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 스트레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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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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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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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다이어 스트레이츠
Dire Straits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마크 노플러, 존 일즐리, 앨런 클라크, 가이 플레처, 데이비드 노플러, 픽 위더스
입성 연도
2018년
후보자격 연도
2004년
후보선정 연도
2018년








역대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파일:MTV Video Music Awards_Logo.png
올해의 비디오상
제2회
(1985년)


제3회
(1986년)


제4회
(1987년)

The Boys of Summer
돈 헨리

Money for Nothing
다이어 스트레이츠


Sledgehammer
피터 가브리엘





다이어 스트레이츠
Dire Straits
[1]


파일:Dire Straits.jpg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결성
1977년
영국 잉글랜드 런던 데포드
데뷔
1978년 5월
싱글 "Sultans of Swing"
데뷔 앨범
Dire Straits
해체
1988년
재결성
1991년 – 1995년
멤버
마크 노플러 (기타, 보컬)
존 일즐리 (베이스)
앨런 클라크 (키보드)
가이 플레처 (키보드)
장르
블루스 록, 루츠 록, 재즈 록, 팝 록
레이블
버티고, 머큐리, 워너 브라더스
링크
파일:다이어 스트레이츠 로고.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멤버
4. 역사
5. 음악성
6. 대표곡
7. 기타
8. 음반



1. 개요[편집]


영국런던 출신의 록밴드.


2. 상세[편집]


요크셔 이브닝포스트에서 록 음악을 평론하는 기자로 일하고 있던 마크 노플러가 동생 데이비드 노플러, 픽 위서스, 존 일즐리와 결성한 밴드이다. 이후 데이비드 노플러와 픽 위서스는 탈퇴하고 5명의 멤버들이 더 거쳐갔다. 1988년 한번 해체했고 1991년 재결성되어 1995년까지 활동하다가 1995년 최종적으로 해체하였다.

펑크 록뉴 웨이브, 글램 메탈이 록 씬을 선도하고 있을 당시에 정통 , 블루스 사운드를 들고 나와 평론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매우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디스코 열풍 이후 1980년대 미국 중심으로 대중음악 시장이 개편된 이후에도 듀란 듀란, 폴리스, 필 콜린스 등과 함께 미국에서 매우 큰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영국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밴드. 대표 곡으로는 Sultans of SwingMoney for Nothing이 있다.

밴드는 총 4회 그래미 상을 수상하였고 3회의 브릿 어워드 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3. 멤버[편집]



1집
2집
3집
4집
5집
1988
1991
1995
마크 노플러

존 일즐리

픽 위서스


데이비드 노플러


앨런 클라크


할 린데스



테리 윌리엄스



가이 플레처


잭 소니




4. 역사[편집]


마크 노플러와 데이비드 노플러의 아버지는 헝가리인으로, 유대인에다가 공산당 당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파시즘 정부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다. 마크 노플러와 데이비드 노플러는 어릴 적부터 픽 위서스, 존 일즐리와 친하게 지냈고 같은 음악 취향을 공유하면서 자라났다.

마크 노플러는 리즈 대학교의 영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지역 신문사의 기자 겸 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취미로 기타를 쳤다. 곧이어 그는 기타를 제법 잘 치는 수준이 되어 수익에 보탬이 될 겸 밴드를 시작하였다. 픽 위서스가 10대때부터 드러머로 활동한 음악가였기 때문에 밴드를 만들기 수월했다고 한다. 처음에 밴드 이름은 "Café Racers"였다. 그러나 너무 밋밋하고 평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름을 "다이어 스트레이츠"라고 바꿨는데, 이 이름을 직역하면 "극도의 궁핍", 의역하면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는 뜻으로 이는 마크 노플러의 당시 재정 상태를 반영한 이름이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이후 토킹 헤즈 등 수많은 밴드들의 오프닝 밴드로 서게 되면서 인기를 쌓았고 이러한 노력 끝에 1978년 버티고 레코드사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아, 1978년 5월 그들의 첫 싱글 "Sultans of Swing"을 발매했다. 처음에 Sultans of Swing의 차트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았고 얼마 뒤 발매된 Dire Straits의 판매고도 저조했다. 그러나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미국에 진출한 이듬해 Sultans of Swing이 프로그레시브 록, 펑크 록, 디스코에 지쳐있던 미국 리스너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되며, 빌보드 핫 100 4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밴드는 성공 가도에 오르게 된다.

