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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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계기
2.2. 진행
2.3. 폭로와 중단
3. 현황
3.1. 핵무기 보유 의혹 및 대량살상무기의 지원 과정
4. 출처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과거 중화민국(대만)에서 진행되어온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신주 계획'(新竹計畫)과 '타오위안 계획(桃園計畫)'은 암호명.

핵무기 개발이 주로 진행된 지역인 대만의 도시 신주와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타오위안 현(현 타오위안 시) 따온 것이다. 신주같은 경수에는 유력 제조업체, 과학기술 연구개발 시설이 다수 위치한 지역이며 특히 미국에서 도입한 중화민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가 이곳의 국립칭화대학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타오위안에는 국방부 직속 중산(中山)과학연구원이 있었다.

2. 상세[편집]



2.1. 계기[편집]


장제스국공내전 당시인 1946년부터 핵폭탄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며,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미국으로 세 명의 물리학자를 파견해 핵기술을 연구케 했다. 하지만 1949년에 국부천대로 인해 핵폭탄 개발은 중지됐다. 대만으로 온 중화민국 정부의 장제스 총통은 대륙 수복을 내세웠지만 이미 대륙을 내주고 작은 섬인 대만에 틀어박힌 이상 현실적으로 대륙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고, 초기에는 외교적 고립에 시달렸지만 차츰 자국의 국력으로 고립을 이겨내고 중화민국을 외교 무대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1950년대부터 공산권은 물론 몇몇 자유진영 국가마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 및 수교하였다. 그리고 1965년 중화인민공화국은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동원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장제스는 중국의 핵실험 성공 1년 전인 1963년에 미국의 U-2 정찰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을 통해 중국의 핵무장이 임박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대만은 1954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었지만, 생사존망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2. 진행[편집]


장제스는 1965년에 “5년 내 핵폭탄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장 계획을 구체화한다. 신주 계획(新竹計畫)이라는 이름도 이 때 붙은 것이다. 대만 서부 신주에 있는 대만 칭화대학 내에 원자로를 설치하고 핵 개발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디모나 계획[1]을 본뜬 것으로, 이스라엘은 1950년대 말 ‘디모나계획’에 따라 프랑스 핵기술을 베껴서 핵무기 보유에 성공했다. 장제스는 ‘이스라엘 핵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고문으로 영입했고, 타이중의 르웨탄(일월담, 日月潭)에 있는 별장에서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3일간 면담하였다. 이 때 장제스는 “이스라엘과 대만은 동병상련의 국제고아”란 점을 강조했다고 하면서 핵무장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으며, 버그만 박사에게 극진한 대우를 했다.

이 때 일부 전문가들이 경제적 부담과 좁은 국토 등을 이유로 핵개발을 반대하자, 장제스는 신주 계획을 타오위안 계획(桃園計畫)이란 극비 계획으로 전환시킨다. 1969년에는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타오위안 현(현 타오위안 시) 룽탄(龍潭)에 있는 국방부 직속의 스먼(石門) 과학연구소를 국방부 직속 중산(中山)과학연구원으로 확대개편해 핵무기 개발을 담당하게 하였다.[2] 중산과학연구원은 ‘국방자주, 과기건군’을 슬로건으로 전투기와 미사일을 비롯 전자전, 화학전에 대비한 무기개발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미국의 눈을 피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캐나다에서 천연 우라늄과 연구용 핵반응기를 도입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농축 우라늄 추출 기술을 확보했다.

장제스가 사망한 후 정국이 혼란해지고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개발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총통도 일단 핵무기 개발 계획을 유지했다. 특히 1979년에 미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이 중화민국과 단교하자 장징궈 총통은 핵무기 개발에 더 절박함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중화민국 국군 참모총장이자 중산과학연구원 원장을 겸임했던 중화민국 군부의 원로 하오보춘은 2000년 출간된 회고록을 통해 "1986년에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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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중산과학연구원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핵물리학자 허리웨이(賀立維. 영어이름 David Ho)는 2015년에 출간된 저서 <대만제 핵무기>(원제: 核彈MIT: 一個尚未結束的故事)[3]에서 당시 중화민국 국군이 핵무기를 개발한 후 어떠한 투발수단(예: 항공기, 미사일)으로 실전에 사용할 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상태였고 때문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침공할 경우 핵무기를 일종의 '대규모 자폭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주장했다.[4]


2.3. 폭로와 중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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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개발을 폭로한 장셴이, 1988년 1월 미국에 망명했다.)

1988년 1월 9일에 중화민국 육군 대령이자 중산과학연구원 내 핵무기 연구센터 부소장이었던 장셴이(張憲義)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만의 핵개발을 폭로했다.

하필 1월 13일에는 장징궈가 오랜 와병생활 끝에 사망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5]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총통 권한대행이 되었지만 당시 그는 국민당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진 총통이 아니어서 대만은 정치적 공백에 시달렸다. 이 때 데이비드 딘 미국재대협회(AIT[6]) 회장은 장셴이가 제공한 문건과 미국 첩보위성이 촬영한 소형 핵실험 위성사진을 들이대고는 하오보춘에게 “일주일 내에 핵 개발 계획을 중지하고,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으면 타이완 관계법에 따른 기존의 방위 공약을 무효화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더불어 IAEA도 특별 감사에 나섰다. 결국 대만 정부는 IAEA의 감사를 수용함과 동시에, 미국과 IAEA의 감시 하에 공식적으로 핵개발을 중단했다.

