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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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첸 라마




파일:토등가조.jpg
13대 달라이 라마
한문
土登嘉措
법명
툽텐 갸초
속명
롭쌍텁개갸초
영문
Thubten Gyatso
티베트어
ཐུབ་བསྟན་རྒྱ་མཚོ་
출생
1876년 6월 27일 청나라 티베트 딱뽀
사망
1933년 12월 17일 (향년 57세)
티베트 라싸 포탈라궁
재임 기간
1879년 6월 14일 ~ 1933년 12월 17일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티베트 국기.svg 티베트
학력
궁중교육
직업
종교인, 정치가
종교
티베트 불교
달라이 라마
재임 기간

13대 1879년 6월 14일 ~ 1933년 12월 4일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친정의 시작
2.3. 첫 번째 망명
2.4. 두 번째 망명
2.5. 현대화와 중국과의 충돌
2.6. 내부 갈등과 장제스의 압박
2.7. 사망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 그의 뒤를 이은 달라이 라마 14세중화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 제대로 된 통치를 해보기 전에 축출되면서 실질적으로 티베트를 제대로 통치한 마지막 달라이 라마이다. 무려 54년 6개월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위기간을 기록하였으며 친정만 따져도 38년에 이른다.


2. 생애[편집]



2.1. 유년시절[편집]


달라이 라마 13세는 1876년 6월 27일, 티베트력으로 5월 5일에 라싸 동남쪽 100킬로미터에 있는 딱뽀 지역의 랑링라빠의 농가에서 아버지 공가렌첸과 어머니 롭쌍조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롭쌍텁개갸초로 지었다. 1877년, 티베트 정부는 달라이 라마 13세를 달라이 라마 12세의 환생자로 선언했다. 판첸 라마 8세와 3세 사원과 주요 사찰의 승려들이 연명으로 광서제에게 달라이 라마 13세에 대한 금병추첨을 면해줄 것을 요청했고 1877년 8월, 광서제는 이를 허락했다. 금병추첨제는 건륭제가 도입한 청나라의 달라이 라마 선출 과정에 대한 개입 제도였다.

1877년 11월 1일, 달라이 라마 13세는 승려들의 옹위를 받아 라싸로 떠났고 1878년 1월, 판첸 라마 8세가 직접 삭발식을 거행하고 법명을 툽텐 가초로 지어주었다. 1879년 6월 14일, 포탈라궁에서 정식으로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였으며 축하 의례는 수일 간 계속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섭정이 수석교사를 맡았으며 광서제는 관례에 따라 황색 목도리 1개, 불상 1개, 염주 1개, 영저 1개를 보내 축하하였으며 공가렌첸에게는 공작 작위를 내렸다. 1882년, 달라이 라마는 사미계를 받았으며 1884년에 정식으로 티베트어 공부를 시작했다. 1886년부터 인명학을 공부했다. 이해에 섭정왕 덕림이 병환으로 사망하면서 4명의 까륀 중 한 명인 데모 호툭투가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영국인의 침공을 막기 위해 호법신상을 주조하였다.

1888년 인도 제국이 1600명의 병력을 보내 티베트 남부 룽투르라산의 티베트군을 공격하면서 인도-티베트 전쟁이 발발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소규모 원정대의 파견에 불과했으나 티베트는 만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참패하였다. 티베트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인도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 충돌은 당시 티베트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의 개입으로 1890년과 1893년 국경 개방과 세관설치에 관련된 조약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티베트인들의 반외세감정이 크게 불거졌다. 특히 청나라가 티베트의 개방만을 요구하자 청나라에 대한 반감도 커졌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2.2. 친정의 시작[편집]


