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고 안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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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ragon in my garage

1. 개요
2. 내용
3. 상세
4. 차고 안에 용이 없다고 확신하면 독단인가?
4.1. 그렇다
4.2. 아니다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칼 세이건이 집필한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1]≫에 등장하는 비유.

'내 차고 안의 용'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의 전반부를 꿰뚫는 하나의 명제로, 세이건은 이 명제를 통해 현대에 만연한 심령술, 초심리현상, 점성술 등의 존재를 '건전한 회의론'적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역설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수많은 검증은 이러한 회의론을 위한 도구이자 회의론 그 자체다.

위의 내용이 담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현대에 만연한 음모론, 초능력 사기, 외계인론, 기술신화 등에 반박하고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두어 건전한 회의론으로 돌아갈 것을 설토하는 내용이며, 현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기본이 되는 '건전한 회의론'을 역설한 책이다.

해당 도서는 국내에서 2001년에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지만, 2022년에 사이언스북스에서 개역판이 출간되었다. 번역에 관해서는 토머스 홉스리바이어던을 '리바이 언덕'으로 번역했던 구판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을 보인다. 예를 들자면 37페이지에서 '유사 과학은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사과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지 않지만 갈망하는 개인적인 힘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2]'이라는 오타가 버젓이 나온다.

2. 내용[편집]


"우리 집 차고에는 불을 뿜는 용이 살고 있다."

내가 진지하게 그런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다음은 심리학자 리처드 프랭클린(Richard L. Franklin, 1925년~)의 집단 치료법을 따른 것이다.) 물론 당신은 직접 보고 싶을 것이다. 용 이야기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수없이 회자되어왔지만, 증거라고 한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단한 기회가 아닌가!

"보여 주세요."라고 당신이 말한다. 나는 차고로 당신을 안내한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사다리와 빈 페인트 깡통과 오래된 세발자전거가 보이지만 용은 보이지 않는다.

"용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묻는다.

"용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면서 대답한다. "이 용은 보이지 않는 용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었군요."

당신은 차고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용의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 용은 하늘을 납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적외선 감지기를 사용해서 보이지 않는 불을 탐지해 보자고 할 것이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보이지 않는 불은 열도 없습니다."

당신은 용에게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겠냐고.

"좋은 생각인데요, 우리 용은 물질로 되어 있지 않아서 페인트가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물리적 조사 방법을 하나하나 제시할 때마다 나는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늘어놓으며 당신의 제안을 무효화해 갈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않고 물질로 되어 있지도 않고 날아다니며 뜨겁지도 않은 불을 뿜는 용이 있다는 것과 용이 아예 없다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의 주장을 논파할 방법도 없고 나의 주장을 반증할 만한 실험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용이 존재한다는 내 주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내 가설을 무효화할 수 없다고 해서 내 가설을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두 주장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검증할 수 없는 주장들, 반증할 수 없는 단정들은 아무리 영감이나 경이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진실과 관련해서는 가치가 없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신에게 증거 없이 믿어 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용이 차고에 산다는 내 주장에서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우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리적 검증을 단 하나도 할 수 없는데, 나는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꿈이나 환각을 본 것일까? 꿈이나 환각을 본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진지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과소 평가했음이 틀림없다.

당신이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해 보자. 증거는 하나도 없고 검증 방법도 없지만, 당신은 내 차고에 불을 뿜는 용이 산다는 생각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틀렸다고는 생각하지만 판단을 유보한다. 현재까지 나온 증거들에 따르면 내가 매우 불리하지만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데이터가 쌓인다면 다시금 조사해 볼 생각을 한다. 그런 당신에게 내가 믿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답답하고 상상력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증명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내 주장을 온전히 믿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일이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여전히 용은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지켜보는 동안 밀가루를 뿌리면 발자국이 찍힌다. 적외선 탐지기의 바늘이 떨리며 무엇인가 탐지해 낸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니 공중에 위아래로 울퉁불퉁한 벼슬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용의 존재를 얼마나 의심하는지 상관없이(보이지 않는 용은 논외로 하자.) 당신은 이제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불을 뿜는 용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 다른 시나리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이 있다고 주장한 게 나만이 아닌 경우이다. 당신이 아는 다른 사람이, 그리고 서로 모르는 게 분명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집 차고에 용이 산다고 주장한다고 상상해 보자. 게다가 모두 다 증거는 뜬구름 잡듯 모호한 것뿐이라고 해 보자. 다들 물증도 없는데 이렇게나 확신하게 되었다고, 스스로도 당혹스럽다고 말한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전 세계의 차고에는 보이지 않는 용이 오래전부터 살아 왔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이제 겨우 파악하기 시작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에 관한 신화는 고대 유럽과 중국 등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존재해 왔다. 어쩌면 그 신화는 실제로는 신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용의 발자국 같은 게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발자국은 용 회의주의자가 보고 있을 때에는 전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밀 조사 결과 발자국이 가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고 대안적인 설명도 나온다. 이번에는 또 다른 용 신자가 화상 입은 손가락을 보이며 용이 뿜는 불길이 드물게 물리적 작용을 해서 데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용의 숨결 이외에도 손가락을 태우는 다른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결정적인 물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용 신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든 말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접근법은 용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일단 부정하고 장래에 물리적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겉보기에 제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똑같은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다.[3]


