악습처럼, 제작비도 아니고 데즈카 오사무가 깎은 적도 없었던 인건비 문제로 이어져 왔다는 주장은 다방면으로 검토할수록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터 코즈마 신사쿠는 애니메이터의 임금 문제는 선라이즈토에이 애니메이션 때문이며 데즈카 오사무는 죄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애니메이터를 직원으로 고용해 복지를 제공하지 않고 프리랜서로서 기용하는 이들 회사와 달리 데즈카 오사무는 애니메이터를 직원으로 정식 고용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트윗이 나왔냐면, 하루 전인 2020년 8월 30일 일본에서 관련 칼럼#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서는 토에이때의 두 배 이상으로 임금을 올려준 데즈카 오사무 회사의 고임금 대우,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저작권을 처음으로 확보한 데즈카 오사무의 전례를 다른 애니회사가 따라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리해진 수익성, 그 와중에 상품화 권한을 확보한 토에이 동화 등 당시의 애니메이션 사업 흐름을 짚고 있다.

현대에도 무시 프로덕션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영을 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교토 애니메이션이다. [27]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교토 애니메이션은 개념 회사라는 소리를 듣는다. 잘못된 정보로 데즈카 오사무에게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데즈카 오사무가 저 방식을 채용한 것도 아주 옛날일이며, 시대가 조금 차이나는 정도면 몰라도 50년은 넘게 지났는데도 데즈카 오사무 탓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구닥다리식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런 관행을 바꾸려는 시도를 업계가 얼마나 했었는가?에 대한 책임회피라고 볼 수 있다. 문제가 있었으면 진작에 바꿨어야지 데즈카 오사무보다 푸대접을 하는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4.3. 다른 이야기[편집]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수입이나 재산의 대부분을 차기작에 만드는 투자비용으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데즈카 오사무 자신이 사장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파업 때는 경영진 측이 아닌 노조측의 선두에 서서 교섭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일화는 알고 보면 무시 프로덕션 설립 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노조의 선두에 서서 함께 회사를 규탄하겠다!'라고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28] 실제로는 1973년에 무시 프로덕션의 노조가 노동쟁의를 일으켜 교섭이 결렬, 도산할 때에 회사 측의 사장은 데즈카 오사무였으며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을 투입해서 도산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어 위키의 'アニメの歴史' 문서에도 그런 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동일한 위키의 다른 문서를 보면, 1971년 6월경 데즈카 오사무가 무시 프로덕션의 방침으로 '초심대로 작가집단을 지향할 것인가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을 지향할 것인가'를 물어서 사원총회에서 논의한 결과 직원 대다수는 카와바타 에이이치를 중심으로 이익추구 기업을 지향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에 실망한 데즈카 오사무는 지금까지의 회사 채무를 자신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사장을 사임했고 이후부터 1973년 도산할 때까지 무시 프로덕션의 사장은 카와바타 에이이치였다. 덤으로 데즈카 오사무 문서의 연혁을 보면 무시 프로덕션 도산 이후 데즈카 개인에게 걸린 채무 보증으로 인해 채권자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저작권까지도 잃어버릴 뻔했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5.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편집]


그가 만화에 기여한 위대한 공로를 기념하여 매년 뛰어난 만화를 선정, 시상하는 상이다. 199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아사히 신문이 주관한다. 상당히 명예롭고 권위있는 상이라 할 수 있다.


6. 어록[편집]


만화는 본래 감성의 영역이므로 리얼리즘에 속박되면 꿈이나 낭만은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만화가어린이는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유치하다는 이유로 부모나 교사가 그것을 짓밟는 것은 어른들의 파시즘이지요.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시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나 생산지상주의는 결국 그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 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독창성을 지닌 어린이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꿈은 2개 이상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만화가와 의사라는 2가지의 꿈을 갖고 있었거든요.

꿈이 1가지 밖에 없다면 그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좌절하지만 꿈이 2가지 이상이라면 좌절하는 일은 없을겁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아름다웠노라는 식으로 포장되는 것, 이것이 추억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그 옛날 전쟁 중엔 이랬지. 그때가 좋았는데"하던 것이

"훌륭한 전쟁이었어. 누가 뭐래도 위대한 시대였다고"와 같은 위험한 발언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도 제작자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괜찮지만

전쟁을 단순하게 묘사하기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29]


나처럼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국민체육훈련소라는 일종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1년 동안 체력을 키워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소년으로 갱생시킨다고 수용소에 처넣는 것입니다.

이곳은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어서 한 번 들어가면 절대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체력을 키우기는 커녕 콩찌꺼기 같은 것만 먹어가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한 군사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나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적군은 수적으로 우리보다 월등하다. 하지만 국민의 정신력은 우리가 수천 배나 강하다.

따라서 우선 적의 인적자원에 손실을 입혀야 한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면 물리적 위협 따위는 두렵지 않다."

이것이 중학생의 일기입니다. 내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일이지만

나는 잘못된 교육이 어린이들의 고운 심성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파괴하는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군부와 정부기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내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써온 것은 군국주의가 남용한 영화의 효용을 거꾸로 좋게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중략)만화를 그릴 때 이 것만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아무리 통렬하고 강렬한 문제라도 만화를 이용해 호소하는 건 상관없지만, 기본적인 인권만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1.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것.

2. 특정 직업을 깔보는 것.

3.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것.

작가 3원칙. 저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창작법'에서[30]


유독 전쟁과 군국주의에 회의적인 명언이 많은데, 선술했듯이 군국주의로 피폐하게 자랐던 유년시절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비단 데즈카 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살았던(미즈키 시게루, 나카자와 케이지, 후지코 F. 후지오 등) 원로 만화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기류가 큰 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전쟁을 오랫동안 겪지 않아 극우 만화가와 미디어물이 하나둘씩 등장하면서 그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가는 씁쓸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인지하지 못하는 탓이 클 것이다. 사실 데즈카 오사무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자민당 지지자들도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녔기 때문에 해당 세대들이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거나 사망하면서 기억이 희미해진것이다.