1882년, 판첸 라마 8세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를 물색하다가 1892년, 판첸 라마 9세를 찾아 자신의 제자로 삼았고 법명을 지어주었다. 1895년 1월, 달라이 라마는 비구계를 받고 8월 8일부터 친정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달라이 라마 13세에 대해 프랑스의 학자 클로드 르방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예리한 지성, 불같은 기질을 다스릴 줄 아는 신중함, 정치적 통찰력 등 비범한 재능을 가진 명석하면서도 젊은 승려였지만 한편으로는 적도 많아, 심지어 주변 사람들 중에도 적들이 있었다.
당시 포탈라 궁에는 달라이 라마 13세에 대한 험악한 분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네충사의 신탁승이 두번이나 달라이 라마 13세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신탁을 내리기까지 했다. 1899년 7월, 달라이 라마 13세는 즉각 이 신탁승을 라싸로 소환하여 자초지종을 캐물었고 신탁승은 달라이 라마의 전 섭정 데모 틴레 랍갸스가 쇠걀 등과 모의하여 달라이 라마를 해치기 위한 마법을 걸었다고 신탁을 내렸다. 이 사건은 '마법 걸린 신발 사건'으로 번졌고 달라이 라마 13세는 데모 틴레 랍갸스와 쇠걀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신발에 마법을 건 혐의로 체포하여 종신형을 선고했다.

달라이 라마는 병기창을 건설하는 등 티베트의 근대화를 시작했으며 러시아를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설정했다. 1898년, 달라이 라마 13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부랴트족의 라마 아왕 로장을 러시아로 파견했으며 1901년, 러시아 궁정에 최초로 공식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는 인도 제국과 영국을 크게 자극했다. 1902년에는 판첸 라마 9세에게 비구계를 주었다.


2.3. 첫 번째 망명[편집]


1904년 8월, 영국은 티베트가 자유통상을 거부하고 이전의 조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2차 침공을 해왔다. 물론 실제 목적은 티베트와 러시아의 결속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프랜시스 영허스밴드 대령이 지휘하는 1150명의 영국군이 라싸로 접근하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수백 명의 고관들과 함께 몽골의 우르가로 피난하였다. 청나라는 거의 손도 쓰지 못했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경의를 표하며 많은 제물을 바쳤다. 백성들이 자기가 아니라 달라이 라마를 더 존경하는 것을 본 몽골 라마들의 수장인 복드 칸이 분노를 표출하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몽골 왕공 칸다 도르지의 초청으로 수도 외곽으로 떠났다.

외몽골 체류 시기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러시아가 티베트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득이 없었다. 1905년, 달라이 라마 13세는 쿰붐사를 비롯한 여러 몽골의 승원을 방문한 후 광서제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했다. 하지만 광서제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 거절하고 서태후만 만났으며 달라이 라마 5세의 전례에 따라 주장대신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상주할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신정개혁과 개토귀류를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달라이 라마는 주중 미국 공사 윌리엄 로크웰 등과 회견했다. 또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 만난 것도 이 시기다.

1908년, 선통제의 즉위식까지 지켜본 달라이 라마 13세는 3년에 가까운 베이징 체류를 중단하고 1908년 11월 베이징을 떠나 1909년 연말에 히말라야로 돌아갔다. 영국군은 1904년 영국-티베트 조약을 체결하여 50만 파운드의 배상금과 티베트-시킴 국경의 정리, 교역소 설치 등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기 때문에 진작 철수한 후였다. 이 협정은 청나라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서 이후 티베트가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시 영국은 1906년에 중국과, 1907년에 러시아와 티베트 관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이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청나라가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첫 번째 망명의 결과로 달라이 라마 13세는 영국에 줄을 대야 한다고 판단했고 영국의 힘을 빌려 자신이 없는 동안 청나라에서 단행한 개토귀류와 신정개혁을 철폐하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2.4. 두 번째 망명[편집]


당시 청나라는 주장대신에 '도살자' 자오얼펑을 임명하여 티베트인들의 반감을 샀고 1909년 6월, 사천군 2천명을 티베트에 진주하게 하는 등 티베트에 대한 주권 강화에 나섰다. 1909년 겨울, 청나라는 2천명의 사천신군을 진주시켜 티베트에 대한 영토주권 확보에 나섰다. 1910년 2월, 청군이 라싸에 진주하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영국과 여러 열강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는 모두 묵살되었고 신년 의식이 한창인 상태에서 청군이 라싸를 점령했다. 영국은 오로지 조약 위반에 대한 가벼운 항의만 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고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의 명호를 취소하였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달칼림퐁을 거쳐 다르질링으로 망명지를 옮겼으며 영국인들은 달라이 라마를 보호했다. 달라이 라마는 시킴 정무장관이었던 찰스 벨 등과 친분을 맺으며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는 등 한동안 조용한 삶을 보냈다.

