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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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진행과 실패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니고연구(ニ号研究) 또는 전시연구 37-1이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에서 육군의 요청으로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1890~1951) 박사가 진행한 핵개발 프로젝트이다. 니시나 박사는 구일본 15대 재벌 가운데 하나였던 리켄그룹 산하 이화학연구소[1] 소속의 물리학자였으며 '니고연구'라는 명칭의 '니(ニ)' 역시 숫자 '2(二)'가 아니라 니시나 요시오의 성씨 첫 글자를 따서 명명된 것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 사회는 일본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에 대하여 연구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이 때문에 니고연구의 진상은 여전히 명백히 규명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 들어서야 상세히 밝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야마자키 마사카츠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하면 니고연구는 원자폭탄 개발보다는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에 가까웠으며, 실현 가능성도 낮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책임 회피를 위한 변명이라는 의심도 있다.[2]


2. 진행과 실패[편집]


1940년 육군항공기술연구소 소장 야스다 타케오는 스즈키 타츠사부로에게 원자폭탄에 관하여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스즈키는 원자폭탄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원자폭탄에 필요한 우라늄 광석의 일본 내 매장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했다. 이에 야스다 타케오는 1941년 6월에 이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오코치 마사토시에게 정식으로 원자폭탄 연구를 의뢰했다. 오코치는 이 프로젝트를 일본을 대표하는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에게 위임하여 니시나 연구실에서 원폭 개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참고로 니시나 연구실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일본 내에서 최첨단이었다.

100명이 넘는 연구원으로 이루어진 니시나 연구실은 우주선반, 사이클로트론 원자핵반, 이론반, 방사성이 생물에 영향을 주는 영향 연구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이론반은 핵분열 현상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핵분열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1942년 12월 니시나 요시오는 다케우치 마사에게 U235 와 U238 의 분리 연구를 지시했다. 이후 1943년 1월에는 니시나 요시오, 다케우치 마사, 야자키 이이츠, 다마키 히데히코 등이 모여 연쇄반응에 관한 확산식과 같은 이론적 취급에 대한 강의를 하였으며 같은 해 2월 28일 다케우치 마사는 우라늄 농축도와 임계값에 관한 계산 결과를 내놓는다. 3월 17일에는 열확산법을 이용한 우라늄 농축방법을 검토했고 3월 19일에는 직접 실험을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

1943년 5월 스즈키 타츠사부로는 니시나 연구실의 토의 결과를 정리해 야스다 타케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3]

① 기술적으로 원폭의 가능성을 검토한 결과, 제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② 천연 우라늄 속에 포함되어있는 U235 를 1㎏으로 농축 분리함으로써 황색 화약 1만 8천 톤의 폭발력을 지닌 폭탄을 얻을 수 있다. [4]

③ U235 를 농축 분리하려면 6불화우라늄(UF6)을 제조하여 열확산법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야스다 타케오는 스즈키를 통해 원폭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니시나 연구실의 토의 결과를 받자 니시나 연구실에 원폭개발을 지시한다. 이 때의 야스다 타케오는 항공총감 및 본부장이었는데 니고연구와 원폭개발 계획은 항공본부 직할 연구 및 군사작전과 비슷한 최고기밀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야마자키 마사카츠를 비롯한 학자들은 니시나 요시오가 보고한 내용을 토대로 니시나 연구실에서 수행한 핵분열의 연쇄반응 계산을 재현한 결과, 이는 원자로 폭주형과 같은 것이었으며 원폭개발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의 결론과 모순되는 계산 결과에 대해 야마자키는 니시나 연구소측에서 연구 인력과 연구 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구실로 이 연구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5]

그럼에도 원폭 개발 연구는 계속 진행되었다. 1943년 6월 다케우치 마사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우라늄 농축을 위한 사이클로트론이 있는 열확산탑 건설에 착수하였고 7월에는 실험에 들어갔으며 11월에는 분리 결과를 분석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라늄 농축을 위한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공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6]

"전시연구 37-1"의 실시요령 및 구성
연구과제
방사성 원소에 관한 연구
기간
개시
종료
연장종료 예정
쇼와 19년 5월
쇼와 20년 3월
쇼와 20년 7월
연구 방침
⑴ 중량 210톤의 전자석을 가진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하여 강력한 방사성 원소를 생성한다.
⑵ 위 방사성 원소를 이용하는 응용연구를 행한다.
과제 분류 및
전시(戰時) 연구원
⑴ 방사성 원소의 연구
이화학연구소
니시노 요시오 (주임)
야마자키 후미오
신마 케이지
스기모토 아사오
⑵ 방사성 원소의 이용[7]
이화학연구소 야자키 이이츠
타마키 히데히코
다케우치 마사
기고시 쿠니히코
"전시연구 37-1"의 담당청은 육군성, 담당관은 오야마 기술중좌(技術中佐)임.
"전시연구 37-1" 및 "37-2"[8]는 함께 우라늄 원자에너지의 이용에 의한 동력 및 폭약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함.

위의 내용을 보면 방사성 원소의 이용, 다시 말해 원자폭탄의 개발에는 이화학연구소의 몇 명밖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 계획이 극비리에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박사급의 핵심연구인력 4000여명, 지원인력까지 포함하면 최대 10여만 명을 동원한 맨해튼 계획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적은 인원으로, 이는 니시나 연구소에서 추진한 원폭개발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계획임을 객관적 수치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

1944년 기고시 쿠니히코가 U235를 농축분리하기 위한 UF6 제조에는 성공하긴 하였으나 정작 중요한 우라늄 농축은 실패하였으며 1945년 3월 니고연구는 중지되었다. 이후 1945년 4월의 공습으로 인해 열확산탑이 소실됨에 따라 개량과 보완을 하려는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다음날 히로시마에 방문해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주었다.

패전 이후 일본은 관련 연구를 공식적으로 중단했고, 그 동안 공공연히 연구했던 것에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3. 기타[편집]


한편 육군과 치열하게 대립하던 일본 해군도 "F연구"라는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역시나 기초적인 수준에서 패전을 맞이하였다.


MBC가 2005년 6월 12일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98회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폭개발" 편, 그리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에서 일본 제국이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12일 흥남 앞바다에서 대기 중 핵실험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당시의 일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썰이라는 평가가 주류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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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HQ의 일본 재벌 해체 이후 현재는 문부과학성의 연구기관이 되었다.[2] 독일에도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연구진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원자폭탄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원자력을 이용하기 위한 연구였다고 밝힌 바 있으며 원자폭탄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몇몇 과학자들은 '나치의 전쟁범죄에 반항하기 위해서 일부러 연구를 사보타주했다.'고 밝힌 바 있다.[3] 참고자료 1: 요미우리 신문사 편, 쇼와사의 덴노4 (讀賣新聞 編, 昭和史の天皇4) 83p, 참고자료 2: 이창위,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출판사. '일본의 원폭개발' 장(250~257p).[4] 리틀 보이의 U235가 700g 분열에 관여하여 TNT 16kt의 폭발력을 냈으니 나름 정확한 계산이다.[5] 니고연구에 참여한 타마키 히데히코가 스스로 이 계산의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밝힌 것은 이 지적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다.[6] 야마모토 요이치, 일본제원폭의 진상 (山本洋一, 日本製原爆の眞相) 68~69p[7] 원자폭탄 개발을 의미함.[8] 일본 해군에서 추진한 F연구를 말한다. 참고로 F연구는 해군이 교토제국대학의 아라카츠 분사쿠에게 위탁한 원자폭탄 개발연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