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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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닝셔츠의 줄임말 러닝이 일본식으로 변형된 것
2. 대한민국 정치계 비하어
2.1. 유래
2.2. 해당 세력에 대한 변호
2.3. 해당 세력에 대한 비판


1. 러닝셔츠의 줄임말 러닝이 일본식으로 변형된 것[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러닝셔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 대한민국 정치계 비하어[편집]


민주당계 정당동교동계 및 여타 호남기반 비노계호남계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호남 고령층을 비하하는 멸칭. 이들의 공통적 코드는 노무현, 열린우리당에 대한 반대였다.[1] 단체로써는 남프라이즈, 민주연합청년동지회 등을 칭할 수 있고, 지역의 경우는 평화민주당 시절부터 김대중계 정치인들의 자금을 조달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 중의 일부는 전국구 공천을 받아서 국회의원이 되기도 한다.


2.1. 유래[편집]


이 단어가 탄생한 데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극적인 승리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새천년민주당은 2003년 9월 4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친노를 중심으로 당원이 모든 공직선거 후보를 뽑는 상향식 공천제, 그리고 당의 해체와 사회자유주의 성향을 강령으로 하는 재창당에 대해서 표결하기로 했다. 간단히 말해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기존 민주당 사수파와 친노를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파로 나뉜 것이다. 이 즈음 동교동계 성향의 당원 이모 씨가 민소매러닝 차림으로 민주당 당사에 난입해 "이 개새끼. 니들이 뭔데 우리를 무시하고 지랄이야"라고 하면서 친노 최고위원을 폭행하는 장면이 뉴스에 보도되었고, 이에 민주당의 호남 지역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인터넷 사이트 서프라이즈에서 호남계 반노 인사들을 '난닝구'라고 비꼬았는데 이 말은 민주당 재창당에 반대했던 호남인들에 대한 멸칭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친노 계열은 결국 당에서 나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으며,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갈등은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위해서 한나라당과 일시적인 동맹관계도 서슴지도 않았을[2] 정도로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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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진이다.[3][4]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김대중 대통령 직계 가신에 해당하는 정치인들, 이른바 동교동계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은 고령 등을 이유로 현역에서 물러난 상태고, 김대중 대통령 시대부터 활동한 정치인들 중 박지원 국민의당 최고위원을 제외하면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은 전무하다. 2010년대까지 활동하던 DJ 정권시절 비서실장인 한광옥 전 의원이 공천 관련으로 민주통합당에 반발해서 정통민주당을 창당,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기를 노려봤지만 민주통합당과 팀킬[5]까지 발생하는 결과를 낳으며 정당지지율 0.2%의 참혹한 성적으로 해산과정을 밟았다.[6]

동교동계의 주요 인사중 한광옥김경재는 아예 한술 더떠 새누리당으로 이적했다.[7][8] 이에 대해서는 "파벌 논쟁에 빠져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꿔버린 격"이라는 견해가 많다.[9] 진보계열 내부에서 더 많이 쓰이며, 이후 거의 구시대의 용어가 되었다. 반대어로는 난닝구 진영(?)쪽에서 만들어낸 빽바지가 있다. 근데 잘 안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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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4월 29일[10] 흰색 면바지를 입고 국회에 등원한 유시민 전 의원의 모습에서 빽바지라는 멸칭이 유래됐다.[11][12] 빽바지는 문재인을 비롯해 친노진영, 친노와 친한 386 수도권 의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호남난닝구vs친노빽바지

이쪽 성향의 인터넷 게시판은 서프라이즈의 친노성향에 반대하며 호남 지역주의자들이 갈려나간 남프라이즈가 유명했지만[13] 이후 아크로 정도가 남아 유지되고 있었는데 친노들이 호남의 반분열주의자들을 대놓고 적대하듯 이들도 당연히 반문 성향을 유지하며[14], 경상도의 '영남패권주의'를 대놓고 적대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아크로조차도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2.2. 해당 세력에 대한 변호[편집]


옹호 입장에서 변호하자면, 난닝구라는 표현은 호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특정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친노계열의 반대편을 지칭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주장이다.

원래 있던 당을 깬 게 친노세력인 만큼 친노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만한 명분이 필요했고 그래서 자신들을 건전한 민주개혁세력으로 포지셔닝하는 동시에 분당반대세력을 호남 지역주의자로 몰아붙였으며 이 과정에서 동원된 게 난닝구라는 비하용어인 것이다. 민주당으로부터 열린우리당이 분당하는 것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문제에서 찬성 측이 반대 측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로 그 비하의 주된 레퍼토리가 호남 지역주의자라는 조롱인 만큼, 난닝구와 호남 비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권후보 선정 이후, 친노 계층은 끊임없이 김대중 전 대통령 계열을 몰살시키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당시의 동교동과 친노는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당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경선을 통과한 후보를 후단협이란 이름으로 흔들었다는 반론이 있다.

