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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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대중음악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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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빙 크로스비 - White Christmas[1] (1942)
프랭크 시나트라 - I'll Never Smile Again[2] (1940)
1950년대




빌 헤일리 & His Comets - Rock Around The Clock[3] (1954)
엘비스 프레슬리 - Hound Dog[4] (1956)
196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 It's Now or Never[5] (1960)
비틀즈 - I Want to Hold Your Hand[6] (1963)
1970년대




몽고 제리 - In The Summertime[7] (1970)
엘튼 존 - Goodbye Yellow Brick Road[8] (1973)
1980년대




Various Artists - We Are the World[9] (1985)
마이클 잭슨 - Billie Jean[10] (1983)
1990년대




엘튼 존 - Candle in the Wind 1997[11] (1997)
머라이어 캐리 & 보이즈 투 멘 - One Sweet Day[12] (1995)
2000년대




레이디 가가 - Poker Face[13] (2008)
에미넴 - Lose Yourself[14] (2002)
2010년대




에드 시런 - Shape of You[15] (2017)
리아나 (Feat. 드레이크) - Work[16] (2016)
2020년대


더 위켄드 - Blinding Lights[17] (2019)
기타




휘트니 휴스턴 - I Will Always Love You[18] (1992)
루이스 폰시 (Feat. 대디 양키) - Despacito[19] (2017)




처비 체커 - The Twist[20] (1960)
머라이어 캐리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21] (1994)


1. 개요
2. 특징
3. 음악구조 용어
4. 역사
4.1. 대중음악의 기원
4.3. 1950년대 중후반, 로큰롤 전성시대
4.4. 1960년대, 소울이 정립시킨 현대 대중음악의 뼈대
4.4.1. 196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5. 1970년대, 세분화되기 시작하는 수많은 장르, 위대한 음반의 시대
4.5.1. 영국 음악계
4.5.1.1. 비틀즈 해체 후, 멤버들의 이야기
4.5.2. 미국 음악계
4.5.2.1. 미국 흑인 음악계
4.5.4. 197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6. 1980년대, 비디오 시대의 도래와 장르간의 크로스오버
4.7. 1990년대, R&B힙합
4.8. 2000년대, 흑인 음악의 최전성기
4.9. 2010년대, EDM과 힙합
4.10. 2020년대 초반, 힙합 vs 팝
4.10.1. EDM과 힙합의 결합 트랩(음악)의 대흥행
5. 국가별 대중음악
5.1. 게르만
5.2. 동아시아
5.3. 라틴
5.4. 동구권
5.5. 중동풍
5.6. 대중음악의 상징적인 인물들
5.6.1. 1950년대 이전
5.6.2. 1960년대
5.6.3. 1970년대
5.6.4. 1980년대
5.6.5. 1990년대
5.6.6. 2000년대
5.6.7. 2010년대
5.6.8. 2020년대


1. 개요[편집]


/ Popular music

널리 많은 사람들, 즉 대중이 즐기는 음악을 일컫는다. 이 문서에는 영미권, 그 중에서도 미국의 대중음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미국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로는 , 컨템퍼러리 R&B, 힙합, 리듬 앤 블루스, 소울, 펑크(Funk), 디스코, 댄스, , 얼터너티브 록 등이 있다.

2. 특징[편집]


대중음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해왔으며 시간과 장소, 사람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르다.

사전적으로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중에게 중점을 둔 음악을 말한다. 순수음악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감각적인 대중성과 오락성 그리고 상업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1] 또 순수음악은 더욱 긴 시간의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대중음악은 짧은 시간의 유행성을 가지고 있다.[2] 하지만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의 속성을 계속해서 흡수해오면서 예술성과 심미성을 얻어나갔고 소위 말하는 예술성은 대중음악을 논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대중음악을 가리켜 흔히들 이라고 부른다. 잘못된 사용법은 아니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팝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큰 의미의 대중음악이 있고, 작은 의미로는 장르로서의 팝이 있다. 전자는 Popular music 내지 줄여서 그냥 Pop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후자는 보통 Pop이라고 하지 Popular라고 하지는 않는다. 줄임말이 의미가 축소되면서 고유명사화된 것.

대중음악은 2010년대에 들어 인터넷유튜브 등의 매체 발달로 인해 세계 최대의 음악 시장인 미국조차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파급력과 영향력이 이전보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대중음악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막강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 첫 문제는 미국의 대중음악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의 음악이 자국에서조차 인기가 없을 정도로 자생력이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 이거에 의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케이스이다.[3][4]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에 큰 자국어 시장을 보유한 스페인과 포르투갈[5] 자국 대중음악 가수들의 인기 기반이 탄탄한 이탈리아, 러시아, 튀르키예[6]를 제외하면 앞서 말했듯이 자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자국에서조차 영미권 대중음악보다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아예 독일은 힙합/랩이 차트를 쓸어갈 정도니 말을 다했다. 동유럽 같은 경우 러시아, 튀르키예와 남유럽의[7] 경우 자국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영미팝으로 도배되고 있다.


3. 음악구조 용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역사[편집]


대중음악의 역사

파일:external/gigaom.com/timeline1.jpg


4.1. 대중음악의 기원[편집]


대중음악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장르들의 뿌리는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영국 음악 역시 대중음악의 정의를 내리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초기의 대중음악은 클래식에서 혼합된 미국 흑인 음악인 블루스스윙 재즈, 틴팬앨리(Tin-Pan-Alley) 지역 작곡가들이 상업성을 노리고 유럽 오페레타를 더욱 가볍게 만든 백인 음악인 트레디셔널 팝(Traditional pop)밖에 없었다.


4.2. 초창기, 스윙 재즈트레디셔널 팝[편집]


대중음악 시대의 실질적인 첫 번째 스타는 빙 크로스비이다. 트레디셔널 팝의 특징으로 꼽히는 크루닝(Crooning) 역시 빙 크로스비가 홀로 개발한 것이다. 동시대에는 재즈 음악 역시 대중음악이었는데, 루이 암스트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금 더 지나면 이 흑인 음악인 재즈가 백인들의 취향에 맞게 한 번 변화한 스윙 재즈가 인기를 끌게 되는데, 현대적인 대중음악의 시작으로도 볼 수가 있다. 글렌 밀러토미 도시가 이 스윙 재즈 시대의 대표적인 밴드리더였다. 스윙 재즈는 이 시대 미국 음악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시대 미국 하면 스윙 재즈였고, 미국의 대중 음악이라 해도 스윙 재즈가 먼저였다.

이 시대에, 대중음악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음악 차트"이다. 빌보드는 1936년 최초의 현대적인 음악 차트를 시작했으며, 1940년에는 현대적인 싱글 차트를 시작하여, 미국 전역에서 인기 있는 곡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한 세대를 지나면, 트레디셔널 팝이 정형화 되게 되었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대중음악계 최초의 엔터테이너 프랭크 시나트라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40년 토미 도시 악단에 들어가 보컬이 되었는데 이때 발표한 "I'll Never Smile Agai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를 하며 돌연 스타덤에 올랐고, 10대 여자들에게 특히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이때 얻은 별명이 "Idol of the bobby soxer"[8]였다. Bobby soxer는 그의 소녀 팬층을 일컽는 말이었는데 그 소녀 팬층이 착용하고 있던 특유의 양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시대에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 등의 가수도 프랭크 시나트라에 비견할 만한 상업적 성공과 인기를 얻었다.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는 프랭크 시나트라보다 시대의 아이콘 적인 면은 없지만, 차트 성적이나 히트곡 수로만 보면 프랭크보다 월등했다.

토니 베넷과 코미디언 출신 딘 마틴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남성 4중창단들의 활약도 이 당시 돋보였다.


4.3. 1950년대 중후반, 로큰롤 전성시대[편집]


1950년대에 흑인음악인 블루스가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블루스가 스윙재즈를 흡수하면서 리듬감이 중요해지고 리듬 앤 블루스, 줄여서 R&B가 탄생한다.[9] 또 한편으로는 백인음악인 컨트리와도 결합하며 비트가 강한 로큰롤이 탄생한다.[10]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트레디셔널 팝을 즐겼다. 그러나 1950년대 초중반 이후 로큰롤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떠오른다.[11]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가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비주류였던 로큰롤 장르를 음악계 주류로 만든 일등공신 역할을 하게 된다. 블루스는 여전히 마이너였기에 대중음악은 백인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8년부터, 미국에서는 "락앤롤의 종말"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58년 제리 리 루이스의 13세 사촌과의 결혼, 리틀 리처드의 "락앤롤은 사탄의 음악이다!" 발언 이후 가수 생활 은퇴[12], 척 베리의 체포[13], 이 사건들로 인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입대[14], 1959년 버디 홀리를 포함한 락앤롤 가수 3명의 경비행기 추락, 같은 해 락앤롤을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한 라디오 디스크 쟈키 앨런 프리드페이올라 사건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락앤롤 정신은 사장되고야 말았다.


4.4. 1960년대, 소울이 정립시킨 현대 대중음악의 뼈대[편집]


로큰롤 음악이 사장되어 버리자, 1960년대 초반의 미국 음악계는[15] 크게 세 가지의 음악 장르가 주류가 되었다.

먼저 첫 번째로 소울R&B를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았다. 1959년, R&B의 대부 레이 찰스What'd I Say를 시작으로 일약 최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하고, 모타운의 초기 아티스트들도 히트하기 시작한다. 로이드 프라이스,[16] 브룩 벤턴[17]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로는, 락앤롤과 기존의 트레디셔널 팝 등을 섞은 팝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리키 넬슨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는, 이 로큰롤 음악에서, 로큰롤 정신은 빼버리고 특유의 멜로디만 남은 댄스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18] 처비 체커The Twist를 시작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바비 루이스의 Tossin' and Turnin',[19] 처비 체커의 Pony Time,[20] 디 디 샤프의 Mashed Potato Time[21]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1960년대 초반 미국 대중음악계의 주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대중음악계에 큰 전환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사실상 유명을 다한 로큰롤이 바다 건너 영국에서 유행하면서 재즈와 결합하게 되고 자연스레 스키플 밴드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였던 비틀즈가 1964년 미국에 진출하게 되고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시작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며 범지구적 인기를 구가한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현대 대중음악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며 세부 장르들이 태동하고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22] 비틀즈는 로큰롤에서 록 음악을 형성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하면서 대중음악에서 록의 입지를 다지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든다.[23]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에 상상을 뛰어넘는 광풍적인 판매량을 보인다. 비틀즈의 음반이 열광적으로 팔리며 기존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24] 그리고 1960년대부터 록 음악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로큰롤은 발전하면서 그 뿌리인 컨트리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다양하고 실험적인 하위 장르를 포함하는 하나의 형식을 갖춘 상위 장르로 록 음악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1960년대 초중반부터 음악계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이 격변하기 시작하며 1960년대 후반기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시작하여 영화계도 현대적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에 비틀즈가 만든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이러한 고전적인 시대에서 현대적인 시대로의 진화 시점에 비틀즈가 강력한 오케스트레이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25]

블루스가 영국으로 건너가 만들어진 브리티시 블루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R&B 밴드에서 시작했던 더 후는 영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비틀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I Can't Get No) Satisfaction같은 명곡으로 하드 록의 시초를 열면서 젊은 층의 큰 지지를 받았고 이는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로 상징되는 히피 문화는 절정으로 이루어지다가 1970년대에 끝을 맞는다. 한편 1965년, 비틀즈Yesterday[26]와 싱글곡 모음집이 아닌 작품으로 보는 '앨범'의 시초가 되는 걸작을 내놓는데 바로 Rubber Soul이다. Rubber Soul 이전에도 '명곡'들은 많았지만, 대중음악계 최초의 '명반'은 Rubber Soul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로 앨범시대를 불러온 시초작이다. 이 Rubber Soul을 시작으로 자극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주도적으로 명반을 내놓기 시작하는 대앨범시대가 도래한다.

그리고 1966년, Rubber Soul에 충격받은 비치 보이스브라이언 윌슨은 대중음악의 '완벽한 고전'으로 불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Pet Sounds를 탄생시키며 이것이 대중 음악가들에게 많은 충격을 몰고 온다. 그중 God Only Knows는 앞으로 현대 대중음악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들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완벽한 작곡이라는 평론을 받았다.[27] 비치 보이스Pet Sounds에 충격받은 비틀즈는 1967년, 등장 후 80년대부터 33년간 고정적으로 가장 위대한 음반으로 평가받던 음악사 위대한 역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28]를 탄생시킨다.

이 작품이 위대하다 평가받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크게 보면 일종의 유행이나 다름이 없던 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고 다른 음악들과 만나 확장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 그리고 1960년대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분리가 강하던 시기였는데 페퍼 상사20세기까지의 고전 음악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분리와 고립을 넘어 서양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 그리고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에 이전까지 확보했던 대중성에 기초해 위대한 예술이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덕목인 '보편성'을 획득한 첫번째 사례라는 것이다. 비틀즈 신드롬이 생겼을 때 당혹해하던 기성세대들도 페퍼 상사는 거부감 없이 들었고, 소위 고급 문화를 지향하는 클래식 음악계도 페퍼 상사를 통해 받은 신선한 충격을 솔직하게 고백했다.[29]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바꾼 음반 중 하나다.[30]

한편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같은 해, 중요한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를 탄생시킨다. 앤디 워홀이 밴드의 후원자로서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었으며 펑크 록, 개러지 록, 익스페리멘탈 록, 뉴웨이브, 슈게이징, 노이즈, 고스 등 그외 하부 장르가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31]

비틀즈의 Rain 등으로 시작됐다고 평가되는 마약을 한 몽환적인 느낌의 록 음악이 유행하는데, 이를 사이키델릭 록이라고 한다. 또 다른 역작 Revolver가 시작하고 페퍼 상사가 상징하는 사이키델릭 록의 사조를 바탕으로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대중음악계를 뒤흔든다. 이 사조는 1970년까지 이어지다가 샤론 테이트 암살사건으로 히피 문화가 몰락하고 사이키델릭 록을 이끌던 3J[32]가 비슷한 시기에 요절하며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함께 이끌었던 롤링 스톤스는 초기에는 블루스나 로큰롤 곡들을 커버하거나 비틀즈가 써준 곡을 받아 발매하는등 그저 그런 행보를 보였으나, 1965년 키스 리처드의 자작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시작으로 이후 롤링 스톤스 4대 명반이라 불리는 앨범들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로큰롤에서 록 음악이 아직 완전히 형성되기 전부터 '자유', '저항', '퇴폐'를 불어 넣어 현대에 일컫는 록의 정신을 세겼으며, 음악적 영향력으로 보면 록밴드로는 그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구르는 돌이라는 명칭답게 지금까지 구르고 굴러오며 현재는 세계 최고의 록밴드의 자리에 올라섰다.

1966년,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채운 명반 Aftermath을 시작으로 평론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그들의 음악성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7년 Between the Buttons를 시작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역작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재거/리처즈의 작곡 능력과 브라이언 존스의 편곡 능력 및 악기 연주 능력이 조화되어 롤링 스톤스의 앨범들 중 유일하게 기존의 이미지를 버리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록을 지향한 앨범이다.

1960년대 초반, 포크 음악에는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등장하며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데 밥 딜런이 대중음악계에 남긴 유산은 당시 의미없는 낱말에 지나지 않은 노래 가사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문학적이고 좀 더 은유적인 이야기를 담게 하며 대중음악에 부재했던 철학을 부여 했다는 점이다.[33] 밥 딜런비틀즈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렇게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이 시기 밥 딜런이 출시한 Highway 61 Revisited[34]Blonde on Blonde[35]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Highway 61 Revisited에 수록된 밥 딜런의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은 명실상부 밥 딜런의 대표곡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을 꼽을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곡이다.[36]

이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버즈의 활동기이기도 하다.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컨트리 록 등 여러 장르에 음악적으로 기여하여 1960년대와 그 이후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특히 맥귄은 이미 버즈 결성 이전부터 비틀즈의 곡들을 모두 어쿠스틱으로 편곡해 부를 정도로 열렬한 팬이어서 1964년도 비틀즈의 앨범 A Hard Day's Night에서 조지 해리슨이 사용한 12현 리켄배커 기타에 영향을 받아 버즈도 같은 기타를 사용했으며 조지 해리슨과 로저 맥귄의 쟁글거리는 기타 사운드는 훗날 쟁글 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러 혼란을 겪은 밴드인데, 1967년에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The Notorious Byrd Brothers는 무그 사운드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흡수해 찬사를 받으며 버즈Pet Sounds로 남게 되었다.

