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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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시리즈
2.1. 미제 시리즈 (1차)
2.2. 이승만 시리즈 (2차)
2.3. 세종과 모자상 시리즈 (3차)
2.4. 동전
3. 대중문화 속 대한민국 환
4. 관련법률
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대한민국에서 1953년부터 1962년까지 유통시킨 통화. 통화에관한특별조치령에 의거하여 통용되다가, 긴급통화조치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통용이 금지되었다. ISO 4217 코드(1973년 제정)가 생기기도 전에 없어졌기 때문에 ISO 4217 코드는 없다. 보조단위로 1/100 단위인 "전"이 이어받아 지정되었으나 실제로 쓰이진 않았다. 기호는 한자를 사용하여 '圜'. 한자키를 눌러 변환할 때 '환'이라고 치고 누르면 안 나오고 '원'이라고 쳐야 나온다. 환을 환이라 쓰지 못하고[1]

본래 圜의 음은 '원'이었으나, 화폐로 쓰일 때는 다른 '원'의 의미와 구별하기 위해 환이라고 읽게 된 듯하다.[2] 1953년 다시 환 단위가 들어왔을 때 원이라고 쓰인 것도 아직 이 한자를 공식적으로는 원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나 다들 환으로 사용해서 환으로 굳어졌다. 1962년 환 화폐가 폐지되면서 이 글자는 쓰일 일이 없게 되어 자연히 잊히면서, 이 글자의 독음이 처음에는 원이었다는 것도 잊혔다.


환에서 원으로의 화폐 개혁을 알리는 대한뉴스 제 369호. 당시의 외래어 표기법 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인푸레숀’으로 표기되어 있다.[3]

위 시기를 보면 답이 나오겠지만, 한국전쟁의 후폭풍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1953년의 화폐개혁에 따라 100원=1환으로 교환한 것이다. 그러나 1962년의 화폐개혁에 따라 10환=1원으로 교환했다. 발권은 한국은행, 제조는 한국조폐공사로 되어있기는 한데 실제로는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소(동전 전량)와 워싱턴 D.C. 인쇄소(미제 시리즈(초기 지폐))가 일부 분담했다.

전란 직후라 그런지 환율이 참 다이나믹했다. 등장직후인 1953년 2월 환율이 60환/USD 오케이 240환!!, 그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인 1961년에 1,250환/USD이니 8년 평균으로 인플레가 50%에 달한 셈. (순간인플레는 300%를 넘었다.)

잊힌 화폐이기는 하지만, 이따금 화폐개혁 떡밥이 나올 때마다 만져지는 카드이기도 하다. 1백원이나 1천원을 1환으로 하여 달러와 비슷한 가치로 고친다든지.


2. 시리즈[편집]



2.1. 미제 시리즈 (1차)[편집]


미리 기술했듯, 미국 워싱턴 D.C.[4]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흔히 미제라 부른다.

이 화폐의 도입에는 상당한 곡절이 있다. 이 화폐를 제작한 시점은 한국은행은 커녕 한국은행법도 공표되기 전 미군정 시기인 1947년이다.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파일:통화발행고.png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의 통화발행고
세로 축: 원 / 가로 축: 연도 및 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군 진주 이후에도 군표 대신 종전대로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광복 이후 불법적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진주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지폐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합법적인 것으로 사후 승인해 줌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인쇄한 불법 지폐를 유통시켰다.출처:임성욱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던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재정 적자를 조선은행권을 찍는 것으로 해결하라고 미군정 재무국장 찰스 고든 중령에게 권유했다. 이때부터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통화팽창이 주된 원인이 되어 물가는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출처:임성욱

조선총독부의 불법 화폐 남발과 미군정의 통화정책으로 1945년 9월 총 통화액은 130억 정도였다. 통화발행고 90억에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음성 자금 40~45억을 합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남발한 화폐는 위폐로 의심받을 정도로 품질이 나빠 경제에 혼란이 생겼다.

