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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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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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북한군의 남침
6월
폭풍 작전

· 옹진반도 전투

· 개성-문산 전투

· 고랑포 전투

· 춘천-홍천 전투

· 강릉 전투

· 대한해협 해전

· 옥계 전투

· 봉일천 전투

· 김포반도 전투

· 동두천 전투

· 포천 전투

· 의정부 전투

· 내촌-태릉 전투

· 수원 비행장 전투

· 한강 인도교 폭파 · 한강 방어선 전투


7월
주문진항 해전

· 동락리 전투

· 오산 전투

· 평택 전투

· 진천 전투

· 천안 전투

· 전의-조치원 전투

· 청주 전투

· 금강 방어선 전투(공주-대평리 전투)

· 장항-군산-이리 전투

· 대전 전투


8월
청송 전투

· 낙동강 방어선 전투

(안동·의성전투

· 마산 전투

·다부동 전투

· 창녕·영산전투

· 안강·기계 ~ 영천·신녕 전투

· 포항 전투

· 포항 철수작전

· 통영상륙작전

)
유엔군의 반격
9월
장사 상륙작전

· 인천 상륙작전

· 9.28 서울 수복


10월
평양 탈환작전

· 초산 전투


중공군 개입
10월
중공군 1차 공세(10/25)


11월
개천-비호산 전투

· 중공군 2차 공세(11/25)

· 청천강 전투

· 장진호 전투


12월
평양 철수

· 흥남 철수작전

· 중공군 3차 공세(12/31)


1951년
1월
1.4 후퇴

· 울프하운드 작전

· 유엔군 1차 반격(1/25)

· 선더볼트 작전

· 원산 포위전

· 금양장리 전투

· 라운드업 작전


2월
중공군 4차 공세(2/11)

· 횡성 전투

· 지평리 전투

· 유엔군 2차 반격(2/20)

· 전략도서 확보 작전

· 원산 포위전

· 킬러 작전


3월
리퍼 작전

· 커리지어스 작전

· 토마호크 작전


4월
러기드 작전

· 중공군 5차 공세(4/22)

· 매봉·한석산 전투

· 사창리 전투

· 설마리 전투

· 파평산 전투

· 가평 전투


5월
설악산 전투

· 중공군 6차 공세(5/16)

· 현리 전투

· 용문산 전투

· 한계 전투

· 유엔군 3차 반격(5/23)

· 평양 대공습


전선 교착
6·7월
도솔산 전투


8월
피의 능선 전투

· 펀치볼 전투


9·10월
가칠봉 전투

· 단장의 능선 전투

· 백석산 전투

· 코만도 작전
11·12월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1952년
1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3월
장단-사천강 전투


7월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351고지 전투


9월
백마고지 전투

· 1차 화살머리고지 전투

· 저격능선 전투


1953년
3월
폭찹힐 전투


5월
M-1고지 전투


6월
351고지 전투

· 2차 화살머리고지 전투

· 949-973-883고지 전투


7월
중공군 7차 공세(7/13)

· 금성 전투

· 백암산 전투

· 425고지-406고지 전투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1. 북한의 기습 남침
1.1. 북한군 초기전력
1.1.1. 보병
1.1.2. 포병
1.1.3. 기갑
1.1.4. 공군
1.1.5. 해군
1.1.6. 보급
1.2. 파일:대한민국 국군기.svg 대한민국 국군의 초기병력
1.2.1. 보병
1.2.2. 포병
1.2.3. 기갑
1.2.4. 해군
1.2.5. 공군
1.2.6. 보급
1.3. 국군의 초기 방어
1.4. 이승만 대통령의 피신
2. 국군의 지연 작전과 미군
2.1. 서울 함락과 한강선 방어작전
2.2.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투입
2.3. 미군의 연패(連敗)
2.4. 포로
2.5. 한국군의 7월 지연작전
2.6. 미 공군의 활약
3. UN군과 공산군의 전력 비교
3.1. 보병
3.2. 포병
3.3. 기갑
3.4. 해군
3.5. 공군
3.6. 비대칭 전력
3.7. 보급 및 수송
4. 국군의 무장강화
4.1. 보병
4.2. 포병
4.3. 기갑
4.4. 해군
4.5. 공군
5. 낙동강 방어선과 남진 저지
6. 인천 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대반격
7. 중공군 참전, UN군 후퇴 및 반격, 38선에 교착된 전선
8. 고지전
9. 휴전
10. 휴전 직후 행사
11. 휴전 협정 이후
12. 전투 목록

