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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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멸망전
魯國滅亡戰
Fall of Lu

시기
기원전 382년
장소
노나라 낭야, 곡부, 거
( )
원인
노목공 희현의 월 대부 금강파의 제안 거부로 인한 금강파의 복수 시도
교전세력
조선朝鮮
제齊
월 금강파越 金剛派
노魯
지휘관
별부사마 악조
노목공 희현†
공자 희분
병력
조선군 6천[1]
제 동부군 약5만 3천여
제 서부군 규모 미상
월 금강파군 3만 6천[2]

총합 약 15만[3]
노나라 동부군
피해
전무[4]
노나라[5]
결과
노나라의 패배
영향
노나라 멸망, 제나라의 구 노나라령 병합, 조선-제-월의 국제무역지구 낭야에 형성, 송나라에 대한 제나라 영향력의 심화

1. 개요
2. 배경
2.1. 노의 사정
2.2. 월 금강파의 사정
2.3. 조선의 사정
2.4. 제의 사정
3. 전쟁의 전개
3.1. 모든 이목이 송에 쏠리다
3.2. 만약의 보험
3.3. 동맹의 의리를 너무 지킨 대가
3.4. 괴물의 한 끗 못 미친 불안감
3.5. 곡부와 노목공
3.6. 노나라의 끝
4. 결말
5. 전후처리
5.1. 대성한 제나라
5.2. 대차게 당해버린 위나라
5.3. 월나라는 월월하지, 그들은 강남스타일
5.4. 그저 가족인 송이 걱정인(?) 조선
5.5. 지붕 쳐다보던 개를 돌려보내준 닭
5.6. 호구잡혀버린 한과 송
5.7. 위나라 패권의 황혼



1. 개요[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노나라는 수군의 육성 문제로 월나라와 협정을 맺고자 했으나 월나라의 내외를 장악하고자 한 대부 금강의 파벌이 왕가 대신 자신들과만 교류할 것을 제안, 노목공이 이를 일축하면서 앙심을 품은 대부 금강이 제나라와 조선을 끌어들여 노나라를 쳐 멸국에 이르게 한 일이다.

작중 일어난 전쟁 중 그 동기가 불순하기로는 한손에 꼽는다는 점이 특징으로, 원래도 월나라는 이후 멸망까지 국가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무너져갔지만 여기서는 그 대표격이자 최대의 폐단인 금강 파벌의 독주가 시작된 사건이다.


2. 배경[편집]



2.1. 노의 사정[편집]


노목공의 변법 개혁 이후로 노나라는 원역사와 다르게 월,송과 손을 잡고 월나라의 화북 영토를 넘겨받아서 해안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제나라에게 큰 압박을 주고 있었다.
기원전 389년에는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훈련시킨 10만 대군을 동원해 낭야와 즉묵 일대를 정복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노목공은 노나라의 수군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수군을 강화히기 위해서는 노-월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월의 협조가 필요했으나, 노목공의 번집은 예의는 몰라도 의리는 지키겠다는 의도로 자신을 사실상 월의 주인으로 대우해달라는 월의 실세 금강의 요구를 거절하게 하였다.
이에 사신이었던 금강의 심복 진명은 즉시 앞으로 수군은 꿈도 꿀 생각조차 하지 말라며 동시에 노목공을 족하[6]라 칭한 뒤 떠나갔다.
노목공은 금강의 반역행위를 알리는 글을 월왕에게 보냈지만 당연하게도 이 글은 월왕에게 가지 못했고, 소식을 전해들은 월의 실세인 금강은 노나라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이 일로 노나라는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립되었다.