3. 상세[편집]


음모론이나 종교 등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다룬 비유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음모론자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음모론이 진짜라는 증거가 없다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반대로 그게 가짜라는 증거도 없지 않느냐는 반박을 해 왔다. 이를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즉 어떤 이론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 거짓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4]

하지만 음모론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동일한 논리가 반대 방향으로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UFO가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UFO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듯이, UFO가 없다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UFO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칼 세이건은 '보이지 않는 용'을 예시로 들어서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비판했다. 보이지 않는 용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반대로 없다는 증거도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은 있다나 없다 중 한 쪽을 증거도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용의 가설은 잠시 거부한 채 미래의 물리적인 자료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는 것.

세이건은 내 차고 안에 용이 살고 있다는 주장은 결국 나의 독단을 증거 없이 믿으라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진중권 교수는 신은 안 믿는 사람에겐 존재론적으로 수퍼맨, 아이언맨과 크게 다르지 않은 허구에 불과하다며 성경을 들이대려거든 인간의 해석이 아니라 그분의 뜻임을 입증할 녹취를 따서 공증받아 오라고 했다. 결국 세이건이나 진중권은 대놓고 '없다'고 하지 않고 불가지론적 자세를 취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다른 과학 이론과 대등하게 취급하진 않고 드래곤이나 슈퍼맨과 같은 취급하며 사실상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개신교 교인들이 (특히 무신론자를 상대로)전도 활동을 할 때 파스칼의 기독교 변증론을 내세워 '경우의 수'로서 믿는게 낫다는 논리를 들기도 한다. 없으면 믿든 안 믿든 쌤쌤이고, 있으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므로 믿는 게 이득이란 논리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다른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그들이 믿지 않는 존재인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나 '내 차고 안의 용'도 없으면 쌤쌤이고 있으면 좋으므로 믿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논리는 심지어 도덕적이지도 못하다. 신을 믿는다면 진심으로 믿어야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식으로 신 앞에서 게임을 하며 계산하고 믿는 것을 '신앙'으로 부른다면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다. 신학적으로 바람직한 것도 아닌데,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으로 합리적인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믿어라 그래야 내가 천국가지'라고 전도하는 짓은 게르만족에게 포교하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도 안했다.

그나마도 이 세상에 종교가 딱 하나라면야 뭐 믿어서 손해보는 것도 아닌데 믿는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너무 많으니 문제다. 그들이 믿지 않는 종교들과 다른 신에도 적용이 가능하기에 다른 종교들도 믿어야 이득이란 결론이 나온다. 모든 종교 다 믿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유일신'을 표방한 종교들도 있고 교리가 상충되는 부분들이 많아 다 믿으려면 충돌이 난다. 또 단순히 믿고 끝이라면야 손해가 아닐지 몰라도, 해당 종교에 꽤 돈과 시간, 수고를 들여야 하는 종교라면 '신이 없는 경우' 손해가 된다. 일례로 고려 때 부처의 힘을 빌어 고려를 지키겠다며 국력을 긁어모아 팔만대장경 건립에 쏟아부었는데, 그런데 삽질할 에너지를 아껴 민생이나 국방에 투자하는 게 기회비용 면에서 더 나았을 것이다. 또 히잡을 꼭 쓰고 다니며 기도와 의식에 정성을 들이고 여러모로 자유의 제약을 받는 이슬람 여성들은 만약 신이 없다면 헛고생을 하는 셈인데 손해가 적지 않다.