그러자 미군정은 고작 천만원 정도의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이것이 소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누명을 쓴 독립운동가는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 활동을 한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 이관술이었다. 또한 김철수와 독립운동을 함께한 박낙종송언필, 6.10 만세 운동 지도자인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도 누명을 썼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를 검거한 경찰들이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에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총괄자 임영태는 친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조작 사건의 시초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라고 분석한다. 정판사 사건으로 부활한 친일파는 4.3 사건6.25 전쟁에서의 학살의 주범이 된다.

파일:노덕술최난수.jpg
정판사 사건 수사를 지휘한 친일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정판사 ‘위폐’ 사건을 통해 조병옥-장택상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경찰 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되고 미군정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됨으로써 향후 반공 체제 형성의 중요한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된다. 또한 법적 한도를 넘어선 피의자에 대한 장기 구금 및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강압 수사 방식이라는 일제 경찰의 유산도 정판사 ‘위폐’ 사건을 거쳐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위폐 공판 소요 사건에서의 비무장 대중에게 총을 쏘는 과잉 진압 방식 역시도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116) 1946년 가을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한 과잉 진압 및 이후 제주 4·3 항쟁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은 위폐 제조 범죄로 인해 민심이 불안해지고, 매점매석, 낭비 풍토가 조장되어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77) 이는 일제의 화폐 남발, 미군정의 일제 화폐 정책 승계, 각종 경제 실책 등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 모든 경제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폐위조범, 즉 정판사 ‘위폐’ 사건 관계자 및 공산당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군정 측이 이러한 공산당의 경제 교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5월 20일 미군정 당국은 백원짜리 신지폐, 즉 조선은행권 100원권 정(丁)권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으며,78) 7월 1일 신권을 발행하였다.(중략) 결국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를 통해 경제 혼란의 책임을 공산당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 져야 책임과 감수해야 할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조선총독부가 과거에 만든 불법 화폐의 효력을 미군정이 인정하는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에[5] 위조지폐가 대량 유통되어 경제혼란이 일어나자 새 화폐를 찍기로 하고 최순주 당시 조선은행 이사를 미국으로 불러 제작했다. 당시 모델로 삼았던 최순주가 가져간 구 대한제국시절 한국은행권때문에 단위를 한글로 원이라고 써놓고 한자로는 圜이라고 쓰는 바람에 미국에서 제작할때 이걸 환인줄 알고 제작했던 것. 그렇게 찍어놓은 지폐 105억환을 국내에 들여왔지만 그러나 미군정청은 정치적인 이유로 화폐개혁을 연기했고 6.25전쟁까지 터지면서 서울이 함락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 중에도 한국은행 중앙금고에 잠자고 있다가, 제작한지 6년이 다된 1953년 2월 17일부터 화폐개혁을 선포한 뒤 유통하기 시작했다.


앞면
뒷면
파일:미제 일환.jpg
일환[6][7]
(1953.02.17)
덩굴 무늬
한국은행 휘장
파일:미제 오환.jpg
오환
(1953.02.17)
파일:미제 십환.jpg
십환
(1953.02.17)
거북선
한국은행 휘장
파일:미제 백환.jpg
백환
(1953.02.17)
파일:미제 천환.jpg
천환
(1953.02.17)
  • 일환권과 오환권, 십환권과 백환권, 천환권은 각각 도안이 같다.
  • 또다른 특징으로는 韓國銀行券(한국은행권)과 각 지폐의 액면이 우횡서로 써져있다. 이는 역대 한국은행권 중 유일하다.


2.2. 이승만 시리즈 (2차)[편집]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사진이 주를 이뤄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으며,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이승만 박사 초상의 위치에 따라 좌(左)이박, 중앙(中)이박, 우(右)이박 등으로 불린다. 여담으로 한국 지폐사에서 갖은자가 쓰였던 마지막 시리즈다. 명칭은 발행 순서에 따라 갑을병정(甲乙丙丁)순으로 불렀다. 거기에 개정판이라면 개(改)를 붙여 개갑이라는 식이다.