한편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를 폐위한 후 판첸 라마 9세에게 대신 티베트를 통치하고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뽑으라고 요청했지만 판첸 라마는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했다. 달라이 라마 없이 티베트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와중에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해 청나라가 무너지자 그 여파는 곧바로 티베트에 닥쳤다. 라싸의 청군도 혁명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달라이 라마 13세는 즉각 티베트인들에게 반청 봉기를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1911년 5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돌아와 5월과 6월에 동티베트 지역의 캄을 공격해 점령했다. 허나 1912년 7월, 사천군과 운남군의 반격에 도로 캄을 내주었고 1차 캄 전쟁이라 불리는 중국과의 첫번째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중국군이 다시 라싸로 진주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한편 라싸에서는 티베트의 게릴라들이 청군을 공격하였고 1만명의 티베트인들이 봉기하여 청군을 티베트에서 몰아냈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인도에서 이를 지휘하여 청조의 관원과 라싸, 르커져, 쟝즈의 청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포고를 내어 청나라 황제의 티베트에 대한 예속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내지의 각 성의 인민이 이미 군주제를 전보시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뒤이어 이전의 한인 지구가 티베트에 정치 명령 공문을 보냈으나, 모두 무시하라. 푸른색 옷을 입은 자는 새로운 나라가 파견한 관리이니 여러분은 이들에게 물품을 제공해서는 안된다. 언제고 반드시 티베트 지역에서 한인이 자취를 감추게 할 것이다."


1912년 12월, 달라이 라마 13세는 2년 만에 라싸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청군과 교전한 장군들을 표창하고 주장대신을 지지한 관리들을 숙청하였다.

1913년 1월 8일, 달라이 라마 13세는 <티베트 전체 종교계, 세속 민중의 앞으로의 선택에 관한 조례>를 발표함으로 공식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함을 선언했다. 또한 티베트의 한족을 추방하라고 지시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망명생활에서 영국인들의 실용적인 통치를 배웠고 1913~1914년 심라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였다. 심라회의는 인도의 심라에서 영국의 주선으로 영국, 중국, 티베트의 대표들이 회담한 회의였는데 영국의 티베트에 가지는 특별이익의 승인,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 인정, 대신에 티베트를 중국의 성으로 편입시키지 않는 안전조항이 합의되었다. 이때 달라이 라마는 히말라야 산맥의 먼위, 뤄위, 차위 등 9만 평방미터를 영국에 할양하면서 감숙성, 사천성, 운남성의 티베트인 거주 지역을 티베트가 지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2.5. 현대화와 중국과의 충돌[편집]


북양정부는 심라회의의 승인을 거부했으나 티베트와 영국은 1914년 일방적으로 심라조약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현대화에 착수했다. 달라이 라마는 시종 승려와 학자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고 1913년에는 4명의 귀족 자제들을 영국에 유학을 시켰다. 그리고 수력발전기를 설치하고 우체국을 창설했으며 1918년 각 지방에 티베트어 초등학교를 설치하고 1923년까지의 흡연을 금지했다. 그리고 1920년, 청나라 군대가 훼손한 조캉 사원 수리 사업을 실시했다. 또한 1914년부터 티베트군 장교들을 영국군 주둔지에 보내 현대 군사학을 배우게 했고 구식 라이플 소총 5천정과 수십만발의 탄환을 구입했다.

1918년 1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병사가 경계를 넘어갔다가 중국군 장교 팽일승 통령에게 참수당하는 리워체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실로 동티베트 수복을 위해 2차 캄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티베트군은 참도와 데게 등을 점령하고 1918년 8월, 영국 부영사 타이크만의 주선으로 13조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티베트의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1920년, 티베트군 사령관 차롱은 티베트군 병력을 5천명에서 1만 5천명으로 3배로 증강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 달라이 라마는 재원조사사무처를 설치하였다. 1920년에는 벨을 초빙하여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1924년 영어학교를 설치하였다. 그외에 은행권 도입, 지질학적 조사, 전신선 건설, 현대적 경찰 조직 등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는데 1923년 9월, 판첸 라마 9세가 티베트 군비의 25%의 담당을 명시한 1923년 2월의 <수저년 법령>을 거부하고 그해 11월 100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판첸 라마가 통치하던 후장 지역을 직접통치지역에 포함시켜버렸다. 1927년에는 카의 뽀메 왕국이 납세를 거부하였고 달라이 라마는 1500명의 군대를 보내 멸망시켜버리는 것으로 답했다.