7. 작품 목록[편집]


데즈카 오사무 전집이 일본에서 출시되었는데, 총권수가 400권이다. 이중 384-400까지는 에세이, 강연, 만화 그리는 법 등을 모은 것이지만, 나머지는 전부 만화. 일본 위키 데즈카 오사무 만화전집 문서
  • 0맨[31]
  • 38도 선상의 괴물
  • 개미와 거인
  • 긴 땅굴[32]
  • 나의 손오공
  • 넘버 7
  • 네오 파우스트
  • 넥스트 월드[33]
  • 노만
  • 클레오파트라
  • 단게 사젠[34]
  • 대자연의 마수 바기
  • 도로로
  • 돈 드라큐라
  • 돌아온 야마타로[35]
  • 데즈카 오사무의 구약성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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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임슬립 10000년: 프라임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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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원태평기
  • 푸른 망아지 브링크
  • 푸문(오리지널 극장판)
  • 프라임 로즈[43]
  • 플라잉 벤
  • 필름은 살아있다
  • 하얀 파일럿
  • 하토야 하늘까지[44]
  • 황금 트렁크
  • MW
  • 철의 선율


8. 여담과 비화[편집]


  • 일본 만화의 기법을 창시했고, 시장을 만들었으며, 만화에 대한 편견을 없앴다는 점에서 별명으로 '만화의 신'이라 불리고 있다. 다른 만화가들도 이렇게 부르며 구글에서 만화의 신(漫画の神様)을 검색하면 데즈카 오사무가 제일 위에 뜬다. 데즈카 오사무의 유족도 이 표현을 사용한다. 한국에선 만신(만화의 신)이라는 말을 여러 작가에게 쓰지만 일본에선 오직 데즈카 오사무만 칭하는 별명이다. 종종 다른 작가의 만화에서 만화의 신이 나올 때 외모가 데즈카 오사무와 똑같을 때도 있다. (예: 괴짜가족.)

  • 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굉장한 인기였는데 몇몇 캐릭터들은 거의 국민 영웅급 캐릭터였다. 대표적으로 우주소년 아톰밀림의 왕자 레오 등등... 다만 한국에서는 아동물로 워낙에 인기를 모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의 만화를 찾아본 한국 팬들 중에는 성과 고어 묘사가 높은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 2014년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가 랭킹에서 무려 10,751표를 얻으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출처

  • 파일:external/www.hayabusa.bz/%E6%89%8B%E5%A1%9A%E6%B2%BB%E8%99%AB.jpg
  • 흔히 만화가라는 직업을 이미지화시킬 때 자주 나오는 디자인인 "베레모를 쓴 안경잡이 캐릭터"의 원조가 되는 인물이다. 모자를 썼던 이유는 젋었을 적에는 컴플렉스인 곱슬머리를 가리기 위해서, 나이가 들었을 때는 탈모를 가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만화나 미디어믹스 등지에서 저런 외형의 캐릭터가 등장하면 십중팔구는 데즈카의 패러디일 정도이며, 본인의 작품에서도 자기 자신을 저런 모습으로 그려 종종 출현시키기도 했다. 블랙 잭에서 숫제 친구로 등장한 것이 그 예시.

  • 사후에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업계 증언에 의하면 성격이 꽤나 괴팍했다고 한다. 데즈카 화실 스태프가 만든 데즈카 전. 데즈카 오사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유고 산문집 <아톰의 슬픔>과 강의 테이프와 기록을 모아 발간한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의 일독을 권한다.

  • 상냥한 성격이었지만 질투가 심했다고 한다. 특히 작품에 대한 질투가 심해서 자신의 작품보다 뛰어난 작품을 보면 한 동안 침울해 있었다는 증언이 많다. 그래서 토키와 장 사람들은 데즈카 오사무가 칭찬하는 작품은 오히려 좋지 않은 작품으로 보았고 데즈카가 비판을 해야 진정한 명작으로 보았다고. 미즈키 시게루, 이시노모리 쇼타로, 후지코 후지오, 우메즈 카즈오도 데즈카에게 욕을 꽤나 먹었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는 언제나 1등이어야만 만족하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이 나오는 만화 '1등 병'이란 만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주인공 모델이 데즈카 오사무였다. 이건 팬들도 알고 있어서 인터넷에 '데즈카 오사무 질투(手塚治虫 嫉妬)'라고 검색하면 꽤 많은 검색 결과가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다만 작품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고 데즈카는 미즈키 시게루, 이시노모리 쇼타로, 후지코 후지오와 이후로도 친구처럼 지낼 정도로 사적으로는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훌륭한 재능이 있다면 자신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당장 무시 프로덕션의 직원들 리스트만 봐도 사람 보는 안목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질투 전설의 연장선으로 다른 사람 결혼식에 간다고 해놓고 안 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이시노모리 쇼타로나가이 고가 결혼할 때도 안 갔다고. 심지어 이시노모리는 이것 때문에 결혼식을 한 번 취소했다. 나가이 고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질투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애초에 안 가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다만 이런 말을 하는 나가이 고조차도 데즈카 오사무의 인품은 훌륭했다고 말한다. 나중에 결혼식 끝나고 비싼 밥 사주면서 나가이 고가 화난 것 같다면서 미안하다고 벌벌 떨었다고.
    • 이 질투와 관련된 이야기가 일본 내에서 워낙 유명한 탓인지 드라마에서도 순화가 되어 나오거나 다소 우스꽝스럽게 나올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이시노모리 쇼타로에 관한 전기 작품으로 단편 대하 드라마가 나왔을 때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모습으로만 나온다.[45] 아울러 실화를 각색한 아오이 호노오라는 만화에서 SF대회에서 아마추어의 수준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패러디 작품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대학생들[46]에게 한껏 칭찬을 쏟아내더니 '뭔가 부족하지 않느냐?' 며 묘한 말을 반복하곤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떠나는 걸로 나왔다. 이때 멤버 중 한 명이 아톰을 넣는 걸 깜빡했다[47]며 뒤늦게 속으로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면 질투 이미지가 단단히도 박힌 듯... 만화이긴 하지만 작중 등장인물들의 실제 인물들이 데즈카 오사무를 만났던 것은 사실이고, 드라마에서 이장면을 찍을때 데즈카 오사무 역할을 했던 오카다 토시오가 그중 한명이다.
    • 심지어 자기 대표작인 철완 아톰조차도 질투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아톰만 알고 작가인 자신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이유. 그래서 더 열심히 아톰을 넘어서는 명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말년에 만화의 신이란 칭호를 공공연히 얻은 뒤로는 아톰에 대한 감정을 풀고 자신의 대표 캐릭터로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 특히 라이벌에게 질투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데즈카 오사무의 200만부 기념 연회 때 있었다. 연회장에서 당시 주목받는 신인 오토모 카츠히로를 만난 데즈카는 "자네가 그린 만화는 잘 보고 있네. 자네의 그림은 굉장히 훌륭해. 그런데 말이야... 실력이 그 정도라면 나라도 쉽게 그리겠어." 라고 얘기했을 정도. 이쯤되면 승부욕의 화신이자 쪼잔함의 대명사인 그 분이 생각난다. 분야는 다르지만 각자 분야의 최고[48]인 점은 같다.