로저 맥귄과 크리스 힐먼만 남은 버즈는 그램 파슨스와 힐먼의 사촌인 케빈 켈리를 기용해 테네시, 내시빌에 박혀서 Sweetheart of the Rodeo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음악적 충돌과 저조한 판매량 역시 갖가지 충돌을 낳다가 남아공 투어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그램은 탈퇴했다. 이후 이 앨범은 얼트 컨트리 록의 시발점으로 재평가 받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 버즈의 또 다른 명반이 된다.

1964년에 데뷔한 킹크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록 밴드이다. 1966년의 Face to Face를 시작으로 음악적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전곡이 레이 데이비스의 자작곡으로 이뤄진 첫 앨범으로 음악적으로 큰 진화를 이룬 작품이었다.[37]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며 발표한 싱글 Waterloo Sunset가 큰 히트를 내었고, 1967년 발표된 앨범 Something Else by the Kinks은 밝은 로큰롤 성향이 줄어들고 영국적인 멜로디가 있는 서정적인 곡들 위주로 짜여진 앨범이었다. 이로서 여러 뮤지션이나 평론가, 프로듀서들이 이른바 킹크스 사운드(Kinks Sound)로 지칭하던 타 밴드들과 다른 킹크스만의 독창적인 사운드가 완성된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미국 시장에서 대실패 등, 큰 실패를 맛보고 안 좋은 일을 연이어 겪는다. 현대에 와서 킹크스는 영국 포크 음악과 전통을 추구하면서 멜로디를 만들어 '영국스러움'이나 '팝 멜로디', '서사가 있는 가사'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38]

모타운을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은, 미국 음악계의 3분의 1이 날아간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로도 계속 전성기를 누렸다. 모타운은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포 탑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마사 앤 더 밴델라스, 더 미라클스 등의 아티스트를 기점으로 미국 음악계를 점령해갔다. 이 중에서도 슈프림즈는 비틀즈에 비견할 만하다 할 수 있는 인기를 누린다.[39] 같은 시기 윌슨 피켓, 오티스 레딩 등의 애틀랜틱 레코드, 스택스 레코드 아티스트들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매했다.

소울 음악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가교 역할을 한 에타 제임스, 소울의 왕이라 불리우던 쌍두마차 샘 쿡오티스 레딩, 그리고 시카고 소울의 기린아 커티스 메이필드 등이 이 당시에 유명했던 인물들. 또한 흑인음악의 대중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아이즐리 브라더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다.

1963년에는 로네츠Be My Baby(로네츠)가 출시한다. 비틀즈, 브라이언 윌슨과 같은 스튜디오 개척자들을 위한 로제타 석이라 칭해지는 이 희대의 명곡은 사상 최고의 팝 레코드 중 하나로 불린다.

1967년에는 오티스 레딩이 부른 곡 Respect아레사 프랭클린이 커버해서 발표한다. 아레사 프랭클린 버전은 당시 막 시작되던 페미니즘과, Black Power Movement(흑인 자부심 고취 운동)에 대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곡이었는데, 페미니즘적인 사상이 들어가 있는 최초의 노래 중 하나이며, 백인들에 영합되려고 했던 모타운과는 다르게 당시 미국 흑인들의 사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흑인 음악인 소울, R&B, 재즈 등이 서로 결합되어 현재의 수많은 흑인 음악의 모태인 펑크(Funk)가 탄생한 시기다. 소울이라는 음악 장르를 완성했고, R&B의 유행에도 큰 업적이 있으며 펑크라는 장르를 만든 소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은 이 장르의 개발과 대중화를 거의 홀로 이끌었다. 1965년 Papa's Got a Brand New Bag (Part 1)으로 대중화의 서막을 알렸고, 이후 60년대 중후반 수많은 펑크 히트곡을 내놓는다. 제임스 브라운이 펑크를 대중화 시키면서, 수많은 펑크 아티스트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아이즐리 브라더스가 있다. 소울을 대표하는 제임스 브라운의 명곡으로 I Got You (I Feel Good)이 있다.

다시 하드 록으로 돌아오면, 1966년에 각 분야의 최고들인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가 결성한 세계 최초의 슈퍼밴드, 크림이 등장하는데 크림은 블루스 베이스의 초고음과 즉흥 연주를 보였으며 이들은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하드 록의 발전과 헤비 메탈 장르의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 시기 비틀즈Helter Skelter가 최초의 헤비 록 혹은 메탈로서 헤비 메탈의 탄생을 예시한다. 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역주행 사례로 크림Disraeli Gears 앨범에 수록된 Sunshine of Your Love가 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비로소 로버트 플랜트를 영입하며 완전체를 이룬 레드 제플린과 1970년대에 결성되는 블랙 사바스와 함께 하드 록의 불경한 삼위일체[40]를 이루는 딥 퍼플이 데뷔하며, 레드 제플린은 1969년 Led Zeppelin 앨범을 시작으로 1970년대 하드 록의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다. 레드 제플린의 이 시기 대표곡으로는 Babe I'm Gonna Leave You, Good Times Bad Times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 4월에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한 것이다.[41] 대중음악계도 이 시기 대대적인 조의를 표했으며, 대표적으로 비틀즈는 1968년 후반기 명반 The BeatlesBlackbird[42]로 조의를 표했다.이외에도 비틀즈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부셨고 민권법 운동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인종차별 완화에 여러가지 기여를 했다.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가 혜성같이 등장하여 이펙터 등의 사용을 정립하고 좡좡거리는 주법을 퍼뜨려 이후의 록 음악계에서의 기타 연주법에 대한 기틀을 잡았다. 기타리스트의 역사는 이 사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는 기존의 흑인 블루스 연주자나 팬들한테는 상당히 멸시받았기도 했지만 이후 재즈, 소울 음악, 펑크 등 흑인 음악계도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아들여 큰 발전을 이룩해서 헨드릭스에게 가던 질타는 후대에 남긴 영향력이 워낙 거대했기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43]

뮤직 비디오도 이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비틀즈가 최초로 광고 목적으로 1966년 Paperback Writer, Rain 싱글 발매 때 프로토 타입의 영상을 제작했고, 그 후 A Day in the LifeStrawberry Fields Forever, Penny Lane같은 독특한 영상미를 추구하는 초기 예술성이 잡힌 현대 뮤직 비디오의 시초격 작품을 제작한다.

이러한 수많은 발전과 업적들로 인해서 서양에서 흔히 이 시기를 대중음악사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부른다.


4.4.1. 196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편집]




4.5. 1970년대, 세분화되기 시작하는 수많은 장르, 위대한 음반의 시대[편집]


이 시기가 록 음악 최대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음악사를 들었다 놨던 비틀즈가 1970년대가 시작되는 1970년에 해체하면서 이후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하드 록프로그레시브 록, 시각적 충격을 강조한 글램 록이 등장하고, 미국에서는 좀 더 팝 친화적인 록인 소프트 록, 그리고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은 로큰롤의 원류 음악을 받아들인 루츠 록과 분파로 하트랜드 록, 컨트리 록이 등장하고 또한 개러지 록에 뿌리를 둔 펑크 록(Punk rock)이 등장했으며 블루스 록도 전성기를 맞으며 록이란 록 음악은 거의 전부 등장한다.


4.5.1. 영국 음악계[편집]


1971년 롤링 스톤스는 롤링 스톤스 4대 명반 중 하나인 Sticky Fingers를 발매하여 최전성기를 보이고 더 후도 그들의 명반 Who's Next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데뷔한 밴드중에서 1970년대에 인기를 끄는 밴드들이 등장하게 된다. 에릭 클랩튼을 중심으로 한 블루스 록 역시 큰 인기를 얻었으며, 70년대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인 Layla가 71년 초에 발매가 된다.[44] 롤링 스톤스와 더 후의 71년도 앨범의 명곡을 하나씩 적어두면 Brown Sugar, Baba O'Riley가 있다. 롤링 스톤스는 바로 다음 해 영국 밴드의 손으로 만든 아메리칸 록의 금자탑이라 평가받는 그들의 최고 역작 Exile on Main St.를 발매하나, 상업적인 면에서는 처참했는데 이후로 잠시 침체기에 든다. 그러나 Angie같은 발라드 명곡을 내놓기도 한다.

1970년대는 하드 록의 전성기로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중 레드 제플린[45]은 1971년 하드 록, 고전 메탈 최고의 걸작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언급되는 Led Zeppelin IV[46]를 내놓는데 레드 제플린의 아이콘이자 단일곡으로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명곡 중 하나Stairway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이 Stairway to Heaven은 은유적인 문학적 가사와 그에 걸맞는 소설 구성같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완벽한 구조, 전/초/후반부 마다 달라지는 장르, 8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명곡이다.

그들 커리어 최고의 작품 이후, 1973년 성공적인 Houses of the Holy[47] 앨범을 넘어 1975년 Physical Graffiti 앨범을 만들어 내는데 하나하나 각 분야의 최고라 불릴 수 있는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의 역량이 최고점에 달해 있는 작품이다. 수록된 대표적인 명곡으로 Kashmir[48]가 있다. 이런 명반들을 줄이어 내놓았는데.. 1977년, 로버트 플랜트의 5살 아들이 사망하며 팀 해체의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이겨내고 밴드로 돌아오는데도 불구하고 1980년, 존 본햄이 사망하며 레드 제플린은 해체하게 된다.

레드 제플린은 대중음악 역사상 멤버 모두가 가장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밴드다. 멤버 전원이 한 손에 들 정도로 대단한 역량을 지녔는데, 보컬의 로버트 플랜트[49], 기타의 지미 페이지[50], 베이스의 존 폴 존스[51] 그리고 드럼의 존 본햄[52] 레드 제플린은 언론에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음에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1970년대 총 앨범 판매량을 정산할때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다.[53][54] 레드 제플린[55]은 록 음악의 기술적인 면에서 전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고, 음악 외적으로 화려하고 섹시한 락스타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1971년 블랙 사바스딥 퍼플도 각각 Paranoid, Deep Purple in Rock같은 하드 록, 고전 메탈의 역사 남을 명반을 발매하며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특히 블랙 사바스딥 퍼플레드 제플린[56]보다 헤비 메탈이라는 장르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메탈 리프를 뽑자면 딥 퍼플Smoke on the Water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정립해지기 시작한 헤비 메탈주다스 프리스트 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해간다.

1973년, 시드 바렛의 탈퇴 이후 방황기를 겪던 핑크 플로이드도 주목받는 밴드가 되었는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역작 The Dark Side of the Moon[57]이 발매되면서 역사상 전례없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누적 958주간 빌보드 200에 차트인했을 정도로 세계 음악계의 스테디셀러이기도 한 닼사문[58]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단일명곡이자 예술작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1975년, 또 다른 명반 Wish You Were Here을 발매하며 프로그레시브 록에서의 입지를 굳힌다.

핑크 플로이드부터 킹 크림슨 등 여러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도 시작됐다. 프로그레시브라는 이름답게 프로그레시브 록은 클래식부터 재즈 등 여러 장르의 음악적 요소 도입, 대곡 지향, 변박과 엇박 등을 이용한 치밀한 구성, 컨셉 지향적인 앨범, 각종 실험적 요소 등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장르를 묶어 부르는 말인데 이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가 시작하면서 대중음악계에 여러 큰 영향을 주었다.

글램 록 또한 유행했는데, 대중음악의 피카소라 불리는 데이비드 보위는 그전까지 다른 뮤지션들과 다르게 특이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으며 본인의 음악에 페르소나를 도입하면서 정체성을 굳힌다. 페르소나에 있어서 마돈나의 선조이며, 마이클 잭슨에 앞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했으니 보는 음악의 시조인 셈. 데이비드 보위뿐만 아니라 록시 뮤직 또한 글램 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글램 록의 비주얼 부분은 MTV 세대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공연이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9]

도 빼놓을 수 없는 밴드이다. 1975년, 그들 커리어 최고 명반 A Night at the Opera을 발매한다. 그 당시에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가 되며 엇갈린 극찬을 받고 있다. 수록된 퀸의 대표곡 Bohemian Rhapsody[60]은 뮤직 비디오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한편,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펑크 록이 등장함에 따라 록 음악은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61] 이들은 당시의 하드 록프로그레시브 록 등 연주가 너무 복잡하고 테크니컬한데다가 추상적인 가사를 쓰는 것을 증오했고, 기업화되어버린 록밴드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 대신 사운드 면에선 더 원초적이고 단순한 로큰롤 음악을, 가사 면에선 뜬구름같은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거리의 생생한 현실 얘기를 다룬 쉬운 가사를 추구하였다.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등의 펑크 록 밴드들도 이 시기에 활동하다 장렬히 산화했다. 펑크의 대모라 불리는 패티 스미스는 이 시기 Horses라는 대중음악사에 아주 중요한 명반을 발매한다.

펑크 록을 대표하는 명반들로는 1976년에 발매한 라몬즈[62]Ramones 앨범은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 앨범의 가치를 알아본 관련업계 종사자들은 하나 같이 극찬을 했고, 흔히 펑크 록의 필수요소라 불리우는 DIY 정신 충만한 업템포의 빠르고 경쾌한 쓰리코드, 다운 스트로크 위주의 기타 연주를 담은 단순한 음악은 사실상 이 앨범이 구체적으로 확립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1977년에 발매한 섹스 피스톨즈의 걸작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앨범이 있다. 이 앨범은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펑크 록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더 클래시London Calling[63] 앨범이 있다.


4.5.1.1. 비틀즈 해체 후, 멤버들의 이야기[편집]

해체한 비틀즈 멤버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도 이 시기에 작품을 내며 활동한다. 폴 매카트니는 '윙스'를 결성해 McCartney 앨범을 시작으로 현재의 인디 팝 전체 장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인정받는 기발한 명반으로 여겨지는 Ram을 발매, 그리고 Band on the Run같은 앨범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64] 조지 해리슨All Things Must Pass[65]앨범을 출시하는데, 3LP로 발매된 탓에 일반적인 LP 앨범에 비해 가격이 2.5배나 비쌌는데도 빌보드 앨범 차트에 7주 동안이나 1위에 랭크되는 등 상업적으로도 어마무시한 성과를 올렸다.[66] 1973년에 발매한 Living in the Material World도 크게 성공했다.[67] 링고 스타Ringo[68]앨범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그리고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1970년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971년에는 Imagine[69]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의 타이틀이자 수록곡 Imagine[70]은 현재는 그 자체로 평화와 반전주의를 상징하는 대표곡이 됐다. UN부터 올림픽까지 다양한 국제 기관과 행사에서 사용되는 준(準)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매년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열리는 새해 맞이 볼 드롭(Ball Drop) 행사에 울러퍼지는 곡 중 하나다. 대략 밤 11시 57~59분 정도에 퍼포먼스가 나오는 관계로 미국의 공개적인 방송에서 나오는 한 해를 마감하는 노래가 되는 셈이 된다.[71] 그 후, 존 레논도 솔로 곡을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리면서 비틀즈는 모든 멤버가 솔로곡으로도 빌보드 1위를 기록하는 엄청난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존 레논 같은 경우, 1970년대 솔로활동 시기 평화주의, 반전주의적 정치 신념을 가지고 숱한 노래를 써내려갔다. 단순히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 반대 시위 등 여러 집회와 사회 운동을 직접 주도해서 20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중 한 명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당시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까지도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해 감시하였을 정도로 그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1975년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다가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존 레논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람에게 총을 맞았다.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고 피격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도착할 즈음에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는데,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 레논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

타임음악이 죽은 날[72]이라는 표지와 함께 추모를 표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대대적인 추모가 있었다.


