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얀 사비체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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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얀 사비체비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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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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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Ballond'or
수상
장피에르 파팽
2위(공동)
데얀 사비체비치
다르코 판체프
로타어 마테우스
3위
수상자 없음


몬테네그로 축구협회
Fudbalska reprezentacija Crne Gore

파일:external/www.atvbl.com/Dejan-Savicevic.jpg

이름
데얀 사비체비치
Dejan Savićević
출생
1966년 9월 15일 (57세) /
유고슬라비아SFR 몬테네그로SR 티토그라드
국적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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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83cm
직업
축구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FK 부두치노스트 티토그라드 (1983~1988)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88~1992)
AC 밀란 (1992~1998)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99)
SK 라피트 빈 (1999~2001)
감독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표팀 (2001~2003)
국가대표
56경기 19골 (유고슬라비아 / 1986~1999)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1. 개요[편집]


유고슬라비아, 지금은 몬테네그로의 前 축구선수. 현재 몬테네그로 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사비체비치가 축구를 정식적으로 시작한 것은 1981년으로 만 1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였다. 이전까지 그는 주로 길거리에서 풋살을 즐겼으며 이는 그가 최정상급의 볼 컨트롤 능력과 테크닉을 가지게 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축구를 처음 시작한 OFK 티토그라드라는 팀은 그를 감당하기에는 작은 클럽이었고 사비체비치는 1983년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 참가하는 부두치노스트 티토그라드로 적을 옮긴다.

부두치노스트에서 첫 시즌, 사비체비치는 유스팀과 성인팀을 왔다갔다 했으며 두번째 시즌부터는 팀의 레전드인 안테 미로체비치[1]를 은퇴시켜버리며 1군 스쿼드에 등록된다. 사비체비치는 첫 시즌 26경기 9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강등을 간신히 면했다. 1985-86 시즌을 앞두고 사비체비치는 프로 계약을 할 수 있는 팀을 물색했다.[2] 이때 그에게 접근한 클럽은 다름아닌 유고슬라비아 최강팀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츠르베나 측에서는 사비체비치의 재능을 높게 사 프로 계약을 제시했으나, 사비체비치는 이를 거절하고 부두치노스트와 프로 계약을 체결한다. 사비체비치가 이적하려면 부두치노스트의 동의가 있어야 했는데, 팀 내 최고의 유망주를 공짜로 내줄리가 없었고, 다른 방법으로 사비체비치가 우선 부두치노스트와 프로 계약을 체결한 뒤 츠르베나 측에서 이적료를 투자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그를 이적료까지 주면서 영입할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사비체비치는 본인이 이적을 위해 항명한다면 부두치노스트 측의 보복 행위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두치노스트에서 꾸준히 출장한 사비체비치는 재능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1986-87 시즌 하위권의 팀이 7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일조했다. 이 시기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고 유고슬라비아의 거함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FK 파르티잔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결국 1987-88 시즌이 끝난 직후 사비체비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한다. 같은 날, 츠르베나에 팀의 득점을 책임질 공격수 다르코 판체프 역시 합류했고, 기존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87년 우승 세대의 일원이자 특급 유망주였던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등 츠르베나의 스쿼드는 유고슬라비아 최강에 국한된 것이 아닌 유럽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스쿼드였다.