2.2. 월 금강파의 사정[편집]


기원전 389년 노제전쟁에서 월왕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전력을 대부분 기용해서 아읍 상륙전에 나섰지만, 한 수 아래이던 제나라 수군에게 막혀서 실패했다.
이 일로 기껏 끌어올린 월왕의 위신은 땅을 기기 시작했고, 금강상회의 금강이 무역을 바탕으로 월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월의 왕위에는 욕심이 없던 금강은 노목공에게 수군 양성을 도울테니 금강을 사실상 월의 주인으로 대우해달라는 거래를 제안했으나 실패하고, 노나라에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노-월의 역학관계는 무역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노월무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월나라라도 단독으로 노나라에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원전 382년 금강은 복수를 위해서는 외부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제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제나라와 특별한 사이였던 조선에게 제나라와 중재를 부탁하게 되었다.

2.3. 조선의 사정[편집]


조선은 당대 최강국이던 위나라와 중원 진입 이전부터 연이 있던 제나라 둘 사이에서 다소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장을 위해서 움직이고 싶어하던 조선으로서는 위나라 1강 체제와 삼진의 연합은 꺼려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제나라의 새로운 군주 전섬은 조선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군주였기 때문에, 이 거절이 제나라와의 관계에 미칠 영향도 생각해야 했다.
때문에 조선은 월의 협조를 받아서 수군을 강화할 수 있고, 강화된 제와 위 사이에 발생할 다툼은 조선에게 이득이라고 판단하여 제나라와 월나라를 중재시켜주었다.

2.4. 제의 사정[편집]


제태공 때 강씨가 버티던 즉묵을 점령하고, 노나라의 침입을 격퇴하였지만 10만을 동원해서 공격할 능력이 있는 노송월 연합은 여전히 제나라의 안보에 큰 위협이었다.
그런데 월나라가 노나라를 배신했고, 조선까지 거들어준다는 사실은 제나라에게 커다란 호재였다.[7] 또한 월나라가 준 정보에 따르면 노나라는 수군이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월나라가 난릉대전 이후 할양한 해안 지역의 경비는 거의 전적으로 월나라에게 맡겨진 상황인 것이 드러났다. [8]
여기에 순우와 즉묵에서 빠르게 점령이 가능할 낭야를 통해 노나라로 즉시 동원가능한 제나라 군사 5만 3천을 더해서 10만 대군을 기습적으로 투입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오자 제나라는 월의 요구를 수락했다.

일이 결정되자 전오는 전쟁의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 한나라에게 노나라의 동맹인 송을 공격할 것을 부추겼다.[9] 한나라는 마침 교통의 요지이며 한의 발상지인 상당군을 위나라에게 홀라당 뺏기었기 때문에 영토를 위해서건, 위나라에게 은근히 복수하기 위해서건 송나라 공격에 열성적이었고, 송나라 수도 팽성에 공격을 가기로 하면서[10] 노나라는 무방비한 상태로,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월,조선의 10만 연합군의 기습에 노출되었다.

3. 전쟁의 전개[편집]


비록 완벽한 기습의 여건이 갖추어졌긴 했다지만, 전오의 음모를 위시한 계책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맞아떨어지면서 조선-제-월 금강파의 연합은 그 누구도 눈치 못 채는 사이에 나라 하나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마술과도 같은 현실을 구현하였다.

3.1. 모든 이목이 송에 쏠리다[편집]


앞서 말하였듯 한나라가 전오의 제안에 달아올라 곧이곧대로 믿은 채 송나라 팽성에 들이받자, 당사자인 송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주변에 지원을 요청, 그 동맹국인 노나라의 시선이 송 전역에 집중되었고 노나라 서부군이 즉응하였다. 제 서부군은 적절한 때가 올 때 까지 채비만 한 채 대기하고 있었고, 따라서 노나라는 산맥의 보호와 겹쳐 제군의 의중을 안일하게 대하였다.