일자별 전황

1. 북한의 기습 남침[편집]


파일:6.25전쟁당시북한군vs한국군.jpg
개전 당시 남북한 지상전 병력 현황 (단위 : 명)
국군
인민군
부대명
병력
부대명
병력
1사단
9,715
1사단
11,000
2사단
7,910
2사단
10,838
3사단
7,059
3사단
11,000
-
-
4사단
11,000
5사단
7, 276
5사단
11,000
6사단
9,112
6사단
11,000
7사단
9,698
7사단[1]
12,000
8사단
6,866
-
-
수도경비사령부
7,061
-
-
-
-
10사단
6,000
-
-
13사단
6,000
-
-
15사단
11,000
-
-
766 독립보병연대
3,000
-
-
12 모터사이클연대
2,000
-
-
105 기갑여단
6,000
-
-
경비 1 여단
5,000
-
-
경비 2 여단
2,600
-
-
경비 3 여단
4,000
-
-
경비 5 여단
3,000
-
-
경비 7 여단
4,000
-
-
1,2군 사령부
5,000
합계
64,697

135,438

과거에 출판된 책이나 자료, 각종 매체에서는 북한군이 20만, 국군이 약 10만이라고 나와있으나 그건 정규군에 편입된 비정규군까지 합친 숫자인 반면 해당 수치로 비교할 시 국군도 보조전력으로 간주하던 국립경찰 5만 명을 추가해야 하는데, 그런 자료는 거의 없다. 당시의 국립경찰은 일반적인 경찰의 이미지와고는 다르게 국군보다 카빈소총도 많고 최신 무전설비와 상당한 규모의 지프와 쓰리쿼터 같은 오프로드 차량을 보유했으며 기관총은 물론 바주카포와 폭약도 보유하고 있었기에 KAMG에선 보조전력을 간주했었다. 실제로 전쟁 전 국지전에서도 1만 명의 경찰들이 보조했었기 때문에 보조전력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해군과 공군을 제외한 숫자로 해군과 공군 전력까지 합친뒤 비정규군을 빼면 국군이 약 7~8만 가까운 숫자고, 북한군이 14~15만 정도의 숫자다.

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14522324883_796720fc7b_h.jpg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양측 병력배치현황. 기호에 대한 의미는 단대호 항목을 참고.

이북괴뢰불법남침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25일 조효부터 삼팔선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이 대거불법남침하여 와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25일 정오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25일 조효 5시부터 8시 사이에 삼팔전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은 대거하여 불법남침하고 있다. 즉옹진 전면으로부터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각지 전면의 괴뢰집단은 거의 동일한 시각에 행동을 개시하여 남침하여왔고 동해안에는 괴뢰집단이 선정을 이용하여 상륙을 기도하여왔으므로 전 지역에 걸쳐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격퇴, 목하전설각지역의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요격하여 긴급적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 1950년 6월 26일자 조선일보[2]


사단을 표시한 위에 X자 2개가 있는 상자의 크기가 국군이 더 크기 때문에 국군이 병력상 우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상자의 크기와 부대의 규모는 별개다. 상자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사단이 담당하는 구역이 넓다는 것. 북한의 사단을 표현한 상자의 크기가 작으면서 여러 개라는 점을 주목하자. 즉, 북한은 동일 전역에 더 많은 사단을 투입하여 국군보다 수적으로도 우세했다는 소리다. 사실 총 병력의 격차는 2배 정도 수준이지만 후방 사단들은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을 하느라 빠르게 전방으로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배 이상 격차가 벌어지는 곳도 있었다. 즉 방어자의 이점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시, 김일성은 긴급내각회의를 소집해서 이승만이 북침을 했다고 거짓주장을 하며 헌법에 따르면 오직 내각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니 빨리 남측에 대한 역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총사령관 명의로 "지금 전쟁이냐 평화냐는 내각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전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다. 모두 동의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내각이 동의하면서 북한의 정권은 최종적으로 남침을 확정하였다.

불과 한시간 후인 새벽 4시, "폭풍224"(폭풍)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물론 북한에서는 열심히 '남한이 먼저 쳤다'고 하나, 그런 식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3]이며, 있었다 한들 이전에 빈발했던 국지전 수준의 전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설이 절대 다수이다.

