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아들 토막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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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과
2.1. 유기
2.2. 시신 발견
2.3. 끝내 미제사건으로 남나
2.4. 결정적 제보 및 검거
2.5. 판결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95년 4월 9일 대전시 중구 태평동에서 50대 남성이 자신의 아들인 30대 남성을 살해한 후 토막내 이틀 뒤인 4월 11일 논산공주에 나눠 유기한 비속 토막살해 사건.


2. 경과[편집]


1995년 4월 9일 오후 2시 30분, 당시 아파트 경비원이었던 59세 이정원은 자신의 아들인 35세 이동권이 집에서 낮술을 하고 현관 유리창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자 홧김에 둔기로 머리를 내리쳐 숨지게 하였다. 진술에 따르면 시신은 살해한 당일 바로 토막을 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집에 있는 과도와 톱 등으로 시신에서 머리와 양손, 양발을 분리해낸 후 몸통 부분을 정부미 포대에 담은 뒤 여행용 가방으로 또한번 감쌌다. 그리고는 몸통에서 분리해낸 머리, 양손, 양발등은 다른 정부미 포대에 나눠담았다.

2.1. 유기[편집]


이틑날인 4월 11일 밤 9시 30분경, 자신의 자동차인 현대 엑셀 승용차에 나눠담은 토막 시신들을 싣고 집에서 출발해 논산군 연산면 신암리 황룡고개 인근 9부능선에 토막낸 부위 중 제일 부피가 큰 몸통 부위를 먼저 버렸다.

이후 곧바로 출발해 2시간 가량을 운전한 뒤 밤 11시경 공주시 반포면 금강에 나머지 부위인 머리, 양손, 양팔 등을 차례차례 버렸다. 이때 범인은 시신을 담은 정부미 포대에다 주변에 있는 돌을 가져와 묶고 던졌는데 범인이 얼마나 시신의 신원이 파악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2. 시신 발견[편집]


시신 유기 시점에서 사흘 뒤인 4월 14일 오후 2시경, 강경경찰서[1] 연산파출소에 황룡고개 인근에서 시체가 담긴 것으로 의심되는 여행용 가방을 발견했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현장을 수색하던 당시 이 모 순경에 의해 토막난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시체는 몸통만 있어 신원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심하게 부패되지 않은 점과, 인근 국도변에서 100여m나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져 있었던 점 등으로 미뤄 경찰은 시신이 최근에 살해된 후 유기된 것으로 봤다.

당시 수거된 사체가 넣어져있던 정부미 포대에는 '전남 순천''조치원'이라는 표기가 적혀져있어 사건해결을 위한 단서라고 여겨졌으나 큰 도움은 안 되었다. 또 사체가 넣어져 있던 파란색 여행용 가방에도 86아시안게임 마크와 '전남 광주'라는 표기가 적혀져있어 아시안 게임 개최 당시 선수촌에 입촌한 454명의 선수 가운데 광주전남 출신 75명의 신원파악에 주력했지만, 이 가방은 일반인들에게도 시판되었던 제품이어서 이런 식의 수사로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후 충남지방경찰청은 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시키고, 토막난 시신의 신장이 170~175cm정도로 추정되며 왼쪽 콩팥을 제거한 흔적이 있고 오른쪽 발목에는 5cm가량의 화상흔이 있다는 정보가 적힌 전단 2만여장을 전국에 배포했다. 또한 사체의 신원을 신고한 사람에 대해 200만원, 살인 용의자 신고자에게는 500만원, 도합 700만원이라는 큰 현상금을 내걸었다.

2.3. 끝내 미제사건으로 남나[편집]


하지만 큰 현상금을 내걸었음에도 이렇다할 제보는 당장 오지 않았다. 발견 현장을 중심으로 나머지 신체 부분을 탐색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했고 충남을 중심으로 신장 제거수술을 받은 자 및 인근 행불자 정보와 대조하면서까지 신원 파악에 노력했으나 이 또한 성과가 없었다. 전단을 배포한 후 들어온 10여건의 제보들은 모두 신빙성이 의심되어 수사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이 사건은 실종자 가족들의 유력한 제보가 없는 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을 사건이었다.

2.4. 결정적 제보 및 검거[편집]


그러나, 전단을 뿌린 이후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전단에 나타난 사체의 특징들이 며칠전 집을 나간 이동권과 비슷하다는 제보를 입수, 이동권이 거주하고 있는 대전시 중구 태평동의 한 집을 수색했다. 루미놀 검사를 시행한 결과 방바닥에서 혈흔 반응이 나왔고 아버지인 이정원을 추궁한 끝에 살해 및 유기 사실 일체를 자백받는데 성공했다. 경찰조사 결과, 이씨는 건축공사장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아들이 술만 먹으면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등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괴롭혀온데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2.5. 판결[편집]


대전지방법원 제1형사부는 이정원에게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평소 주벽이 심한 아들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을 정상참작했으나 범행 은폐의 목적으로 사체를 토막낸 후 야산과 강물 등에 유기한 것은 부자(父子)간의 정으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중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이후 2005년에 70세의 나이로 만기출소한 것으로 보인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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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당시 논산의 시가지는 논산읍이 아닌 강경읍이었기 때문에 논산경찰서의 이름도 강경경찰서였으며, 이후 1996년 6월 29일 논산시 승격과 동시에 강경경찰서는 논산서로 이름이 변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