  • 그의 밑에서 일하던 어시스턴트, 연출가, 애니메이터는 굉장히 많지만 데즈카에게 직접 창작의 비결을 배운 제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타카하시 료스케는 한 번 신인 시절 데즈카에게 연출 기술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당신도 창작자입니다." 라고 하면서 안 가르쳐줬다고 한다. 데즈카는 창작을 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라이벌이라 보았으며 창작이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보고 연구하며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 개발해야 하는 것이지 누가 알려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고 싶으면 자신의 작품이나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간접적으로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

  • 잠자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드는 시간을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했다고. 커피담배, 각성제[49]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50] 오로지 정신력으로 잠을 자지 않았으며 토미노 요시유키와 무시 프로의 직원도 "사장님(데즈카)이 잠을 자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미즈키 시게루는 이런 점을 염려하여 "잠을 자야 건강해지고 정신도 맑아져서 창작력이 높아지고 오래 산다." 라고 데즈카와 이시노모리 쇼타로에게 조언을 해주었지만 듣지 않고 단명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죽기엔 아직 젊은 나이인 만 60세에 위암으로 죽었는데, 1986년 1월 10일에 일본 NHK에서 방송한 특집 다큐멘터리 '데즈카 오사무 창작의 비밀(手塚治虫 創作の秘密)' 영상을 보면 취재 당시[51] 만 56세의 나이로 어마무시한 작업량을 소화하는 걸 볼 수 있다. 계약을 좀 덜하고 조금 더 널널하게 일을 했어도 됐을 텐데 스스로 작업에 인정사정 없이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면 몸이 당연히 남아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지금껏 몸이 버틴게 용할 정도다. 마감일[52]이 닥칠 때면 일주일에 5일을 나가지도 않고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잠이고 밥이고 없이 작업하고 만화가는 헝그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서 많이 먹지도 않았다. 다큐에서 해맑게 웃으며 원고용지 사이즈가 과거에 비해 작아져 그림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못 그리는 문제나 나이로 인한 손떨림 등으로 인한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림에 대한 컴플렉스나 딜레마가 없다면 40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그 바램을 이루지 못한 건 자기 자신에게나 독자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 공감을 많이 받은 유튜브 댓글에도 60년을 살면서 180년치 일을 했다는 베스트 댓글이 있다.

  • PTA와 최초로 맞서 싸운 만화가로도 유명하다. PTA가 자신의 만화를 유해도서로 지정하여[53] 화형식을 하자 데즈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만화는 아카혼(조악한 종이질에서 유래한 유해만화의 부류. 직역하면 빨간책.)이 아니라며 공청회 등에서 치고 받았다. 결국 PTA는 데즈카에게 패배하고 아톰 등의 만화를 유해도서에서 해금시킨다. 이는 당시 서슬이 퍼랬던 PTA의 위엄에 비추어보면 깜짝 놀랄만한 일.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정병섭군 자살사건으로 인해 만화를 미친 듯이 불태우는 와중에 웬 만화가 한 명이 '모든 만화가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라며 정화위원회에 당당히 맞서 싸운 정도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스탠 리.[54] 다만 PTA가 데즈카 오사무의 말을 순순히 들어준 것도 데즈카 오사무의 집안의 후광 덕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PTA는 아무런 빽도 없는 나가이 고의 말은 철저히 무시했다.[55]

  • 월트 디즈니의 대단한 팬으로 데즈카 오사무를 담당하는 편집장은 그가 마감을 매일 어겨버리는 문제[56] 때문에 개인 사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기본이며[57] 그를 만날 때 항상 밤비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몇몇 디즈니의 표절 작품들도 존재하며 저작권 무시도 꽤나 저질렀다.[58] 시대가 시대이긴 했지만... 참고로 데즈카와 월트 디즈니 본인이 실제로 만난 건 산케이 신문의 특파원 자격으로 뉴욕의 세계박람회를 취재하기 위해 1964년 미국에 방문했을 때 잠깐 만난 게 전부. 당시 데즈카가 자신이 철완 아톰의 제작자라는 사실을 디즈니에게 밝히자 그는 아톰을 이미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며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 #