1980년 7월, 데이비드 노플러가 형과의 갈등으로 인해 밴드를 탈퇴한 이후, 앨런 클라크를 키보디스트로, 할 린데스를 기타리스트로 받아들이면서 멤버가 대거 교체되었다. 얼마 안가 픽 위서스도 밴드를 탈퇴했다. 그러나 이런 멤버간의 갈등과 별개로 밴드의 음악은 점점 인기를 얻고 있었고, 2집은 평론적으로 부진했지만 3집은 크게 성공했다.

그들의 대표작인 Brothers in Arms는 1985년 발매된 작품으로 당시 향락에 빠져들던 글램 메탈을 정면으로 비판한 Money for Nothing을 비롯해 Brothers in Arms, Walk of Life, So Far Away 등 수많은 명곡들이 수록되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9주 연속 1위를 하고 UK 앨범 차트에서는 14주간 1위를 하며, 총 3,000만장이 팔려 밴드 커리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대성공에 힘입어 마크 노플러는 평소 존경하던 음악가였던 에릭 클랩튼과 합동 콘서트도 나가고, 스팅, 필 콜린스 등과도 협업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또 영화 음악 제작가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런 대외 활동을 많이 할 수록 자연스럽게 밴드에서 관심이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마크 노플러는 1988년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해체했다. 1991년 잠깐 밴드를 재결성하여 6집 On Every Street를 발매했지만 판도가 바뀐 록 음악 시장, 지나친 관심과 기대 등으로 인해 결과물은 기대에 못미쳤다.[3] 1995년, 마크 노플러는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끝났다면서 소리소문 없이 밴드를 해체하였다. 이후 마크 노플러는 영화 음악 제작가로 활동하며 간간히 솔로 활동도 하는 중이다.


5. 음악성[편집]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음악은 에릭 클랩튼블루스 록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에어로스미스라던가 건즈 앤 로지스 등 1970~80년대의 블루스 록 밴드들은 대체로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의 스타일을 계승한 편이지만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그보다 앞선 1960년대 정통 블루스 록 음악을 계승했다.

그 외 J.J 캐일에게서도 영향을 받았고 컨트리 록, 팝 록, 재즈 등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여러가지 영향을 받은 밴드와 음악가, 장르가 많지만 이 밴드의 음악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수식어는 루츠 록일 것이다. 그들은 펑크 록뉴 웨이브가 영국을 휩쓸던 1970년대 말~80년대 중순에도 변함 없이 블루스, 컨트리, 재즈 기조를 지켰으며, 여기에 팝 록의 성향을 추가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더 마크 노플러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의 44위에 랭크되어있으며 클린톤 기타리스트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기타리스트중 한명으로 꼽힌다. 특히 록 기타리스트로는 보기 힘든 핑거스타일을 하는 기타리스트로 아주 명성이 높다.

보컬도 상당히 특이한데 특유의 힘 쫙 빼고 대충 부르는 것 같은 스타일이 유명하다. 자세한 사항은 마크 노플러 참조.

6. 대표곡[편집]


당시 록음악을 조금이라도 들었으면 모를수가 없을정도로 그들의 대표곡은 마성의 브금급으로,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할 만한 곡들이 많다.

- Sultans of Swing (1978)

항목 참조.