한편 위 국군 또한 동부군이 상채에서 잡일을 처리하던 중 그 공백을 노린 한나라의 팽성 진공에 진노해 몸소 군을 이끌고 한을 토벌할 기세로 노발대발하자 상방 공숙좌는 필사적으로 이를 제지하였다.
이는 효과를 보아 위무후는 진정하였으나 한의 행동에는 제지가 필요했고, 이에 상채에 원정군이 귀환하는 대로 유사시를 대비한 채비로써 신정에 포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3.2. 만약의 보험[편집]


그러나 이 때 이미 전오의 언질과 사주에 응하여 이 참에 서하를 "또" 공격해오는 진헌공 사습과 그 밑의 진의 강병에게 끝내 눈이 돌아가버린 위무후는 열이 오른 채 맞대응을 위해 일각여삼추(15분이 세번의 가을과도 같다)라도 되는 것 마냥 친정을 할 채비에 돌입했다! [11]
이로써 제나라는 위나라 중앙의 시선을 서하 전역으로 완전히 묶어두었고, 위나라가 조직적으로 노나라를 도모하는 것을 저지할 최후의 가능성까지 무산시켰다.

3.3. 동맹의 의리를 너무 지킨 대가[편집]


한편 폐부를 모조리 찌를 비수가 너무나도 당당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노나라의 기풍이 겹쳐 노목공 희현을 비롯하여 노나라의 그 누구도 동맹국이 돌변한 태도를 보이리라는 염려를 전혀 하지 못해 노나라 동부군 및 낭야주둔군은 눈앞의 제 동부군을 극도로 경계한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애초에 월인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는 보인 반응부터가 새삼스러운 일 정도에 불과했고, 월과 조선의 상륙군은 그야말로 낭야를 날로 먹은 뒤 제군과 합류하여 약 10만의 대군세로 노나라 동부를 집어삼킬 쾌진격을 시작했다.

너무나도 빠른 전개에 거는 정보조차 얻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장악당했고, 이후 곡부를 곧바로 치기 위해 진공하니, 노목공은 그때까지도 애초에 움직일 생각이 없던 태산 건너의 제 서부군에 시선이 쏠린 채 본인이 기거한 수도 곡부로부터 13리 밖까지 연합군이 가까워져서야 사태의 전모를 접할 수 있었다.

3.4. 괴물의 한 끗 못 미친 불안감[편집]


나름 관직을 거의 내려놓은 뒤 동부군의 기량 복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위 제일의 명장 오기는 상채의 일을 끝마치고 주군의 명에 따라 신정에 포진한 채 대기하는 중 주군이 서부군을 대동해 서하군으로 이동중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머릿속에서 인과관계가 휘몰아치는 숙고가 있었지만, 무언가에는 다다르지 못한 채 이는 막을 내렸다.

3.5. 곡부와 노목공[편집]


곡부에는 2만 3천의 병력이 메타적으로 55 가량의 숙련도와 66의 곡부 방비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상황을 알아채자마자 파발을 인근으로 뿌린 노목공이었지만 제와 월과 조선은 너무나도 가까워 오로지 늠구만이 파발이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늠구에서도 원군은 제 때 올 수 없었고, 이에 주공의 후예로써 결사적인 수성을 결의했지만, 이 때를 위하여 연합군 전체의 배려로 힘을 온전히 아낀 채 여기까지 온 조선의 거대한 발석거와 노포[12]에 일방적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노나라를 진흥시킨 목공 희현은 성과 함께 명을 달리하거나 다친 전군의 7할5푼에 섞여 의리를 지키고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3.6. 노나라의 끝[편집]


수도인 곡부가 국군과 함께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날아가고 그 대계를 이었어야 할 태자 희분은 이미 낭야에서 사로잡히자, 남은 것은 잔존세력의 일소였던 제나라는 그제서야 최후까지 대기시켜 두었던 제 서부군을 움직여 철저히 제압하고, 위나라의 속국인 위(衛)나라까지 노릴 교두보까지 확보하였다.

소식이 너무 뒤늦게 전해져 위 동부군은 승구 외엔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이에 오기는 본인을 책망했으나 부장이자 본래의 동부군 담당인 파녕에게 이 정도의 궤계를 모조리 꿸 수 있으면 사당이 세워져야 할 판이라는 위로를 받는 것과 함께 승구를 위나라에 병합하게 된다.

4. 결말[편집]


그렇게 주공 단의 7세기여를 이어오던 후예는 자취를 감추고, 한나라는 송나라의 영웅적인 선전으로 계획이 좌절되었다. 남은 것은 소식이 온 천하에 전해지는 것 뿐이었다.