칼 세이건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가 분명 외계인 또는 신을 '느끼고' 있는데 그까짓 증거가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자신의 생각이 그것을 끌어왔기 때문이라며 원하는 걸 상상하라는 "끌어당김 법칙"-더 시크릿이라는 것까지 고안해낸다. 하지만 임신을 하는 상상을 하면 실제로 임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임신이 될 뿐이다. 원래 믿는대로 느껴지고 몸이 반응하므로 정신승리하면 온 몸에 승리의 전율과 쾌감이 느껴지지만 그냥 행복회로라고 비하될 정도로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에 의한 위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의처증에 걸릴 정도로 아내를 의심하면 정말 바람피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뇌내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망의 실현을 상상하는 맹목적인 심상화는 진통제처럼 정신적 고통은 가라앉혀주니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 중 하나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가 학계서 논의된 원문의 진의와는 다르게 자주 인용될 지경.[5] 진통제를 남용하면 통증이 없으니 모든 게 다 해결된 것 같지만 단지 느끼지만 못할 뿐이다. 일단 통증은 적어져서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으며 자신의 위안을 위해 신을 끌어당기는 비이성적 현실도피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의 예시들은 논점에서 벗어난다. 먼저 과학은 몰가치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다. 만일 과학이 당위적이고 특수한 영역을 다루는 순간 그것은 인문학이나 사회학이 되는 것이다. 용의 존재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사실 판단이므로 세이건의 주장에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이나 문화, 신앙에 관한 예시는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전제되는 것이므로 과학의 영역이 개입될 수 없으며, 과학의 영역에 개입할 수도 없다. 옳고 그름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되 참과 거짓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이건이 말하는 요지 또한 상대적 영역인 종교가 절대적 영역인 과학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예시는 그러한 두 영역을 혼동하였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여부만 다루면 되지만 개인적 삶에 대한 태도, 그러니까 당위적이고 주관적인 영역까지 침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과 상충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위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위의 예시는 부적절하다. 정신적 고통의 해소는 인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도 이익과 손해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예시들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직접적인 이익과 손해만 집중하여 정작 그 본질을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 제작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고, 히잡을 쓰는 전통을 따름으로서 사회적 규범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방어기제는 역설적으로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능이다. 당위적 관점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함부로 평가할 것이 못 된다. 이에 대해 단정적인 어투로 평가하는 태도는 신앙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 또한 세이건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위의 예시는 세이건의 생각과 무관하며, 역설적으로 그가 경계하는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세이건은 '내 차고 안의 용'에 대한 현명한 접근법은 멀쩡한 사람들이 똑같이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삼인성호'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세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또 '개인의 망상은 정신병, 다수의 망상은 종교(내지는 풍습)'이란 말도 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마을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자개 저택의 비밀(SBS 공식 요약) 편에서 칼 세이건이 문제 제기한 '멀쩡한 사람들이 똑같이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분석했다. 어머니야 피해망상이라고 쳐도, 문제는 멀쩡한 아들과 딸마저도 엄마의 피해망상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가 설명하길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더라도 백사람 이백사람이 이야기할수록 그 소문의 힘은 커지며 셋이서 동일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어머니를 해치려고 한다는 생각에 같이 몰입하게 되는 일종의 소규모 '군중 심리'라고 한다. 특히 가족 간의 유대관계가 강할 수록 쉽게 일어난다고 하니, 하물며 다른 올바른 정보를 접할 수 없는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미신'을 믿고 자라면 세뇌될 수 있다. 엄마의 망상을 부정하면 엄마가 슬퍼하니까 동조했듯이, 부모가 믿는 풍습이나 미신, 종교를 따라 참여해주면 부모가 좋아하니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각인되니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린 시절 '각인'은 세살버릇 여든간다는 속담처럼 큰 영향을 끼친다.