4.5.2. 미국 음악계[편집]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한껏 영국에 밀리기만 했던 미국 록 음악계에서도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록 음악계를 넘어, 미국 대중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음악가, 브루스 스프링스틴[73]의 전성기가 열린다. 1964년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보고 충격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기타 가게로 달려가 싸구려 기타를 구입하여 활동을 시작했지만 연이은 실패를 맛본다. 그러다 1975년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Born to Run를 탄생시키는데, 이 명반은 미국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74] 하트랜드 록[75]의 탄생을 상징하는 명반이다. 미국의 양대 시사주간지 타임뉴스위크 표지를 동시에 장식한 사건은 당시 이 앨범이 미국을 얼마나 발칵 뒤집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어로스미스, 이글스같은 미국의 록 밴드들도 하나둘씩 등장하며 반격을 가했다. 에어로스미스는 Toys in the Attic로 미국의 저력을 보였고, 이글스는 1972년 데뷔부터 눈길을 끌기 시작하더니, 1975년 'One of These Nights' 앨범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위력을 보였다. 특히 1977년, 그들의 최고 명반 Hotel California는 미국에서만 3,000만 장을 판매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들의 5집 Hotel California의 타이틀곡이라 볼 수 있는 Hotel California는 국내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포크 음악계에서도 다양한 활약이 있었는데, 밥 딜런의 경우 1960년대 출시했던 좀 더 포크 록에 가깝던 명반들이 아니라 기존의 포크 음악에 가까운 명반을 내놓는데, 1975년작 Blood on the Tracks이다.[76] 그다지인 보컬과는 별개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도 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전설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77] 또한 커리어 최고의 명반이자 가장 위대한 포크 앨범 중 하나인 Blue를 발매한다. 또한 같은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캐롤 킹[78]도 중요한 역작이라 불리는 Tapestry[79]를 발매한다. 이 명반으로 캐롤 킹은 최초로 그래미 상을 수상한 솔로 여성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는데, 그것도 무려 4관왕을 했다. 추가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이렇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수많은 앨범들이 쏟아지는 1960년~1970년대는 음악적으로 폭발하는 시기였다.

소프트 록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카펜터즈브레드의 성공은 소프트 록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그리고 1977년 플리트우드 맥의 최고 걸작이자, 소프트 록의 상징으로 언급되며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뽑히는 Rumours가 발매된다. 전 세계 총 3,5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77년 발매되자마자 광풍을 몰고 왔던 앨범이다. 1977년 영화 최대의 아웃풋이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이라면 음악 최대의 아웃풋은 바로 Rumours라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영향을 불러왔고, 지금까지도 빌보드 200 100위권 안에 들어 있을 정도로 많은 리스너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앨범이다.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디스코 열풍이 불때도 소프트 록은 건재했다. 당시 소프트 록은 디스코와 함께 미국 음악계의 큰 주춧돌이었다.

그리고 서독크라프트베르크의 활동도 이 1970년대 부터다. 테크노의 시초격이자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혁신을 이끈 그룹이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들을 때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멜로디의 배치, 그리고 반복적인 리듬 등 우리가 이미 귀로 익어있는 다양한 문법들이 바로 크라프트베르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의 작품은 신스팝, 포스트 펑크, 힙합, 앰비언트 뮤직, 테크노 등의 다양한 일렉트로니카 음악 장르들, 그리고 현대의 EDM 씬의 음악까지 현존하는 모든 일렉트로니카 음악과 팝 음악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으며 마이클 잭슨, 콜드플레이팝 음악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아민 반 뷰렌, 에이펙스 트윈, 데드마우스 등 일렉트로니카 씬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까지 많은 프로듀서에게 영향을 미쳤다. 1977년에 발매한 Trans Europa Express부터 독어/영어 다국어 녹음을 시작했다고 한다.

독일일렉트로니카 그룹, 탠저린 드림도 이 시대에 데뷔한다. 크라우트 록의 거장이자, 크라프트베르크, 장 미셸 자르등과 함께 일렉트로니카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티스트다.

뉴 웨이브, 펑크 록 밴드 블론디도 이 시대에 데뷔해서 활동한다. 뉴욕 펑크 씬을 이끈 중요한 밴드로, 초창기 미국 펑크 록과 뉴웨이브 씬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Parallel Lines를 발매하고, 이 앨범의 싱글 "Heart of Glass"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예상치 못한 대히트를 거두는데, 빌보드 핫 100 1위, 대다수 유럽 국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미국을 넘은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기는 디스코소프트 록이 전성기이기는 했지만, 하드 록도 마냥 침체됐던건 아니었다. Foreigner보스턴이 큰 인기를 누렸다. 1976년 발매된 보스턴의 데뷔 앨범 Boston은 미국에서만 무려 1,7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Foreigner는 1977년 "Feels Like The First Time"을 빌보드 핫 100 4위에 올리고 같은 해 "Cold As Ice"가 빌보드 핫 100 6위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성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해인 1978년 "Hot Blooded"가 빌보드 핫 100 3위를 기록하며 대히트, 그 다음 해인 1979년 "Double Vision"이 빌보드 핫 100 2위를 기록하며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이 당시는 디스코 음악이 음반 시장과 미국 음악계, 나아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점령했던 1970년대 후반이었는데, 이들은 디스코는 커녕 디스코에서 영향을 받은 싱글이나 수록곡조차 만든 적이 없다. 무조건 미국적인 아레나 록/하드 록으로 승부한 것이다.


4.5.2.1. 미국 흑인 음악계[편집]

펑크(Funk)는 이 시기 대중음악의 중요한 장르였다.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스티비 원더,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 템테이션스, 빌리 프레스턴, 커티스 메이필드, Ohio Players, Kool & the Gang,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잭슨 파이브, Rufus, B. T. 익스프레스, Earth, Wind & Fire, 팔리아멘트를 포함한 수많은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이 70년대 초중반에 펑크 장르의 히트곡들을 발매했다. 이중에서도 대표적인 펑크 아티스트로는 제임스 브라운이다.

레이 찰스와 함께 R&B의 대부로 꼽히는 스티비 원더는 그의 대표곡이자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곡중 하나로 꼽히는 Superstition를 내놓는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전형적인 펑크 노래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노래는 1972년작으로, 펑크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기 전에 나온 노래이다. 단일곡 말고도 스티비 원더는 1973년 Innervisions, 1976년 Songs in the Key of Life 같은 천재성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든 걸작들을 발매한다. 모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된다.

소울 음악은 이미 대중적인 양식으로 탄탄히 자리 잡아, 알 그린,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로버타 플랙, 디온 워윅 등의 거물급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미국 흑인 가수들이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197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0위 안에 든 곡 중 4곡이 소울 음악 아티스트들의 곡으로, 그 4곡은 5위를 기록한 에드윈 스타의 "War",[80] 6위에 오른 다이애나 로스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81] 7위를 기록한 잭슨 파이브의 "I'll Be There",[82] 10위에 오른 프리다 페인의 "Band of Gold"[83]이다. 8위를 기록한 레어 어스는 록밴드였으나 모타운 소속 아티스트였고, 연말 차트에서 8위에 오른 "Get Ready"는 스모키 로빈슨이 작사, 작곡한 템테이션스의 노래를 커버한 것이었다.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84] 총 17곡이었다.[85]

마빈 게이는 1971년에 기념비적인 걸작을 제작하는데 바로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꼽히는 What's Going On이다. 이 과정에서 모타운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으나 마빈 게이는 발표를 하지 않고 계속 뭉게면 더 이상 모타운에서 앨범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하며 발매를 강행하게 한다. 이전까지 부드러운 흑인음악을 내던 모타운에서 발매한 최초의 사회고발성 앨범이며 그 과정에서 아티스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한 권리를 쟁취하는 측면에서도 파격적이었다.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의식, 아티스트가 회사를 상대로 자존심을 지킨 사례이며 이후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같은 모타운 계열 후배들도 뮤지션의 권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줬다. 이 앨범의 과정이나 내용이 없었다면, 이후 흑인 음악 장르가 상당히 바뀌었을지 모른다. 대중음악계의 흐름을 바꾼 음반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197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5곡이었다.[86] 같은 해에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의 흥행 영화 샤프트가 개봉했는데, 아이작 헤이즈가 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Shaft"가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첫 싱글 "Theme from Shaft"도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로버타 플랙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이 1위에 올랐고,[87]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8곡이었다.[88] 같은 해에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의 흥행 영화 슈퍼 플라이가 개봉했다. 커티스 메이필드가 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Super Fly"가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89] 앨범의 첫 싱글 "Freddie's Dead (Theme from Superfly)"이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4위, 앨범의 두번째 싱글 "Superfly"가 핫 100에서 2주 연속 8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타운이 주도하던 1960년대와 다르게 이 시점부터는 갬블 앤 허프가 설립한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라는 경쟁자가 나타났고 알 그린, 로버타 플랙과 같은 새로운 소울 음악 스타들과,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Funk 밴드들이 전성기를 맞게 되어 씬에 변화가 일어났고, 1970년대의 모타운은 레이블의 최전성기였던 60년대에 비해 미국 대중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기존의 모타운 소속 스타들이 1970년대 중후반에 커리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회사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197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백인 1명과[90] 흑인 2명으로[91] 구성된 팝 그룹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가 1위에 올랐고,[92]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7곡이었다.[93]

소울 음악 중에서도 특이한 양식의 소울 음악이 바로 필라델피아 소울인데, The Stylistics, The Spinners, The O'Jays 등의 그룹들을 주축으로 하여 7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누렸다. 이 당시 이렇게 소울 음악은 현재의 팝 음악처럼 대중적인 장르였기에 미국 백인들도 소울 음악을 시도하게 된 것이 바로 블루 아이드 소울이다. 기원은 60년대의 더 라이쳐스 브라더스이지만 전성기는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Hall & Oates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블루 아이드 소울 아티스트다. 데이비드 보위도 이 시기 블루 아이드 소울을 했었다.

한편 위의 펑크 음악은 당시 발전한 신시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대중화된 디스코가 등장했다. 펑크(Funk) 음악의 하위 장르로, R&B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데, 디스코의 대중화는 74년도 Love Unlimited Orchestra의 Love's Theme, MFSB의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 George McCrae의 Rock Your Baby[94], The Hues Corporation의 Rock the Boat 등의 대성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디스코 음악은 1970년대 후반을 미국 음악계를 지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은 소프트 록을 제외한, 미국의 주류 장르던 마저 시들했고 기존의 다른 장르들은 거의 사장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미국 음악은 이 디스코 음악의 영향을 안 받은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동안 침체기에 들었던 롤링 스톤스는 이 주류를 받아들인 앨범 Some Girls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1974년은 디스코의 전성기가 시작된 해였다. 197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한 Love's Theme과 5위에 오른 잭슨 파이브Dancing Machine, 7위를 기록한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70년대 중후반이 디스코의 시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Love's Theme배리 화이트가 작곡과 프로듀싱을 했고, 배리 화이트의 개인 오케스트라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케네스 갬블-리온 허프가 작곡, 작사와 프로듀싱을 했고, 이들이 사장으로 있던 음반사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의 하우스 밴드였던 MFSB에 의해 연주되었으며 미국의 필라델피아 소울/R&B 걸그룹 더 쓰리 디그리즈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8곡이었다.[95]

1975년에는 호주에서 결성하고 영국에서 활동한 3인조 음악 그룹, 비 지스디스코로 음악적 방향을 바꿨다. 빌보드 핫 100 1위곡 Jive Talkin'[96] 7위를 기록한 'Nights On Broadway'가 등장하게 되었고, 밴드는 새로운 사운드에 결과적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중들도 화답하여 Main Course 앨범은 순식간에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게 되었고 빌보드 200에서 14위를 기록했다. 다음 앨범부터는 본격적으로 디스코를 차용했고 남은 70년대에 전 세계를 디스코로 물들이며 밴드의 최고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다. 비 지스는 빌보드 핫 100 1위곡 순위에서 9곡을 보유해 그룹 자격으로는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위는 20곡을 보유한 비틀즈, 2위로 12곡을 보유한 슈프림즈 다음이다.

같은 해에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는데, Shining Star가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를 기록하고[97]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위에 오르는 등 공전의 히트를 거두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6집 앨범 "That's the Way of the World"가 빌보드 200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98] 크게 성공한다. 앨범의 두번째 싱글 "That's the Way of the World"도 핫 100에서 12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0위를 기록하며 히트했다.

1969년부터 Funk 밴드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아이즐리 브라더스는 싱글 "Fight the Power"가 핫 100에서 4위,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9위에 오르며 크게 히트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13집 앨범 "The Heat Is On"이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했다.[99] 1973년에 Funky Worm으로 히트를 거둔 오하이오 플레이어스도 이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들의 싱글 "Fire"는 핫 100에서 1주 1위,[100]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1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이들의 6집 앨범 "Fire"도 빌보드 200에서 1주 1위를 기록하는[101] 성공을 거둔다.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1곡이었다.[102] 1975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블루 아이드 소울 곡들로는 연말 차트 3위를 기록한 엘튼 존 밴드Philadelphia Freedom,[103] 연말 차트 5위에 오른 프랭키 발리My Eyes Adored You, 연말 차트 8위를 기록한 데이비드 보위Fame[104]이 있다.

197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0곡이었다.[105] 같은 해에 발매된 스티비 원더의 18집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빌보드 200에서 14주 비연속 1위를[106] 기록하고 197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둔다. 앨범의 첫 싱글 "I Wish"와 두번째 싱글 "Sir Duke"도 크게 히트했는데, I Wish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 Sir Duke는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77년, 비 지스는 미국 위주로 전성기를 누렸던 장르인 디스코를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를 통해 단숨에 세계인의 인기를 받게 한 장르로 변화시켰다. 이 사운드트랙 앨범에서는 비 지스에게 3곡의 빌보드 차트 1위곡을 안겨 주었다. How Deep Is Your Love, Stayin' Alive, Night Fever가 그 곡들이며 한 세대를 디스코 세대로 바꿔놓았다.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다른 가수 이본느 엘리먼(Yvonne Elliman)에게도 If I Can't Have You라는 노래를 주었고 이것 역시 빌보드 1위를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More Than A Woman'은 비 지스 버전과 타바레스(Tavares) 버전, 두 버전이 실려있고, 마찬가지로 히트했다.

토요일 밤의 열기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성공에 기름을 부었고, 4,000만장이 팔려나가며 당시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사운드트랙 앨범 탑5에 항상 들고 있다. 비 지스가 전 세계 음악 왕좌에 앉는 절정의 시기였다. 비 지스의 사운드는 1977년 크리스마스 시즌 시작부터 9개월 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삼형제가 쓴 7개의 곡이 27~37주 연속으로 차트 1위를 주름잡았다. 3곡은 비 지스의 이름으로 나왔고, 2곡은 동생 앤디 깁의 이름으로,[107] 1곡 씩 이본느 엘리만의 If I Can't Have You, 프랭키 발리Grease이다.

197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2곡이었다.[108]

1978년 3월, 1964년 4월의 비틀즈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작곡한 곡으로만 빌보드 핫 100 차트 10위권 안에 5곡을 채워넣었다. Night Fever, Stayin' Alive, If I Can't Have You, 'Emotion'[109], 'Love Is Thicker Than Water'[110]가 그 곡들이다. 배리 깁은 연속으로 4곡을 빌보드 1위에 올린 작곡가가 되었다.

197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11곡이었다.[111]

197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0위 안에 든 곡 중 7곡이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으로, 그 7곡은 2위를 기록한 도나 서머의 "Bad Girls",[112] 3위에 오른 시크의 "Le Freak",[113] 5위를 기록한 피치스 & 허브의 "Reunited",[114] 6위에 오른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115] 7위를 기록한 도나 서머의 "Hot Stuff",[116] 8위에 오른 빌리지 피플의 "Y.M.C.A.",[117] 9위를 기록한 아니타 워드의 "Ring My Bell"[118]이다.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든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1곡이었다.[119]

하지만 1979년 여름에 있었던 디스코 폭파의 밤으로 이 화려했던 디스코의 전성기는 끝나고, 이를 통해 뉴 웨이브, 하드 락 등의 백인 음악이 인기를 얻게 되지만, R&B 역시 변화를 추구한다. 그게 바로 포스트 디스코컨템퍼러리 R&B 음악.

