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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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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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운동계열
생몰년도
훈격
강원석
의열단
? ~ ?

고영건
3.1운동
1887 ~ 1941
애족장
김두갑
일본방면
1922 ~ 1944
애족장
김만수
3.1운동
? ~ ?

김석암
3.1운동
1891 ~ 1959
대통령표창
김선오
3.1운동
1865 ~ 1919
애국장
김성득
일본방면
1923 ~ 1983
애족장
김승래
3.1운동
? ~ ?

김승태
3.1운동
1878 ~ 1940
애족장
김양산
3.1운동
? ~ ?

김원수
3.1운동
? ~ ?

김용이
3.1운동
1891 ~ 1919
애국장
김용주
3.1운동
? ~ ?

김정태
3.1운동
1890 ~ 1958
애족장
김종훤
3.1운동
1893 ~ 1948
애족장
김헌규
의병
? ~ 1916
애족장
노백용
국내항일
1885 ~ 1961
건국포장
노상익
만주방면
1849 ~ 1941
대통령표창
노상직
파리서명
1855 ~ 1931
건국포장
노석호
국내비밀
결사조직

1916 ~ 1944
애족장
류진옥
파리서명
1871 ~ 1928
건국포장
문위동
국내항일
1903 ~ 1976
애족장
반양환
광복군
1924 ~ ?

박도백
3.1운동
1892 ~ 1939
애족장
박재홍
국내항일
1903 ~ 1979
애족장
박정수
광복군
? ~ ?
애족장
배덕수
국내항일
1895 ~ 1970
대통령표창
배동석
3.1운동
1889 ~ 1924
애족장
배종철
국내항일
1895 ~ ?
대통령표창
배치문

1890 ~ 1942
애국장
서석재
3.1운동
? ~ ?

서진령
3.1운동
1899 ~ 1971
대통령표창
손명조
3.1운동
1884 ~ 1919
애국장
송기송
대한통의부


송상진

1887 ~ 1967
대통령표창
송세탁
3.1운동
1884 ~ 1939
대통령표창
신수명
일본방면
1924 ~ 2007
대통령표창
안무술
3.1운동
? ~ ?

안효구
3.1운동


안효진
3.1운동
1874 ~ 1946
건국포장
이강석
3.1운동
1879 ~ 1923
애족장
이윤재
조선어학회
1888 ~ 1943
독립장
이윤희
노동운동


이진석
3.1운동
1896 ~ 1970
애족장
이차수
3.1운동
? ~ ?

임학찬
국내항일
1890 ~ 1952
건국포장
조영우
3.1운동
1887 ~ 1923
애족장
조정환
대한독립단
1875 ~ 1926
애족장
전용헌
국내항일
1890 ~ 1934
건국포장
정적윤
3.1운동
? ~ ?

조동출
3.1운동
? ~ ?

조용명
3.1운동
? ~ ?

조항래
3.1운동
1884 ~ 1949
애족장
최여봉
국내항일
1899 ~ 1970
애족장
최현호
3.1운동
1890 ~ 1974
애족장
한임길
의병.미상
? ~ ?
애국장
허 발
자금지원
1874 ~ 1931

허윤송
광복군
1919 ~ 1985
애족장
허 평
파리서명
1882 ~ 1968

황찬숙
국내항일
1905 ~ 1970
애족장
김해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과
김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함.

파일:건국훈장애족장약장.jpg
파일:건국훈장애국장약장.jpg
파일:건국훈장독립장약장.jpg






파일:노상직.jpg

자 / 호
치팔(致八) / 소눌(小訥)
본관
광주 노씨[1]
출생
1855년 11월 21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
(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2]
사망
1931년 3월 24일[3]
경상남도 마산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1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노상익은 그의 친형이며, 독립유공자 황문익은 그의 조카이다.[4]

2. 생애[편집]


노상직은 1855년 11월 21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아버지 노필연(盧佖淵)[5]과 어머니 창녕 성씨 성욱호(成郁鎬)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둘째 작은아버지 노호연(盧滈淵)에게 입양되었다.

<소눌편년(小訥編年)에 따르면, 노상직은 5살 때 <효경(孝經)>을 배웠고 7살 때 <소미통감(少微痛鑑)>을 읽었으며, 10살 때는 부친으로부터 중용대학을 배웠고, 11살 때는 논어맹자를 읽었으며, 12살 때 <시전(詩傳)>, 13세 때에 주역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7살 때 하과(夏課)에 참석했고, 21살 때 대구와 거창의 도회(都會)에 참가했으며, 26살 때는 한성시(漢城試), 28세에는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하고, 29살 때는 응제(應製)에 응하여 급분(給分)을 받는 등, 유학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또한 그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1886년 허전이 별세할 때까지 수시로 찾아가 배움을 이어갔다. 허전이 사망한 후엔 허전의 아들인 허운(許運)과 함께 성재문집 초고인 용어(庸語)와 연보를 정리하고 허전의 행장을 찬술하기도 했다.

1879년 선대의 세거지인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 국동으로 이주한 노상직은 그곳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우고 1883년 학도들을 모아 하과를 실시했다. 하지만 1885년 부친이 사망하고 이듬해 스승 허전과 모친을 함께 잃자, 그는 강학을 중단하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1888년 극기재(克己齋)를 열어 학도들을 교육하고 교육용 서적인 <훈몽첩(訓蒙帖)>을 저술했으며, 추원재와 극기재를 오가며 강학 활동을 했고 창녕과 밀양 등지에서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교육했다. 이러한 강학 활동은 1910년 한일병합 후 중단되었다. 그의 친형 노상익은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수여받자 단호히 거부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고 이듬해 10월 만주로 망명했다. 노상직 역시 한달 뒤에 형을 따라 가솔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912년 형 노상익에게 양자로 보냈던 장남 노식용(盧寔容)이 만주 안동현[6]에서 사망하자, 그는 아들을 만주에서 장사지낸 뒤 밀양군 단장면 무릉리 노곡동으로 귀향했다. 이후 그는 1914년 자암서당을 건립하고 강학을 재개했다. 또한 그는 선현들의 저서를 간행하는 데에 힘을 쏟기로 하고 자암서당에 전심각(傳心閣)을 따로 두고 서책을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간행작업에 큰 보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方冊中傳千古心 서책 가운데 천고의 마음을 전하나니

老年咀嚼味增深 노년이 되어 되씹으니 맛이 더욱 깊어지네.

卻愁世降言湮久 세월이 흐르면 말마저 사라지는 것을 근심하여

日以鋟書作己任 날마다 책 새기는 걸 내 책임으로 삼았네.


그러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하자, 노상직은 김창숙, 곽종석, 장석영 등이 작성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이 일로 밀양군 헌병대에게 체포된 그는 며칠간 취조를 받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후 1926년 자암서당을 중수한 뒤 계속해서 저술 작업과 강학 활동 및 서책 간행작업에 매진하다 1931년 3월 24일 마산부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노상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6월 23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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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은공파 28세 상(相) 항렬.[2]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울산광역시 교육감 노옥희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월 3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황계(黃棨, 1830. 10. 10 ~ 1882. 7. 15)의 차녀로, 황계의 장손자 황문익에게는 작은고모가 된다.[5] 이명 노준연(盧浚淵).[6]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