앞면
뒷면
파일:신 십환.jpg
신(新) 십환[8]
(1953.03.17)
숭례문
총석정[9]
파일:좌이박 백환.jpg
신(新) 백환[10]
(1953.12.18)
이승만
독립문
파일:중앙이박 오백환.jpg
오백환
(1956.03.26)
당초 무늬
파일:오십환.jpg
오십환
(1958.08.15)
독립문
이순신 동상, 거북선
파일:우이박 백환.jpg
개(改) 백환
(1957.05.16)
이승만
당초 무늬
파일:우이박 오백환.jpg
신(新) 오백환
(1958.08.15)
액면가
파일:우이박 천환.jpg
신(新) 천환
(1957.03.26)
한국은행 휘장
이승만 시리즈의 발행 순서는 신 십환 → 신 백환 → 신 오백환 → 신 천환 → 개 백환 → 오십환, 신 오백환 순서이다.

  • 위 사진에도 있지만, 처음엔 미국 달러처럼 이승만의 얼굴이 지폐 중앙에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으로 막 접고 다니다보니 필연적으로 얼굴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것 때문에 구석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500환 이승만, 1000환 이승만이 사용 개시된 날짜인 3월 26일은 바로 이승만의 생일이다. 여담으로 1955년과 1956년의 3월 26일에는 이승만 탄신 기념우표도 발행됐다.


2.3. 세종과 모자상 시리즈 (3차)[편집]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새롭게 도안된 환권이다. 1962년 화폐 개혁 전까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쓰였고, 이 환권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대한민국 원으로 회귀했다. 처음으로 한자가 사라지고 한글로 표기한 권종들이다.

앞면
뒷면
파일:세종 오백환.jpg
개(改) 오백환
(1961.04.19)
세종대왕
한국은행 본관
파일:세종 천환.jpg
개(改) 천환
(1960.08.15)
횃불
파일:모자상 백환.jpg
개갑(改甲) 백환
(1962.05.16)
엄마와 아들
독립문
발행 순서는 개 천환 → 개 오백환 → 개갑 백환 순서이다.

파일:모자상.jpg
  • 이 중에서 개갑 100환(모자상)은 한국조폐공사제조 지폐 중 최단기간(1962. 05. 16.~06. 10., 25일)동안 유통된 지폐다. 미사용 기준 거래시세는 약 400만원대. 일명 "모자상"으로 색동옷을 입은 어린 아이와 어머니가 통장을 보고 흐뭇해 하는 표정이 그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당시 도안을 맡은 도안실장과 안면이 있었던 조폐공사에서 근무하던 여직원 권기순과 그 아들인 유재순이 모델이다. 이 당시에는 유명인이 아니다보니 모델이 영부인이라는 루머가 나돈 적이 있다. 권기순이 조폐공사에서 일하다가 함흥냉면집 "오장동 흥남집" 사장 아들과 결혼하고 나서 퇴사를 했는데, 어느날 조폐공사에서의 상사가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호출해서 영문도 모른 채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사진이 그대로 새 지폐의 도안이 되었다고. 지금 보면 엄연한 초상권 침해지만 별다른 법적 갈등은 없었다. 이후 이들 모자는 흥남집을 물려받아 운영했고, 지금도 흥남집 2층에 살아계시다고 한다. 참고로 수요미식회, 2004년 1월 18일 SBS TV장학회 방송분에서도 언급되었다.
    • 따라서 백환 지폐에는 4가지의 타이들이 있다.
      • 최초로 여성인물이 들어간 지폐.
      • 최단기간 유통된 지폐(1962. 05. 16. ~ 06. 10. 25일)
      • 미성년자 인물이 들어간 유일한 지폐
      •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이 들어간 지폐
  • 판례 중에 1953. 2. 26.[11]부터 “환”이 사용된 것과[12] 1962. 6. 18.[13]부터 “원”이 사용된 것[14]을 각각 공지의 사실[15]로 본 것이 있다.
  • 2021년 11월,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돌잔치 사진에 꽂혀있던 개(改) 천환 화폐를 일본 엔화로 오해하고 지적했다가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 윤석열은 1960년 12월생으로 개(改) 천환권 발행시기인 1961년 12월에 돌잔치를 열었고, 이 화폐가 찍혔던 것으로 보인다.