과학자들조차 종종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고 마는 이유가 바로 믿는대로 느껴지는 심리 때문이다. 한편 '만물XX설' '이게 다 XXX 때문이다'처럼 '신내림'이라는 편향에 빠진 사람은 안 좋은 일을 다 신내림과 연관지어 해석하는데, 90년대 미신조장 논란으로 폐지되었던 MBC '이야기 속으로'의 클리셰도 '편향'으로 해석된다. 중고를 샀다가, 혹은 음침한 장소에 갔다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느니, 모든 걸 다 자신이 믿는 것과 연결지으면 실제 그렇게 느껴진다. 풍수지리에 푹 빠진 사람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터가 안 좋다는 둥 '풍수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사주나 삼재 등 '운명론적 세계관'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녀가 불교를 믿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상담한 부모에게 다른 설명을 해줘도 씨알도 안 먹히는데[6], 아이러니하게도 신내림 일화 중에는 기독교 집안에서 신내림을 거부하니 안 좋은 일이 일어나다가 신내림을 받은 뒤에야 좋아졌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말이 씨가 된다'고, '안 좋은 일'이란 것도 '꿈보다 해몽'처럼 해석하기 나름인지라 이런 무속적인 확신에 굳게 빠져버린 종교인들은 설사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신이 나에게 뭔가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마음대로 결단해버리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현령비현령)인 셈.

이런 '편향'심리를 다룬 우화도 있다. 어느 아저씨가 도끼를 잃어버린 뒤 옆집 아이를 의심했더니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럽게 느껴져 점점 더 심증이 확증으로 변해갔는데, 알고 보니 다른 곳에 두고 까먹었던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벗겨진 뒤 아이를 다시 보니 전혀 의심스럽지 않더라[7]는 이런 편향의 심리로 인해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온갖 미신과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으며, 그래서 법원에서는 심증을 배제한 채 철저히 객관적 증거로만 판결한다. 제아무리 판사라도 용의자가 범인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향에 빠질 수 있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이 자신이 믿고 싶은 음모론 유튜브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만약 '용'이 실제 있다고 믿고, 이 용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확증편향에 빠지면 '신내림' 환자와 똑같은 증세가 나타날 것이다. 몸이 이유 없이 여기저기 아픈 '신병'은 신이 원인이라기보다 보통 확증편향으로 인한 신경쇠약, 피해망상이 원인이다. 그것이 초자연적인 계시라는 의견을 지키기 위해 진찰 결과나 적절한 치료법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용을 차고 속에 숨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과학적(철학적 논증과 수학적 정리를 포함한다) 근거가 없는 미신도 때에 따라서는 요긴하게 필요할 때가 있긴 하여 도구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냈고 긍정적인 역할도 있으나, 남용하면 부작용이 있고 '과유불급'이다. 이슬람 과격파들은 그런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2020년에도 프랑스에서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한 중학교 교사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이슬람인에게 참수당했는데, 그 광신도들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자각이 없고 쿠란대로 처벌했기 때문에용서와 전도가 먼저라는 내용은 쏙 빼고 '정의실현'이라고 믿고 있다는데 이는 8세기의 정통 이슬람 율법주의자가 봤다면 기겁을 했을 일이다. 이슬람 아버지가 직장 다니는 딸을 못마땅히 여겨 사람을 시켜 딸의 두 눈을 칼로 찔러 멀게 해버린 사건도 보도되었는데 이들은 다 자기 딴에는 '신의 믿음으로' 정의라고 믿고 그리했다. 이처럼 도덕으로, 율법으로 정당화 되지 못하는 일들이 어느새 무슬림들 사이 새 교리로 등장하여 세계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차고 속의 용을 지키려고만 하는 문제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과학적인 검증을 거부하는 순도 100% 광신은 개선할 수가 없으며 오직 이 '근거 없는 믿음'에 의존하는 광신도들로 용의 추종자들이 생겨나면 이들은 논리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쪽수를 믿고 상대(온건 무슬림, 자유주의 신학파가 될 수 있다)를 아예 '제거'해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진짜로 신이 와서 천국의 왕국을 열지 않는 이상 종교는 어떻게든 맛이 가버릴 일이 많기에 이런 부작용을 경계하는 현대 민주국가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세워, 믿음은 자유지만 정치 쪽에 개입은 하지 말라고 타협했다. 철저히 정치나 법 등 국가 시스템을 움직이려면 '증거' 위주로만 작동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칼 세이건이 '내 차고 안의 용'의 개념을 소개할 적의 미국의 상황은 반지성주의, UFO, 초능력, 신복음주의등이 '신과학'이니 '뉴에이지'니 하는 포장지로 바뀌어 한창 뜨고 있었고, 기독교 근본주의가 진화론을 부정하며 과학 교과서에 창조설을 넣으려고 지속적으로 로비하는 등 또다시 성서무오설이 커지며 개입을 시도했었다. 대중과학자인 세이건은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계몽서적을 출간했고, '내 차고 안의 용'도 전혀 어려운 과학 용어 없이 쉽게 비유적으로 근거 없는 믿음의 모순을 설명해주었다.