  •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한 작품은 단연 밤비다. 에세이에서 "나의 디즈니 미침은 「밤비」로 최고가 되었다."라고 적기도 했다. 데즈카는 1951년 5월 26일 일본에서 밤비가 공개되자, 하루 7회의 상영을 며칠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봤다고 하며, 당시 밤비를 80여 번이나 봤다고 한다. 이후의 재상영 관람까지 포함하면, 밤비를 130회 이상 봤다고 한다.# 데즈카는 자서전에서 내가 생각하던 애니메이션의 모든 게 다 들어있었다고 밤비를 찬양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밤비를 거의 똑같이 그린 '밤비(バンビ)'라는 만화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밀림의 왕자 레오는 밤비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 일본 만화가들 중 동물 캐릭터를 독보적으로 잘 그리는 만화가다. 다른 만화가들 중에도 동물을 능숙하게 잘 그리는 이들은 많지만, 데즈카는 동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풍에 알맞게 희화된 디자인의 동물 캐릭터를 그려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물론 정글 대제(레오)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원더 쓰리, 불새 등 많은 동물 캐릭터가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며, 수컷 동물은 늠름하게, 암컷 동물은 요염하게 그려내는 재주는 다른 어떤 만화가도 갖지 못했던 데즈카만의 능력이었다. 데즈카는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거나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징면도 종종 그렸으며, 그 중간 단계인 이족보행 늑대(뱀파이어)나 인간의 다리가 달린 백조(리본의 기사) 등 수인 캐릭터가 작중에 등장하는 일도 많았다.


  • 하마터면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작에 관여할 뻔한 적이 있다. 철완 아톰의 미국 방송을 본 스탠리 큐브릭이 '이번에 SF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당신을 미술감독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데즈카에게 보냈는데, 그 조건이 1년간 런던에 체류하는거라 데즈카는 그러고는 싶지만, 식구 240명을 먹여살리느라 바빠서 못한다는 답장을 주었다. 그런데 큐브릭은 그에 대한 답장에서 식구 240명처자식 240명...으로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데즈카는 당혹감을 느꼈다고.[59]

  • 북미에서도 MW 등의 블랙 오사무 계열이나 성인풍의 작품들이 출시되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푸른 망아지 브링크를 제작하던 도중 위암으로 급사함으로서 브링크는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되었는데, 이 작품의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한때 '데즈카 오사무 본인도 브링크의 결말을 그렇게 낸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고 있다'는 카더라가 돌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제작 도중에 본인이 사망했으므로 후회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이고, 실제로 브링크의 결말에 데즈카 오사무 본인이 얼마나 관여했을지는 미지수다.



  • 아직 일본에서 만화에 대한 평가가 박하던 시절 대표작인 철완 아톰이 학부모 단체들에게 비판받은 사례가 있다. 비판의 이유는 "아이들에게 허황된 망상을 심어준다"는 것이었으며 그 근거는 "일본이 고속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는 것이었다.[60] 하지만 아톰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던 팬이 후에 일본의 대표적인 로봇 중 하나인 '아시모'를 만들어낸 것을 생각하면 망상이 아닌 꿈에 가까웠던 것.[61]

  • 2008년 6월 이와테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을 데즈카 오사무가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일본 웹에 떠돌았다. 블랙잭 17권 158화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와테에서 일어난 지진의 사상자 수가 17명 사망에 158명 부상이었다.

  • 데즈카 가문은 계보를 따라가면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올라가는 뼈대 있는 집안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통일신라 시대, 즉 남북국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 족보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부하인 '데즈카노 타로미츠모리'라는 무사가 조상이라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사네모리 이야기>라는 가부키가 있다고 한다. 거기다 덤으로 데즈카의 할머니는 핫토리 한조의 후손이라고. 사실 데즈카가 일본에서 만화의 신이라 불리고 추앙받는데는 그의 작품이 훌륭한 것도 있지만 이런 가문의 후광도 없지 않다.

  • '양지의 나무'라는 막말을 다룬 작품에는 증조부를 모델로 한 '데즈카 료안'이 등장한다. 난학 의사로 일본 제국 최초의 군의관이었다고 한다.

  • 아들 데즈카 마코토는 데즈카 프로덕션의 이사이자 영화감독[62]으로 활약[63]한다. 딸 루미코는 프로듀서로 일한다. 데즈카 마코토의 부인인 며느리 오카노 레이코는 만화 음양사, 팬시 댄스[64] 등으로 유명한 만화가이며 데즈카 루미코의 남편인 사위 키리키 켄이치도 '도쿄 셔터 걸' 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 괴짜가족 시리즈에서도 전설적인 만화가로 언급된다. 직접적인 등장은 없고 싸인[65]이나 영정사진으로만 등장하다가[66] 한 에피소드[67]에서도 출연하는데 한때 호러 만화로 인기를 끌었으나 지금은 지독하게 재미없는 만화를 그리는 3류 만화가 벰의 꿈 속에 나타나 "만화를 우습게 보지 말게!" 라고 일갈을 하는데 벰의 반응은 "당신은 대체 누구시죠?" 였다.

  • 아키타 쇼텐에서 출판된 '블랙 잭 제작비화'란 만화에선 소싯적 1시간에 3~4페이지를 그렸다고 하며 마감 전의 속도는 그야말로 빛에 가까웠다고 한다. 또한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별걸 다 구해오라고 한 듯...

  • 스타 시스템을 써서 다양한 캐릭터가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캐릭터들에게 배우처럼 출연료까지 설정했다.

  • 그의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 중 '로크 홈'[68]은 선역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는 미형 악역으로 자주 얼굴을 보인다. 그리고 일명 콧수염 할아버지라 불리는 '반 슌사쿠'도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데 아톰에선 탐정으로 등장했다가 블랙잭에선 가난한 부부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블랙잭을 상대로 사기치려 했던 의사로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블랙잭의 작품 특성상 이 콧수염 할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캐릭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 2014년 4월 7일, 구글 문화원에서 최초의 만화가 컬렉션으로 지정되었다. 링크는 이쪽.

