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커보커 극장 붕괴사고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니커보커 극장 붕괴.jpg

1. 개요
2. 니커보커 극장
3. 상세
4. 원인
5. 이후
6. 유사 사고


1. 개요[편집]


Knicker Bocker Theater Collapse

1922년 1월 28일 미국 워싱턴 D.C.의 니커 보커 극장이 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진 사고.


2. 니커보커 극장[편집]


파일: 니커보커 극장.jpg

20세기 초에 이미 20곳의 극장을 소유 중이던 해리 크랜달(Harry Crandall)은 18번 도로(18th St NW)와 컬럼비아 도로(Columbia Rd)가 만나는 지점에 둥근 삼각형 형태의 새 극장을 짓기로 결정했는데 이전에도 여러 번 같이 일하고 자신의 극장들을 디자인한 건축가 레지나드 W. 기어(Reginard W. Geare)에게 '워싱턴 D.C.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양식의 극장을 원한다.'고 말했고 레지나드는 인디애나 주에서 가져온 석회석으로 벽을 장식해 벽돌값만 77,000달러를 들인 니커보커 극장을 만들었다. 니커보커 극장은 극장 높이 약 12m, 1층 관객석 1,000여석, 발코니에 500석, 박스 형식 관람룸에 200석이 마련되었다. 유성영화가 나오기 전이라 한쪽에는 영화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들도 있었는데 전부 니커보커 극장에 고용된 인원이었다. 극장 내부는 황금상아, 비단으로 장식됐고, 메인 로비와 흡연실, 사탕가게, 응접실 등이 있었고 당시 개봉한 무성영화들을 상영하면서 관객들을 모았다.

문제는 당시 시기가 안 좋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사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붕을 만들 때 원래는 콘크리트와 철근을 써야 했는데 당시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철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원래 설계보다 더 가벼운 철근을 써야 했다. 덕분에 공사는 더 빨리 끝나고 공사비용도 줄이긴 했으나 이렇게 줄이면서 완성된 지붕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계산하지 않았다.

그렇게 완공된 니커보커 극장은 1917년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6시에 개관했다. 극장은 크게 흥했고 관객들이 너무 많아 조금이라도 더 수용하려고 발코니 쪽을 늘려 관객석을 더 추가했지만 추가하면서 지지대는 설치되지 않았다.


3. 상세[편집]


파일: 니커보커 폭풍.jpg

1922년 1월 28일 워싱턴 D.C.는 폭설로 인해 역사상 최대 강설량이 기록됐다. 대서양에서 자라난 구름이 조지아 주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라이나노스 캐롤라이나를 거쳐가면서 눈구름으로 성장했고 엄청난 양의 눈을 퍼부었다. 처음엔 내리는 눈에 시민들은 즐거워하며 눈을 즐겼으나 눈은 28시간 동안 지속해서 내렸고 허리 높이까지 쌓였다. 한쪽엔 최대 4.8m나 되는 눈이 쌓이자 도시가 제 기능을 못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커보커 극장에선 2개월 전 개봉한 무성영화 Get-Rich-Quick Wallingford#를 상영했고 이를 보러 약 300여명의 관객들이 모였다. 관객들은 25센트를 지불하고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관람했는데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오케스트라가 영화 음악을 연주하던 중 오후 9시경 지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먼지가 떨어졌다. 관객석에 앉아 있었던 전직 탄광 매니저 W. H. 모리스(W. H. Morris)는 불길한 징조를 깨닫고 바로 극장에서 빠져나갔는데 그는 당시 소리가 탄광이 무너질 때 나는 소리와 똑같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다른 관객들도 불길함을 느끼고 빠져나가려 했으나 60cm 두께로 쌓인 눈의 무게를 못 이긴 지붕이 무너졌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무너져내린 지붕과 충격으로 같이 무너진 발코니에 깔리고 말았다. 지붕은 조각나지 않고 그대로 건물 내로 떨어지면서 공기가 압축됐고 압축된 공기가 그대로 창문 등으로 밀려나가며 건물 내 모든 창문이 다 깨졌으며 몇몇 관객은 당시 밀려나간 공기에 날아가기도 했다. 이들은 날아간 덕에 피해를 덜 입었다. 영사실은 극장과 붙어 있을 뿐 아예 이어진 건 아니라 피해를 덜 입었다. 당시 영사실 직원들은 갑자기 불어닥친 압축된 공기에 놀라 살펴보니 지붕이 사라져 있었다고 회상했다.


