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 노라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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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 노라트라(Nord Noratlas)

1. 소개
2. 개발 배경
3. 소요 제기부터 채용까지
4. 수출과 운용


1. 소개[편집]


프랑스 공군(French Armée de l'Air)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 수송기들의 엄청난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48년부터 개발에 나선 군용 수송기이다. 처음 설계는 SNCAN(Société Nationale de Construction Aéronautique du Nord)에서 착수했으나 이 회사가 노르 아비아시옹(Nord Aviacion)에 합병되면서 대부분의 기체가 이때 만들어진 탓에 노르 노라트라(Nord Noratlas)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2. 개발 배경[편집]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어쨌든 승전국 대열의 말석에 끼게 된 프랑스는 연합군이 압수한 추축국 항공기 다수를 나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가 건네 받은 수 백대의 군용기들은 비록 나치 독일군이 쓰던 것이었지만 전쟁 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항공산업계의 기술 수준을 뛰어넘은 것들이 많았던 탓에, 항공기 부족에 시달리던 운송업계와 공군의 입장에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유독 쓸만한 수송기만큼은 양도받지 못했던 프랑스는 낡은 융커스 Ju 52이나 미국에서 공여해준 더글러스 C-47 수송기를 계속 써야만 했다. 두 기종이 도움이 안된 것은 아니지만, 공군에서는 이 수송기들이 화물을 싣고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탑재량이 부족한데다 대형 화물은 옮길 수 없는 점에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3. 소요 제기부터 채용까지[편집]


1947년에 DTI(Direction technique et industrielle)가 주최한 차세대 중형 수송기의 초안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논의를 통해 SNCAN 사는 노르 2500, 브레게 사는 BR-891R, SNCASO 사는 SO-30C을 후보 기종으로 제출하게 된다. 세 후보 중에서 화물을 동체 후방이 전부 열려 램프로 부릴 수 있게 고안된 노르 2500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어 1948년 4월 27일에 DTI는 2대의 프로토타입을 주문했다. 원형 1호기는 3엽 가변 피치 프로펠러가 부착된 1600 hp의 놈-론 14R 공랭 엔진을 쌍발로 갖추고 1949년 9월 10일에 첫 시험비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시제기는 대부분의 임무를 소화하기에는 지나치게 느리고 비행 성능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출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래서 시제 2호기는 SNECMA 사에서 영국으로부터 면허 생산권을 얻은 4엽 프로펠러에 출력 2040 hp을 발휘하는 브리스톨 허큘리스 738/9 엔진으로 강화하고 노르 2501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기체에 만족한 DTI는 3대의 노르 2501을 발주하는 동시에 미국제 수송기인 페어차일드 C-82 패킷과 비교 테스트를 해보게 된다. 프랑스 심사단은 비교 결과 노르 2501이 여러가지 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인정했고, 1951년 7월 10일에 첫 양산기체 34대를 구입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렇게 프랑스 공군의 제식 수송기로 채용된 노르 노라트라는 1961년까지 425대가 생산되며 오랫동안 이용되었다. 이 수송기가 유명해진 계기는 1956년 수에즈 위기가 발생했을 때 프랑스의 공수부대원들을 태운 노르 노라트라 편대가 일제히 이집트 포트 사이드와 포트 포아드(Port Fouad)에 강하시키는 모습이 TV 화면을 타면서부터였다.



4. 수출과 운용[편집]