4. 차고 안에 용이 없다고 확신하면 독단인가?[편집]



4.1. 그렇다[편집]


반대로 말하자면 저 차고 안에 용이 없다는 것도 독단을 그대로 믿으라고 하긴 마찬가지다. 저 수많은 Ad Hoc[8]들 모두가 전부 진실이라는 것이 거짓이라고 100% 확신할 수 있는가? Ad Hoc을 모두 제외한다고 해보자. 당신은 당신 화장실의 변기가 당신이 나무위키를 보고 있는 지금도 실존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버트런드 러셀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간의 사이에 대한 한 일화가 있다. 두 사람 간에 러셀의 방 안에 코끼리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토론이 일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방 안에 코끼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고, 러셀은 온갖 다앙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굽히지 못했다. 결국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선 무신론이나 유신론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물론 용이 없다는 것이 더 개연적이기는 하나, "개연적"임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용이 없음이 개연적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Ad Hoc이 아닌가? 없다는 쪽의 임시변통 가설이 더 적다는 반론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가설의 많고 적음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가설은 당연히 분할가능하다.

가정하여서 만약에 구분하여 확답을 주는 절대자가 있다면 구분이 가능했겠지만 인간과 같이 해석적인 판단 내에서는 절대적인 확증 없이 모두 다 선택의 연속일 뿐이게 된다. 이건 특정 감각을 넘어서 확증에 대한 영역이다. 한정적인 것을 결정해야할 상황이라면 특정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결과를 얻는 게 가능하겠지만, 결코 무언가를 확증해줄 수 있는 절대자가 존재하는 지 알 수 없고, 특정한 관찰자인 자신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확증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어떠한 것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선택과 해석의 일부이기 때문에 특정한 확신이 아닌 절대적인 확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어떠한 논제에 대해서도 선택 공리처럼 특정한 관찰자내에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문제가 될 수 있고, 과연 정말 확증이 아니고 선택인가?하는 문제 마저도 선택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확신이 존재하는 지 모르며, 있다고 하다라도 특정한 관찰자의 확신이 정확하다는 확증도 없고, 더군다나 어떠한 관찰로도 이에 대한 확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현재는 경험에 의한 자기 확신을 모두와 합의하고 그 합의를 개선해서 나아간다는 부분이 관찰 내에서 조금 더 실질적인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 뿐이지 이에 대해서 더 큰 의미를 갖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관찰자는 결국 관찰 자체를 부정하면 아무것도 확증할 수 없게 되고, 사실상 관찰 자체에 대한 확증은 관찰로써 확증될 수가 없으니 관찰자는 확증에 대해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4.2. 아니다[편집]


한 예로 "99.9999% 이상"…구미 3세 여아와 친모 석씨 친자 확률 사건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오차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라며 확신했고 법원은 이를 증거로 채택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없으니 못믿겠다면서 정작 관심법을 믿는다면 그냥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100%에 가까운 확률을 신뢰하며, 그렇기 때문에 확률과 통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기예보에서 나타나는 강수확률이 80% 정도라면 사람들은 우산을 챙긴다. 100% 확신을 하지는 않아도 80%만큼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100%가 아니므로 점쟁이가 점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은 일종의 흑백논리이다. '점쟁이 저 죽을 날 모른다'는 속담처럼 미래 예측에 100%란 없기에 '100%(확신)에 가까운' 확률일수록 신뢰도가 높아진다. 만약 누군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100% 확신할 수 있냐며, 또 일기예보는 100% 확신할 수 있는 거냐면서 지구멸망설과 일기예보를 거기서 거기라고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궤변론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내일 지구 멸망할 확률이 0%는 아닐지라도 그 정도면 무시해도 될 만한 확률인지라 대개 신경도 안쓰나 일기예보는 많이들 신경쓰는데, '확률의 차이'다.

