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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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클래시 로고.png

조 스트러머
믹 존스
토퍼 히든
폴 시모넌

{{{#808080
[ 구 멤버 ]
테리 차임즈 · 롭 하퍼 · 키스 레벤
}}}
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 Studio Albums ]

파일:The_Clash_The_Clash.jpg


파일:Give 'em Enough Rope.jpg


파일:external/ecx.images-amazon.com/91apLp-DEQL._SL1500_.jpg


파일:Sandinista!.jpg


파일:combatrock.jpg


1977.4.8.

1978.11.10.

1979.12.14.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 1px solid #000000;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8em"
Sandinista!
1980.12.12.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 1px solid #3c8c74;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cbbb4; font-size: .8em"
Combat Rock
1982.5.14.
}}}
[ Live Albums ]




'''

더 클래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펼치기 · 접기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고.p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더 클래시
THE CLASH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조 스트러머, 믹 존스, 폴 시머넌,
테리 차임즈, 토퍼 히든

입성 연도
2003년
후보자격 연도
2003년
후보선정 연도
2003년





















더 클래시
The Clash
}}}
파일:TheClash.jpg
▲왼쪽부터 폴 시머넌, 조 스트러머, 토퍼 히든, 믹 존스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결성
1976년
영국 런던
데뷔
1977년 3월 18일
싱글 White Riot
데뷔 앨범
멤버
조 스트러머(보컬, 리듬 기타)
믹 존스(리드 기타)
토퍼 히든(드럼)
폴 시모넌(베이스 기타)
장르
펑크 록 · 뉴웨이브 · 포스트 펑크 · 댄스 펑크
활동 기간
1976년~1986년
링크
파일:The Clash Logo2.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여담
4. 음반 목록



1. 개요[편집]


영국 출신의 펑크 록, 뉴 웨이브 밴드. 섹스 피스톨즈와 함께 영국 펑크의 양대산맥으로 통한다.[1] 또한 영국 펑크씬에서는 굉장히 저항적인 가사와 과격한 밴드로써도 유명하다.


2. 상세[편집]


조 스트러머(보컬, 리듬 기타), 믹 존스(리드 기타), 테리 차임즈(드럼)[2]', 폴 시모넌(베이스)의 4인조로 결성되었다.[3][4] 1집을 발매한 뒤에 테리 차임즈가 탈퇴하고 토퍼 히든이 드러머로 가입한다.

섹스 피스톨즈의 영향을 받아 결성되었다. 리더인 조 스트러머가 런던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구경하고 그만 ‘감동하여’ 펑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퍼브록 밴드 101'ers[5]를 탈퇴해 믹 존스[6]와 함께 클래시를 결성했다.[7] 그리고 1976년 12월에는 섹스 피스톨즈Anarchy in the UK 순회공연에 오프닝으로 참가, 펑크 물결 확산에 나섰다.

섹스 피스톨즈의 바톤을 이어잡았으나 단순한 워너비 피스톨즈를 넘어 본인들만의 오리지너리티를 가졌으며, 현재는 섹스 피스톨즈와 동격으로 대우 받을 정도. 혹자는 무정부주의에만 그쳤던 펑크씬의 정신을 선동적인 가사와 과격한 사운드로 저항정신을 내뿜었다는 것으로 영국 펑크씬의 발전형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한다.

DIY정신에만 입각하여 단순한 구조만을 고집했던 섹스 피스톨즈와 달리, 프로그래시브한 구조나, 헤비메탈을 연상시킬 정도의 강력한 사운드, 심지어는 레게 리듬까지 도입하는 등 펑크 록의 음악적 저변을 엄청나게 확장시킨 밴드이다.[8] 이 때문에 펑크 록을 음악성없다고 까는 평론가들도 더 클래시는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그들의 저항정신을 그대로 담아 수많은 밴드가 그들을 동경하고 펑크계로 뛰어들기도 했다. 리버틴즈가 대표적인 경우다.[9]

1986년 믹 존스와 조 스트러머의 불화로 해산을 맞았으나 2년 후 다시 화해를 하고 현재도 함께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하고, 공연을 하는 등 활동을 하고 있다.[10] 2002년 조 스트러머가 심장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최근에는 폴 시머넌이 블러데이먼 알반과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으며 고릴라즈 곡 Plastic Beach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다. 믹 존스도 고릴라즈의 라이브 세션에 참가하고 데이먼 알반이 클래시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을 볼때 친분이 있는것으로 보인다.[11] 참고로 시머넌은 뮤지션인데 지나치게 잘생겨서 클래시 활동 당시 별명이 '런던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 '미스터 핸섬'이었다.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화가로도 활동했다. 아들이 둘 있는데 역시 대단한 미남들로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3. 여담[편집]



  • 한국인들은 불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이 양반들은 욱일기카미카제를 매우 사랑하고 그 이미지를 자신들에게 적극 차용하곤 한다.더 클래시의 카미카제 티셔츠들[12] 션 레논 여친이 입었다가 한국인들한테 까인 그 욱일기 티셔츠가 바로 이 분들 티셔츠이다.[13] 일부 팬들은 '제국주의를 까려고 만든 티셔츠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14] 평소에도 카미카제 머리띠를 악세사리로 잘만 두르고 다니는 걸 보면(심지어 도쿄 공연에서도) 딱히 그런 깊은 뜻을 염두에 두고 입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 밴드가 욱일기와 가미카제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것은 절대로 극우 성향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15] 조 스트러머는 1970년대 말엽부터 ‘반나치 동맹(Anti-Nazi League)’과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으며 클래시 자체가 영국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밴드로 꼽힌다. 링크 여담이지만, 사실 카미카제라는 단어 자체가 품고 있는 의미가 서구권에선 본래와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심지어 카미카제 칵테일이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이 칵테일을 처음 만든 곳은 미국.링크

  • 초기 대표곡 White Riot. 클래시 멤버들은 1976년의 노팅 힐 폭동에 어쩌다 참여했었는데, 그때 조 스트러머가 든 생각은 흑인들은 이렇게 열받으면 폭동도 일으키고 그러는데 백인들은 찌질하게 아무것도 안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사가 섬뜩하다. "모든 권력은 돈있는 놈들에게 있고 거리에 쏘다니는 우리는 가진게 없네. 난 백인들의 폭동을 원한다!"