라이브 버전[4] 어째 라이브 버전이 신난다 그것이 라이브의 묘미
1984년 Alchemy Live 버전이다.[5] 이 당시에는 드러머가 Terry Williams였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첫 히트곡. 한국어 난수방송 V24의 도입부로 삽입되기도 했다. 또한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이름에 유래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리더인 나잠수가 결성한 후에야 이 노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 Money for Nothing (1985)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명실상부한 대표곡. 항목 참조.
- Why Worry (1985)

마크 노플러의 기타 인트로가 인상적인 곡. 국내에서도 라디오에서 DJ가 청취자 사연을 읽을 때 잔잔하게 깔리던 마성의 브금급 노래이기도 하다.
- Your Latest Trick (1985)


- Walk of Life (1985)

(UK판)


(US판)
키보드 리프가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로, 미국판 뮤직비디오엔 MLB, NFL, NBA 진기명기 장면을 넣었다. 1980년대 중반 시절 유명한 선수들을 볼 수 있는 건 덤. 마사장님 덩크 장면도 나온다! 영국판 뮤직비디오에서는 한 청년이 Brothers in Arms 앨범 커버의 레조네이터 기타를 들고 버스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마성의 브금급으로 많이 쓰인 노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동아오츠카의 '썬듀'라는 음료의 광고 BGM으로 사용되었다. 이 밴드가 미국에서 특히 인기를 얻었던 점, 노래의 제목[6]이나 뮤직비디오의 분위기 때문에 홈팀의 타자가 볼넷을 얻었을 때 Charge처럼 오르간 편곡 버전으로 틀어주기도 한다.



7. 기타[편집]


  • 리더인 마크 노플러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태생이며, 일곱 살 때 뉴캐슬 근방으로 가족이 이주했다. 그는 흔히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자세한건 문서 참조. 인맥도 넓어 위에 나왔듯이 에릭 클랩튼, 필 콜린스, 스팅과 함께 공연한 적도 있다.





  •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감독 에드거 라이트는 영화 삽입곡으로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3번째 앨범 Making Movies의 히트 싱글인 수록곡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을 선택했는데,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그를 거절한다. 그에 감독은 소심한 복수로, 영화에서 좀비에게 음반 던지는 장면에서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음반을 주인공들이 주저없이 던져 망가뜨리게 한다. 근데 프린스Purple RainLP판은 그거만은 부수면 안된다며 애지중지 싸고돈다 그래도 이후엔 좋게 허가가 났는지 후속작 뜨거운 녀석들에서 Romeo and Juliet이 ost로 등장한다.



8. 음반[편집]



  • Dire Straits (1978)

  • Communiqué (1979)

  • Making Movies (1980)[7]

  • Love over Gold (1982) [8][9]


  • On Every Street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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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 사전적인 의미는 (경제적으로) 끔찍한 곤경이 된다.[2] 그런데 헌액식 당일에 팀의 상징인 마크 노플러가 참가하지 않아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3] 물론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것이지 미국 빌보드에서 12위를 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는 성공했다.[4] 라이브 영상인데도 유튜브 뷰가 2억이 넘는다![5] 많은 Sultans of Swing 라이브 중 최고라고 평가받는다.[6] Walk of Life. 볼넷을 'Walk' 라고 말하기도 한다.[7] 롤링 스톤 선정 “80년대 최고의 앨범 100선”에서 52위에 랭크된 명반으로, 다이어 스트레이츠 대표 발라드 Romeo and Juliet과 멋진 기타 솔로로 유명한 Tunnel of Love가 수록되어 있다.[8]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첫 UK 앨범 차트 1위를 달성한 앨범으로, 이 앨범부터 Brothers in Arms, Money for Nothing(베스트 앨범), On Every Street까지 연달아 UK 앨범차트 1위를 달성함으로써 80년대 UK 앨범 차트 1위를 가장 많이 달성한 가수가 된다.[9] 상업적으로는 Brothers in Arms가 제일 뛰어나지만, 많은 팬들과 비평가들은 이 앨범에서 마크 노플러의 천재성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