이러한 와중에 군 수뇌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전방 사단의 경우 전력의 대부분이 외박, 아니면 휴가였다. 38선상에서의 연이은 무력충돌과 전쟁 발발설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 당시 군은 직전까지 장기간동안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술한 대규모 출타도 이로 인한 병력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전투력 회복 차원에서 조치되었던 대규모 휴가이지만 아무리 병사들의 피로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대규모로 휴가를 내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기간을 두고 소수의 인원을 순환적으로 휴가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참작하기엔 무리가 있는 셈. 한편 이 건에 대해서는 역으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항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시각도 있다.

본격적 개전 이전부터 연속되던 국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6월 24일의 국지전이 있었느냐, 있었다면 어느 쪽 책임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은 북한이 전쟁 준비를 했다는 분명한 증거다. 현실적으로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대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며 수십 킬로미터를 전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설령 한국전쟁의 개전이 남한의 선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침략의사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1950년 6월 25일. 농번기에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가 가관인데, 김일성 자신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남북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남한을 단 2개월 만에 밀어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삼팔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의 계산에 의해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이 소요되는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므로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6월 25일과 가장 비슷한 시점에 전쟁을 일으킨 사례가 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오시프 스탈린을 배신하며 독소전쟁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에 일으켰던 것. 본래 독일의 계획은 빠르면 9~10월, 아무리 늦어도 11월까진 모스크바를 비롯해서 우랄산맥 서부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주로 말에 의존하는 보급과 러시아의 환절기 기후로 지연되었고 모스크바 육박전을 할 때 겨울이 되는 바람에, 월동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독일군[4]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비 부족으로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 없게 되어 1942년 봄까지 소련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하는 방어전을 펼치는 전술로 일관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한편 소련은 이 시간동안 미국의 지원과 자국의 어마어마한 인구와 노동 생산력을 기반으로 독일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정비할 수 있었고 소련의 이 전력이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정예부대들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나치 독일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이 날짜가 진짜 절묘했던 게 1950년 6월 달력이다.
1950년
6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이날이 바로 일요일이었다는 점인데 이게 뭘 의미하냐 하면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 휴가를 나가는 그 요일이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중 가장 방어가 허술한 요일이기도 해서 개전일로 택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날이 된다. 실제로도 각 부대 지휘관들조차 일요일에는 육본에 있는 장교클럽으로 내려와서 연회를 즐기기까지 했다. 평일이었더라면 평소처럼 병력이 주둔지에 그대로 다 있었기 때문에 바로 맞붙었으면 되었겠으나 하필 휴일인 탓에 병력들이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부대가 비어 있어서 병력들에게 비상소집령을 내려야만 했고 그러는 동안 북한군을 막는 중요한 시기를 놓치게 된다.


1.1. 북한군 초기전력[편집]


초반에는 일본제 무기를 사용했으나, 차후 소련제 무기들로 대거 무장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소련에게 무기 원조를 요청하면서 어느 정도의 원조를 받았지만 스탈린은 일정 시점부터 무기를 원조가 아닌 판매로 제공했다. 신생국이던 북한의 김일성은 돈이 아닌 과, , 철광석, 모나자이트, 을 소련에게 제공하는 계약을 맺으면서 무기대금을 치렀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의 눈을 의식해 최신 전차나 최신 전투기는 제공하지 않고 제2차 세계 대전때 사용하던 중고무기와 화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평사포 및 곡사포를 제공했다. 일례로 당시 북한군 포병의 최대 화력은 122mm 평사포곡사포였으며, 소련은 그보다 화력이 강한 152mm나 203mm는 제공하지 않았다.

전차도 최신 전차인 T-54IS-2, IS-3는 제공되지 않고 화력이나 대전차전 능력이 두 전차보다 약한 T-34가 제공됐다. 이는 미국의 눈을 의식한 것도 있지만 당시 최신 전차들이었기 때문에 줬다가 노획 당할 것을 우려한 점도 있다.