  • 곤충 매니아이긴 하지만,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서 소스라칠 정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 2014년 5월, 데즈카 오사무의 딸 루미코가 여태껏 잠겨있었던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는데, 반쯤 먹다 남은 초콜릿 바, 오토모 카츠히로에 대한 평가를 적은 수필[69], 그리고 수많은 스케치가 나왔는데, 이중 야한 그림이 많이 나왔다. 루미코는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런 야한 그림 중 극히 일부분만 공개하였는데, 나체의 여성이 으로 변하는 그림과 여성 쥐 수인 그림이다.설명 및 사진 이 자료가 공개되고 나서, 대자연의 마수 바기와 같은 그 동안의 작품을 생각해보면 데즈카는 퍼리,수인 마니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016년에 루미코와 데즈카 프로덕션이 합의하여 수위가 너무 심각하지 않은 29점을 공개한 "데즈카 오사무의 에로티카"를 출간했는데, 퍼리, 수인 뿐만 아니라 인체 변형 등의 온갖 마이너한 페티쉬 성향이 다분한 그림까지 그렸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 초콜릿 바캐러멜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데즈카가 활동하던 시기는 24시간 편의점과 식당도 없는 시절인데 데즈카는 철야 작업을 즐겼기 때문에 밤에 배가 고파지면 뭘 사먹으러 갈 수가 없었고, 초콜릿과 캐러멜을 먹으며 체력을 충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말년엔 치아가 다 썩어버렸다고 한다. 말년의 사진은 틀니를 끼고 찍은 것이다. 타카하시 료스케의 말에 따르면 무시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캐러멜을 나눠줬다고 하며 그래서 무시 프로덕션 출신 업계인들은 추억의 음식이라며 캐러멜을 사먹을 때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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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이 데즈카 오사무가 직접 그린 1950년의 연하장인데, (이 당시 구단명은 오사카 타이거스) 여기에는 "요즘 오사카 타이거스가 부진해서 야구만화 그릴 생각이 안 든다"(!)라고 적었다.[70] 그리고 연하장에 꼬박꼬박 한신 유니폼을 입은 호랑이를 그려서 보낸 건 기본. 그래도 사망하기 전에 우승하는 모습은 보고 갔으니 여한은 없을 듯 하다.

  • 사후 데즈카 프로덕션 만화부의 반 토시오가 데즈카 프로덕션과 협력해 데즈카 오사무의 일생을 다룬 "데즈카 오사무 이야기"를 펴내었고 단행본 4권으로 완결되었다. 국내 정발.

  • 바티칸으로부터 노아의 방주 애니메이션 제작을 의뢰받은 적이 있는데 '노아의 방주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지금의 자료로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고 신부에게 밝혔다고 한다. 이에 신부는 감동을 받고 귀국했다고. 그만큼 작품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애니도 제작 도중에 그가 죽어서 결국 다른 이들이 맡아 완성된 데즈카 오사무의 구약성서 이야기이다.

  • 도시바에서 '만약 데즈카 오사무가 현재까지 살아있었다면 어떤 만화를 그렸을까?'라는 주제로 AI에게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들을 학습시켜 그린 만화 '파이돈'이 2020년 2월에 공개되었다.# 스토리나 기본 컨셉까지만 AI가 만들어내고 이를 토대로 하여 사람의 손으로 그려내는 형태인데, 파이돈이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논한 저작이라는 걸 생각하면 꽤나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 불새, 붓다 등의 작품을 남긴 작가주의 만화가라는 인식이 있어 대중성 및 상업적인 쪽으로는 명성에 비해 약한 작가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지만, 블랙 잭은 4600만부 넘게 팔리고 철완 아톰은 무려 1억부가 넘게 팔렸다. 일본 내에서도 10위권에 안에 드는 판매량이다.

  •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을 거야의 에피소드 중 하나에는, 만화가 지망생이 집의 지박령에 조종당해 보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만화를 그리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주인공이 그 지망생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하자, 그는 자신에게 만화의 신이 깃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무시한다. 그러자 주인공이 데즈카 오사무가 이런 데에 있을 리가 없다며 받아치는 장면이 나온다.

  • 데즈카 오사무를 따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만화가로는 타나카 케이이치 (田中圭一)[71]가 있는데 그가 작품을 내면 데즈카 오사무의 딸 데즈카 루미코가 띠지로 저주 축사를 보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축사의 내용은 "고소하겠습니다.", "내가 라이온 킹은 참았지만 당신은 용서 못해!" 등이 있다. 진짜로 싫어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이 둘은 친한 사이로 농담 삼아 그러는 것이다. 2020년에는 100일 뒤에 죽는 악어의 페이크 결말을 보고 분노한 타나카 케이이치가 "다른 사람의 그림체를 따라 그리다니 최악이다." 라고 트윗을 하자 사람들이 바로 데즈카 루미코에게 신고하였다.

  • 전쟁의 참상과 군국주의의 가혹함을 경험해서인지 반전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지배층의 권력강화 수단으로 이용되는 영웅이미지, 애국심, 종교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불새 시리즈와 더 크레이터를 통해서 뒤틀린 공동체주의로 한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전쟁과 과학만능주의를 크게 비판하고 경계했다. 그래서인지 일본 극우 중에는 데즈카 오사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 2000년대 들어서는 정치적 올바름 측면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들이 비판받고 있다. 흑인이나 동남아시아 쪽의 외국인을 미개하게 등장시켜 풍자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데즈카 오사무의 문제만은 아니고 동시대에 나온 상당수의 다른 매체들도 안고 있는 문제다. 데즈카 오사무가 작품활동을 하던 1950~80년대는 정치적 올바름이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시대 작가들에게 PC를 지켰냐 안 지켰냐 따지는 건 사치이고 군국주의에 대해 비판 의식을 가진 것만으로도 용한 거다 따라서 최근에 나오는 단행본에는 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꼭 적어 넣는다.