한편으로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힙합 음악이 태동하고 있었는데 펑크(Funk), 레게, 소울 음악, 재즈 등의 영향을 받으며 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1979년 발표된 슈거힐 갱의 Rapper's Delight은 레코딩 된 랩 음악의 시초를 알렸다.


4.5.3. 뮤직 비디오의 발전과 카세트 테이프, 그외[편집]


음악 수준 뿐만 아니라 뮤직 비디오도 이전 시대보다 발전을 보인다. 1966~67년 비틀즈, 그리고 1969년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같은 뮤비를 거쳐 단편 명작 수준으로 수준을 끌어올린 것도 이 시대 퀸의 Bohemian Rhapsody다. 이를 위해 일류 영상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큰 제작비와 세심한 공을 들여 제작하였고, 당대의 첨단적인 촬영 기법과 특수효과가 총동원되었다. 후처리를 거치지 않고 촬영 과정부터 특수 효과를 적용했다는 점도 유명하다.[120]

1970년대 중반경부터 그 당시 두 인기 밴드였던 ABBA에 의해서 뮤직 비디오가 더욱 보편화됐다. 퀸의 Bohemian Rhapsody이 당시로서는 블록버스터급 뮤직 비디오여서 많은 관심을 모았고, 그리고 퀸과 동시대의 인기 밴드였던 ABBA는 1974년경부터 모든 싱글 발표 곡들에 그 각 가사들을 단편극처럼 영상 스토리화하거나 댄스풍 영상으로 만든 뮤직 비디오를 촬영해서 전 세계 TV에 방영시켜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는 이후 다른 팝 뮤지션들에게도 신곡 발표때마다 뮤비를 제작하는 관행을 널리 유행시키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1970년대는 서구 선진국들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등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도 가정용 TV가 대중들에게 한창 보급되던 시기라서 세계의 대중음악팬들이 "단지 듣는 것 뿐 아니라 보면서 즐기는 음악"에 대한 욕구와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은 다음 시대에 MTV의 탄생과 함께 1980년대 대중음악의 아이콘, 마이클 잭슨을 필두로 받아들이게 된다.

카세트 테이프가 점차 대중화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주 음반 매체였던 LP는 부피가 크고, 재생 매체마다 음질차가 큰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개발되었다. 카세트 테이프는 1980~1990년대의 대중 음악 시장의 급속 팽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LP는 가격도 비쌌고 부피가 커서 재생에 한계가 있었는데, 카세트 테이프가 등장하면서 수천 원 전후의 가격으로 LP보다 엄청나게 작은 크기에 좋은 휴대성까지 갖춘 덕분에 음반 시장 발달에 크나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레드 제플린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아레나 록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레드 제플린의 시대 이전까지 록밴드는 콘서트장에서 30분정도만 잠깐 노래를 부르고 나가는게 관례였고 비틀즈의 부도칸 공연이나 셰이 스타디움 공연도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킹크스 등의 유산을 레드 제플린이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연 시간을 2시간 이상으로 확 늘리고 화려한 무대 의상과 조명을 통해 후대 글램 메탈 밴드들 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 전반의 무대 세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4.5.4. 197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편집]




4.6. 1980년대, 비디오 시대의 도래와 장르간의 크로스오버[편집]


1979년, 디스코 폭파의 밤 이후 디스코 음악의 인기는 말그대로 폭락해 버렸지만, 이 디스코 음악의 여러 요소들은 당연히 사라질 수 없었고 이에 디스코가 한 번 계량된 게 포스트 디스코인데, 포스트 디스코에 1980년대 초 들어 인기를 끌기 시작한 뉴 웨이브, 신스 팝 등이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댄스 음악이 등장했는데 그게 바로 댄스 팝이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의 전성기였다. 이전의 주 음반 매체였던 LP는 부피가 크고, 재생 매체마다 음질차가 큰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개발되었다.[121] 개발 후에 필립스의 '표준 매체' 정책이 효과를 거두어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됐다. 그 뒤로 테이프 자성체 개선 노력 및 소니에서 낸 워크맨 덕분에 1980~199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 매체로 자리매김했다.[122]

나중에 나온 미니디스크, CD보다 훨씬 일반화되었던, 즉 당시로서의 첨단 기술이 필요 없었던 제작 공정[123]과 재생 기기가 저렴했던 덕분에 1980~1990년대의 대중 음악 시장의 급속 팽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의 LP는 가격도 비쌌고 부피가 커서 재생에 한계가 있었는데, 카세트테이프가 등장하면서 수천 원 전후의 가격으로 LP보다 엄청나게 작은 크기에 좋은 휴대성까지 갖춘 덕에 음반 시장 발달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1982년에 들어서 CD가 상용화하기 시작한다.

뉴 웨이브는 1978년부터 유행하여 1980년 초까지 크게 유행했던, 펑크 록의 후속 장르로, 신디사이저를 적극 차용하는 등 일렉트로닉 요소를 도입하고, 당대에 유행하던 디스코와 같은 말랑말랑한 팝 사운드와 펑크 록을 결합한 음악이다 미국에서는 블론디, 더 폴리스 등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 등이 있었다. 신스 팝은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장르로 신디사이저가 주 악기로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종반의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일렉트로닉 뮤직, 디스코크라프트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크라우트 록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70년대 종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이나 영국의 포스트 펑크 시대에서 뉴 웨이브 음악의 중심적인 장르이기도 했다. 신스 팝은 그 이후 등장한 다양한 일렉트로니카 장르와 록 음악, 댄스 뮤직 장르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장르들이 결합해 탄생한 댄스 팝은 1980년대 들어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이 함께 이끌었으며, 컨템퍼러리 R&B힙합이 주도하던 1990년대~2000년대 중반에는 인기가 없다가 200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다시 맞고, 2010년대 중반부터 힙합을 비롯한 기존 흑인 음악들이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며 지금은 침체된 장르다. 물론 단독 장르로 봤을때 사장됐다는 것이고, 20년대 현대에 와선 록 음악, R&B, 팝 음악 등등 장르 구분이 그렇게 의미가 있지 않다는 평이다. 당장 가장 최근 크게 히트한 노래로 해리 스타일스As It Was 가 있는데, 뉴 웨이브, 팝 록으로도 분류되는데 또한 신스 팝, 컨템퍼러리 R&B, 인디 팝, 펑크로도 장르가 속해있다. 현대에는 장르 구분이 크게 의미 없는 음악들이 많이 있다고 보고 있다.

198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미국의 대표적인 뉴 웨이브 밴드 블론디의 명곡 Call Me[124]가 1위를 수상하고, The Wall이라는 명반으로 저력을 보여준 핑크 플로이드가 막대한 히트를 거두면서 수록곡이 2위를 달성했고, 앞으로 대중음악계에 파란을 일으킬 걸작을 내놓을 마이클 잭슨의 "Rock with You"가 4위로 당당히 성적표를 내민다.

블론디의 인기는 끝나지 않았는데, 1981년 역시 블론디의 해였다. 이 해 발표한 싱글 Rapture는 또다시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해 이들의 3번째 1위 곡이 되었으며 3년 연속으로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 곡은 미국 힙합 역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곡이다. 왜냐하면 이 곡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랩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드 록을 고집했던 Foreigner도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1981년 4에 수록된 곡이자, 싱글로도 발표한 "Urgent"가 빌보드 핫 100 5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 노래에는 유명한 모타운 출신 색소폰 연주자 주니어 워커(Junior Walker)가 참여했다. 기존의 정통파 하드 록이 아니라 중간에 색소폰 솔로를 더하며, 사실상 디스코 및 흑인 음악의 영향을 디스코 시대가 지난 이 곡에서야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2년 이들은 하드 락 사운드를 벗어나, 소프트 락 곡들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Waiting For A Girl Like You"로 빌보드 핫 100에서 10주 연속 2위를 기록했다.[125][126]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 곡에 이용했고, 1984년/1985년 소프트 락 싱글 "I Want to Know What Love Is"가 빌보드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신디사이저라는 기계는 거의 일본이 대중화시킨 것으로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이것에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이 류이치 사카모토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 열리니 1981년, 24시간 음악 관련 전문 방송 채널 MTV가 개국한다. 1980년대 이후 MTV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강하다. 세상 사물을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해석하거나, 기성세대적인 가치관을 깨뜨리게 만들었다. 괜히 MTV 세대라는 시사용어가 나온게 아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만든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1982년, 마이클 잭슨은 커리어 최고 역작을 내놓는데, 바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불리는 Thriller다. 마이클 잭슨Thriller의 수록된 단일곡으로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명곡 중 하나로 불리는 Billie Jean뮤직 비디오를 방영함과 함께 이것이 최다 시청 뷰를 만들어내면서 대중음악계에서 이전 시대보다 뮤직 비디오의 비중이 커짐과 함께 MTV의 발전과도 연결되었다. 마돈나, 밴 헤일런, 다이어 스트레이츠 등이 MTV 부흥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때부터 댄스 음악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한다.

마이클 잭슨Thriller로 전작을 완전 뛰어넘으며 커리어상 음악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유례 없는 엄청난 대성공을 거둔다. 무려 현재까지 약 6,6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현대 대중음악의 흐름을 변화시킨 혁명적인 작품 중 하나다. 과거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 비틀즈의 Meet the Beatles! 앨범을 시작으로 음악시장에 대호황이 왔던 것 처럼, 이 Thriller 앨범으로 1980년대 음악시장에 대호황을 부르기 시작한다. 또한 그때까지 남아있던 흑백장벽을 깨부수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1970년대 디스코 열풍으로 한때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 들어 그 열기가 식으면서 차트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잭슨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빌보드 핫 100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차지했다.[127][128][129][130] 그만큼, 이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1970년대에 비해 거의 바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위대한 흑인 뮤지션들이 많았고, 민권법 통과와 무하마드 알리, 마틴 루터 킹 목사같은 인권 운동가들의 활약 등등 흑인들의 입지는 이전보다 넓어지고 있었으나, 흑인 음악은 크나 큰 침체기에 있었다. 그러나 Thriller로 다시 흑인 음악의 전성기가 열린다.[131] 결정적으로 이 시기부터 마이클 잭슨,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음악의 흑백장벽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King of Pop이 마이클 잭슨이라면, Queen of Pop이라는 칭호의 주인은 마돈나다. 밴드와 남성 가수들이 지배하던 80년대 빌보드 차트에 혜성처럼 등장해 거의 사회현상이다 싶을 만큼 화제거리를 몰고 왔다. 사실상 오늘날 여가수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컨셉은 다 해봤다고 무방하며, 그녀의 성공에 고무받은 많은 여가수들이 댄스 디바로 데뷔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여가수가 성이나 종교, 정치 같은 민감한 소재를 건드리는 것이 금기시되던 그 시절에 노골적으로 해당 이슈들을 거론하고, 담론을 나누는 것에 거리낌 없었는데 이는 오늘날 소셜테이너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

마돈나하면 이전 시대보다 중요성을 부각한 엄청난 콘서트 규모와 화려한 퍼포먼스[132]를 빼놓을 수 없다. 최초로 성공한 댄스플로어 디바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티스트답게 뛰어난 안무와 무대 매너로 큰 호응을 얻었고, 이는 오늘날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돈나의 영향력은 음악 뿐 아니라 헐리우드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Blond Ambiton 투어의 제작 과정과 실황을 담은 다큐영화 '진실 혹은 대담'은 엄청난 성공과 더불어 헐리우드 최초의 리얼리티 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 미국리얼리티 쇼가 얼마나 엄청나게 대형화되었고, 미국 문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거의 업계 자체를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

마돈나는 1984년, 역사에 남을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마돈나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준 전설적인 앨범 Like a Virgin를 발매한다. 당시 발매 초기엔 상업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음악성 면에선 별 볼 일 없는 앨범으로 평가당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굉장한 수작으로 재평가 되었는데 음악 자체로 호평을 받기보단, 1980년대 시대상의 금기에 정면으로 맞서 문화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980년대를 분석하는 방송, 책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앨범과 함께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 문화적 파급력이 워낙 엄청나서 대중문화, 음반 업계, 여성 인권(페미니즘) 분야에서 무조건 언급될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나다.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로 유명한 프린스도 이 시기 활동한다 1982년 1999(앨범)을 시작으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1984년, 커리어 최고 작품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앨범 Purple Rain를 발매한다. 1980년대 초중반은 프린스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 필 콜린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마돈나, 플리트우드 맥, 다이어 스트레이츠, 밴 헤일런, 듀란 듀란 등의 레전드 아티스트들이 빌보드 1위 자리를 두고 다투던, 차트 경쟁이 극심했던 시기였다.[133] 그러나 Purple Rain은 발매되자 빌보드 순위에 오르더니, 급기야 한 달 뒤에는 Born in the U.S.A.를 누르고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다. 무려 1984년 8월 첫째 주부터 1985년 1월 둘째 주까지 24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인기가 상당했다. 이 외에도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휘트니 휴스턴마이클 잭슨, 프린스 다음으로 미국의 앨범 시장을 점령한 미국 흑인 아티스트였다.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 앨범 Whitney Houston은 빌보드 200에서 14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134] 198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두번째 싱글 You Give Good Love빌보드 핫 100에서 3위,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 세번째 싱글 Saving All My Love for You는 핫 100에서 1주 1위,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3위, 다섯번째 싱글 How Will I Know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위, 여섯번째 싱글 Greatest Love of All은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1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에 자넷 잭슨의 3집 앨범 Control이 발매되었다. 초창기 뉴 잭 스윙을 대표하는 앨범으로, 빌보드 200에서 1986년 7월 첫째 주부터 둘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6위, 198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에 오르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첫 싱글 "What Have You Done for Me Lately", 두번째 싱글 "Nasty", 세번째 싱글 "When I Think of You", 네번째 싱글 "Control", 다섯번째 싱글 "Let's Wait Awhile", 여섯번째 싱글 "The Pleasure Principle"은 빌보드 핫 100에서 각각 4위, 3위, 1위, 5위, 2위, 14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What Have You Done for Me Lately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3위, Nasty는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8위, When I Think of You는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2위, Control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7위, Let's Wait Awhile은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8위에 올랐다.

휘트니 휴스턴의 2집 앨범 "Whitney"는 1987년 6월 2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1987년 6월 넷째 주부터 9월 첫째 주까지 11주 연속 1위, 198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3위, 1988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기록하고 1988년 4월 18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이 팔리는[135]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가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36]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Didn't We Almost Have It All"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37]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2위, 세번째 싱글 "So Emotional"이 핫 100 1주 1위,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위를, 네번째 싱글 "Where Do Broken Hearts Go"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3위를 기록했고 다섯번째 싱글 "Love Will Save the Day"은 핫 100에서 9위를 기록했다.

마이클 잭슨의 7집 앨범 "Bad"는 1987년 8월 31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1987년 9월 넷째 주부터 10월 다섯번째 주까지 6주 연속 1위, 1988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고 1988년 6월 1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38] Bad의 첫 싱글 "I Just Can't Stop Loving You"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139]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5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Bad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40]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9위, 세번째 싱글 "The Way You Make Me Feel"은 핫 100 1주 1위,[141]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6위, 네번째 싱글 "Man in the Mirror"는 핫 100 2주 연속 1위,[142]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1위, 다섯번째 싱글 "Dirty Diana"는 핫 100 1주 1위,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1위를 여섯번째 싱글 "Another Part of Me"는 빌보드 핫 100에서 11위, 일곱번째 싱글 "Smooth Criminal"은 핫 100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3위에 오르는 등 7개의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그리고 슈게이징을 대표하는 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데뷔한 시기다. 1990년대 가장 영향력있는 밴드 중 하나로 꼽히며, 이들은 대중음악 역사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소닉 유스와 함께 노이즈를 팝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밴드 중 하나로,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슈게이징 장르를 정의한 밴드로 평가받는다. 이들의 독특한 사운드는 이 밴드 이후의 나온 밴드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며, 수많은 팔로워 밴드들이 등장하게 된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Isn't Anything을 시작으로 활동을 알린다. 자극적인 기타 노이즈에 팝적인 멜로디를 곁들인 좋은 의미의 괴작이다.