2.4. 동전[편집]


파일:십환 주화.jpg
화종
10환화
최초 발행
1959.10.20
소재
구리(95%),
아연(5%)
도안
무궁화(앞면), 액면(뒷면)
지름
19.1mm
무게
2.46g
제조처
미국 필라델피아 제조국
발행
중지

1962년 6월 10일[16]
파일:오십환 주화.jpg
화종
50환화
최초 발행
1959.10.20
소재
구리(70%)
아연(18%)
니켈(12%)
도안
거북선(앞면), 액면(뒷면)
지름
22.86mm
무게
3.69g
제조처
미국 필라델피아 제조국
발행
중지

1962년 6월 10일[17]
파일:백환 주화.jpg
화종
100환화
최초 발행
1959.10.30
소재
구리(75%)
니켈(25%)
도안
이승만(앞면), 액면(뒷면)
지름
26.0mm
무게
6.74g
제조처
미국 필라델피아 제조국
발행
중지

1962년 6월 10일

환화 동전 발행을 알리는 대한뉴스 제 237호.

10환(무궁화), 50환(거북선), 100환(이승만과 청와대 상징) 3종류가 있었다. 1959년 10월 20일에 10환과 50환이 먼저 발행되었고, 10월 30일에 100환이 발행되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주조 기술이 부족해서 미국의 필라델피아 제조국에서 주조했다.

이후 3차 통화조치 때 10환과 50환은 그대로 1원5원으로 계승되었으나, 100환은 박정희 정권때 다보탑 10원으로 갈아버렸다. 원래 100환은 첨성대로 도안을 변경하여 발행할 예정이었으나 백지화 되었다. 참고로 10환과 50환 주화는 임시조치법으로 1975년 3월 22일까지 각각 1원과 5원으로 통용되었다. 당시에 동전이 상당히 부족했으며, 1965년까지는 원 단위 주화는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쓰게 된 것이다. 100환 주화는 앞에 언급된 이승만 초상화 때문에 10원 주화로 통용되진 못했다. 링크

10환과 50환 동전은 13년동안이나 더 시중에 돌아다닌 덕택에 현재도 잔존량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100환은 회수되어 폐기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잔존량이 적은 편이다.

한편 한국은행으로 회수된 100환 동전은 수 년간 묵혀져있다가 훗날 등장한 백원 주화의 재료로 쓰이기 위해 녹여졌다.

파일:external/www.sixbid.com/375989m.jpg

다른 여담으로는 1893년에 발행된 일환 은화가 있다. 그런데 괴랄한 것은 분명히 저 주화는 일환이 맞는데도 액면의 절반에 해당하는 닷량(5냥)이라는 글자가(왼쪽 우측을 볼것) 찍혀 있다는 것. 이는 재정 충당을 위해 전년도에 닷냥 은화를 만들고 남은 소전(동전의 디자인을 새기지 않은 금속판 상태의 동전)에다가 액면을 두 배로 써서 발행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극인(주화에 디자인을 새기는 기계)의 디자인을 제대로 고치지 않은 것.(...)[18] 그래서 일환과 닷량은 액면상으로는 두 배의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규격이 완전히 똑같다.


3. 대중문화 속 대한민국 환[편집]


  • 넷마블섰다에서는 '그때 그 시절'을 표방하고 있는지라, 이 시절의 지폐가 등장한다. 물론 게임상으론 돈다발(!!!)로 나오기에 큰 가치는 없다.
    • 비슷한 사례로 애니팡 섯다도 있는데, 이쪽은 10만, 50만, 100만, 500만 환 지폐가 등장한다.[19] 디자인은 1958년판 500환권에서 이승만 초상화가 빠진 형태와 비슷하며 액면별로 색상이 다르다.
  • 만화 타짜 1부도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주로 환을 썼는데, 중간에 원으로 화폐개혁이 일어난다. 하지만 인당 최대 5000환만 500원으로 바꿔준다고 공표된 탓에 '화란'이와 결혼생활을 꿈꾸던 고광열이 돈을 더욱 벌기 위해 '허대철'이란 호구에게 다시 작업을 걸러 광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아귀에게 당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하여 고니와 아귀의 대결이 성사되는 등 작중 매우 중요한 배경사건이다.