내 차고 안에 용이 존재할 확률이나 이순신 장군이 영화 '외계+인 1부'처럼 신분을 숨긴 외계인이었을 확률이나 비슷한 수준인데, 누군가 당신이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정보를 100% 확신할 수 있냐면서 슬쩍 외계인설과 동급으로 둔다면? 이순신 장군이 외계인이었을 리 없다는 주장은 독단일까? 현실에서 외계인이 존재할 확률, 또 하필 그 외계인이 이순신 장군이었을 확률을 따져봤을 시에 비현실적인 확률이므로 그런거 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에 해당한다. 물론 학계 정설도 100%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외계인설을 믿는 것보단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학계 정설을 뒤엎을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 외계인설을 뒷받침하지 않는 이상 외계인설의 신뢰도는 학계 정설의 신뢰도와는 천지 차이다. 고유정 전 남편 살해 사건의 고유정이 무죄일 확률이 용이 존재할 확률보단 훨씬 현실적이나 법원은 유죄로 판결했고 언론과 대중들도 고유정을 범인으로 확신했다. 여러 증거를 취합해봤을 시에 그럴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100% 확률이 아니라고 피장파장이 아니다. 판사들이 판결내릴 때도, 감독들이 선수를 투입할 때도, 주식을 투자할 때도 확률에 따른다.

