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륭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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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륭정변
唐隆政變

시기
710년
장소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
원인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권력 장악
교전세력
위황후 파벌
상왕 파벌
지휘관
황제 이중무
황후 위씨
안락공주
종초객
무연수
기처눌
종진경
상왕 예종
임치왕 이융기
태평공주
유유구
결과
예종의 제위 복위
영향
임치왕 이융기의 태자 책봉
태평공주와 이융기의 권력 투쟁 발생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1. 개요[편집]


唐隆政變

710년 당중종의 아우인 당예종과 예종의 아들인 이융기태평공주와 함께 위황후 일파를 주벌하고 예종을 복위시킨 궁중 쿠데타이다.

2. 배경[편집]


705년 환언범, 장간지, 경휘, 원서기, 최현위 등이 궁중 쿠데타(신룡정변)를 일으켜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주벌하고 당중종을 복위시켰다. 측천무후는 신룡정변을 통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당나라가 부활하게 된다. 하지만 신룡정변의 주역들은 잠재적 위협이 될 무삼사 일파를 방치하여, 무삼사 일파에게 자신들이 제거될 시간을 주고 말았다. 결국 신룡정변의 공신들은 무삼사와 위황후의 합작으로 인해 완전히 숙청되고 말았다.

무삼사와 위황후의 전횡을 보다못해, 707년 중종의 태자 이중준쿠데타를 일으켜 무삼사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나, 위황후를 제거하지는 못하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이중준이 제거된 뒤, 위황후는 안락공주와 함께 무시무시한 권력욕을 계속 드러냈고, 여기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불만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위황후는 자신이 제2의 측천무후가 되고,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만들려고 했으나, 중종의 반대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중종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다. 결국 710년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중종을 독살한 뒤, 이중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당륭(唐隆) 연호를 선포하였다. 위황후는 수렴청정의 형식을 빌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3. 과정[편집]


중종을 독살한 이후 위황후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종의 동생인 예종(당시에는 안국상왕)과 태평공주의 존재였다. 위황후는 차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위황후의 이러한 시도는 예종의 아들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에 의해서 간파당하게 되었다. 이융기는 고모인 태평공주와 함께 위황후 일파를 주벌할 것을 모의하였고, 금군을 이끌어 정변을 일으킨다.

이융기는 정변을 통해 종초객, 무연수, 안락공주, 위황후, 상관완아 등 관련 인물들을 처형하고,[1] 아울러 위황후의 일족을 완전히 멸하였다.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폐서인되어 패역서인으로 당나라 내내 조롱받게 된다.

이융기는 뒤이어 이중무에게 퇴위를 요구하여 제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고, 아버지인 예종을 다시 제위에 올렸다. 이융기는 정변에서의 공헌도가 매우 높았지만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황태자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융기의 큰형인 송왕 이성기가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이융기에게 양보한 덕분에, 이융기는 큰 무리없이 황태자가 되었다.

4. 결과[편집]


한편 위황후 일파가 축출된 뒤, 중종의 아들인 이중복은 삼촌인 예종이 즉위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이중복은 쿠데타를 일으켜 예종을 제위에서 몰아내려고 했지만,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자신은 죽은 뒤 폐서인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융기는 예종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한때 정변을 같이 일으켰던 태평공주 일파와 정치적 암투를 벌여야 했다. 예종은 태평공주와 이융기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대립은 점점 첨예해졌다. 그 와중에 712년, 예종은 황태자인 이융기에게 제위를 물려주어 태상황이 되었고, 이융기는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인 당현종이었다. 결국 현종과 태평공주의 대립은 곧 새로운 정변의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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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상관완아는 이융기와 태평공주의 궁중 내부 협력자였으나, 쳐들어온 반정군에게 오인당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케이스이다. 사후 1년 뒤인 711년에 상관완아에게 혜문(惠文)이라는 시호가 올려졌으며, 이융기는 상관완아가 지은 시들을 모두 모아 문집으로 엮었고 장열에게 서문을 짓도록 하는 등 사후 예우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