그러나 이 수송기가 처음부터 그렇게 성공적인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1952년에 노르 2501의 시제기가 시험 도중에 추락하며 승무원들이 사망하는 사고를 일으켰고, 이듬해인 1953년 1월 9일에 또다시 추락해서 조종사가 죽고 말았다. 이때 순직한 조종사의 미망인에 의해 노라트라(Noratla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간에 들끓는 악평에도 첫 양산 기체 34대는 1953년 6월 25일까지 공군에 모두 인도되었다. 프랑스 공군이 이에 더해 174대를 추가 주문하자 노라트라의 발주댓수는 208대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이처럼 순전히 군용 수송기로 사용된 노라트라였으나, 민간 화물기로서의 잠재능력에 눈을 뜬 운송사들에 의해 민수용으로도 10대가 주문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비행장 근처에 매복시킨 박격포나 낮게 나는 수송기를 노리는 대공포에 많은 수의 노라트라가 희생되었고, 이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전선 수송기로 계속 쓰기에는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프랑스는 차세대 수송기 C-160 트랜잘 도입을 추진하는 동시에 상태가 좋은 기체 8대를 골라 노르 가브리엘(Nord Gabriel)이라는 전자전기로 개조해서 활용했다. 가브리엘은 노르 노라트라의 여러가지 파생형 중에서 가장 늦은 1989년까지 현역을 지키다가 퇴역했다.

프랑스에서 노라트라가 개발되던 무렵, 새로운 군용 수송기가 부족한 것은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서독 수출이 노라트라의 개량에 하나의 자극이 되었고 수출의 시발점이 되어주었다. 서독 공군은 재건을 시작한 1956년부터 186대의 노라트라를 구입했는데 그중 25대는 직도입이지만 나머지 161대는 노르 사가 서독에 세운 자회사인 노르 항공기(Flugzeugbau Nord)에서 만들어져 납품된 것들이다. 서독은 노라트라를 도입한지 8년이 지난 1964년부터 중고 기체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프랑스 방산업체들의 중요 고객으로 떠오른 이스라엘 공군(IAF)은 1956년에 3대의 N-2501IS를 구입했으나, 정작 이스라엘측은 이 수송기를 원하지 않았었다. 다만 프랑스 정부는 이스라엘이 노라트라 3대를 함께 사가야만 그들이 원하고 있던 12대의 다쏘 우라강 전투기를 판매하겠다고 버텼다. 이런 황당한 불공정 거래 조건에 이스라엘측은 당황했지만, 당시의 프랑스는 유대국가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아주는 몇 안 되는 열강 중 하나였던 탓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 기체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이스라엘군이었으나 수에즈 위기에서의 활약을 지켜보며 노라트라의 유용함을 인식하고 1959년에 3대를 더 사오고 1962년에는 16대의 N-2501D를 추가 구매했다. 이때 6대는 서독으로부터 사온 중고 기체였는데, 이 수송기들은 모두 제103비행단에 배치되었다. 노라트라는 원래 화물 및 병력 수송을 위해 쓰일 예정이었지만, 미국제 C-130 수송기가 베트남 정글데이지커터 폭탄을 투하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국내로 저공 침투하여 원거리 폭격을 가하는 폭격기로도 쓰인 일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 공군은 6일 전쟁을 개전하면서 노라트라를 해상 정찰과 초계에도 이용했던 사실은 당시 군사전문가들을 또한번 놀라게 하는 일화로 전해진다. 그중 1대는 미 해군의 정보수집선 리버티호(USS Liberty AGTR-5)를 탐지해 다쏘 미스테르 전투기 편대를 정확히 유도시켜 34명이 죽고 171명이 부상을 입는 큰 피해를 입힌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C-130을 받으면서 1978년에 이 수송기를 퇴역시키며 모든 기체를 그리스 공군에 팔아넘겼다. 사실 그리스는 1970년에 2차 대전의 배상금조로 50대의 노라트라를 서독으로부터 양도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사온 기체는 아테네 근교의 엘렙시스 공군기지(Elefsis AFB)의 제354 전술수송 비행대에 배치되었다. 354비행단의 노라트라들은 1974년 7월 21일부터 22일 야음을 틈타 크레타에서 이륙해 터키 영토로 몰래 침투해 그리스 제1레인저 부대를 키프로스의 수도 니코시아까지 수송하는 임무에 이용되었다. 당시는 기상이 좋지 못한데다 기체도 낡았지만, 그리스군이 결행한 나이키 작전(Operation Nike)에 참가한 15대의 노라트라 중에서 12대가 니코시아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그리스 레인저 부대원들은 국제 연합이 관리하고 있던 니코시아 공항을 장악하고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해오는 터키 육군 연대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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