한편으로 1980년대는 헤비 메탈의 황금기로 80년대 초 영국에서 도래한 NWOBHM을 시작으로 여러 메탈 장르가 등장한다.1970년대 후반 잠시의 침체기를 겪은 헤비 메탈은 영국을 중심으로 NWOBHM, 즉,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영국 헤비 메탈의 새로운 물결)이라 불리는 음악적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초기에 이어 후발주자들이 나선 것이다. 대표주자로는 모터헤드,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색슨, 다이아몬드 헤드 등이 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일찍이 7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80년대에 나온 British Steel로 자신들을 헤비 메탈로 알렸기에 여기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British Metal"이 헤비 메탈의 방향성을 새로 정립했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반 취급을 받으며 Metal God이란 노래를 부를 정도로 자신들을 메탈 그 자체와 동일시 시켰고, 그들이 제시한 패션코드인 가죽 자켓과 달라붙는 바지, 무쇠징이 박힌 옷가지(일명 stud & leather), 육중한 모터 사이클 등의 이미지는 헤비메탈의 시각적 이미지를 확립시켰다. 또한 기존 하드 록의 끈적함과는 선을 긋는 롭 핼포드의 무자비한 철혈 보컬은 메탈이 가지는 마초성에 더욱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아이언 메이든과 다른 음악스타일은 이후 스래시과 이후 파생되는 익스트림 계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이언 메이든스티브 해리스의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사운드를 바탕으로, 악곡의 구성력을 차츰차츰 강화해 갔다. 7분이 넘어가는 식의 대서사시를 써내기까지 시작한 아이언 메이든의 소재는 실로 다양해졌다. 그들은 기존의 블랙 사바스의 어둠 뿐만 아니라 전쟁, 신화, 민담 등의 보다 넓은 세계로 가사 소재의 장을 확장시켰다. 보컬인 브루스 디킨슨은 파워풀하면서도 단어 하나마다 딱딱박히는 테누토를 선보이는데다, 라이브 공연장에서 군복을 입고 영국의 국기를 흔들며 열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이들의 이런 사운드, 세계관의 노선은 헬로윈을 거쳐 거의 현재의 유러피안 메탈, 파워 메탈의 전형을 제시하였고 셀 수 없이 많은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러한 밴드들은 스래시 메탈, 블랙 메탈, 글램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80~90년대 유행하는 장르들의 단초를 제공했다.

NWOBHM 사운드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중적인 멜로디와 화려하고 섹슈얼한 연주가 특징인 글램 메탈(팝 메탈/LA 메탈[143])이 등장하였다. 머리를 화려하게 기르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은 헤어 메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70년대 영국 글램 록과 미국 특유의 마초성이 어우러진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명곡 Living After Midnight이나 데프 레파드의 Bringin' On The Heartbreak 등의 곡에서 영향을 받아 팝적이고 대중적인 멜로디와 메탈의 강렬한 사운드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밴드들이 많아졌으며,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메탈 밴드 밴 헤일런의 직접적인 음악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국내의 이상한 사짜들이 글램 메탈(팝 메탈)의 기원에 대해 헛소리를 하나, 국내 팬덤 커뮤니티에서나 도는 평이므로 가볍게 무시하길 바란다.

글램 메탈은 멜로디나 기타 연주에 있어서 화려함을 중시하였고, 동시에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전의 하드 록 밴드들이 이에 자극받은 팝 메탈 스타일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할 정도였다. 대표적인 밴드로 건즈 앤 로지스, 본 조비, 스키드로우, 콰이어트 라이엇, 머틀리 크루 등이 있다.

1983년 콰이어트 라이엇의 "Metal Health" 앨범이 빌보드 200에서 1위를 달성하면서, 본격적인 글램 메탈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동년에는 데프 레파드Pyromania 앨범이 빌보드 2위를 찍고 싱글 "Photograph"[144]"Rock of Ages"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미국에 글램 메탈을 전파하였다. 뒤이은 1984년에는 밴 헤일런Jump가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글램 메탈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전미에 글램 메탈의 열풍이 불어닥쳤다.

본 조비는 198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미국의 록 밴드이자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설이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글램 메탈(팝 메탈) 밴드로 꼽힌다. 헤비 메탈계에 대중화의 바람이 불던 1983년에 결성되어 이듬해 데뷔 앨범 Bon Jovi로 정식으로 음악 씬에 등장했다. 그후 팝 메탈의 주역으로 올라서고,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대부분의 밴드들이 모습을 감춘 지금까지도 여전히 음악 씬의 중심부에 서있다.

1985년, 2집 7800˚ Fahrenheit 으로 골든 레코드(!)를 기록하고 히트 메이커인 프로듀서 데스몬드 차일드를 영입하고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1986년, 데스몬드 차일드가 프로듀서 겸 작곡가로 참여한 3집 Slippery When Wet 앨범은 You Give Love a Bad NameLivin' on a Prayer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다. 앨범도 대박을 쳐서 빌보드 차트 8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미국에서 약 1,200만장을 팔아치워 일약 톱스타가 되었다. 1988년에 발매한 4집인 New Jersey 앨범도 차트 정상에 오르고, Bad MedicineI'll Be There For You 두 곡의 넘버 원 싱글을 만들었다.

세계 투어를 돌고, 5집 앨범을 내기까지의 휴식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존 본 조비는 혼자서 영화 영 건스 2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하게되는데, 여기서 작업하다가 나온 앨범이 1990년에 나온 Blaze of Glory 앨범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도 타이틀 곡인 Blaze of Glory가 빌보드 싱글 차트 넘버 원을 달성하고 아카데미상과 그레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건즈 앤 로지스는 가히 아메리칸 하드 록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밴드이다. 1987년 7월 21일, 첫 공식 음반이자 메탈 역사뿐 아니라 대중음악 전체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앨범인 Appetite for Destruction을 발매한다. 그리고 1988년 Sweet Child O' Mine의 히트로 앨범 발매 50주 만인 8월 6일 빌보드 200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다. 88년 8월 발매된 Sweet Child O' Mine 싱글은 9월 10일 핫 100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다. 곡은 1988년 연말 결산에 5위에 랭크된다. 현재 Appetite for Destruction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으로 기록되어있다. 발매 후 미국에서만 1,800만 장, 전 세계적으로는 3,000만 장이라고 한다.

스키드로우는 데뷔 시점이 1989년도로 웬만한 메이저급 글램 메탈 밴드중에서는 가장 늦기 때문에 글램 메탈 최후의 불꽃이라고도 불린다. 스키드로우의 등장 이후 글램 메탈은 변변한 스타를 찾지 못하면서 양산형 음악만을 배출하다가 결국 1990년대 불어닥친 얼터너티브 열풍에 맥 없이 무너지고 만다. 머틀리 크루, 건즈 앤 로지스와 함께 유럽 투어를 돌 정도로 큰 밴드였지만, Skid Row(음반)을 끝으로 1996년 세바스찬 바흐가 여러가지 사유로 인하여 밴드를 탈퇴한 이후 별 활약이 없었다. 이 밴드의 보컬이었던 세바스찬 바흐는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가수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등지에서 펑크와 하드코어의 영향을 받아 메탈리카 등의 스래쉬 메탈 밴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메탈리카는 스래시 메탈의 빅4 중 하나이며, 메탈리카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Master of Puppets 앨범과 타이틀 트랙이 유명하다. 북미의 인디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던 스래시 메탈의 대중화에 기여한 앨범 중 하나이기도 하다.

U2는 1970년대에 데뷔하며 활동했는데, 1983년 낸 앨범 "War"가 영국 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 투어에서 매진 공연을 잇따라 만들어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U2는 불후의 걸작, The Joshua Tree를 내놓았다. 전작들에 비해 더 잔잔하고 차분해졌으며,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완성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밴드로 떠오르게 된다. 앨범에 수록된 "With or Without You"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로도 널리 불려지는 U2의 대표곡으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또다른 빌보드 핫 100 넘버 원 히트곡인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앨범의 포문을 여는 곡이자 U2 팬들에게는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등의 곡들도 수록되었으며 이 앨범을 통해 U2는 명실공히 80년대 최고의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밴드로 전 세계적으로 2억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했으며 역사상 단일 투어로 110회의 공연하여 100% 전석매진에 총 720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는 아티스트는 U2만이 유일하다.

다만, MTV의 등장으로 외모만 훌륭하고 음악적 실력이 떨어지는 가수들이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다이어 스트레이츠Money for Nothing이 이런 세태를 비판하는 노래였다. 세계 최초로 3D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으며, 뮤비 자체로도 가치가 크다. 이 노래는 한창 MTV가 전성기를 달리던 1985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MTV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뮤직 비디오들로 피터 가브리엘Sledgehammer와 노르웨이 3인조 밴드 A-haTake On Me가 있다. 이 뮤비들 모두 역사적인 뮤직 비디오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하의 Take On Me는 80년대 뮤비 중 최초로 10억뷰를 넘겼고, 현재 16억뷰로 80년대에 공개된 뮤직비디오 중 조회수 1위이다.

그리고 1970년대에 태동하던 힙합 음악 역시 Run-D.M.C., LL Cool J, 비스티 보이즈, 퍼블릭 에너미,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를 필두로 메이저로 급부상하여 어엿한 대중음악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 이 외에도 슬릭 릭, 쿨 모 디, 라킴, 빅 대디 케인 등등 전설적인 래퍼들이 힙합을 크게 발전시켰다.

80년대 말에는 프리스타일뉴 잭 스윙 등 흑인 음악에서 유래한[145] 새로운 댄스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중 뉴 잭 스윙은 압도적인 인기를 끌며 90년대가 R&B힙합의 시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자넷 잭슨, 바비 브라운, 밀리 바닐리, 폴라 압둘, 캐런 화이트, 키스 스웨트 등 수많은 뉴 잭 스윙 가수들이 미국 대중음악계의 정상을 차지했으며, Babyface테디 라일리,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등의 프로듀서들은 수많은 뉴 잭 스윙 히트곡들을 만들어냈고 이 중 Babyface는 세련된 스타일의 뉴 잭 스윙을 선보여 90년대 R&B의 밑거름을 다진다.

1988년에 발매된 바비 브라운의 2집 앨범 Don't Be Cruel빌보드 200에서 6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146] 1989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Don't Be Cruel빌보드 핫 100에서 8위,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9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My Prerogative"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위, 세번째 싱글 "Roni"는 핫 100에서 3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80위, 네번째 싱글 "Every Little Step"은 핫 100 3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8위, 다섯번째 싱글 "Rock Wit'cha"는 빌보드 핫 100에서 7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5위를 기록했다. 이 외에도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2 사운드트랙 앨범의 첫 싱글로 발매된 바비 브라운의 "On Our Own"이 핫 100에서 2위를 기록하고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9위에 오르는 등 크게 히트했다.

1989년에 발매된 자넷 잭슨의 4집 앨범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를[147] 기록했고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첫 싱글 "Miss You Much"는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148]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두번째 싱글 "Rhythm Nation"은 빌보드 핫 100에서 2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8위를, 세번째 싱글 "Escapade"는 빌보드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149]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5위, 네번째 싱글 "Alright"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4위, 다섯번째 싱글 "Come Back to Me"는 핫 100에서 2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9위, 여섯번째 싱글 "Black Cat"은 빌보드 핫 100 1주 1위,[150]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9위, 일곱번째 싱글 "Love Will Never Do (Without You)는 핫 100에서 1주 1위,[151]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9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밀리 바닐리도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에 발매된 이들의 데뷔 앨범 "Girl You Know It's True"는 빌보드 200에서 7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152] 미국에서 총 6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앨범의 첫 싱글 "Girl You Know It's True"는 빌보드 핫 100에서 2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8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Baby Don't Forget My Number"는 핫 100에서 1주 1위,[153]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8위에 올랐다. 앨범의 세번째 싱글 "Blame It on the Rain"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54]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6위를 기록했고 네번째 싱글 "Girl I'm Gonna Miss You"는 핫 100 2주 연속 1위,[155]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1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6위를 기록했다. 다섯번째 싱글 "All or Nothing"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를 기록했고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9위에 올랐다.



4.7. 1990년대, R&B힙합[편집]


무너진 흑백장벽과 다양화 된 장르 속에서 1990년대대중음악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특히나 1990년대에는 '세계 3대 디바'로 불리는 대형 상업 여가수를 필두로 한 여자 가수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는 머라이어 캐리,[156] 셀린 디옹,[157] 휘트니 휴스턴,[158] 마돈나,[159] 자넷 잭슨,[160] 보이즈 투 멘,[161] TLC,[162] 마이클 잭슨,[163] 토니 브랙스턴[164] 등이 있다.

이외에도 정말 수많은 가수들이 90년대 중후반에 메인스트림에 등장하였는데, 브리트니 스피어스, 에미넴, 어셔, 백스트리트 보이즈, 스파이스 걸스, *NSYNC, 데스티니스 차일드, JAY-Z,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브랜디, 모니카, 알리야, 로린 힐 등이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90년대 후반[165] 메인스트림에 데뷔하여 2000년대 초반까지[166] 큰 인기를 끌었으며, 몇몇은 2010년대까지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롱런하기도 했다.[167]

80년대 중후반부터 대중화가 되어가던 힙합은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 완전히 음악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90년 MC 해머가 발매한 Please Hammer, Don't Hurt 'Em이 전 세계적으로 1,870만 장 팔리면서 힙합의 시대를 알렸고 뒤이어 바닐라 아이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대중성 짙은 랩 장르인 팝 랩 아티스트였는데 이 흐름은 1992년 발매된 닥터 드레The Chronic으로 인해 완전히 깨진다.

더 크로닉의 성공으로 팝 랩은 침체되었고 G-funk 장르의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이 힙합 씬의 주류가 되었다. 서부 힙합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투팍 샤커, 스눕 독, 워렌 G, 네이트 독, 아이스 큐브, 이지 이, 닥터 드레가 이 흐름을 이끌었다. 특히 1994년 닥터 드레가 프로듀싱한 스눕 독의 데뷔 앨범 Doggystyle은 미국 내에서만 700만 장, 전 세계적으로 1,100만 장이 판매되며 서부 힙합 전성기를 대표한다.

한편으론 힙합의 본고장인 뉴욕에서도 주권을 되찾고 있었는데 1993년 발매된 우탱 클랜의 데뷔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를 시작으로 1994년 나스의 데뷔 앨범 IllmaticThe Notorious B.I.G.의 데뷔 앨범 Ready to Die, 1996년 JAY-Z의 데뷔 앨범 Reasonable Doubt버스타 라임스의 데뷔 앨범 The Coming 등이 발매되며 동부 힙합 역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서부의 투팍, 동부의 비기가 사망한 후 미국 힙합씬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는데, 퍼프 대디로 대표되는 동부의 팝 랩, 마스터 P의 노리밋 사단으로 대표되는 남부 힙합이었다. 이 둘을 통해 대중음악계에서 힙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고, 이는 00년대 초중반의 힙합 최전성기로 이어진다.

또한 컨템퍼러리 R&B 같은 흑인 음악들이 흑인 가수들에 의해 팝이나 힙합과 결합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90년대 중반에 퍼프 대디의 음반사 배드 보이 레코드와 머라이어 캐리가 처음 시도했으며 90년대 말이 되면 대중음악계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전설적인 밴드 너바나로 시작된 그런지 열풍이 순식간에 메인스트림을 점령하며 한때 록 음악에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에서는 그 반향으로 복고적 요소에 국가적 색채가 더해진 브릿팝이 크게 유행하며 오아시스, 블러 등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들을 포함한 여러 장르들은 기존의 록 음악을 대체하려는 성격이 강했는데 이를 얼터너티브 록이라 한다.

또한 90년대 말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NSYNC, 스파이스 걸스, 백스트리트 보이즈, 98 Degrees 등의 틴 팝 아티스트들의 10대 취향의 가사와 댄스가 큰 인기를 끌었고 훗날 힙합 레전드가 되는 에미넴이 등장한다.