  • 한국 밴드인 크라잉 넛이 'OK목장의 젖소' 앨범에서 London Calling을 따온 '명동콜링'이라는 곡을 넣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도바츠텐이라는 밴드는 노동 CALLING이라는 곡을 이 곡의 제목에서 차용했다.

  • 또다른 대표곡인 Should I Stay or Should I Go은 1982년 처음 공개되었으나 활동중지 이후인 1991년 재발매되었을 때 훨씬 큰 인기를 얻어 각국 차트 톱 10에 들고 영국 차트 1위를 찍었다. 더 클래시의 유일한 UK차트 1위곡.

  • 대중적 인기로는 정점에 오른 곡 Rock the Casbah은 더 클래시의 곡들 중 유일하게 미국 빌보드 톱 10에 든 곡이다. 1979년에 이란의 지도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디스코 음악을 금지했던 일에 대한 노래이다. 걸프전이나 테러와의 전쟁 당시 재조명되기도 했는데 작사가인 스트러머는 속이 터질 것같다고 말했다. 권위주의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곡인데 미군이 마치 행진곡처럼 쓰니까 사람들이 반이슬람 곡인줄 알았던 것.


  • 영화 아이언맨 2편에서 이들의 곡인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쓰이기도 했다. 토니 스타크가 차고에서 작업하는 장면. 비디오 게임 파 크라이 4가 똑같은 곡을 오프닝과 트레일러에 쓰기도 했다. 또 이 곡은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조나단 바이어스가 동생 윌에게 알려 주는 곡이기도 하다.




4. 음반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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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섹스 피스톨즈가 앨범 1장으로 단명한데 비해 이들은 6개의 앨범과 다수의 EP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섹스 피스톨즈가 "펑크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줬다면, 클래시는 "펑크가 나아갈 길"을 보여준 셈.[2] Terry Chimes. 1집 앨범에 '토리 크라임즈(Tory Crimes), 즉 '보수당의 범죄들'로 표기되어 있다.[3] 믹 존스나 폴 시모넌이 리드 보컬을 맡은 곡도 꽤 있다.[4] 초기에는 기타가 3명(!)이었다. 키스 레빈이 있었는데, 몇가지 문제로 탈퇴했다. 키스 레빈 훗날 쟈니 로튼의 포스트 펑크 밴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td. 약칭 PIL)에 참여한다.[5] 펍 록 밴드로 정통 백인 R&B, 로큰롤 사운드를 표방했다.[6] 당시 미대생이었던 폴 시머넌과 London SS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었다. 믹 존스에게서 이미 밴드 가입 제안("니 목소리랑 기타치는건 참 좋은데, 니 밴드는 구려."가 믹 존스가 조 스트러머에게 한 제안이었다고 한다.)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 섹스피스톨즈 공연을 본 뒤 큰 충격을 받고 101'ers를 때려 치우고 믹 존스를 찾아간다.[7] 그리고 우연히 클래쉬의 공연을 본 한 관객이 충격을 먹고 펑크밴드를 만들겠다며 만든 밴드가 아나코 펑크 밴드인 CRASS 이다.[8] "조 스트러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에 레게를 가르쳤다" - 존 라이든. 1978년 일본 뮤직라인과의 인터뷰 중.[9] 믹 존스는 이들의 1집앨범 Up the Bracket을 프로듀스 하기도 하였다.[10] 이 시기 조 스트러머는 믹 존스 없이 클래쉬를 건사하며 클래시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Cut the Crap을 발매한다. 드러머 토퍼 히든도 헤로인 중독으로 쫓겨 났고, 폴 시머넌은 이 앨범에 거의 참여를 안 했기에 사실상 조 스트러머의 솔로 앨범이었고, 이마저도 매니저의 과도한 간섭 등으로 조 스트러머 자신조차 이 앨범을 싫어했다. 거기에 더해 이 앨범은 사운드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클래쉬 팬들에게서 클래쉬 앨범으로 안 쳐주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요즘에는 조금씩 재조명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앨범과 비교하면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시기, 믹 존스는 레게 디제이이자 초기 펑크 확산 및 레게-펑크 하이브리드의 혁혁한 공을 세운 돈 레츠같은 디제이과 Big Audio Dynamite를 결성한다. 하지만 평가가 막장에서 압권까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이유는 완전히 랩과 댄스뮤직으로 선회했기 때문에.[11] 여담이지만 두 밴드를 매니지먼트하는 회사가 같다.[12]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군부는 태평양 전쟁때 영국군에 대해 귀축영미 운운하며 카미카제 등의 공격을 퍼부었다.[13] 참고로 션 레논이 자기 여친을 비판한 한국인에 인종차별적 모욕을 퍼붓고 마룬 5 멤버 제시 카마이클이 동조했다.[14] 티셔츠에 Pearl Harbor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런 주장이 나온 것. 카우치 사건 당시에도 한 멤버가 더 클래시의 카미카제 티셔츠를 입은 것이 논란이 되자 이와 같은 변명을 했었다.[15] 비슷하게 지미 페이지도 나치 애호가이지만 그냥 밀덕에 가까우며 정치적으로는 평생 중립을 지키며 어떠한 의견도 표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