츠르베나에서 첫 시즌인 1988-89시즌, 사비체비치는 군에 입대했는데, 문제는 군인들의 팀은 츠르베나의 최대 라이벌인 파르티잔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비체비치는 클럽 대항전과 국가대표팀에서만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AC 밀란과의 경기는 사비체비치의 활약이 돋보였던 경기인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기막힌 왼발 로빙 패스로 스토이코비치의 득점을 도왔고, 이어지는 2차전에서는 직접 선취골까지 득점하며 밀란을 탈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인해 2차전은 중도 취소되었고 다음날 재경기에서 츠르베나는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다.[3]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는 계속해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그것이 성공해 축구 선수들이 군복무를 하면서도 클럽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의 첫 시즌인 1989-90 시즌 사비체비치는 팀의 리그, 컵 대회 우승에 일조했고 대망의 1990-91 시즌이 다가왔다. 이 시즌은 사비체비치 커리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해인데, 이 시즌 팀은 리그는 당연지사고,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하며 세계를 놀래켰다. 사비체비치는 유러피언 컵에서 3골을 넣었는데, 그 중에는 4강 1차전,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한 것이었다. 2차전 경기 종료 직전 클라우스 아우겐탈러가 헤더로 자책골을 기록하며 팀은 결승 무대에 올랐고 강호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승부차기까지 끌고간 끝에 골키퍼 스토야노비치의 선방으로 우승을 달성했다. 그해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칠레의 콜로 콜로를 3-0으로 완파하며 우승했고[4] 사비체비치는 팀 동료 다르코 판체프, 초대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로타어 마테우스와 함께 발롱도르 2위에 랭크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1-92 시즌에도 사비체비치는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시기 그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구단이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명문 AC 밀란이었다. 그러나 사비체비치는 첫 시즌 리그에서 10경기에 나서 4골만을 넣는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를 영입한 것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밀란의 회장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사비체비치의 열렬한 팬이었고 독단적으로 사비체비치를 영입한 것이다. 수비적인 면을 중시하는 카펠로 감독이기 때문에 활동량이나 수비 가담이 적은 사비체비치는 그의 전술과는 맞지 않았고 공수완전체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를 선호했기 때문에 출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당시 세리에 A에는 경기당 3명의 외국인 선수만 출전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다. 잘 알다시피 오렌지 삼총사 조합이 밀란의 퍼스트 초이스였고[5] 이외에도 장 피에르 파팽 등에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사비체비치는 6개월 만에 팀을 떠날 생각을 했고, 올랭피크 마르세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사비체비치는 팀에 남았고 1993-94 시즌 오렌지 삼총사가 각각 지속적인 부상, UC 삼프도리아, AFC 아약스로 행하면서 해체되었고 새로이 영입된 외국인 선수인 브리안 라우드루프, 플로린 라두치오우가 못미더운 활약을 보여주며 사비체비치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카펠로는 그를 여전히 완벽한 주전으로 기용하지는 않았고 중요한 경기에서는 명단 제외되었다. 겨울, 마르세유로 부터 마르셀 드사이가 합류하면서 그의 입지는 다시 한 번 좁아지게 되었다. 사비체비치가 밀란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베를루스코니의 지지에 기반했고 이 시즌 밀란은 리그에서는 36득점, 15실점이라는 경악할 만한 수치로 우승했다.[6] 밀란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진출했는데, 사비체비치의 진가는 여기서 발현됐다.

밀란의 상대팀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드림 팀' FC 바르셀로나였고 로날드 쿠만,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와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팀이었다. 카펠로는 굉장히 수비적인 전술을 운용했으나 결승전만큼은 공격적인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사비체비치는 말 그대로 바르셀로나를 박살내기 시작했고 다니엘레 마사로의 선취골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후반전에는 기막힌 왼발 하프 발리슛으로 상대 골키퍼인 수비사레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밀란은 바르셀로나를 4-0으로 완파했고, 사비체비치는 그 중심이었다.

1994-95 시즌 사비체비치의 입지가 상승하나 싶었으나 카펠로의 철학이 한 경기로 인해 바뀔 이유가 없었고 사비체비치 본인도 부상에 시달리며 리그 19경기 출장에 그친다. 밀란은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지만 사비체비치는 부상으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되었고[7], 밀란은 패기로 무장한 AFC 아약스에 패배했다. 1995-96 시즌 사비체비치는 리그에서 23경기 출장 6골을 기록했고 팀은 리그에서 우승했다. 1998-99 시즌 중반 사비체비치는 밀란을 떠났고 잠시 친정팀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복귀했다. 6개월만에 사비체비치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의 SK 라피트 빈으로 이적했고 00-01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편집]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8]에서 활약했으며 56경기에 나와 19골을 기록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두 대회에서 각각 8강, 16강에 올랐다. 언뜻보면 좋은 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유고슬라비아의 엄청난 재능들을 생각하면 불미스러운 사건이 유독 안타까운 케이스이다.

