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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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강에 있던 나루터.

위치는 지금의 노량진동이 아닌 노들섬 맞은편의 동작구 본동 258-159번지 일대.


2. 역사[편집]



2.1. 유래[편집]


노량진의 원래 고유어(우리말) 표현이다. 한자로 옮기며 해오라기 노(鷺), 들보/해협 량(梁), 나루터 진(津). 한자에 뜻을 담았듯 백로(해오라기)가 노닐어서 "노(들)", 노들섬과 동작구 사이의 좁은 해협이라 "량"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는 나루터 주변에 갈대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노을빛으로 물들어 "노들"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연경관이 대대로 빼어났던 곳임을 나타낸다.

노량 해전의 노량과는 무관하다. 이쪽은 이슬 노(露), 들보/해협 량(梁)의 한자를 쓰며,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둘 사이의 좁은 해협(량)을 의미한다. 이름처럼 이 곳은 이슬과 안개가 자욱하곤 하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새벽녘에 엄폐하여 일본 함대를 유인하는 전략이 가능했다.


2.2. 조선시대[편집]


한강 남북을 잇는 여러 나루터 가운데 하나였다.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한강에 다리가 없었기에, 나룻배로만 건널 수 있었다. 제물포 또는 한강 상류에서 온 배들이 노들나루에서 쉬어간 뒤, 노들섬을 거쳐 용산으로 건너 서울으로 가곤 했으므로, 여객/화물(조운)의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에 와선 한강/한양/한성 이남의 모든 조운은 모두 여기에서 취합한 후 한강을 건너게 했다. 당시 이 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가 관할했으며, 도승(渡丞, 정9품)이 관리했다. 나중에 영조가 이 관리자의 직책명을 도진별장(渡津別將)으로 고쳤다.

구한말일본 제국이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대교를 지었음에도, 한국인들은 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노들나루의 나룻배를 통해 한강을 건너곤 했다.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노들나루의 이용을 금지했다.

조선시대부터 노량진 또는 노량도라는 지명을 써왔으며,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정리하며 노량진을 공식지명으로 확정했다.


2.3. 대한민국[편집]


1945년, 중앙대학교교가에 "한강수 굽이치는 노들의 강변 명수대 송림속에 우뚝선 중앙"이란 소절을 넣는다. 인근의 초·중·고에도 '노들'이라는 이름을 쓴다.

1967년, 노들로라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겼다.

1991년, 3기 지하철 계획을 하며 서울 지하철 9호선노들역이 결정되었다.

2009년, 동작구민들에게 노량진뉴타운에 조성될, 노들역 2번 출구의 공원의 이름을 공모했는데, "노들나루 공원"이 선정되었다. #

노들역 4번 출구에서 13분 가량 등산하여 올라가는 수도산/고구동산/용봉정공원에 오르면 대한민국의 35개 마천루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모든 마천루를 둘러볼 수 있다.


3. 관련 문서[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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