인터넷 게시판에 누군가 "우리 집에 애완견이 있다"는 글을 올렸다고 생각해보자. 다짜고짜 증거를 대라는 댓글보다는 귀엽겠다, 부럽다 등등의 의견이 달릴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가 있다고 올린다면 못 믿겠다는 댓글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나아가 "우리 집에 외계인(용)이 있다"는 글을 올린다면 그때부터 주작이니 관종이니 하며 거짓을 확신하는 댓글이 많이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네티즌들의 반응이 '독단'이 아닌 이유는 상식적인 확률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애완견이야 주변에 흔하니 애완견 키운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확률은 아니지만 코끼리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한국인은 보기 힘들고 나아가 외계인이나 용은 100% 없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없다고 봐도 무방할 확률이므로 애완견과는 달리 '인증샷'이란 증거가 없는 한 못 믿는 것이다. 자기 집 화장실의 변기가 나무위키를 보고 있는 지금도 실존한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인증샷' 올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인증샷도 없이 자기가 방 안에서 코끼리와 같이 껴안고 잔다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이는 독단이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말의 치아수 논쟁'이다. 어느 두 학자가 길을 가다 말을 보고 말의 치아수에 대해 논쟁이 붙었는데, 서로 각종 문헌을 근거로 논박했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두 학자의 토론을 듣고는 "그냥 말의 입을 벌려보면 되는거 아니냐?"고 촌철살인 한마디를 남겼다는 이야기다. 방 안에 코끼리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토론할 열정이라면,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보면 되는 거 아니냐는 반론을 할 수 있으며, 직접 코끼리를 눈으로 보기 전까진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간단하게 입증하면 될 것을 달변으로 무마시키는 것이 보이스피싱 등 사기꾼들의 수법이기에, 혓바닥이 길면 의심하라는 말도 있다. 가장 유명한 예시로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이 있다. 당시 모두가 연구팀에게 줄기세포가 있을 것이라 믿었으나, 결국 줄기세포는 없었다. 황우석은 화려한 언변술로 줄기세포의 존재를 주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줄기세포의 존재를 믿었으며, 급기야 줄기세포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죄악시되기까지 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줄기세포는 없었다. 줄기세포를 보여달라던 MBC PD수첩은 성난 여론에 의해 방송중단되기도 하였다. 황우석 사례는 백 사람의 믿음과 논변보다는 하나의 믿을만한 증거가 더욱 중요함을 보여준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천국이나 사후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종교는 증거가 없으니 그렇게 말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호킹 박사는 외계인이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진화한 생명체가 지구에만 존재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후세계야 실체 자체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으니 없다고 확신했지만, 우주의 실체 자체야 입증되었으니 이 넓은 우주에 외계인이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미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같은 논리로 이 광활한 지구에 수많은 부러진 나뭇가지 중에 요정이 부러뜨린게 하나도 없겠느냐며 믿기도 하지만,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진 외계인이나 요정이나 없다고 확신해도 무방할 확률일 수는 있다. 우주 역시 아직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 실제 최고의 우주물리학자로 인정받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정보는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하여 '팩트'처럼 알려졌었고, 당시 블랙홀에 누가 가서 직접 그런지 확인한 증거가 있냐는 의문엔 "니가 호킹보다 잘 알아?"라고 권위로 찍어 눌렀다. 하지만 호킹 스스로가 기존의 입장을 180도 수정,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정보는 방출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걸 문화일보에서는 '대학자의 용기있는 고백'이라고 칭송했는데, 누가 ‘말의 입을 벌리듯이’ 블랙홀에 직접 가서 확인해볼 수 없으므로, 호킹이 침묵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용기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호킹이 용기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다들 블랙홀에 대해 계속 잘못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아무리 과학이론이고 그 분야의 석학이라 해도 증거를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이론들의 치명적인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블랙홀은 다 빨아들인다고 했으니 그 말이 맞다고 확신하며 반대의견을 묵살하던 사람들은 호킹의 한마디로 독단으로 전락했다. 언론에서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고 고백한 호킹에게 '용기있다'고 칭송했는데, 그렇다면 용기없이 침묵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일반인들이 '줄기세포를 보여달라'고 하듯이 확실한 증거를 요구할 수 없는 이론들은 여전히 잘못 알려진 것도 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차고 안의 용은 미신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실체적인 증거를 보기 전까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이론이 아닌 것 같아서 틀렸다고 말했을 뿐인 호킹에게 굳이 거창하게 '용기있다'고 한 것은 과학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가 유명세와 돈 때문에 줄기세포를 조작하며 일반인이 쉽게 확인 가능한 것까지도 속였는데, 하물며 우주이론처럼 일반인들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유명세와 돈 때문에 더욱 조작의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다. 황우석이 줄기세포에 대해 과장했던 것도 그래야 정부와 언론,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우주에 대해 계속 연구하려면 우주에 대해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소재를 던져야 하고, 나아가 조작을 해도 일반인들이 확인하기 힘드므로, 실체적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론은 이론으로 간주해야 한다. 물론 이론과 미신은, 이론에는 최소한의 근거는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최고의 우주물리학자도 자신이 평생 주장해오던 블랙홀 이론을 하루아침에 뒤엎을 정도로, 우주라는 분야는 아직 상상이 더 많은 곳이다. 하물며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르게 살고 있다는 평행우주의 존재는 복잡한 수식 따위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실체적인 증거가 필요하므로, 과학이론으로 포장하고 있어도 아직은 괴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이 평행우주일 수도 있고, 가상의 매트릭스일 수도 있고, 부처님 손바닥일 수도 있으나, 증거가 없다면 괴담에 가깝다. 지금 우리가 보고 먹는 것이 다 외계인이 정교하게 신호로 조작하는 거 아니냐며 지구 시뮬레이션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장난기 많은 신이 '외계인이 인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고 인간들이 생각하도록' 장난쳐본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그 신은 어디서 온 것이며 그 신조차, 마치 인간이 가상 세계를 만들듯, 시뮬레이션일 확률은? 이렇듯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니 상상은 자유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소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논리와 이론으로 그럴듯하게 설명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증거가 없으면 소설이다. 과학이론이 포함돼있으면 좀 더 '정교한 소설'에 가까울 뿐이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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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2] 원문 Pseudoscience speaks to powerful emotional needs that science often leaves unfulfilled. It caters to fantasies about personal powers we lack and long for.[3]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과학, 어둠 속의 촛불』 (서울: (주)사이언스북스, 2022), 256-259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4] 보스턴 대학의 천문학자 파파기아니스 박사가 본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법칙이다. 파파기아니스 박사는 UFO의 존재를 굳게 믿어왔던 사람이었는데, 회의론자들이 UFO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자 지금까지 UFO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UFO가 없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며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을 고안했다.[5]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항목의 4.2 문단 참고. [6] 김제동은 아침마다 109배를 하며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108배가 아닌 109배인 이유가 어머니가 교회 권사라 108배 하면 죽인다고 해 109배 한다고 했더니 그건 괜찮다고 해서 그렇다고 한다(...).# 이 정도야 애교 수준인데, 가족간은 물론 부부간에도 '종교 갈등'으로 인해 연을 끊는 불상사도 적지 않다. 서로 상대방의 종교 때문에 재수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굳게 믿고, 이렇게 확증 편향에 빠져버리면 백약이 무효이다. 실제 '신내림'에 확증편향에 빠지면 다른 설명 씨알도 안 먹히고 그냥 본인이 믿는대로 신내림을 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배우자의 종교로 인해 불행이 닥친다고 굳게 믿는 사람에겐 다른 설득이 안 먹히기에, 배우자와 갈라서야만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7] 여씨춘추열자에 수록된 이야기이다.[8] 여기서 얘기하는 Ad Hoc은 차고 안의 용을 입증하라는 주장에 대해 '이 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 용의 불 또한 보이지 않으며 온도가 없다''그 용의 발자국은 너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 내용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