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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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병세.jpg
본명
남동환(南東煥)

명부(明夫)
본관
영양 남씨[1]
출생
1898년 12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안망실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2리 안망실마을)[2]
사망
1956년 5월 24일[3]
경상북도 안동군
(현 경상북도 안동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남병세는 1898년 12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안망실(현 안동시 일직면 망호2리 안망실마을)에서 아버지 남상호(南相滈)[4]와 어머니 의성 김씨 김면휘(金冕輝)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망호2리 입향조 남팔개(南八凱)의 16대손이다.

그는 1925년 2월 안동군에서 경북청년대회 준비위원을 역임했고, 8월에는 안동청년연맹 심사위원을 지내며 안동 일대의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봄, 그는 고향 망호동에서 김남수의 권유로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안동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하성경(河成卿)의 집에서 안상길(安相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안동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또한 안동의 사상단체인 화성회(火星會) 간부를 지내면서, 예천시민과 형평사원 간의 분쟁 조사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8월에는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해 연구부 총무간사가 되었고, 1928년 안동지회 정기대회에서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좌익 활동으로 인해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0년 11월 14일 한 차례 구류갱신결정 처분을 받았고#,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이후 고향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6년 5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남병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수의공파(修義公派) 18대손 환(煥) 항렬. 영양 남씨 26세.[2] 인근의 송리리와 함께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3] 남씨대동보 6권 밀직공파(영양 본관)-수의공파 323쪽에는 1955년 7월 24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초명 남상렬(南相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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