  •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및 그가 관여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생물체가 있다. 일견 돼지처럼 보이는 괴상한 생물체인데 이름은 효땅츠기(ヒョウタンツギ. 북미권에서 불리는 이름은 PATCH GOURD)라고 하며 개그씬이나 배경의 엑스트라에 섞이는 식으로 뜬금없이 튀어나오곤 한다.[72] 원래는 데즈카의 여동생인 미나코가 한 낙서에서부터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하며, 데즈카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버섯의 일종이라고. 현재는 데즈카 프로덕션의 마스코트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


9. 관련 인물[편집]




  • (데즈카 작품들의) 애니메이션에서 스탭으로 참여한 애니메이션 업계인[73]
[▼ 관련 업계인 일람]




10. 관련 문서[편집]




11.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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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명은 벌레 충() 자만 빼고 음이 같은 手塚 治(데즈카 오사무).[2] 다만 사이토 타카오도 구상과 주인공 고르고의 얼굴은 자신이 직접 그렸다.[3] 디즈니 작품 중에서도 밤비를 제일 좋아했다.[4] 다른 작가들의 커리어와 비교를 해보면 알 수 있지만, 어떤 작가는 평생 한 작품에만 매달린가더나, 본인에게 익숙한 장르만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 처럼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5] 아이러니하게도 카지와라 잇키의 최대 히트작 내일의 죠애니메이션은 (전형적인 카지와라 식은 아니지만) 데즈카의 무시프로에서 제작했다. 그리고 팬들은 데즈카 오사무가 질투심이 심해서 욕한 작품일수록 성공하는 징크스가 있었기에 오히려 거인의 별의 대단함을 역입증하는 사례로 보기도 한다.[6] 2009 시즌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엠블럼, 유니폼도 모두 변경하였다. 그리고 레오의 아버지 판쟈라고 잘못 아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세이부 라이온즈의 마스코트는 레오 성인 버젼이 맞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레오를 아기 사자로만 기억하는 것이 가장 크고, 생긴 것이 도장이라서 그런 것도 있다. 양자의 차이는 레오만 귀 끝이 검은색이라는 것으로, 세이부 라이온즈 마스코트를 보면 귀 끝이 검은색이다.[7] 그래도 개그씬이 은근히 많은데 뜬끔없는 게스트 출연과 시대에 맞지 않는 물건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메타발언까지 한다.[8] 비록 등장인물의 환상이긴 했지만...[9] 이 단편은 본래 단편모음집인 '공기의 바닥' 초판본에만 실렸고 이후 데즈카 오사무 전집 시리즈에서 제외 됐을 정도로 본토에서 그 존재가 희미했다. 그러다가 최근 해당 블로그의 주인이 일본옥션에서 경매로 '공기의 바닥' 초판본을 구매하여 한국으로 가져와 스캔 및 보정, 식질을 하여 공개하였다.[10]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의 신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은 모리 야스지이다.[11] 베테랑 애니메이터는 일반 직장인 수준으로 연봉을 받지만 말단은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이라 평균을 내면 연수 100만엔 남짓이 뜨며 따라서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터는 모두 가난하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12] 고정급을 받는 직원의 태업, 비밀로 부업하기 용이한 환경, 기획 중에는 작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환경.[13] 1962년 무시 프로덕션이 개업할 때 대비해서 2016년 일본 샐러리맨의 급료는 13.3배, 물가는 4.8배 올랐으므로 전자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670만엔, 후자의 기준으로는 240만엔 정도 된다. 2010년대 TV 애니메이션의 제작비 단가는 통상 1000만엔을 조금 넘는 수준.[14] 대표적으로 니시자키 요시노부[15] 단 데즈카나 일본만의 방식이라 하기는 어렵고, 미국 역시 해나-바베라 등 비교적 자금력이 약하고 TV에 의존한 스튜디오 등에서 원가저감 방법이 사용되었다.[16] この時、手塚は「(一本につき)五十万で売って。それ以上高くしないでください。それ(くらい低価格)なら他でつくれないでしょ」と指示、「手塚さんはテレビアニメを独占するつもりだったのかどうか。萬年社は『安すぎる』と、手塚さんに内緒で百五十万円を虫プロに払っていました。実際は制作費がいくらなんて、どうでもよかった。ロイヤリティーが日銭で何百万円と入ってきたんですから。」(虫プロ & 元営業部次長 & 須藤将三)[17] もちろん、経理上は最初から百五十五万円で処理していました。その後も値上げ交渉をしていって、『アトム』は放映された四年間で、最終的には一本三百万円を超えるまでになったと思います。(p.129)[18] その前例のおかげで、以来アニメの製作費が常に低いという弊害が生まれました [19] 그리고 그 뒤에 바로 나오는 원문은 それ自体は不幸なはじまりではあったけれど、日本が経済成長を遂げていく過程でテレビアニメーションはいつか始まる運命にあったと思います。引き金を引いたのが、たまたま手塚さんだっただけで。 ただ、あのとき彼がやらなければあと二,三年は遅れたかもしれない。そしたら、ぼくはもう少し腰を据えて昔のやり方の長編アニメーションの現場でやることができたと思うんです。 それも、今ではどうでもいいことですけど。 로 일단락된다. '그것도,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이라는 과거회상격 발언으로 마무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문장을 처으부터 읽어보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문장의 제목이 宮崎駿『手塚治虫に「神の手」をみた時、ぼくは彼と訣別した』 데즈카 오사무에게서 신의 손을 봤을 때 나는 그와 결별했다.이다. 즉 그가 한 일이 아무래도 좋고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데즈카와는 결별했으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다.[20] 해당 추도문은 데즈카 오사무가 저가에 수주한 것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작심비판한 게 아니라 스토리 작품관 등 이것저것 까내리는 도중에 저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는 정도 비중이고, 이후엔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에 대한 데즈카 오사무의 모든 발언이 잘못되었다(これまで手塚さんが喋ってきたことというのは、みんな間違いです。)