커지고 커지던 음악 시장은 1999년에 절정을 맞았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해이다.


4.8. 2000년대, 흑인 음악의 최전성기[편집]


90년대 미국에서 제일 대중적인 장르였던 컨템퍼러리 R&B는 90년대 동안 보이즈 투 멘, 머라이어 캐리, 재닛 잭슨, 휘트니 휴스턴, 알 켈리, 어셔, Jodeci, 드루 힐, 메리 제이 블라이즈 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다.

2000년대에도 그 인기는 유지되었고 데스티니스 차일드비욘세, 어셔, 앨리샤 키스, 알 켈리, 아샨티, 크리스 브라운, 시에라, 타이리스, 아방트 등 많은 R&B 가수들이 차트를 점령했다.

힙합 음악은 90년대 말 퍼프 대디마스터 P의 활약으로 00년대 들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90년대 초중반의 메인스트림 힙합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남부 힙합은 아웃캐스트의 성공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마스터 P의 노리밋 사단이 90년대 말에 대성공을 거두며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후 00년대가 되면 루다크리스, 릴 웨인, 티아이, 영 지지 등의 정상급 래퍼, 릴 존이 만들어낸 장르 크렁크와 하위 장르 스냅 음악을 시도하는 래퍼, Three 6 Mafia 같은 기성 아티스트들이 모두 성공을 거두며 남부 힙합은 힙합씬을 넘어 대중음악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장르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크렁크컨템퍼러리 R&B가 융합된 장르인 Crunk&B는 200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대표곡으로는 어셔Yeah!, 시에라Goodies, 크리스 브라운Run It! 등이 있다.

동부의 퍼프 대디는 90년대 말에 정상의 위치에 올라 메이스 등의 팝 랩 래퍼들을 히트시켰고 이는 붐뱁으로 대표되던 동부 힙합의 스테레오타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동시에 DMX라는 하드코어 힙합 아티스트가 나타났지만 기존의 붐뱁과는 다른 것이었고, 어떤 부분에서든 동부 힙합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000년대가 되자마자 자 룰이라는 동부 팝 랩의 스타가 나타났고, 제이지나스의 디스전은 대중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동시에 퍼프 대디, 버스타 라임즈, 미시 엘리엇 같은 90년대 동부 랩스타들이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패볼러스, 조 버든 같은 신인 래퍼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DMX는 싱글 대신 앨범에 집중하는 성향으로 인해 히트 싱글은 적었지만 앨범 하나 하나가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동부의 간판 랩스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서부 힙합씬은 투팍의 사망 이후 몇 년간은 침체기를 겪게 되었는데 99년 말 닥터 드레2001을 발매하면서 다시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서게 된다. 2000년 한 해 동안 서부 힙합은 원래의 지위를 어느 정도 찾은거나 다름 없었으며 닥터 드레가 발굴해서 키운 중서부의 에미넴은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2000년대 초반 동안에는 스눕 독이 많은 히트곡과 히트 앨범들을 발매했으며, 닥터 드레는 50 센트라는 동부 힙합씬의 대스타를 발굴했다. 그러나 서부 힙합씬 자체의 신인 대스타는 스눕 독 이후로 명맥이 끊겨 버린지 오래였고 닥터 드레는 서부 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신인을 찾게 된다. 바로 더 게임이었다.

더 게임은 닥터 드레의 지원 하에 2005년 최고의 랩스타가 되었고 대중음악계에 서부 힙합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이런 배경으로 힙합이 완전한 대중음악으로서 빌보드 핫 100 등의 차트를 지배하던 시기가 2000년대 초중반인데, 남부 동부 서부를 제외한 지역인 중서부의 힙합씬 역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00년이 되자마자 넬리와, 닥터 드레가 발굴한 에미넴이 차트를 지배했으며, 2000년대 동안에는 이 둘과 함께 트위스타칭기, 칸예 웨스트가 앨범과 싱글들을 히트시켰다.

2000년대에 일렉트로니카는 다양한 장르들과 끝없이 결합하기 시작한다. 특히 비트감이 강한 록, 댄스, 힙합 등과 시너지 효과를 이루며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졌고 장르들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아예 팝에 대해 대체적 성격을 가진 얼터너티브[168] 장르가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중음악은 상업적으로 점점 하락세에 접어든다. 지속되는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리스너들의 소비 경향이 싱글 위주로 바뀌면서 앨범 판매량이 급감한 것이 원인이다.


4.9. 2010년대, EDM과 힙합[편집]


2010년대에는 힙합과 컨템퍼러리 R&B 등의 흑인음악과 일렉트로닉 뮤직이 진일보하게 된다. 특히 힙합은 일렉트로니카와 긴밀하게 결합해 유례없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트랩이 크게 인기를 끌며 차트를 휩쓸기 시작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은 대형 클럽의 성장과 뮤직 페스티벌의 재흥행 [169]에 더불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중 일렉트로 하우스덥스텝계열의 EDM들과 그동안 소외 되왔던 유럽(비영국) 출신의 DJ들이 셀럽으로서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또한 과 결합하여 프로듀서,DJ의 앨범의 보컬이 피처링 하는 형태로 트랩과 함께 차트를 양분하고 많은 양상형 음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R&B 역시 일렉트로닉 음악과의 결합하는 등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고, 이 흐름 중 하나이자 기존의 컨템포러리와 구분되는 얼터너티브 R&B더 위켄드Beauty Behind The MadnessStarboy의 전 세계적 히트 이후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꾸준히 인기를 받던 라틴 음악[170]이 2016년부턴 팝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보유하게 됐다.

몇십 년 동안 대중음악 시장의 주축이 됐던 록 음악은 마침내 그 생명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메인스트림에서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기존의 앨범 시장(피지컬)은 해가 갈수록 축소되고 있는 반면 스트리밍 시장이 압도적으로 증가했고 앨범을 피지컬로 발매하지 않고 스트리밍으로만 발매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많이 늘면서 음악 시장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노래들이 스트리밍 시장을 겨냥하여 2분대 중반~3분대 초반으로 많이 짧아졌다.


4.10. 2020년대 초반, 힙합 vs 팝[편집]



4.10.1. EDM과 힙합의 결합 트랩(음악)의 대흥행[편집]


2020년대의 경우 팝씬에선 201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뉴트로 흐름이 더 위켄드After Hours 발매 이후 정점을 찍으며 트렌드[171]가 되었다. 특히 수록곡 Blinding Lights는 1960년 히트한 뒤로 무려 60년 간 빌보드 올타임 차트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처비 체커The Twist의 왕좌 자리를 차지했다.

영국에서 그라임과 트랩을 결합한 드릴 랩이 개발되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빌보드 차트 1위부터 20위 까지 모두 트랩으로 도배되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락씬의 경우 올리비아 로드리고good 4 u빌리 아일리시Happier Than Ever 같은 계열 음악이 Z세대 백인 팝스타 들에 의해 오랜만에 hot 100 차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그뒤로 abcdefu머신 건 켈리의 Mainstream Sellout(앨범)이 히트하며 팝펑크가 록의 부활을 이끌수 있을지 기대받고 있다.

음악 시장의 경우, 2010년대 후반에 극강세를 보이던 스트리밍 시장이 하락세를 보이고 반대로 라디오 플랫폼이 전성기를 맞았다. 현재 음악 시장의 구도는 라디오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롱런곡 vs 덤핑 등의 각종 음원 공세를 이용한 1주 반짝 판매량 1위 곡[172] 두 개로 나뉜 상황이다.


또한 코로나이후, R&B와 일렉트로니카가 결합해 여성층을 사로잡는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있다.


5. 국가별 대중음악[편집]



5.1. 게르만[편집]


  • 미국: 포크, 컨트리, 재즈, 블루스, , R&B[173], [174], 힙합[175], 얼터너티브[176], 일렉트로닉 뮤직
  • 영국: [177], , 힙합[178]
  • 스웨덴: 스웨디시 팝
  • 노르웨이: 블랙 메탈
  • 독일: 크라우트 록, 인더스트리얼, 슐라거(Schlager)


5.2. 동아시아[편집]




5.3. 라틴[편집]




5.4. 동구권[편집]


  • 러시아: 러시안팝(Russian Pop, Российская поп-музыка), 바르드(Бард, 음유시)
  • 카자흐스탄: Q-POP


5.5. 중동풍[편집]


  • 튀르키예: 튀르크체 팝(Türkçe Pop. 해외 명칭은 터키쉬 팝 Turkish Pop)
  • 인도: 힌디 팝(Hindi Pop. 혹은 I-POP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리우드 영화음악
  • 아랍: 아랍팝(Arab Pop) (이집트레바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 이란: 이라니언 팝(Iranian Pop) 혹은 페르시안 팝(Persian Pop)
  • 그리스: 렘베티카(Rembetika)


5.6. 대중음악의 상징적인 인물들[편집]



5.6.1. 1950년대 이전[편집]




5.6.2. 1960년대[편집]




5.6.3. 1970년대[편집]




5.6.4. 1980년대[편집]





5.6.5. 1990년대[편집]




5.6.6. 2000년대[편집]




5.6.7. 2010년대[편집]



5.6.8. 2020년대[편집]


[ 랩스타 ]