노무현의 극적인 경선 통과 과정 역시 그 어떤 동교동계의 지원 없이 순전히 노무현의 개인기로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원인을 보지 않고 내부의 갈등을 단지 친노의 권력욕으로 매도하는건 온당치 않다. 예를 들면 집권 직후 노무현 대통령이 행한 일은 한나라당이 아닌 김대중 계열에 대한 공격인 대북송금 특검이었다.

전여옥조차 요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할 줄은 몰랐다는 대북특검을 김대중 계열을 포함하여 비노 계열을 공격하기 위해 수용했다고 평가된다. 왜냐하면 대북특검의 근거가 대북교류 협력법인데, 이 법은 남북 대치의 특수 상황에서 북한으로 자금 이동을 막기 위한 정치적 법으로, 이 법대로 하자면 이후락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인들이 협약을 위해 북한에 들어간 것도 위법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 차원에서 행해진 위법은 눈감아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국내의 리버럴 계열뿐만 아니라 한나라당조차도 실제로 대북특검을 수용할 줄은 몰랐다고 반응한 것이다.#

그야말로 노무현이 스스로 말했던 정체성#마저 내다버린 법이었다. 또 당시가 한나라당에 정책 양보도 하면서 상생정치, 소통정치를 하려고 그래도 노력했던 임기 초반[15]이었기도 하고.


2.3. 해당 세력에 대한 비판[편집]


난닝구라는 표현자체가 비하적 용법이고 이는 자제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난닝구라 불리는 과거 동교동계 성향의 인물들과 구 새천년민주당계 인사들의 성향을 보면 옹호될 수 없는 여지가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난닝구로 대표되는 호남의 토호 세력은 중앙 정권의 창출,계승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이익,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선거의 공천이 더 큰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을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권교체'라는 단어도 이들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중앙정치의 논리와 명분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구심점 없는 지방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난닝구의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은 71년 대통령 선거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치구도화된 영호남 지역갈등으로 인해 산업화 정책에 소외되고,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더욱더 제대로 된 국가적 사업도 받지 못한 소외감과 피해의식을 대변해줄 유일한 중앙정치인이었던 김대중 대통령과 그 가신들을 따라오거나, 그 이전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기반이었던 호남의 지역토호들이나 지지세력을 이끌던 일반인들이기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지역에서는 그럭저럭 기침좀 하고 입지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중앙에는 전혀 정치 연줄도 생존력도 없는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평화민주당이나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에 쌈짓돈을 모아 정치자금으로 기부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호남 기반 정당을 유지해왔던 소액주주들로, 그중 힘이 있는 사람들이 공천을 받아 금뱃지를 달긴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다니면서 중앙정치의 생존을 경험한 동교동계 의원들같은 정치감각이나 정치적 단결력같은 것은 전무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 이후 자신의 지역기반 후계를 남기지 않은채 그 자산을 전부 노무현 후보에게 넘기는 바람에 이 사람들은 졸지에 정치적 구심점을 잃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갑자기 그동안 관심도 없었던 경상도 출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다시 따르는데 거부반응을 보였고, 노무현 본인도 김대중 대통령의 방식대로 지역 유지들을 일일이 통제하면서 기반을 구축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에 당에서 방치되었고, 결국 이런 돌발적이고 정치와는 거리가 먼 감정적인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이는 난닝구만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을 따르던 가신들조차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내각제를 했다면 죽을때까지 지역의 국회의원직을 차지하고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겠지만, 단임제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계속 국회의원만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했으니 그들은 사실상 미래없는 정치인이 되었고, 그들에게도 지역기반 정치에 관심없던 노무현은 따를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치력을 갖춘 동교동계 인사중 김경재나 한광옥은 자기 살길을 찾아 아예 당적을 새누리당으로 바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했으며, 이들의 성향은 지역을 떠나 정치성향으로 보더라도 새로운 정부에 역할을 하기보단 자기 지역의 기득권을 지키는게 더 중요했으며, 최소한의 정당 내부 개혁에도 부정적이며, 호남 지역구에서 출마할때 공천 잡음이 일어나기 일쑤인데다가 제대로 된 정책 공약보다는 안일한 지역주의에만 기대어 당선되기만을 바라는 문제점 등[16] 비판받을 구석이 많은것은 부정 할 수 없다. 사람 사는 곳에 어디서든 일어나는 소지역주의와 이권정치를 벗어나기엔 아직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국민 의식이 성숙했다고 보기 어려웠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으로 난닝구들이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국민의당으로 지역당째로 이적하고 호남 의석을 대부분 석권하면서 더더욱 전국정당화에는 관심도 없이 호남의 고립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것의 끝판왕이 바른미래당 합당 당시 호남계가 집단 탈당하여 결성한 민주평화당과 여기서 다시 갈라진 대안신당. 결국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민생당으로 뭉치긴 했지만, 더불어민주당과의 호남 대결에서 참패[17]하면서 이들은 거의 궤멸되었다.[18]

