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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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2호

3호

4호
화양동 느티나무
강감찬 생가 터(낙성대)
세검정 터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호
강감찬 생가 터(낙성대)
姜邯贊 生家 址(落星垈)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로 77
(봉천동 228)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수량 / 면적
토지 796㎡
지정연도
1974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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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에 있는 사당 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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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유허비[1]

1. 개요
2. 교통, 지리
3. 낙성대 삼층석탑
4. 고려 강감찬 장군 사적비
5. 번외편: 낙성대학교



1. 개요[편집]


고려-거란 전쟁의 마지막을 고려의 승리로 장식해준 구국영웅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명신 인헌공 강감찬이 탄생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이다.[2][3]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다.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도 있었는데,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집을 가리켜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개경 낙성대는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서울의 낙성대와는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다만 이 유적은 고려의 유적이 아니다.

내부는 강감찬의 사당인 안국사와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원 가운데에 강감찬 동상이 있다. 예전과는 달리 재정비되어 꽤나 갈만한 곳으로 변했다. 낙성대로 올라가는 큰 길에는 강감찬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2. 교통, 지리[편집]


수도권 전철
낙성대(강감찬)역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지하 1928
(舊 봉천동 1693-39)

근처 역으로 낙성대역이 있지만, 사실상 거리는 꽤나 멀다. 낙성대역에서 낙성대를 가려면 조금 걸어가야 하는 편. 처음 찾아가는 경우 헤멜 수도 있다.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4번출구로 나와서 서울 버스 관악02를 타고 쭉 가는 것. 가다보면 낙성대공원(및 영어마을. 2010년까지는 주민체육센터라는 말이 나왔지만, 영어마을이 신설되고 멘트가 바뀌었다)이 나오는데, 거기서 내리면 된다.

모두 잘 알다시피 근처에 서울대학교가 존재한다. 그래서 서울대학교가 대한민국 최고 명문 대학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별이 떨어졌다는 구국영웅 생가 옆에 자리 잡은 덕에 장군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서울대학교의 관악캠퍼스 이전은 1975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고 이전에는 서울 여기저기에 단과대학들이 산발된 형태로 있었으니 나중에 붙여진 의미 부여에 가깝다. 전신인 경성제대 시절엔 조선 유일대학으로써 전문학교들이랑 엮이는 것 자체가 수치인 수준이었다. 오히려 현재가 약해진 것.

2020년 4월 3일부터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었다.

참고로 이곳을 관할하는 행정동 이름도 낙성대동인데, 이는 2008년에 봉천7동의 이름이 이 일대의 이름을 따서 변경되어 그런 것이다.


3. 낙성대 삼층석탑[편집]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2호[4]

4호

5호
봉황각
낙성대 삼층석탑
정업원 터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
낙성대 삼층석탑
落星垈 三層石塔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로 77(봉천동)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 / 면적
석탑 1基, 토지 480.6㎡
지정연도
1972년 5월 25일
관리자
(관리단체)

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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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3층 석탑


강감찬거란을 막은 업적을 사람들이 기리기 위해 강감찬의 집터인 낙성대에 쌓은 석탑이다. 13세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는 낙성대에 있던 것을 1973년 ~ 1974년에 낙성대공원을 만들면서 공원 내 안국사로 옮겨왔다.


4. 고려 강감찬 장군 사적비[편집]


사적비가 삼층석탑 맞은 편에 있다. 사적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 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태조의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때는 바야흐로 중원 대륙 동몽고 지대에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 12년, 서기 993년에 처음 침구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 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다시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칩입하므로 고려에서도 강조 장군이 30만 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때에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는 본시 문관 출신으로서, 학문과 지략이 탁월한 위에 문무를 겸비한 이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오다가, 현종 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에 재상을 겸한 채 서경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섯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 10만 명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 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2천 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막았다가, 적들이 오자 갑자기 물을 터서 적군을 크게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다시 다른 길로 송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가며 귀성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때는 3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이야말로 고려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 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1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런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장군은 73세에 조정에서 물러나 성 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은거하며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했으며, 현종 22년, 서기 1031년 8월에 세상을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9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 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

서기 1974년 6월 10일

노산 이은장 짓고

일중 김충현 쓰고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세움



5. 번외편: 낙성대학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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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실제로 떨어졌다 알려진 곳에는 비석 하나 있는 '유적지'가 있다.[3] 垈(터 대)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이다.[4] 3호 '양관'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1977년 11월 22일에 해지한 후 사적 제 253호로 승격시켰고 명칭도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