2.6. 내부 갈등과 장제스의 압박[편집]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급속도로 추진한 개혁에 보수파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달라이 라마의 지지기반인 귀족과 승려들이 현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달라이 라마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고 1924년 군 사령관 차롱의 면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와중에 국민혁명을 통해 중국의 지배자로 등극한 장제스가 다시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929년, 장제스는 달라이 라마에게 중국과 티베트가 삼민주의 아래에 일치단결하여 제국주의공산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훈계했지만 티베트 정부는 장제스가 강조하는 삼민주의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다.

장제스는 이어 몽장위원회를 설치하고 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 와중에 1930년 6월, 캄에서 발생한 재산 분쟁에 사천군벌 류원후이의 군대가 개입하면서 3차 캄전쟁이라 불리는 중국-티베트 전쟁이 발발했다. 1931년 2월부터 티베트군은 대대적으로 개입하여 서강 지역으로 확장했다. 당시 국민정부는 내전과 공산당의 폭동, 일본 제국의 침략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1차 양광사변만주사변이 연달아 터지면서 개입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류원후이 측은 1918년 정전협정의 파기를 주장했다.

초기에는 티베트군이 승승장구하여 1931년 5월까지 깊숙하게 진격하여 달라이 라마 5세 시절의 영토를 회복하는가 했지만 1932년 4월, 류원후이의 반격으로 7월에 크게 패해 진사강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932년 10월 8일, 류원후이는 티베트와 천장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티베트의 귀족과 승려들이 권력기반인 달라이 라마가 30년대 들어서 더 이상 현대화를 추진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후 류원후이 및 청해성의 마부팡 등의 군사적 위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영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보장함에 따라 군벌들의 공격으로 멸망당하는 처지는 면할 수 있었다.


2.7. 사망[편집]


"나 자신은 이 나이에 아직 남은 짧은 수명을 종교적 헌신에 바치기 위해서는 교권과 속권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내 생은 여럿이거니와, 나 자신을 전적으로 종교적인 일들에 바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머무르고 있는 수호 신불들 때문에, 그리고 내 '근본 라마'의 가피력으로 백성들은 내게 와서 가르침을 청하거나 불화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며 세속사 보살피기를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지금까지 나는 능력을 다해 과업을 수행해왔지만 이제 곧 쉰여덟살이 될 것이고, 그러면 종교적, 세속적 활동을 계속해나가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932년, 달라이 라마 13세의 발언.

달라이 라마 13세는 예순이 가까워지면서 노쇠한 몸이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및 중국과 친하게 지내야 하며 공산주의자들이 티베트에서 승려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사찰을 약탈하고 있으니 공산주의자들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1933년 12월 17일 밤, 달라이 라마 13세는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국민정부는 1934년 4월 황무숭 장군이 이끄는 추모사절단을 파견하여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3. 참고문헌[편집]


  • 달라이 라마 평전, 클로드 르방송, 바움.
  • 20세기 전반기 달라이 라마의 이미지 변화 : 전쟁과 자연재해와 관련하여, 박장배, 동북아문화연구 23호, 동북아시아문화협회.
  • 19세기말~20세기초 티베트의 군주론의 변용, 박장배, 동북아문화연구 19호, 동북아시아문화협회.
  • 13대 달라이 라마 툽땐갸초의 대외인식, 박장배,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 한인이 주체가 되는 중화민국에 직면하여 - 辛亥變局 하에서의 小數族群의 어려움과 선택, 吳啟訥, 윤들, 중국근현대사연구 56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티벳(西藏)불교와 판첸라마의 還生, 鄭仁在, 동아 연구 36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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