사람들은 경악하고 구조하러 달려왔다. 밤이 되자 구조대원 약 200여 명이 모였고 그들은 눈과 콘크리트, 나무, 철근의 잔해 속에서 사람들을 구조했다. 다음날 오전 2시 30분에는 구조대원 외에 인근 주민과 수도 주둔 미군, 워싱턴 광역 경찰청 경찰관들까지 동원됐다. 당시 미합중국 육군 기병 소령이었던 조지 S 패튼(George S Patton)은 그저께 먹은 해물이 잘못돼서 알러지 반응으로 고생하는던와중에도 구조대원과 군인, 경찰 600여명을 지휘해 구조작업을 지시했다. 어린 아이까지 동원되어 잔해를 파고 들어가 아직 갇힌 부상자들에게 진통제와 마실 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따뜻한 음료를 가져와 구조대원들에게 나눠줬다. 택시 운전사들은 택시를 구급차로 활용해 사람들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인근 병원과 군사병원까지 꽉 차서 근 집, 호텔에서 사람을 받아 치료해야 했고 몇몇 부상자들은 현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신체를 절단해야 했다. 시신은 인근 교회에 안치됐다. 구조물 밑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공구가 필요했고 공구를 가진 사람들은 전부 공구를 들고 와 구조를 도왔다. 전화 교환원은 20여명의 의사들에게 연락해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치료받게 했다. 사고 연락을 받은 워싱턴 D.C. 시청 측은 인근 극장들은 혹시 모를 또 다른 붕괴를 대비해 임시 폐쇄했다.

결국 이 사고로 98명이 사망하고 13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워싱턴 D.C.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됐으며 하얏트 리젠시 호텔 고가 통로 붕괴 사고에 이어 미국에서 일어난 부실공사로 인한 사고 중 사망자 수로 따지면 2위다. 같은 수의 사망자가 나온 미국의 붕괴 사고 플로리다 챔플레인 타워 붕괴 사고도 2위다.


4. 원인[편집]


원인은 상술했듯이 부실공사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철근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원래 예정됐던 철근보다 더 가볍고 얇은 철근을 써서 지붕을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특히 지붕 트러스를 만들면서 철근을 약한 것으로 썼고 트러스 연결구조를 얇은 고작 반 인치(약 13mm)의 철판으로 때운 것이 화를 불렀다. 거기다 이런 지붕이 벽에 완전히 지지대로 고정된 상태도 아니었고 벽 철근에 말 그대로 얹혀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여름에 열을 받은 벽이 팽창하고 겨울에 줄어들기를 반복하면서 지붕과 연결부분이 약해졌고 조금씩 어긋났다. 거기다 건물의 북서쪽 벽도 지어질 때 약하게 지어져서 지붕이 무너지면서 기울기까지 했다.

더 무서운 점은 조사 결과 이런 식의 구조로 지어진 건물, 특히 극장 건물이 많았다는 점이다. 지붕에 지지대 없이 그냥 벽에 얹히는 식으로만 하면 비용을 줄이고 빨리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은 극장 건물들이 이러한 건축 방식을 택했다.

눈도 제대로 치워지지 않았고 폭설이 아니더라도 눈이 쌓이면 어느정도 치워야 하는데 치우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건물이 지어진 방식 때문에 눈이 안 내렸더라도 언젠간 무너졌을 거라고 말한 건축 전문가들도 많았다.


5. 이후[편집]


이 사고와 관련해 9명이 조사를 받았으며 그 중 5명은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기소되지 않은 4명은 시 소속 건물 조사관과 시 소속 건물 관리자, 그리고 철근을 제공해 준 계약자였으며 기소된 5명은 건물 디자이너 레지나드 W. 기어, 지붕을 설계하고 디자인한 존 하워드 포드(John Howard Ford), 북서쪽 벽을 담당했던 줄리안 R. 다운맨(Julian R. Downman), 콘크리트 감독관 도널드 월레스(Donald Wallace), 건물 전체 감독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레지나드 W. 기어만 부주의 혐의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레지나드 W. 기어는 사고 이후 받아 주는 곳이 없었고 1927년자살했다.

해리 크랜달은 니커보커 극장이 있었던 자리에 새로 앰버서더 극장(Ambassador Theater)을 세웠는데 이번엔 레지나드 W. 기어 말고 다른 극장 건축 전문 건축가를 고용했다. 하지만 죄책감을 이겨내진 못했고 1929년 대공황 때 주식에서 큰 손해를 본 후 1937년에 자살했다. 앰버서더 극장은 45년간 있었다가 1968년 문을 닫았고 1969년 철거됐으며 이후 같은 자리에 선트러스트 은행이 들어섰다. 은행 건물은 니커보커 극장을 기리는 의미에서 같은 형태로 지어졌는데 2019년 선트러스트 은행이 BB&T와 합병하여 트루이스트 파이낸셜로 바뀐 뒤에 지점이 사거리 건너편의 옛 BB&T 지점으로 통합되면서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사고 100주기를 맞이한 2022년 1월 28일 10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6. 유사 사고[편집]



전부 지붕이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붕괴된 사고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0 19:47:26에 나무위키 니커보커 극장 붕괴사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