5. 전후처리[편집]



5.1. 대성한 제나라[편집]


조선은 노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금강은 영토가 아니라 노나라에게 좌절된 월나라의 실권에 대한 공인을 제와 조선에게 받고 역학관계를 재정립한 채 거래 상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주력을 맡고 노나라 전역을 직접 점유한 제나라는 실상 노나라를 집어삼켜 산동과 그 근교를 일통한 대국이 되어 위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 저력이 되는 존재로 뛰어올랐으며, 이는 후일 제 최전성기의 발판이 되었다.

5.2. 대차게 당해버린 위나라[편집]


이리저리 군을 움직이기만 한 채 뒤늦게 소식이 퍼진 위나라는 급히 서하전선에서 쌍방의 합의로 동시에 군을 물렸지만[13] 이후 사태 파악을 하는 과정에서 그 진상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 채 제가 온전히 주도한 합공으로 노나라가 망하였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작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선은 액면상의 동원 규모로 인하여 체면치례만 한 것으로 여겨 조선을 회유해 제의 정보를 얻을 창구로 쓸 계획을 세웠다.

5.3. 월나라는 월월하지, 그들은 강남스타일[편집]


전혀 월나라를 위한 일은 아니었지만, 금강파가 이로써 왕가도 밀어제끼고 정국을 온전히 좌지우지함으로써 금강이 곧 월나라가 되자 결과적으로는 월나라도 반사이익을 보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이어졌다.
바라는 것을 모두 얻고 국제무역도시 낭야에서의 거래로 조선과도 교류를 트고 제나라의 파트너가 된 금강과 그 파벌의 위세는 국내의 군소 파벌[14]들마저 분열시키면서 그 끝을 모르게 되었다.
이로써 집중되는 부는 금강의 전횡이자 국책사업의 밑거름이자 힘이 되었고, 이 때부터 오랜 기간 동안 월 왕가는 그 격에 걸맞지 못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월나라는 강남 국가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인식이 안 좋고 혹평당하는 형국을 멸망까지 짊어지고 가게 된다.

5.4. 그저 가족인 송이 걱정인(?) 조선[편집]


일이 끝나고 애초에 얻을 것이 거의 없던 보상이자 반대급부로 국제무역도시 낭야에서의 지분에 더해 수군의 육성을 자문받기 위해 월 전체에서 15등 순위에 달하는 항해사와 강남의 최고급 군선용 목재로 만든 군선들을 수여받았던 조선이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친척나라인 송이 이번 사태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예상되었고 이를 다독일 필요를 느낀 조선후 기식은 몸소 송나라를 방문해 좋지 않은 시선 속에서도 자매결연을 맺은 송공의 앞에서 교묘하지만, 그럼에도 간곡한 해명을 하였다.

이내 이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졌고, 송의 동맹국을 모조리 날려버린 전쟁에서 중핵의 기여를 하고도 조선과 송의 관계에는 흠 하나 가지 않은 채 의자매는 다음을 기약하였다.

5.5. 지붕 쳐다보던 개를 돌려보내준 닭[편집]


사태의 급변으로 위무후로부터 서하에서 군대를 함께 물리자는 제안을 받은 진헌공은 이미 무슨 이유로 위군이 회군하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마치 승부를 다음에 이어서 하자는 듯 이에 응하였다.
위나라에서의 오랜 인질생활로 당대의 국제정세와 위나라를 꿰고 있었던 영사습이었기에, 설령 이 때를 노려 이득을 보려 한 들 그 가능성도 크지 않고 위격을 다시금 자극할 것을 우려한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 서하 전역이 깔끔히 끝나자, 한편으로는 위를 상대함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동쪽 건너편의 조선에게 수교할 것을 제나라에 권고받은 것을 계기로 관계를 트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대에는 국제정세에 기반한 조선의 사정으로 이는 좌절되었고, 그 후대에야 결실을 맺게 된다.