고 전부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21] 데즈카 평전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의 만화 데즈카 오사무 이야기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데즈카 오사무 본인이, 원래 애니메이터 지망이었지만 업계 사람에게 "애니메이터 따위 박봉에 고생만 직살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만화가로 돌아선 케이스다. 해당 작품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전재한다면 데즈카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이유로 애니메이터의 꿈을 접는 사람들이 더이상 나오길 바라지 않아서 사비를 털어가며 직원들의 급여를 챙겨준 것이다.[22] 나중에 종이에 그린 그림을 셀로 옮겨떠주는 트레이스 머신이란 기계가 1970년대부터 보급되어 원화가들은 종이와 연필로만 작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만 해도 셀 위에 잉크로 바로 그려야 했기 때문에 화학물질을 들이마시고 폐병을 앓거나 급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23] 돈은 벌 수 있어도 촉박한 납기에 과도한 작업량은 그 당시부터 문제였다. 3D였던 건 마찬가지. 지금은 여기에 물가 대비 실질 임금까지 줄었으니 아무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이다.[24] 셀화 시대에는 연필선 이외의 형광색 등을 인식하지 않았기에 색연필 초안을 그린 종이 그대로 클린업할 수 있었고, 선화가 철저하게 연결되지 않아도 채색 문제가 안 생기기 때문에 번거로움이 덜한 만큼 프로 애니메이터는 다들 한 달에 1000장 정도는 그렸다고 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의 동화맨 작업량은 월평균 500장이라고 2009년 발표되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느려질 수 밖에 없는 동화의 단가를 올렸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25] '방송사에서 수주받은 제작비'가 유일한 수입원일 때 그 금액이 적었다는 게 아톰 50만엔 비판의 핵심인데, 디스크를 많이 팔아서 제작비 이상을 벌어들이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면 그건 곧 '수주받은 제작비'라는 관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 오타쿠 모임을 표방한 회사, 야애니 회사 등 신생 기업도 상당히 늘어났기에, 그 신생 기업 입장에서는 돈만 벌 수 있다면, 혹은 품질을 끌어올릴 실력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굳이 과거 관례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감독 이름은 물론 원화가 이름까지도 기억될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의 가치가 높다.[26] 「話の特集」1979年7月号 瀕死のアニメーション이라는 부분에,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비판 혹은 그에 대한 데즈카 오사무의 항변이 언급된다.[27] 교토 애니메이션의 창업자 핫타 요코(八田陽子)는 데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의 채색부 출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무시 프로덕션의 경영과 급여 지급 방식을 벤치 마킹했을 수도 있다.[28] 社長の手塚治虫は虫プロ設立当時「僕は何かあったら労組の先頭に立って一番に会社を糾弾する」と冗談を言っていたことがある。[29] 이 발언은 2013년 미야자키 하야오바람이 분다가 개봉되면서 재조명되었다. 다만 이 작품은 전쟁 씬이 간략하게 묘사됐어도 반전(反戰) 메시지가 없는 건 아니다.[30] 훗날 2020년 한국 한정으로 도둑맞은 아싸 드립이 논란거리가 될 만한 찬반양론을 일으키면서 특정 직업을 깔보는 식으로 통렬하고 강렬한 문제를 호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재평가를 일으키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또한 여전히 그의 3원칙과는 달리 작가주의적 작품이 우후죽순 늘어나게 됨에 따라 특정 사회집단을 우회적으로 묘사한뒤 바보로 만드는 경우는 많아지고 있다.[31] 제로맨이라고 읽는다.[32]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단편.[3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생한 미국과 소련간의 패권 경쟁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작품. 핵이나 원자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도 들어가있다.[34] 애꾸눈 검객 단게 사젠을 다룬 찬바라 이야기를 만화화.[35] 1986년작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러닝타임은 24분이다.(크레딧이나 오프닝을 제외하면 사실상 20분) 아기 갈색곰과 증기기관차 C6씨의 이야기를 다룬다.IMDB 정보[36] 소설가 미쿠라 요스케가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노숙자 여성 바르보라를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그린 성인만화. 아들 데즈카 마코토에 의해 '데즈카 오사무의 바르보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미쿠라 역은 이나가키 고로, 바르보라 역은 니카이도 후미가 맡았다.[37] 원제 サボテン君. 사보텐은 일본어로 선인장이라는 이야긴데, 문제는 주인공 호칭이 사보텐이다.[38] 리본의 기사 속편[39] 원제는 아톰 금석물어(アトム今昔物語). 아톰이 1969년으로 타임슬립한 스토리이다.[40]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41] 주인공이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사랑하던 여자가 우주의 정체불명 바이러스에 감염(남편도 주인공의 친구인데, 그만 바이러스로 먼저 끔찍하게 죽는다)되자 냉동인간 상태로 만들고, 치료제를 찾기 위해 무려 50년이나 우주를 탐험한다는 이야기. 결말에는 치료제를 찾아 건강을 회복한 여자가 주인공의 아들(자기 아버지를 쏙 빼어닮은 모습)과 사귀게 되고, 이제는 노인이 된 주인공과 감동적인 재회를 하고서 끝난다. 한국에서도 과거 명절 특집으로 MBC에서 더빙 방영했다.[42] 켄1은 켄이치라고 읽는다. 데즈카 오사무가 초기에 돌려썼던 소년 탐장 캐릭터 켄이치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작품.[43] 일본 서브컬처계에서 최초로 비키니 아머가 등장한 작품이다.[44] 제목이 'ハトよ天まで'인데, 하토가 일본어로 '하트'도 되고, 비둘기란 단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주인공 이름이 하토마루(ハト丸)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중의적 제목으로 봐야 할 듯.