[ 팝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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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이유때문에 당연하게도 대중성을 갖고있는 대중음악의 존재는 클래식이 발전한 형태인 현대음악을 청중들로부터 하여금 멀어지게 만들었다.[2] 대중음악 중에서도 대체적으로 나이가 조금 있는 성인들한테 인기가 많은 더 정적인 대중음악은 그래도 라디오에서 오랫동안 고정적으로 방송이 될 만큼 조금은 더 인기가 오래가지만, 청소년들의 관심을 주로 사로잡는 더 동적인 대중음악은 몇년만 지나도 라디오 방송에서 아예 사라져 버릴만큼 대부분 인기가 오래가지 못한다.[3] 저 나라들은 유튜브 통계만 봐도 인기가수와 인기 영상 20위권까지 자국 출신 가수는 아예 없거나 1, 2명 밖에 없고 나머지 인기가수들은 전부 영미권 가수들일 정도다. 자국어로 부르는 가수들이 영미권 가수들보다 자국 안방에서조차도 인기가 더 없다는 얘기. 이것 때문에 이 지역 가수들은 자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음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웨덴의 아바, 프랑스의 다프트 펑크가 그러한 케이스. 그래서 독일의 람슈타인은 자신들의 노래 가사에서 '난 자국어로 노래하지 않아'라는 가사를 직접 집어넣어서 저러한 세태를 풍자한 바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어가 버젓이 있어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the voice, 갓 탤런트 등)에서 대부분 참가자들이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인기 가수로 떠도 영어로만 발매를 하거나 아예 자국을 떠나 미국으로 진출해버린다...그러면서 그 자리를 KPOP이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4] 동아시아권에 비해 영미권 대중음악의 영향력이 유럽에 강하게 투사되는 것은 맞으나 2021년 7월 10일 기준 프랑스 싱글 차트 Top 100 https://acharts.co/france_singles_top_100 에 따르면 1위부터 4위까지 Soso Maness, Naps, Jul 등 프랑스 아티스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아티스트인 Lil Nas X가 6위에 보이고 있다. 영국 싱글차트에서 2021년 7월 11일 기준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에드 시런의 Bad Habits도 프랑스 싱글 차트에서는 33위로 고전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어권 음악(프랑스 노래 뿐 아니라 프랑스어로 발표한 모든 곡을 포함)도 유튜브에서 상당한 조회수를 확보하고 있다. 조회수가 가장 많은 프랑스어 곡은 2021년 7월 17일 기준 약 8억2천만 뷰를 기록하고 있는 Papaoutai(2013년 유튜브 업로드)이고, 그 다음이 7월 17일 기준 약 7억9천만 뷰를 기록하고 있는 Aya Nakamura의 Djadja(2018년 유튜브 업로드)이다. 이는 일본어로 발표된 대중음악 노래 가운데 조회수가 가장 높은, 나무위키에서도 명곡 중의 명곡이라 칭송하는 요네즈 켄시의 Lemon(요네즈 켄시)(2018년 유튜브 업로드, 2021년 7월 기준 6억 8천만뷰)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이다. [5] 포르투갈은 희한한 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참가자들이 영어 노래를 부르며 경쟁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하거나 혹은 우승은 못해도 크게 뜬 가수는 꼭 자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음반을 내서 자국은 물론 포르투갈어권(주로 브라질)에서 인기를 얻는다. 대표적인 예가 The voice Portugal 4에서 우승한 Fernando daniel으로 수 많은 영어노래를 부르며 해당 시즌을 우승하였지만 우승 후에는 주로 포르투갈어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Espera, Voltas는 포르투갈, 브라질 등 포르투갈어권에서 굉장히 인기도 많고 유튜브 조회 수도 상당하다.[6] 유럽의 방송, 음악 협회들과 단체에 유럽 국가 명의로 가입되어 있고 각종 차트에서도 유럽으로 포함시키기 때문에 음악계에서는 유럽 국가로 분류한다.[7] 구유고 연방의 경우 영미팝 노래가 인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카톨릭, 정교, 이슬람 등 여러문화가 충돌했던 적이 있던지라 자국의 고유한 음악을 보존하고 있다. 세르비아 음악만 보더라도 전형적인 동유럽풍 노래같다가도 튀르키예풍 멜로디가 섞여있는 느낌이 아주 많이 난다. 다만 내수시장이 세르비아는 고작 700만이고 구유고권으로 확대해도 2000만 뿐이라 영미팝이 타 유럽국가 처럼 자국음악시장에 강하게 투사되는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8] Bobby soxer들의 우상[9] 당시의 R&B는 로큰롤의 초기 형태와 상당히 유사했다. 현재의 컨템퍼러리 R&B와는 유사성을 찾기가 힘들다.[10] 역시 현재의 록 음악과는 차이가 있다.[11] 주로 Slient Generation 세대였다. 베이비 부머 세대(1946 ~ 1964 출생)는 락앤롤의 전성 시대가 시작될 당시에 태어난 세대이다.[12] 목사 안수를 받았다.[13]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14] 기성세대들에게 좋은 인식을 남기고, 오랫동안 가수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2년 동안 독일에서 운전병 생활을 했다.[15]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전의 미국 음악계를 말한다.[16] 로이드 프라이스는 1959년 Stagger Lee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 Personality (빌보드 핫 100 2위, 195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 I'm Gonna Get Married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대히트곡을 발매했다.[17] 브룩 벤턴은 1959년 "It's Just a Matter of Time" (빌보드 핫 100 3위), "Endlessly" (빌보드 핫 100 12위), "So Many Ways" (빌보드 핫 100 6위), 1960년 "Baby (You've Got What It Takes)" (빌보드 핫 100 5위), "A Rockin' Good Way (To Mess Around and Fall in Love)" (빌보드 핫 100 7위), "Kiddio" (빌보드 핫 100 7위), 1961년 "Think Twice" (빌보드 핫 100 11위), "The Boll Weevil Song" (빌보드 핫 100 2위), 1962년 "Lie to Me" (빌보드 핫 100 13위), 1963년 "Hotel Happiness"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곡이 크게 히트했다.[18] 로큰롤, R&B, 소울 장르의 곡들이었다.[19] 196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위[20] 196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위[21] 196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22] 1960년대의 경우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체가 크게 변동했었던 시기로 이 시기부터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해 미국 역사상 유래 없는 암흑기가 시작되며 히피 등 반문화 체제가 성장하여 클래식 시대가 종말을 맞는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등의 메소드 배우의 등장과 뉴웨이브 시네마의 유행, 헤이즈 오피스의 폐지로 1960년대 이후와 이전으로 영화계의 역사가 크게 나뉘는데, 음악계도 그런 셈이다.[23] 대중음악을 하나의 문화 체제로 발전시켰고 최초의 리마스터링 & 뮤직비디오 시도, 야외 게릴라 & 스타디움 공연 대중화, 악기와 장르간 크로스오버로 락 뮤직의 성립과 세분화에 기여, 메들리곡 & 컨셉트 앨범 대중화, 4인 락밴드 & 일렉기타 체제 확립, 앨범 위주의 음악 대중화 등에 기여하며 이로 다 말하기 힘들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24]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 상상을 넘는 판매량이었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도 보급기 기준으로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나 된다.[25] 고전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 패션과 종교로 설명하자면, 댄디와 미니 스커트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모즈 룩'이 반항의 상징이었으며, 머쉬룸, 몹톱컷으로 불리는 비틀즈의 헤어컷을 따라했다고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존 레논의 예수 발언, 멤버들이 무신론자였던 이유 등으로 비틀즈의 앨범이 화형식을 당하고, 이스라엘에서는 공연이 취소되었다.[26] 세계에서 가장 많이 커버된 곡이자 가장 많이 재생된 곡. 1985년까지 1,600개 가 넘는 버전이 만들어진 것이 인정되어 기네스 기록이 되었고, 2014년 2월 CBS News 보도 자료에 의하면 3천 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 한다. 방송음악협회에 따르면 20세기에만 재생이 아닌, 700만 번이 넘게 '연주'되었다고 한다.[27]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당시 사회에서는 저조한 판매 성적을 보였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것은 오직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고, 이 앨범이 재평가를 받는 것은 다름아닌 8,90년대부터였다. 여기에는 폴 매카트니 같은 동료들의 꾸준한 찬사가 같은 도움 등이 있었다.[28] 유명한 문구로 '영화에 시민 케인이 있고, 소설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있다면, 대중음악에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있다'는 문구가 있다.[29] 대표적으로 천재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고백이 있다.[30] 보통 이렇게 평가받는 음반들은 60~90년대에 몰려 있다.[31] 드림 팝의 시초는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로 보는 게 주 시각이다.[32]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공교롭게도 모두 27세에 죽었다.[33] 2017년 음악 최대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올뮤직의 연구 결과, 밥 딜런은 전체 기준 두번째로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솔로 아티스트로는 가장 많이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위크에서는 폴 사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글스, 닐 영, 도노반, 돈 매클레인, 조니 미첼 등 쟁쟁한 70년대 아티스트들을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밥 딜런은 이러한 문화계의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34] 모더니즘 시인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평론가들은 밥 딜런이 미국의 정치적, 문화적 혼돈을 잘 담아낸 혁신적인 음악을 했다고 극찬하였다.[35] 포크 록에서 한층 더 나아가 블루스, 컨트리, R&B 등 보다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고 백 밴드인 더 호크스를 비롯한 여러 명의 세션 뮤지션들을 고용하여 제작해 딜런의 앨범 중에서도 손꼽히게 호화로운 사운드를 보여주는 앨범이다.[36] 이 노래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노래로는 A Day in the Life, Be My Baby, Respect, Smells Like Teen Spirit, (I Can't Get No) Satisfaction 등이 있다. 당장 항목으로 넘어가서 수상 기록을 봐보면 알겠지만, 명곡 리스트를 선정할 때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이 곡을 1위로 올린다.[37] 비틀즈의 Rubber Soul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Rubber Soul이 사운드적으로 통일감을 이뤘다면 Face to Face는 가사로 통일감을 조성한 앨범이었다.[38] 엘비스 코스텔로, 더 잼(과 폴 웰러), 더 스미스, XTC, 오아시스, 블러, 실제로 데이먼 알반이 존경하는 뮤지션 중 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리버틴즈가 이들의 추종자로 유명하다.[39] 비틀즈가 1964년 ~ 1970년 사이에 20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만들어냈는데 같은 시기 슈프림즈는 12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만들어냈다. 이 시기에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10개 이상 만들어낸 아티스트는 비틀즈와 슈프림즈가 유이하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40] They made up the ‘unholy trinity’ of British hard rock and heavy metal during the genre's 1970s golden age. - BBC[41]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 정부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지정, 국경일로 만들었다.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은 지금까지도 인류에 회자되는 명연설로 남아있으며 지금도 간간이 미국 교과서에 실린다.[42]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추모적 성격을 띠는 곡으로, 폴 매카트니에 따르면 실질적으로는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흑인 소녀를 위한 곡이라고 한다.[43] 실제로 지미 헨드릭스가 흑인음악계에서 까일 무렵에도 비비 킹, 마일스 데이비스, 조지 클린턴 등의 진짜 거장들은 창의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헨드릭스의 혁신성을 알아보고 그에 영향받은 음악을 선보였다.[44] 에릭 클랩튼과 그의 친구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 패티 보이드가 얽힌 일화가 있는 곡이다. 자세한건 항목 참고.[45] 역대 음반 판매량이 공식적으로 약 3억 장 이상으로, 역사상 6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엘튼 존, 마돈나 다음에 위치한다.[46] 전 세계 총 3,7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대중음악 역사상 6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록 장르 음반 중 3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47] 레드 제플린이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다. 레게, 펑크,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 등을 시도하였다.[48] 문학적인 가사와 8분의 긴 시간이 특징이며 전체적인 음악풍은 중동, 인도풍이나 약간은 레게사이키델릭 록의 느낌이 있다.[49] 가장 위대한 록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며 로버트 플랜트를 제외하고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수많은 록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보컬이다. 음역대 또한 매우 넓어서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서 로버트 플랜트보다 음역대가 더 넓거나 비슷한 보컬은 액슬 로즈프레디 머큐리밖에 없다.[50] 쇼팽의 클래식 곡까지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할 정도의 어마 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를 빼면 지미 페이지 위에 있는 하드 록 기타리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51] 존 엔트위슬, 잭 브루스,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윌슨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베이시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수많은 악기들을 수준급으로 다루기에 3집에서부터 이 능력이 빛을 발했으며 그중에서도 4집, 5집, 6집 세 앨범이 위대한 앨범이 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52] 현대 드럼의 기본 주법을 창시한 드럼의 신이다. 이견이 없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로 평가받는다. 어지간한 드럼 교본에는 존 본햄의 이름이 무조건 등장하며 그렇기에 드럼을 배운 사람들 중 레드 제플린은 잘 몰라도 존 본햄을 모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53] 70년대 활동 음악가만 따지면 엘튼 존이 위이지만, 이는 라이온킹 등 8~90년대의 커리어까지 다 합친 수치다. 순수 1970년대만을 쳤을때는 레드 제플린이 1위다. 이는 ,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등 1970년대에 인기 있던 다른 음악가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다.[54] 한편 의외로 빌보드 핫 100에서는 신통찮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내 인기는 한참 아래였던 도 빌보드 핫 100 1위 곡은 2개를 냈고, 핑크 플로이드도 1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냈는데, 레드 제플린의 빌보드 핫 100 최대 기록은 Whole Lotta Love가 기록한 3위였다. 이는 레드 제플린이 싱글 발매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발매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Stairway to Heaven같은 인기 곡들마저 싱글로 내지 않았을 정도.[55] 레드 제플린은 역사상 3번째로 많은 RIAA 다이아몬드(1,000만장) 인증 판매고를 올린 앨범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참고로 1위는 9회를 올린 가스 브룩스, 2위는 6회를 올린 비틀즈이다.[56] 헤비 메탈을 창시한 밴드를 꼽을때, 가장 널리 알려져있는 밴드 중 하나이나 역설적으로 헤비 메탈 색체가 가장 적은 밴드기도 하다.[57] 전 세계적으로 총 4,3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록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Thriller 앨범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58] 기존의 앨범들이 전형적인 명곡을 위주로 좋은 명반을 만들었던 반면, 이 앨범은 곡 대다수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 앨범 자체를 하나의 음악처럼 만든 경우기 때문에 이 곡의 모든 곡들은 메들리 형태로 이어져 있으며, 따라서 수록곡 전체를 한번에 들어야 완벽한 감상이 가능하다. [59] 록 뮤지컬의 확립에도 기여했다.[60] 앨범에 대한 평가도 포함해서, 작품이지만 갑자기 지나치게 평가가 높아진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고 너무 과소평가가 됐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이건 서로 개성이 있는 곡들을 억지로 줄세우기를 해야해서 역사성이나 창조성, 개성 등 따져야 하는 입장이라 그렇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늘 명곡 취급을 받는다.[61] 특히 영국이 그 영향이 가장 강했다.[62] 미국 록 밴드이다. 펑크 록의 계보때문에 분류가 이렇게 된 듯 하다.[63]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이며, 과장해서 락 음악은 London Calling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추후의 락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64] 개별 곡들도 포함해서 모두 빌보드, UK 차트 1,2위를 쓸어담던 앨범들이다.[65] 록 역사상 최초의 트리플 앨범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66] 이 앨범은 1971년 한해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고 한다.[67]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핫 1위 등.[68] 빌보드 앨범 차트 2위, 싱글 1위 2곡.[69] 빌보드, UK 차트 1위를 달성했다.[70] 빌보드 핫 100 3위에 올랐으며, 차트 1위에는 실패했으나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려 1971년 연말결산 차트에서 3위에 올랐다.[71] 저녁 6시 정각 행사 시작을 알리는 볼 레이징(Ball Raising, LED 볼을 꼭대기로 올리는 행사)이 이뤄지며, 밤 11시 56분 쯤 존 레논의 <Imagine>이 나오며, 노래가 끝나면 1분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볼이 내려오는데 이것을 볼 드랍이라고 한다. 그리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프랭크 시나트라의 <New York, New York> 등이 순서대로 맨해튼 한복판에 울러퍼진다.[72] 돈 맥린의 American Pie에 등장하는 가사인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에서 따온 표현. 1959년 2월 3일, 즉 비행기 추락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한꺼번에 객사한 날을 가리킨다. 그후 다시 쓰이게 된 것이다.[73] 미국에서 그의 별명은 다름아닌 'The Boss'다.[74] 이 음반이 발매된 1975년 8월 25일은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지 4개월째 되는 날짜이자,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까지 겪으면서 미국 국민들은 미래를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찬 시각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PTSD, 마약과 같은 사회적 문제도 1970년대에 대두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의 영광은 베트남 전쟁에서 처음으로 패전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를 뉴저지의 청소년, 노동자들의 시점을 무대로 이러한 삶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을거란 믿음에 가득찬채 마을을 떠나는 모험을 다룬 찬송가에서, 증오와 폭력으로 물든 거리의 비극, 갱단들의 총격전을 그려나가는 서사시로 이루어진 앨범은 1970년대의 미국의 상황을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75] 컨트리 뮤직과 블루스, 로큰롤을 기반으로 하여 미국 노동자들의 비애를 다룬 장르이다.[76] 앨범 제작 당시 사라와의 파경으로 인하여 딜런이 느낀 절망과 분노,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들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과 이별에서 오는 복잡한 심경과 고뇌 등은 밥 딜런 특유의 모더니즘 문학적인 가사와 함께 앨범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이는 딜런이 자기고백적 싱어송라이터의 본좌 위치에 오르는데 한 몫하였으며, 이후의 싱어송라이터들에게도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앨범은 역대 최고의 Breakup album(이별 뒤 나온 앨범)이란 평을 받기도 한다.[77] 캐롤 킹과 더불어 여성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언급할 때 항상 언급되는 아티스트이다. 북미권에서 조니 미첼 이후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중에서는 조니 미첼의 영향권 아래에 없는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악계, 특히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에게 조니 미첼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78] 팝, 소프트 록, 싱어롱라이터이다.[79] 조니 미첼의 Blue와 함께 더불어 1970년대 자기 고백적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명반을 언급할때 자주 언급되는 앨범이다.[80] 빌보드 핫 100 3주 연속 1위[81]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82]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83] 빌보드 핫 100 3위[84] 흑인과 백인이 멤버로 있는 밴드들도 포함되었다.