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 동서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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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특이점과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KBS의 옛 주간 시사 프로그램. 1987년 10월 25일부터 《카메라 동서남북》[1]의 후속으로 1991년 5월 17일까지 KBS 2TV에서 방영했다.

당시 제작 전담부서는 TV본부 산하 기획제작국(구 기획제작실)이었으며, 주요 MC는 이인원 앵커[2], 취재 PD로는 전용길, 김철수 등이 활약했다. 오프닝 타이틀 내레이션은 장정진이 맡았다.

2. 상세[편집]


1987년 10월 25일에 가을 개편으로 신설되었다. 당초에는 1TV 토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었지만, 1988년 부터 채널을 옮겨 2TV로 채널을 옮겨 일요일 밤 8시 40분 → 9시 40분에 방송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 가을 개편부터 1991년 5월 17일 봄 개편으로 기동취재 현장으로 개편될 때까지 금요일 저녁 8시 5분에 방송되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에 따라 신설된 프로그램[3]이지만 실질적인 신설의도는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즉, 원래는 그 동안 흔히 볼 수 있었던 교양 계몽 프로그램으로 신설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당초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민주화의 여파로 대선 이후부터는 검열이 풀린 시대상을 타서 시사 고발 프로그램으로서 성격을 강화해나갔으며 사실상 정권비판적인 소재를 다루기 시작한 첫 탐사보도 프로그램이다. 지금 보면 상당히 미숙하게 다룬 면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민주화 바람을 한창 탔을 때라는 걸 감안해도) 매우 파격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그 동안 방송사에서 직접적으로 다루는게 금기시 되었거나 다루더라도 반드시 부정적으로 다뤄야 했던 파업이나 학생운동, 철거민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온정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다뤘으며 시사 관련한 소재도 상당부분 다루는 등 그 동안의 KBS의 논조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뉴스비전 동서남북의 전신이라 할수있는 추적 60분과 비교해도 엄청난 발전을 이록한 셈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을 기점으로 논조가 점차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뉴스비전 동서남북은 그 영향을 덜 받은 편이라서 그 이후에도 사회문제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 편이었다.

이러한 논조는 당시 권력층이나 KBS 상층부에게 안 좋은 눈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1988년 5월 15일 방영 예정이던 '서울대 5월제' 편은 김도진 당시 TV본부장 측이 해당 축제의 민중적 관점을 문제삼아 방영을 취소시켰으나 KBS PD협회 측이 '뉴스비전 관련 청문회 및 토론회'를 열고 간부 등에게 방영을 수 차례 건의하면서 6월 12일 방영이 성사되었다. 7월 22일에는 KBS 측이 서울올림픽 프로 제작을 위한 효율적 인력관리 등을 이유로 돌연 폐지 결정을 내려 일선 PD들 사이에서 논란이 불거지다가, 당사 측은 올림픽이 끝나고 부활시키겠다고 하며 이를 번복했다. 약 3개월 간의 휴식기를 거친 후 10월 9일 방영을 재개했다.

1990년 KBS 사태로 인한 노조의 제작거부 투쟁으로 4월 15일부터 한달여 간 중단된 바 있고, 1991년 봄개편 때 기동취재 현장[4]이라는 데일리 시사 프로그램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기동취재 현장은 그 이전의 뉴스비전 동서남북보다 심층성이 약하다는 평[5]을 받았고 그 이후에 1년 만에 1TV 일요일 밤 9시 20분으로 시간대를 변경하면서 다시 주간 시사 프로그램으로 변경되다가 1992년 가을개편 때 KBS 9시 일요현장으로 통합되었다.

여하튼 이 때 2TV 시사 프로그램의 맥이 끊어졌다가 1994년 봄 개편을 맞아 추적 60분으로 부활했고, 2019년 시사직격으로 바뀌었다가 2023년 다시 추적60분으로 환원되어 맥을 잇고 있다.

3. 특이점과 기타[편집]


당대의 신문, 방송 뉴스, 시사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초상권 개념이나 사생활 보호 개념이 아직 형성되기 전이라서 당시 뉴스비전 동서남북 방송자료를 보면 그야말로 뜨악할만한 장면이 많다.[6] 일단 지금은 흔하게 나오는(...) 모자이크 처리는 거의 나오지 않고 심지어 사이비 종교 문제에 대해 다뤘을때 신도들의 얼굴이 그대로 나오는데다가(...) 피해자의 얼굴은 가려놓기는 했지만 목소리 변조는 하지 않았다(...) 이는 후의 김보은 양 사건이나 지존파 사건 당시의 언론보도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도서관에서 뉴스비전 동서남북[7] 1991년도 방영분 중 3월 1일부터 마지막회 방송분까지 소장하고 있어서 무료 열람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이전의 방송분을 볼려면 현재로서는 무식하게 오래된 비디오를 뒤지거나 급구하든지, 아예 KBS로 취직해서 KDAS를 통해 조회해야 한다. 더욱이 KBS 미디어에선 뉴스와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취재원 보호 등을 이유로 판매하지 않고 있어서 이 프로그램도 구매가 불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KBS에서 2018년 7월자로 기동취재 현장의 일부 방송분도 올려지면서 인터넷으로도 볼수있게 되었다.

나무위키에는 ‹뉴스비전 동서남북›으로 문서가 작성되어있지만 실제 프로그램 로고는 후의 기동취재 現場(현장)이나 방송초기의 時事(시사)매거진 2580처럼 뉴스비전 東西南北(동서남북)도 한자 표기가 되어있다.

그리고 후에 KBS 2TV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KBS 뉴스비전1994년 2월 21일부터 1997년 2월 28일까지 2TV 저녁 8시에 방영되었다. 시사적인 소재를 다루었다는 걸 제외하면 뉴스비전 동서남북과는 방송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매우 컸다.


4. 관련 문서[편집]



[1] 추적 60분의 후속 프로그램이었다.[2] 비슷한 시기에 생방송 심야토론도 진행했고, 1992년 퇴사 후 통일국민당 대변인과 문화일보 부사장, 한국대학신문 회장, 국민통합21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KBS의 왜곡보도를 전달했던 흑역사 경력이 있다. # [3] 생방송 심야토론도 이 때의 개편으로 신설되어 동시기에 방송을 시작했다.[4] 원래는 "뉴스의 현장"이라는 타이틀로 기획되어있었지만 기자들이 "PD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왜 뉴스 타이틀이 붙냐"면서 반발하는 바람에 기동취재 현장으로 타이틀이 정해졌다. 다만 실제로는 후의 뉴스투데이(1999 - 2001), 생방송 시사투나잇(2003 - 2008)과 마찬가지로 기자도 제작에 참여했다.[5] 뉴스비전 동서남북은 20 여분짜리 아이템 2건을 다루었는데 기동취재 현장은 10분짜리 아이템 3건+날씨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심층성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6] 물론 여타 시사 프로그램에 특별히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특별한 요청이 없으면 사건 당사자의 얼굴을 가려놓거나 하지 않았다.[7]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뉴스비 동서남북으로 자료등록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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