[45] 다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도 빼먹지 않는 양심적인 선배 캐릭터로 나오긴 한다. 하지만 실화와 100% 비슷하게 하면 너무 망가질게 뻔하니 배려 차원이었을지도 모를 연출이다. 후배 뒷담화 깠다가 울며 후회하고 사과하는 전개가 나오기는 좀...[46]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안노 히데아키일듯. 실제로도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업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47] 실제로 그 애니메이션에선 온갖 패러디가 튀어나오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작품의 SF 캐릭터는 하나도 안 나왔다.[48] 마이클 조던의 별명이 농구 황제, 데즈카 오사무의 별명은 만화의 신[49] 일본이 각성제를 마약류로 분류해 금지한 게 의외로 20세기 중순이라 데즈카가 활동하던 초기에는 일부 각성제가 합법이었고 동료 만화가들도 종종 사용했다고 한다.[50] 후배인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생전에 커피를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폈는데, '지나친 커피와 담배는 건강에 해롭습니다'는 문구를 보고 "그럼 팔지 말든가!" 라고 투덜댄 적이 있었다.[51] 1985년 10월 18일. 참고[52] 어차피 연재횟수나 꽉찬 스케줄 때문에 매일매일이 마감일이다...[53] 1950년대에는 자신이 그렸던 만화인 '복안마인'이 옷을 갈아입는 여성의 맨다리(특정 신체부위는 물론이고 속옷차림이 아니라 진짜 맨다리다)가 보였다는 이유로 판매중지 크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54] 마약의 해로움에 대해 경고하는 만화를 그려달라고 보건청에서 부탁했고, 이를 받아들여 스파이더맨 코믹스에서 해리 오스본이 마약 때문에 고통받는 내용을 준비했는데, 이를 CAA에서 규정 위반이라고 출판을 금지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스탠 리는 보건청이 더 높은 기관이니까 그냥 밀고나간다고 결정했고, 오랜 세월 이후 최초로 CAA의 보증 마크가 붙지 않은 코믹스가 나왔다.[55] 하지만 이는 PTA에게 있어 굉장히 큰 악수였는데, 나가이 고는 그 시절 기준으로도, 지금 기준으로도 노빠꾸라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굉장히 막나가는 사람이였다. 실제로 그가 PTA에 의해 탄압을 받은 후로 보인 광기를 보고 싶다면 파렴치 학원 문서를 참조.[56]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도 있는데 편집장들이 사무실까지 찾아가 몇 시간 후에 마감이다 빨리해달라고 서로 재촉할 때 그는 3장을 동시에 그렸고 인쇄 중의 엉킴을 막기 위해 페이지를 뒤섞어서 그리기도 했다.[57] 사무실 앞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하며 게다를 신고 목욕통을 든 상태에서 600km 떨어진 본가로 도주하거나 해외로 도주한 적도 있다고 한다.[58] 대표적으로 '메트로폴리스'에 나왔던 미키 마우스[59] 사실 서양인들의 입장에선 회사의 사원을 '한 가족'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힘들다.[60] 사실 일본은 이미 1930년대부터 '탄환열차 계획'을 세우면서 고속철도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61] 일본이 로봇 산업의 선구자로 설 때, 아톰이 결정적인 열쇠로 작용했다. 아톰 덕분에 많은 로봇 창작물이 나왔고, 이러한 작품을 봤던 세대가 일본의 공업화와 첨단기술 개발에 앞장섰다. 데즈카 오사무는 자국을 선진공업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62] 보통 일본에서는 마코토를 영상예술가, 즉 비쥬얼 아티스트라고 부른다.[63] 철완 아톰 스토리에 뿌리를 둔 우라사와 나오키플루토 제작요청을 허가한 것도 바로 데즈카 마코토다. 플루토 1권에 우라사와 나오키와 데즈카 마코토의 대담록이 실려 있다.[64] 영화화도 되었다.[65] 아톰이 그려져 있다. 서울문화사에서는 유명한 선생님이라고 번역.[66] 후배 만화가의 한심한 몰골을 보고는 영장 사진 속의 데즈카가 눈물을 흘리는 연출도 있었다.[67] 정확히는 우당탕탕 괴짜가족 26권의 2화 '벰의 인생'. 이후 베스트! 원조 괴짜가족에서 벰 주제 에피소드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수록.[68] 이름은 셜록 홈즈에서 따왔다. 첫 출연작이자 주인공인 작품이 '소년탐정 로크 홈'. 간혹 타 작품에선 '마쿠베 로쿠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쪽은 맥베스에서 따왔다.[69] 이 수필에서 데즈카 오사무는 오토모 카츠히로의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았고, 오토모는 후에 걸작 AKIRA를 그려내게 된다. 확실히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정작 오토모 카츠히로와 데즈카가 만났을 땐 "당신이 그리는 그림은 나도 그릴 수 있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위의 질투심에 대한 사례와 연결지어서 보면 그것도 질투였던 모양.[70] 실제로 이 연하장을 보내기 전해인 1949년 오사카 타이거스는 65승 69패 3무 승률 .485로 B클래스(하위권)인 리그 6위를 찍는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다만 지금처럼 리그 꼴찌는 아닌데, 1949년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8팀 참가의 단일리그제였기 때문. 이듬해인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이 프로야구단 마이니치 오리온즈를 창단해 리그 참가를 선언하자 이전부터 프로야구단을 가지고 있던 경쟁 신문사 요미우리 신문과 주니치 신문이 반발하면서 결국 일본프로야구는 둘로 분열되어 마이니치의 리그 참가 반대측이 센트럴 리그, 리그 참가 찬성측(마이니치도 물론 포함)이 퍼시픽 리그를 결성해 지금까지 양대리그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71] 데즈카 이외에도 여러 만화가의 그림체를 그대로 모작해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공식에서 의뢰를 받고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 다만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그림은 도무지 그릴 수가 없다고 한다.[72] 심지어는 은하탐사 보더플래닛처럼 전혀 개그 씬이 없을 것 같은 진지한 작품에서도 튀어나온다.[73] 196~8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에 참여한 스탭은 무시 프로덕션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