전투기의 경우 제트 전투기도 아니고 소련에서는 이미 퇴역해 예비부품도 부족한 Yak-9 같은 프로펠러 전투기가 제공됐다. 물론 북한이 당시 제트 전투기를 독자적으로 운용한다는 것부터 불가능하기는 했지만 신품 가격을 받고 중고 전투기를 팔았다.예시


1.1.1. 보병[편집]


개전 시점에서 북한 육군과 경찰병력을 포함해 약 18만명으로 추산되며 소련에서 지급한 모신나강 소총, PPSh-41 기관단총, DShK 중기관총을 비롯해 대전차소총이나 국공내전때 노획하여 넘겨받은 권총, 일본제 아리사카 소총과 기관총, 소련이 독일에게 승리하고 노획되거나 손에 넣은 물품중 일부인 기관총이나 소총 기관단총 등이 있다.

또한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팔로군 내 조선인 부대 3만 명을 편입하고, 팔로군 조선의용대 출신의 군인들을 지휘관으로 삼았으며, 소련의 훈련으로 사단급 훈련까지 끝마쳤으니 당시 기준에서 웬만한 나라들은 상대하기 힘들 수준이었다. 미군도 본토에서 정예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상대가 안 됐을 정도다.

물론 급조한 군대답게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용병술을 보면 이들도 번개불에 콩 볶아 먹듯이 했는지 어설픈 면모가 군데군데 보이긴 했으나 그걸 감안해도 신생국가의 군대로는 매우 훌륭한 수준이었다.


1.1.2. 포병[편집]


포병전력으로 제일 강한 화력은122mm M-30 견인곡사포이고 그외에 76mm ZiS-3 사단포, 100mm KS-19 대공포, 85mm 대공포, 카츄샤 다연장로켓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M72 모터사이클, GAZ-67 등이 있다. 당시에 이 정도 전력이면 신생국 기준에서는 막강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제 무기나 미국, 독일, 일본제 무기는 일부 미흡한 게 있기는 했어도 2차 세계대전에서 그 성능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포병이 보유한 화기 대부분이 한국군이 보유한 화기보다 유효사거리가 더 긴 관계로 38도선 상에서의 국지적 충돌 때마다 한국군의 대포병 사격이 먹히지 않는 원거리에서 북한군 포탄이 날아오는 바람에 상당한 피해를 보게 만들었다.


1.1.3. 기갑[편집]


북한은 소련제 T-34-76T-34-85 전차 242대와 SU-76M 경자주포 150대 이상, BA-64B 장갑차 54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T-34-76은 2차 세계대전 당시 T-34-85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생산이 중지됐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지만 T-34-76 또한 2만대 이상 생산된 전차다. 그 많은 수량을 고려하면 북한에 원조 물량이 어느 정도 넘어갔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다. 화염방사전차인 OT-34-76을 운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사진중에는 76mm 포 장착 전차가 포착되어있는 사진도 있다.

T-34 전차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최강의 전차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화력, 기동력, 방어력, 생산성 모두 상당히 우수한 전차 중 하나였다. 특히 생산성 하나만큼은 8만 5천대라는 최고치를 찍는 등 경악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고 북한군이 침공 당시 선봉에섰던 T 34-85 전차는 그 무시무시한 티거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는 전차였다. 독소 전쟁 당시 질을 중시했던 독일과 달리 소련은 양인지라 독일군 따위 비교도 안 되게 정말 어마어마하게 찍어대는 통에 엄청나게 남아돌았고 어차피 본인들은 전쟁말기부터 티거를 잡기 위해 개발한 IS-2IS-3를 주력으로 굴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력부대용으로는 다시는 쓸 일이 없는 T-34를 북한에 많이 공여했다.

소련은 북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 내부에 전차병 양성과 기갑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많은 투자를 했고 북한에 잔류한 소련군 10전차사단을 통해 전력확충을 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T-34를 원조받거나 구매하는 방식으로 기갑전력을 편성하기 시작해 최초 전차부대인 115전차연대를 창설하고 확대해서 105전차여단을 창설했다.

북한은 소련에게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하기 위해 500대의 T-34를 판매 요청했고 242대까지는 도입됐지만 한반도 지형이 산이 많고 논이 많은데다 그나마 있는 평지 역시 포장이 되지 않아 전차 기동이 어렵다고 판단해 242대까지만 지원하고 나머지는 항공기 지원으로 바꿨다.

T-34/85 전차는 150대를 운용했다는 등 의견이 다양한데 일단 소련이 지원한 숫자는 242대라고 하고 침공 당시에는 방어용이나 예비용으로 90대 가량을 북한 지역에 남겨두고 남은 150대를 투입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외에는 SU-76M 경자주포는 150대 이상이 있었는데 잔고장도 잘나는 편에다가 위력이 T-34에 비해 떨어졌지만 전차가 한대도 없었던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물론 북한군은 여기서 잔머리를 살짝 굴렸는데 선봉에 T-34만 세워놓고 후방에는 T-34와 SU-76M 경자주포를 섞는 방식으로 진을 짜서 전진했다. 이는 SU-76M 경자주포의 결함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였다.