우선 불운의 시작은 UEFA 유로 1992인데, 사비체비치를 포함해 유러피언 컵에서 실력을 입증했던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멤버들은 이 대회에 내전으로 참가하지 못했다.[9] 1994년 미국 월드컵 역시 불참했는데, 이 월드컵은 1987년 우승 세대 멤버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시점이었다.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우승을 거머쥘 수도 있는 황금세대였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10]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환상적인 테크닉과 강한 왼발 킥력을 가진 판타지스타 타입의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어, 섀도우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 뛸 수 있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환상적인 드리블과 정교한 퍼스트 터치를 가져 1990년대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등과 함께 당대 최고 수준의 드리블러로 손꼽히는 선수였다. 뛰어난 테크닉과 페인팅으로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데, 특유의 천재성과 민첩성, 가속도를 활용해 상대 수비수의 예측을 벗어나서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 것을 즐기는 선수였지만, 순수하게 주력만으로 수비수를 제쳐낼 수 있을 정도로 빠른 발 역시 가졌기에 상대 수비의 반경에서 벗어나고 역습 상황에서 직접 공을 전진시킬 능력이 있었다. 거기에 드리블이 뛰어나고 피지컬이 준수한 편이라[11] 볼 키핑과 탈압박에도 강점이 있던 선수.

대부분의 판타지스타 스타일의 공격수들이 그렇듯, 탁월한 개인 능력을 갖췄다. 앞에 언급한 드리블뿐 아니라 왼발을 사용하는 경우, 슈팅, 패스, 크로스 모두 높은 수준으로 갖춰, 순식간에 후방에서부터 스스로 공을 운반하며 돌파하다가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뿌리거나 좋은 크로스를 올리고, 정교한 슈팅을 때릴 능력이 있었다. 또한 대다수 왼발잡이들이 그렇듯 킥 능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라 프리킥 능력도 보유했었다. 그리고 주 발인 왼발뿐 아니라 오른발로도 수준급의 슈팅을 때릴 수 있었기에 상대 수비의 혼선을 유발했다.

AC밀란에서는 보통 4222의 인사이드 레프트나 왼쪽 스트라이커로 출전했던 경우가 많았는데, 마치 현대의 인사이드 포워드 타입 공격수들처럼 왼쪽 측면과 중앙을 모두 활용하여 환상적인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붕괴시키고, 위력적인 왼발로 슈팅을 때려서 직접 득점을 하거나 정교한 스루패스를 다른 공격수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이런 타입의 공격수들이 많이들 그렇듯, 수비가담이나 활동량에는 약점이 있었고, 이 점이 당시 감독이던 파비오 카펠로가 사비체비치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가 되어 더 좋은 커리어를 쌓지 못하게 되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2001년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임명되면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부아딘 보스코프, 이반 추르코비치와 함께 공동 감독 체제로 2002년 월드컵 진출을 노렸으나 슬로베니아에게 충격적으로 밀리면서 실패했다. 유로 2004 예선에도 팀을 지휘했으나 부진이 계속되었고 아제르바이잔에게 충격적으로 패배한 뒤 사임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1] 몬테네그로 지역 출신으로는 최초로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에서 뛴 선수이다. 한때 잉글랜드 무대에서 활약한 바 있다.[2] 이전까지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태의 계약으로, 프로 계약은 아니었다.[3] 이 시즌 AC 밀란은 우승을 차지해버렸다.(...)[4] 정작 본인은 전반전에 퇴장당했다.[5] 물론 판바스턴은 이 시즌부터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6] 34전 19승 12무 3패[7] 사비체비치는 당시 자신이 뛸 수 있었더고 주장했다.[8] 유고 대표팀은 내전으로 인해 뿔뿔히 갈라지고 사실상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이 되는데, 사비체비치의 경우 몬테네그로가 독립한 것은 2006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고 대표팀으로 활약했다.[9] 유고슬라비아 대신 참가한 덴마크가 우승을 거머쥐었다.[10] 물론 87년 멤버의 주축이 있던 크로아티아나 마케도니아는 이미 분리된 상태였다. 여기서 우승을 거머쥘 수도 있었다는 것은 내전으로 인해 갈라지기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상태이다.[11] 183cm에 떡대도 좋은 편이라 당대 기준으로나 현대 기준으로나 테크니컬한 타입의 드리블러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뛰어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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