국민의당의 분당 이후 19대 대선, 7대 지선, 21대 총선 세번의 총선동안 민주당이 과거 겪었던 큰 계파갈등이나 분열 없이 유기적인 모습으로 무난히 3연승한데다, 분당된 국민의당 세력이 적은 세력에서도 계파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는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난닝구' 세력이 계파갈등과 분열의 진앙이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3.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난닝구(인터넷 방송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그래서 일각에서는 '호남 출신으로서 지역주의에 기생하여 민주당에 있던 정치꾼들이지, 만약 영남 출신이었다면 진작에 한나라당으로 가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놈들'이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2]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대선 빚조차 민주당에 떠넘기고 딴살림을 차렸다. 민주당은 그 대선 빚때문에 정당보조금과 당사 비품이 압류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정당보조금을 압류한 사람은 열린우리당 출신으로 국회의장을 했던 김원기의 친동생으로 대선홍보물 관련 비용이었다. #)[3] 두 번째 사진은 이 사람이 다시 사고를 친 것. 2011년 12월 11일 친노가 주축인 시민통합당민주당의 (재)통합 결의를 위한 전당대회에 참석한 이씨는 대의원 확인을 위한 지문날인에 '항의'하며 여성 당직자의 뺨을 때렸다. 정작 이씨는 이 시점에서 대의원은 커녕 민주당 당원도 아니었다. 당연히 지문날인에서 막힐 것이기에 격분하여 저지른 짓. 이때는 겉옷을 빼놓지 않고 잘 입었다.[4] 이씨는 이후 국민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다. 국민의당의 창당 배경이 친노가 주도하는 당에 불만을 품은 구 동교동계, 호남 세력과 안철수 세력의 연합임을 고려하면 이씨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민의당은 창당 직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뤘는데, 호남에서 몰표를 받으며 광주/전북/전남 지역구 28석 중 23석을 차지했다.[5] 그냥 팀킬이 아니라 여소야대여대야소로 바꾼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다. 정통민주당 항목 참조.[6] 이에 앞서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전에도 한화갑을 중심으로 평화민주당이 창당되었으나, 이때도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고 결국 한화갑마저 이탈하여 총선을 앞두고 국민행복당에 흡수되어 소멸된 바 있다.[7] 한화갑도 이 두 사람들과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를 지지했으나, 실제 입당까지는 하지 않았다.[8] 이후에도 한광옥은 박근혜 정부 말기 때 마지막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하였으며, 김경재는 한국자유총연맹 회장을 맡는 등 극우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나마 한광옥은 박근혜 탄핵 이후 비교적 운신을 삼가고 있으나, 김경재는 전광훈사랑제일교회 세력, 즉 국민혁명당과 손을 잡으면서 강경한 기독교 우파가 되고 말았다. 빤스와 난닝구의 만남으로 든든한 속옷 조합이 마침내 완성됐다.[9] 반대로 친노계의 중요인사 중의 한 명이었던 조경태는 파벌싸움에 밀려서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다만 조경태는 원래 보수 성향이 있었던 편.[10] 이 날은 200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선서가 있었다.[11]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 유시민이였는데, 난닝구 쪽으로 부터 타깃이 되었다.[12] 여담으로 2020년 류호정 의원이 국회에 원피스를 입고 등원하는 비슷한 에피소드도 있었다.[13] 2007년 열린우리당 해체 시절 잔류민주당은 '동'프라이즈, 잔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중립은 '중'프라이즈, 친노이지만 반서영석은 노하우 21로..분리되었다. '북'프라이즈는 없었다... 하기야 그거 하면 코렁탕 먹는데[14] 이들 사이에서 문재인은 주로 '문국쌍'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15]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의 압도적 반대(단 한명을 제외한 모든 국무위원들이 반대했다.)를 무시하고 최초로 서명한 법이다.[16] 지방선거에서 이런 문제점이 드러난다.[17] 심지어 박지원까지도 떨어졌다.[18] 대다수의 난닝구는 사실상 정계은퇴를 한 상태이며, 정치판에서 아직도 떠나지 못한 일부가 더불어민주당에 남아있지만 영향력은 극도로 미미하다. 이들은 반이낙연·친이재명파로부터 '수박'이라는 조롱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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