[85] 에드윈 스타 - War (5위), 다이애나 로스 -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6위), 잭슨 파이브 - I'll Be There (7위), 프리다 페인 - Band of Gold (10위), 잭슨 파이브 - ABC (15위), 잭슨 파이브 - The Love You Save (16위),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Elf Agin) (19위), 에릭 버든 앤드 워 - Spill the Wine (20위), 파이브 스테어스텝스 - O-o-h Child (21위), 멜라니, 더 에드윈 호킨스 싱어즈 - Lay Down (Candles in the Rain) (23위), 템테이션스 - Ball of Confusion (That's What the World Is Today) (24위), 더 모멘츠 - Love on a Two-Way Street (25위), 잭슨 파이브 - I Want You Back (28위), 스티비 원더 - Signed, Sealed, Delivered (I'm Yours) (31위), 클레런스 카터 - Patches (35위), 브룩 벤턴 - Rainy Night in Georgia (37위), 체어멘 오브 더 보드 - Give Me Just a Little More Time (39위)[86] 템테이션스 - Just My Imagination (Running Away with Me) (9위), 알 그린 - Tired of Being Alone (12위), 허니 콘 - Want Ads (13위), 더 언디스퓨티드 트루스 - Smiling Faces Sometimes (14위), 코닐리어스 브라더스 & 시스터 로즈 - Treat Her Like a Lady (15위), 진 나이트 - Mr. Big Stuff (18위), 마빈 게이 - What's Going On (21위), 빌 위더스 - Ain't No Sunshine (23위), 더 프리 무브먼트 - I've Found Someone of My Own (26위), 오션 - Put Your Hand in the Hand (33위), 잭슨 파이브 - Never Can Say Goodbye (40위), 더 퍼즈 - I Love You for All Seasons (45위), 드라마틱스 - Whatcha See Is Whatcha Get (46위), 스티비 원더 - If You Really Love Me (48위), 아레사 프랭클린 - Spanish Harlem (49위)[87] 빌보드 핫 100 6주 연속 1위[88] 로버타 플랙 -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1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 The Candy Man (5위), 조 텍스 - I Gotcha (6위), 빌 위더스 - Lean on Me (7위), 알 그린 - Let's Stay Together (11위), 더 샤이-라이츠 - Oh Girl (13위), 척 베리 - My Ding-a-Ling (15위), 루서 잉그램 - (If Loving You Is Wrong) I Don't Want to Be Right (16위), 스타일리스틱스 - Betcha by Golly, Wow (18위), 스테이플 싱어즈 - I'll Take You There (19위), 마이클 잭슨 - Ben (20위), 빌리 프레스턴 - Outa-Space (22위), - Slippin' into Darkness (23위), 더 메인 인그리디언트 - Everybody Plays the Fool (29위), 더 피프스 디멘션 - (Last Night) I Didn't Get to Sleep at All (31위), 코닐리어스 브라더스 & 시스터 로즈 - Too Late to Turn Back Now (34위), 더 오제이스 - Back Stabbers (35위), 멜 & 팀 - Starting All Over Again (38위)[89] 1972년 10월 셋째 주부터 11월 둘째 주까지[90] 토니 올란도[91] 텔마 홉킨스, 조이스 빈센트 윌슨[92]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93]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 -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1위), 로버타 플랙 -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3위), 마빈 게이 - Let's Get It On (4위), 빌리 프레스턴 - Will It Go Round in Circles (8위), 다이애나 로스 - Touch Me in the Morning (10위), 클린트 홈즈 - Playground in My Mind (12위), 빌리 폴 - Me and Mrs. Jones (15위), 도비 그레이 - Drift Away (17위), 스티비 원더 -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 (19위), 아이즐리 브라더스 - That Lady (21위), 실비아 - Pillow Talk (22위), 스티비 원더 - Superstition (26위), 더 오제이스 - Love Train (32위), 배리 화이트 - I'm Gonna Love You Just a Little More Baby (33위), 던 피처링 토니 올란도 - Say, Has Anybody Seen My Sweet Gypsy Rose (34위), 에디 켄드릭스 - Keep on Truckin' (35위), 블러드스톤 - Natural High (39위)[94] 74년도 당시 전 세계적으로 1,100만 장 이상이 판매되며 디스코의 전 세계적인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곡이다.[95]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 - Love's Theme (3위), 잭슨 파이브 - Dancing Machine (5위), MFSB featuring 더 쓰리 디그리즈 -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 (7위), 아레사 프랭클린 - Until You Come Back to Me (That's What I'm Gonna Do) (11위), 쿨 & 더 갱 - Jungle Boogie (12위), 스타일리스틱스 - You Make Me Feel Brand New (14위), 알 윌슨 - Show and Tell (15위), 블루 매직 - Sideshow (19위), 에디 켄드릭스 - Boogie Down (30위),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 Be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Me (34위), 로버타 플랙 - Feel Like Makin' Love (35위), 더 메인 인그리디언트 - Just Don't Want to Be Lonely (36위), 빌리 프레스턴 - Nothing from Nothing (37위), 조지 맥크레이 - Rock Your Baby (38위),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 I've Got to Use My Imagination (41위), 더 휴즈 코퍼레이션 - Rock the Boat (43위), 스티비 원더 - Living for the City (45위), 디안 워윅, 더 스피너스 - Then Came You (46위)[96] 197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2위[97] 1975년 5월 넷째 주[98] 1975년 5월 셋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99] 1975년 9월 둘째 주[100] 1975년 2월 둘째 주[101] 1975년 2월 둘째 주[102]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Shining Star (7위), 미니 리퍼튼 - Lovin' You (14위), 칼 더글러스 - Kung Fu Fighting (15위), 토니 올란도 앤드 던 - He Don't Love You (Like I Love You) (19위), 밴 맥코이 & 더 소울 시티 심포니 - The Hustle (22위), 라벨 - Lady Marmalade (23위), - Why Can't We Be Friends? (24위), 메이저 해리스 - Love Won't Let Me Wait (25위), 스티비 원더 - Boogie On Reggae Woman (26위), 아이즐리 브라더스 - Fight the Power (29위), 오하이오 플레이어스 - Fire (31위)[103] 필라델피아 소울 장르의 곡이다.[104] 펑크(Funk) 장르의 곡이다.[105] 조니 테일러 - Disco Lady (3위), 더 맨해튼스 - Kiss and Say Goodbye (6위), 더 미라클스 - Love Machine (7위), 실버 컨벤션 - Fly, Robin, Fly (14위), 다이애나 로스 - Love Hangover (15위), 도로시 무어 - Misty Blue (19위), 더 실버스 - Boogie Fever (20위), 핫 초콜릿 - You Sexy Thing (22위), 실버 컨벤션 - Get Up and Boogie (That's Right) (24위), KC 앤 더 선샤인 밴드 - (Shake, Shake, Shake) Shake Your Booty (26위), 코모도어스 - Sweet Love (27위), 맥신 나이팅게일 - Right Back Where We Started From (28위), 리듬 헤리테이지 - Theme from S.W.A.T. (29위), 오하이오 플레이어스 - Love Rollercoaster (30위), 루 롤스 - You'll Never Find Another Love Like Mine (32위), 비키 수 로빈슨 - Turn the Beat Around (38위), 도나 서머 - Love to Love You Baby (41위), 다이애나 로스 - Theme from Mahogany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43위), 러퍼스 피처링 샤카 칸 - Sweet Thing (44위), KC 앤 더 선샤인 밴드 - That's the Way (I Like It) (45위)[106] 1976년 10월 셋째 주부터 1977년 1월 둘째 주까지 13주 연속 1위, 1977년 1월 다섯번째 주에 1주 1위[107] 이 중에는 Shadow Dancing이라는 노래도 있었는데, 이 노래는 비 지스의 다른 노래들 못지않게 히트쳐서 1978년 빌보드 연말차트 1위를 차지했다.[108] 더 이모션스 - Best of My Love (3위), 핫 - Angel in Your Arms (5위), 셀마 휴스턴 - Don't Leave Me This Way (7위), KC 앤 더 선샤인 밴드 - I'm Your Boogie Man (11위), 스티비 원더 - Sir Duke (18위), 마빈 게이 - Got to Give It Up (20위), 더 실버스 - Hot Line (25위), 로즈 로이스 - Car Wash (26위), 마릴린 맥쿠 & 빌리 데이비스 주니어 - You Don't Have to Be a Star (To Be in My Show) (27위), 코모도어스 - Easy (33위), 나탈리 콜 - I've Got Love on My Mind (35위), 더 잭슨스 - Enjoy Yourself (40위)[109] 사만다 생의 곡.[110] 앤디 깁의 곡.[111]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 - Boogie Oogie Oogie (9위), 코모도어스 - Three Times a Lady (10위), 시크 - Dance, Dance, Dance (Yowsah, Yowsah, Yowsah) (20위), 조니 마티스, 데니스 윌리엄스 - Too Much, Too Little, Too Late (28위), 레이디오 - Jack and Jill (31위), 댄 힐 - Sometimes When We Touch (33위), 도나 서머 - Last Dance (34위), 로버타 플랙, 도니 해서웨이 - The Closer I Get to You (38위), 더 오제이스 - Use ta Be My Girl (42위), 나탈리 콜 - Our Love (43위), 힛웨이브 - The Groove Line (49위)[112]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113] 빌보드 핫 100 6주 비연속 1위[114]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115] 빌보드 핫 100 3주 비연속 1위[116] 빌보드 핫 100 3주 비연속 1위[117] 빌보드 핫 100 2위[118] 빌보드 핫 100 2주 연속 1위[119] 도나 서머 - Bad Girls (2위), 시크 - Le Freak (3위), 피치스 & 허브 - Reunited (5위), 글로리아 게이너 - I Will Survive (6위), 도나 서머 - Hot Stuff (7위), 빌리지 피플 - Y.M.C.A. (8위), 아니타 워드 - Ring My Bell (9위), 도나 서머 - MacArthur Park (12위), 포인터 시스터즈 - Fire (15위), 시크 - Good Times (20위), 에이미 스튜어트 - Knock on Wood (22위), 맥신 나이팅게일 - Lead Me On (24위), 더 잭슨스 -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 (25위), 레이디오 - You Can't Change That (30위), 피치스 & 허브 - Shake Your Groove Thing (31위), 디안 워윅 - I'll Never Love This Way Again (32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After the Love Has Gone (38위), 도나 서머, 브루클린 드림즈 - Heaven Knows (39위), 보니 포인터 - Heaven Must Have Sent You (43위), 시스터 슬레지 - He's the Greatest Dancer (45위), 빌리지 피플 - In the Navy (48위)[120] 최초의 뮤직비디오는 1960년대 중반에 비틀즈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는데, 당시 워낙 바쁘던 비틀즈가 여러 음악관련 방송들에 다 출연할 수가 없어서, 곡 분위기와 가사에 맞는 영상을 찍어서 곡 런닝타임에 맞게 편집하여 방송국에 보냈던 것이다. 처음엔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이후엔 갈수록 더 신경을 써서 제작해서 Strawberry Fields Forever 등의 뮤비에서는 독특한 영상미를 실험하기도 한다. 이후 이는 핑크 플로이드, 비치 보이스 등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121] 원래 LP 전부터 오픈릴 테이프의 형식으로 테이프 녹음 자체는 널리 쓰이고 있었지만 기기가 거대하고 사용이 번잡하여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방송국이나 전문 분야에서는 오픈 릴이 널리 쓰였고, 디지털 녹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LP를 비롯한 모든 음반의 음원이 테이프에 녹음되었다. 즉, 아날로그로서는 가장 음질이 좋은 매체인 것이다.[122] 1970년대까지는 카세트보다 좀 더 대형인 8트랙 테이프라는 매체도 있었다. 오토리버스 기능으로 반복 재생할 수 있어 자동차 오디오용으로 널리 쓰였고, 한국에서도 픽업 트럭 등에서 꽤 오랫동안 찾아볼 수 있었다.[123] 잔부품이 많이 들어가지만 테이프 원단만 좋은 것으로 확보하면 나머지는 공장 차리는 데에 그리 고급 기술이 필요하진 않았다.[124] 뉴 웨이브 음악의 상징적인 노래이기도 하다.[125] 이는 아직까지도 최장기 빌보드 핫 100 2위 기록이다. 2002년 미시 엘리엇의 곡 "Work It"과 타이 기록이다.[126] 공교롭게도 10주 연속 2위를 차지하던 기간 1위를 차지하던 곡도 10주 연속 1위를 차지했는데, 다름아닌 올리비아 뉴튼 존의 대표곡인 Physical이었다.[127] 쿨 & 더 갱 - Celebration (1981년 2월 첫째 주부터 둘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 198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위)[128] 다이애나 로스, 라이오넬 리치 - Endless Love (1981년 8월 셋째 주부터 10월 둘째 주까지 9주 연속 1위, 198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위)[129]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 Ebony and Ivory (1982년 5월 셋째 주부터 6월 넷째 주까지 7주 연속 1위, 198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위)[130] 라이오넬 리치 - Truly (1982년 11월 넷째 주부터 12월 첫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7위)[131] 국내외로 논란이 있는 사실로 사상 최초로 MTV에서 헤비 로테이션된 흑인 아티스트는 아니라는 내용이 적힌 기사들이 있다. 이미 프린스의 1999 (82.12 방영)이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83.03 방영)보다 먼저 방영하였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백인 아티스트보다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흑인 아티스트의 뮤비가 전혀 방송되지 못 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간도 많이 흘렀고, 마이클 잭슨의 임팩트가 엄청나서 혼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전까지 존재했던 무형의 벽을 허물어버린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의 업적을 폄하할 수 없다.[132] 마이클 잭슨 또한 그렇다.[133] 60년대, 70년대도 앞서 보다시피 상당히 치열했다. 그렇지만 80년대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기를 꼽자면 이 초중반대다.[134] 1986년 3월 둘째 주부터 4월 셋째 주까지 7주 연속 1위, 1986년 5월 셋째 주부터 6월 넷째 주까지 7주 연속 1위[135]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88년 4월 18일에 기록)[136] 1987년 6월 넷째 주부터 7월 첫째 주까지[137] 1987년 9월 넷째 주부터 10월 첫째 주까지[138]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88년 6월 1일에 기록)[139] 1987년 9월 셋째 주[140] 1987년 10월 넷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141] 1988년 1월 넷째 주[142] 1988년 3월 넷째 주부터 4월 첫째 주까지[143] LA 지역에서 활동한 글램 메탈 밴드를 지칭한 용어인데, 일본에서 시작해서 한국으로 퍼진 것이다. 간혹 아래에 언급할 팝 메탈의 기원과 같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144] 이 곡은 최초의 글램 메탈 히트 곡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상징성으로 인하여 최고의 글램 메탈 곡을 꼽을때 반드시 3위 안에 들어간다.[145] 뉴 잭 스윙은 완전한 흑인 음악이다.[146] 1989년 1월 셋째 주부터 2월 첫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 1989년 2월 셋째 주부터 3월 첫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147] 1989년 10월 넷째 주부터 11월 셋째 주까지 4주 연속 1위[148] 1989년 10월 첫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149] 1990년 3월 첫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150] 1990년 10월 넷째 주에 1주 1위[151] 1991년 1월 셋째 주에 1주 1위[152] 1989년 9월 넷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 1989년 11월 넷째 주부터 12월 둘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 1989년 12월 넷째 주에 1주 1위, 1990년 1월 둘째 주에 1주 1위[153] 1989년 7월 첫째 주[154] 1989년 9월 넷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155] 1989년 11월 넷째 주부터 12월 첫째 주까지[156] 90년대를 주름잡던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으로, 1990년대를 상징하는 여가수로서 여러 매체와 시상식에서 디케이드 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 최고의 가수임을 인정받았다. 93년 《Music Box》발매 이후부터, 96년 《Daydream》활동 시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90년대 중반을 휩쓸었다. 이외에도 91년 《Mariah Carey》앨범, 94년 《Merry Christmas》앨범, 97-98년 《Butterfly》앨범 등 90년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히트작을 만들어내었고 이 10년 동안 15개의 빌보드 1위 곡을 배출해내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157] 90년대를 주름잡던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으로, 96년 《Falling into You》발매 이후부터 98년 "My Heart Will Go On" 활동 시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90년대 후반을 휩쓸었다. 이외에도 94년 《The Colour of My Love》앨범, 95년 프랑스어 앨범 《D'eux》등으로 꾸준히 높은 인기를 누렸다.[158] 90년대를 주름잡던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으로, 92-93년 《The Bodyguard OST》및 "I Will Always Love You"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90년대 초중반을 휩쓸었다. 이외에도 91년 《I'm Your Baby Tonight》앨범, 99년 《My Love Is Your Love》앨범 등으로 90년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높은 인기를 누렸다.[159] 명실상부한 팝의 여왕으로, 92년 《Erotica》이후부터 침체기를 겪었지만 95년에 히트곡 "Take A Bow"를 배출했다. 이후 98년에《Ray of Light》앨범 이후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90년대 후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에 가장 성공한 가수 4위였다.[160] 90년《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앨범 시기부터 93년《janet.》활동 시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앨범의 7개 싱글이 모두 빌보드 Top 5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97-98년《The Velvet Rope》앨범 등으로 90년대 전반에 걸쳐 인기를 누렸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가수 2위였다.[161] 92년 "End of the Road" 활동 시기부터 96년 "One Sweet Day" 활동 시기까지 싱글들 위주로 90년대 초중반 큰 인기를 끌었다. 단 5개의 곡으로 빌보드 1위 총합 50주를 달성했다. 이외에도 91년 《Cooleyhighharmony》앨범 등으로 인기를 누렸다. 90년대 가장 인기있었던 R&B 남자 그룹으로 꼽히며 빌보드 기준 90년대에 가장 성공한 가수 3위였다.[162] 싱글 "Waterfalls"로 활동하던 95년《CrazySexyCool》부터 "No Scrubs"로 활동하던 99년《Fanmail》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90년대 중후반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당시 가장 인기있는 여자 그룹이었으며, 이외에도 92년《Ooooooohhh... On the TLC Tip》앨범 등 90년대 전반에 걸쳐 인기를 끌었다.[163] 명실상부한 팝의 황제로, 비록 80년대만은 못했으며 93년에 아동 성추행 논란에 처하기도 했으나, 90년대에도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92년 앨범《Dangerous》 로 전 세계 3,2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으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Black or White"도 상당한 화제성을 가지면서 전세계적인 신드롬급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아동 성추행 논란을 벗어난 후 95년 앨범《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으로 전 세계 2,0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꾸준히 큰 인기를 누렸다.[164] 90년대 초반에 데뷔하여 96-97년 싱글 "Un-Break My Heart"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싱글이 속한 앨범《Secrets》역시 세계적으로 1,500만 장 넘게 팔리며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93년 셀프타이틀 앨범《Toni Braxton》으로 인기를 끌었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함께 세계 4대 디바로 불리기도 했다.[165] '97년 ~ '98년[166] '00년 ~ '01년[167] 에미넴, 브리트니 스피어스[168] 타 장르와 완전히 구분 지어 얼터너티브 뮤직이라 부른다.[169] 록 음악이 하락세를 겪음에 따라 부진하던 페스티벌 문화가 edm으로 대체[170] Despacito , Havana[171] 이 때를 기점으로 국내외를 넘나들며 정말 많은 아티스트들이 신스웨이브, 디스코 등과 같은 뉴트로 사운드를 적극 기용하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2022년 발매한 Beyonce의 앨범 RENAISSANCE 등이 있다.[172] 이런 곡 대부분은 리믹스 편법페이올라, 그리고 스탠 문화로 인해 1위를 해먹는다.[173] 소울, Funk,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컨템퍼러리 R&B, 네오 소울, Crunk&B, 얼터너티브 R&B 등의 하위 장르가 있다.[174] 블루스 록, 하드 록, 개러지 록, 포크 록, 루츠 록, 펑크 록, 글램 록, 피아노 록, 메탈, 그런지, 슈게이징, 얼터너티브 록 등의 하위 장르가 있다.[175] 갱스터 랩, 붐뱁, G-funk, 크렁크, 팝 랩, 재즈 랩, 더리 랩, 래칫, 트랩, 멈블 랩, 이모 랩, 싱잉 랩 등의 하위 장르가 있다.[176] 흔히 인디 성향이 강한 음악이 이쪽에 속한다.[177] 비틀즈,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등의 록 음악하면 생각나는 굵직굵직한 아티스트 대부분이 영국 출신인 경우가 많다.[178] 미국의 힙합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그라임, UK드릴 같은 장르가 발생해 영국 고유의 힙합씬이 형성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