5.6. 호구잡혀버린 한과 송[편집]


한나라는 위나라를 상대하기 위한 일환이었던 이번 팽성전역이 대실패로 끝나고 나라 안팍, 문무를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차질에 시달릴 예정이었고, 그 정도로 대승을 거둔 송나라는 곧이어 동맹국이 모두 이반 및 멸망하고 이 과정에서 조선이 어쩔 수 없이 제나라의 손을 잡았음을 전오로부터 듣게 되었다.
송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송에게 이내 닥친 것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진 제나라로부터의 영향력이었고, 이 국면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타파할 수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소식은, 조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송나라를 위하고 있음을 확답받았다는 것.

5.7. 위나라 패권의 황혼[편집]


항상 서하를 노리는 진, 삼진의 관계에 의문을 표하는 한과 조, 위와 맞먹는 대국이 되어가는 제, 그에 종속되어가는 송, 그리고 북방에서 점점 세를 키워가고 말도 안되는 강군의 상징인 조선은 더 이상 위나라가 순수히 힘만으로 대처할 수 없는 위협이 물위로 떠오르고 있음을 인지하게 하였고, 국력이 가장 강했으나 중원에서 3방향을 모조리 경계해야 했던 위는 국군 특유의 호전성에도 불구하고 전략을 바꾸어나갔다.
특히 연을 일격에 멸하는 저력을 보인 요동에서부터 찾아온 조선의 존재는 향후 위와 제가 서로를 대적함에 있어 명백한 변수가 될 것임을 점점 깨달은 양국이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시도를 점점 늘려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원의 명실상부한 최강국을 가늠할 수 있었던 시대가 막을 내려가고, 위는 제와 천하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를 마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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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은 전원 공성부의 신작을 대거 대동한 공성전문 부대로 이 전쟁의 핵심이 되었다.[2] 월왕은 월나라의 자랑이자 주력인 수군의 장악도 또한 금강파에게 대대적으로 밀리고 있었고, 따라서 이 전쟁에 동원된 월군은 전부 금강파의 사병이었다.[3] 제 서부군은 사실상의 전후처리에 동부군을 대신해 노나라 잔존지역의 장악에 동원되었고, 따라서 그 규모는 동부군과 동급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4] 한 전투에서 이런 적도 극히 드물지만, 이 경우는 명백히 아예 한 전쟁에서 얻은 성과였다.[5] 이렇게 평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일방적인 참상이었다.[6] 단어의 명목상으로는 딱히 격의 차이는 없었지만 실질적 격의 차이로 이미 국군에 대한 비하의 의미를 겸하게 되었다.[7] 특히 금강의 요구조건으로 금강을 사실상 월의 주인으로 인정해주어도 월왕 자리는 일단 그대로 둔다는 것이 도리를 중시하던 전섬의 기준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기도 했다.[8] 이 말은 곧 노나라의 최전선기지인 낭야에 들키지 않고 제월조선 연합군 4만을 상륙시키고, 노나라의 동부를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9] 이는 송과의 친척국 관계라 그 안위 또한 신경 써야 할 은근히 곤란한 상태임을 전한 조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였다.[10] 이 때 전오는 동시에 노와 송을 공격하기로 해놓고 늦게 출발해서 어그로를 한나라로 돌렸다(…)[11] 서하군에서 오기가 빠진 이상 아무리 오기가 길러냈다 해도 위 서하군은 이전의 최정예가 아니었다. 이에 진헌공은 전오의 간계에 맞추어 움직이게 되면서도 그 지모에 진심어린 극찬을 보내었다.[12] 이 모두는 묵가 공성부의 초기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존의 것과 궤를 달리하는 크기에 비례하는 위력을 자랑했다. 전오는 이들의 진가를 대번에 알아채고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연합군 전체에 조선의 공성군을 최대한 집중적으로 호위할 것을 주문했다.[13] 이것만으로도 돈이 엄청 깨지는 것은 고금동서의 상식이니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14] 누누히 말했듯 이 부류에는 왕가가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