4. 관련법률[편집]


  • 1953년 2월 15일부터 1962년 6월 9일까지 제정된 법령 중 벌금 또는 과태료에 관한 규정을 적용할 때에는 그 규정에 정하여진 화폐단위 환을 원으로 보며(벌금 등 임시조치법 제4조 제3항), 그와 같이 산출된 벌금의 다액(多額)이 10만원 미만일 때에는 그 다액을 10만원으로 한다(같은 법 제3조). 다만, 벌금, 과료 또는 과태료의 금액을 일정한 금액에 배수를 곱하여 정할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같은 법 제5조).


5.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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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圜은 '둥글 원', '돌 환'이라는 두 가지 훈음이 있는데 어차피 圜은 완성형에 없는 확장한자라 그냥 '원'에만 배당한 듯. 참고로 대한제국 원 시절의 '원'도 圜이라는 한자를 붙여썼다.[2] 실제로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원을 환이라고 읽은 작품들이 좀 있다.[3] 딱 보면 알겠지만 전형적인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었다. 외래어 표기법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되는 과정에서 이런 일본식 영어 발음이 대거 삭제되었다.[4] 필라델피아에 있는 것은 동전 주조창이며, 지폐 인쇄창은 로널드 레이건 시절 포트워스에 인쇄창을 추가로 세우기 전까지는 워싱턴 D.C.의 그것이 유일했다.[5]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하여 책임을 돌렸으나 역사학자 김기협에 따르면 "조선 총독부가 찍은 30억 원은 불법으로 찍은 위조지폐였다. 황급하게 찍느라고 품질도 나쁜 것이 많아 당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잘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 위조지폐의 유통 능력을 미군정이 보장해주었다. 30억 원 위폐사건의 핵심 공범인 미군정이 1천수백만 원의 공산당 위폐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출처[6] 미제 시리즈 중 유일하게 백색지와 황색지 버전이 존재한다.[7] 황색지는 판번호 1~43번, 백색지는 판번호 43~50번이다. 여기서 판번호 43번은 황색지와 백색지가 혼재하는 영역이다. 판번호의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듯, 백색지가 황색지보다 발행량이 적기 때문에 황색지보다 훨씬 고가에 거래된다.[8] 백색지와 황색지 버전이 존재한다. 십환은 백색지와 황색지의 가격 차가 크지 않은 편이다.[9] 북한의 건축물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는 아직 남북이 갈라졌다는 인식이 적었던 걸로 보인다. 당연한 것이 저때는 분단되고 나서 8년, 6.25 전쟁으로 북한 대부분을 일시 수복했던 게 불과 2년 반 전이다.[10] 십환권과 마찬가지로 백색지와 황색지 버전이 존재한다. 황색지가 백색지보다 훨씬 고가에 거래된다.[11] 법률 제277호 긴급금융조치법 제3조 제1항 참조.[12] 대법원 1960.1.14. 선고 4292민상493 판결. 본문 중에 단기 19XX년(...)이라는 표기가 보이는데 아마 기존에 단기 42XX년으로 제대로 표기되어 있던 걸 숫자만 일괄적으로 변경해서 이 모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13] 법률 제1091호 긴급금융조치법 제3조 제1항 참조.[14] 대법원 1991.6.28. 선고 91다9954 판결. 전술한 4292민상493 판례를 참조했다고 되어 있다.[15]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소송상 불요증사실, 즉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의 일종이다. 역사 사건, 천재지변, 전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16] 유통은 1975년 3월 22일까지 허용[17] 유통은 1975년 3월 22일까지 허용[18] 당시는 조선에 근대적인 동전을 발행하는 기술이 없어서 이런 일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19] 게임상의 이미지로 1000환이 버스토큰이다. 인플레이션 1만 환 내외는 버스토큰을 엽전처럼 꿴 뭉치로, 1000만 환부터는 골드바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