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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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現 부산개성중학교 야구부 코치.
2. 선수 경력[편집]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의 원년 멤버로 프로에 입단해 232.1이닝으로 최다 이닝 투구, 탈삼진왕을 기록하는 등 롯데의 우완 언더핸드 스로 에이스였으나 1983 시즌 후 현역으로 입대해 1985년에 제대한 뒤로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99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3] 현역 시절 등번호는 12번이었다.
그는 최동원 입단 이전 원년 롯데의 에이스였다. 1982년 3월 28일 구덕 야구장에서 열렸던 롯데 자이언츠의 프로야구 첫 경기인 해태 타이거즈 전에 선발로 등판해 6이닝 1실점으로 롯데의 첫 승리투수가 되었고[4] 원년 최다이닝 및 최다 탈삼진 등의 기록을 세웠다.[5] 다만 프로 원년 롯데의 전력이 변변찮았던 탓에[6] 시즌 19패를 당하며 다패왕의 오명도 같이 쓰고 말았다.[7] 1983년에는 국가대표 에이스 최동원의 입단으로 에이스 자리는 내주었지만, 2선발로 역시 팀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1982~1983년 두 해 동안 402이닝이나 던졌는데, 최동원에 가려졌을 뿐이지 명백한 혹사였다.[8] 때문에 롯데의 에이스 혹사 계보 중 최상단에 위치한 선수로 볼 수 있다.
그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문제는 병역이었다. 병역을 현역 일반병으로 마치면서 선수 생활에 공백기가 생긴 것도 컸다. 프로 선수의 군팀 입대가 불가능할 뿐더러 복무기간도 30개월로 길었고 또 선수 수명이 2020년대보다도 짧았던 1980년대 당시에 현역 입대는 선수 생활 사실상 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9]
원년 이후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듬해 입단한 최동원이 롯데의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언더핸드 투수로 원년 당시 리그 내 상위권의 활약을 보였음을 생각한다면 한희민 이전 프로야구의 언더핸드 에이스로 봐도 될 법한 수준. 원년 이후에도 활약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남긴다는 점에서 상당히 아쉬운 선수라 할 수 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역임하다 2014년 6월 7일 개성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서 고교야구 주말리그 경남고등학교 야구부전 경기 9회말 끝내기 스퀴즈 번트로 승리한 후 인터뷰했다. 그러나 개성고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정원욱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5. 관련 문서[편집]
[1] ~5월 21일[2] 5월 22일~[3] 이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팀 역사상 단 두 번 뿐이었던 우승을 모두 놓쳤다.[4] 해태의 선발 투수는 방수원이었으며 1회말 아웃 카운트를 한 개도 잡지 못하고 난타당하다가 강판당해 패전투수가 됐다.[5] 그러나 정식 시상 타이틀은 없었다. 이닝 부문 타이틀은 지금도 시상 대상이 아니며, 탈삼진 부문 타이틀은 1993년 신설되었다.[6] 1982년 롯데의 시즌 최종 성적은 31승 49패로 6개 팀 중 5위였다. 15승 65패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압도적 꼴찌를 차지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밑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사실상 하위권이나 다름없었다.[7]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 시절부터 롯데의 팬을 자처한 축구 해설위원 한준희는 노상수의 원년 성적을 보고 롯데의 향후 앞날이 순탄치 않겠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직감은 여지없이 적중하고 만다.[8] 아직 마운드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1983년만 해도 평균자책점이 전년 대비 1.2점이 올라갔는데, 국가대표 선수들의 입단으로 인한 리그 수준의 급격한 상향 문제도 있었겠으나 바로 전년도 최다이닝을 기록할 정도로 혹사당했던 것 또한 이유로 볼 수 있다.[9] 이 시기에 현역 일반병으로 입대했던 다른 선수들(양세종, 정학수, 최계훈 등)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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