훗날 장셴이는 자신의 미국 망명, 핵개발 폭로가 장징궈의 사후 하오보춘 참모총장을 위시한 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전쟁 위험이 높아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강변했다. 중화민국이 단순히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는 것을 넘어서 군부를 중심으로 실제로 핵무기를 생산 및 배치할 의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 했다는 논리이다.# 한편 장셴이는 미국 테네시 대학교에서 원자력 부문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미국 CIA에 포섭된 상태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하오보춘도 장셴이가 도주했다는 것을 알자 CIA의 수작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3. 현황[편집]


  • 대만은 이후에도 몇 차례 극비리에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정부에서는 모두 부인하고 있다.
    • 1995년 7월 독립주의자였던 리덩후이 당시 총통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자신의 미국 방문 직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실시하자 "핵무기 개발 재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으나 국내외적으로 파장이 커지자 부랴부랴 번복한 일이 있었다.
    • 천수이볜 총통 시절에도 자체 핵무기 개발을 추진 중이라는 의혹이 입법원(국회에 해당)에서 제기됐으며, 홍콩의 아주주간도 “대만이 2004년부터 인도의 지원을 받아 핵을 개발 중이다”는 보도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이에 대해 천수이볜은 “대만에는 핵폭탄이 없고, 개발할 의사도 없다”고 했다.
  • 하지만 아시아 국가 중 한국, 일본과 함께 높은 수준의 원자력 기술을 확보한 국가 중 하나라서 핵 도미노 현상이 현실화할 경우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
  • 대만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NPT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태이며(1970년에 가입했으나 1971년 쫓겨남), 따라서 핵무기 개발을 다시 추진한다고 했을 때 막을 수 있는 국제법적 장치는 없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NPT를 준수할 것임을 대내외에 발표한 바 있다.[7]


3.1. 핵무기 보유 의혹 및 대량살상무기의 지원 과정[편집]


미국 워싱턴의 국제전략연구협회가 발간하는 디펜스 앤드 포린 어페어스지는 대만이 한 중동 국가의 중개로 핵미사일들을 수입하였다고 대만 및 홍콩 신문들이 12일 보도하였으며 그러나 도입 시기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대만 국방부는 그러나 11일 밤 발표한 성명에서 어떠한 종류의 핵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한 적도 없다고 반박 기자회견을 하면서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고 일축하였다고 영자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가 보도하였다.
하지만 일간 명보도 이 잡지 보도를 인용하면서 대만이 적어도 2개의 핵무기 시설과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실질적으로 익명을 요구한 대만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중국이 도발할 경우 비재래식 무기를 이용하여 반격할 계획이라고 경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대만의 위성채널 TVBS도 잡지 보도를 인용하여 핵시설 보유 외에 중동 국가를 통해 옛소련제 핵미사일을 구매하여 이중 1기는 남아공에서 밀반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였으며 칭화대학의 원자 과학과의 중젠 교수도 대만은 핵개발이 가능한 조건들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대만은 남아프리카 연방이 핵개발에 나서자 비밀리에 지원하였다고 주장하며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는 지난 1994년 만델라 정권이 들어서면서 핵미사일을 대만에 이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연합뉴스 기사
대만은 2발의 핵탄두를 구매하면서 중국대륙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에 장비하고 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의 언론이 보도하면서 미국 워싱턴 국제전략연구협회가 발간하는 디펜스 앤드 포린 어페어스 잡지를 인용하고 있다.
언론매체들은 원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판매된 핵미사일을 대만이 한 중동 국가의 중개를 통해 구매하면서 은밀히 반입하였다고 밝혀 이 잡지는 익명을 요구한 대만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게 되었다.
중국이 도발하는 경우에 비재래식 무기를 이용해 반격할 것이라고 전하면서 비재래식은 일반적으로 핵무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대만 국방부는 발표한 특별성명에서 어떤 종류의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으며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한 적도 없다고 보도 내용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동아일보 기사


4. 출처[편집]


[포커스] CIA는 대만 핵무장을 어떻게 좌절시켰나 - 주간조선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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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련 위키백과(영어)[2] ‘중산’이란 연구원 이름은 국부 쑨원(孫文)의 호(중산)에서 따왔다.[3] 책 제목의 MIT는 미국의 어느 지방 공대가 아니라 대만제(Made in Taiwan)의 머리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A Bomb'이라는 표현도 단순히 폭탄이 아니라 Atomic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4] 다만 당시 경국 전투기와 단거리 유도탄이 개발되고 있었기에 핵무기 개발이 완료되면 투발수단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5] 장징궈가 장셴이의 망명으로 인한 충격이 결정타가 되어 숨을 거두었다는 음모론식 이야기도 있다. 그는 당시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장셴이 망명을 보고받고 나서 3일 뒤에 사망했다.[6] 미국이 대만과의 교류를 위해 설치한 형식상 민간기관. 주 대만 미국 대사관의 역할을 한다.[7] 대만 정부는 NPT와 비슷하게 BWC(생물무기금지조약), CWC(화학무기금지조약)에도 가입하지 못했지만 조약 내용은 준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