BA-64B 장갑차는 기관총 1정이 무장의 전부였고, 54대 밖에 없는데다 방어력 또한 없는거나 마찬가지라 전차 전력만큼의 위협은 안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북한의 기갑전력은 아시아 최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련은 아시아권이라고 볼 수 없어 포함되지 않고,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소련의 지원을 받기 힘들어 일본제 노획 구식전차나 국민당 정부에 무기대여법(렌드리스)로 대여되었다가 그걸 노획한 미국제 전차가 전부였고, 일본은 패망해서 자위대가 생기기 전이라 전차를 만들거나 원조받을 수 없었다. 주일미군은 일본에서 중전차는 사용하기 어렵다 판단해 M24 채피가 실질적인 기갑전력의 전부라 할 수 있었고, 한국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밖에 없었으니 아시아권 내에서는 북한이 최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1.4. 공군[편집]


북한 공군은 육군전력보다 약했다. 원래 북한은 소련에게 T-34/85 추가 지원 대신 공군전력을 지원받기로 합의했는데, 소련은 신품가격을 받고는 정작 중고품, 그나마도 정비를 두 세번 정도만 받은 항공기에 부속품도 부족한 프로펠러 전투기를 넘겼다.

북한이 받은 전투기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소련 항공기로 큰 활약을 하면서 강력한 전투기라고 판정되었던 소련제 Yak-9 150대 가량, Il-10 공격기겸 경폭격기 70대 가량, 남한에서 월북한 L-4, L-5 센티넬 연락기나 소련으로부터 받은 Po-2, An-2 야간 저고도 폭격기가 있었고 Yak-18 훈련기 등 24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후술하겠지만 한국의 공군 장비가 워낙 열악한 상태였으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게 한반도의 제공권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항공기들은 프로펠러 항공기로서 제트 전투기 시대가 시작된 시점에서는 미 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8월 15일 광복절까지 남한을 점령한다는 목표 때문에 제대로 전투기를 다룰 줄 아는 인물들은 20~30명 정도밖에 안됐다. 전 일본 항공대 출신의 조종사들 역시 친일파로 몰려 숙청될까봐 입대하길 꺼리거나 남한으로 월남하는 통에 수가 적었다. 당시 미군 최신 제트 전투기인 F-80 슈팅스타와 F-82G 트윈 머스탱, 심지어 F-51 머스탱과 해군의 F4U 콜세어에 격추되기도 했다.[5] 조종사의 숙련도, 기체의 성능 등 모든 면에서 미 공군이 유리했다. 결국 제공권을 빼앗긴 북한군은 이후 작전 수행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어야 했다.


1.1.5. 해군[편집]


북한의 해군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북한은 지형적으로 서해와 동해를 동시에 수호할 수 없다. 또 당시 소련은 미 해군에 비해 해군 전력이 약했으며,[6] 드러내놓고 군사원조를 하기에는 미군과의 마찰을 우려했으므로 육군이나 공군과는 달리 해군에 대한 지원은 소극적이었다.

북한은 자신의 우군인 중국과 소련이 육로로 붙어있었기에 먼바다로 나갈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판단했으나 남침 과정에서 진격속도를 빠르게 할 소규모 상륙작전을 진행하고 후퇴하는 한국군의 뒤통수를 노려서 상륙해서 포위해버리거나, 남침해서 한국 내부로 깊숙히 전진한 이후 빈약한 육상교통로로 인한 보급부족사태를 염려하여 한국에 있는 주요 항구를 점령한 후 해상수송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해군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소련과 중국이 이를 충족해주지 못했다.

북한 해군 전력은 1000톤급 무장수송선 1척[7], 1780톤급 무장수송선인 남포호와 어뢰정 4척이 주력이었고, 나머지는 4~50톤급 발동선과 상륙정 70척 가량, 남한에서 월북한 소해정 3척과 화물수송선 4척 등이 있었다. 하지만 1000톤급 무장수송선은 대한해협 해전에서 백두산함에 격침되었고[8], 주문진항 해전에서 미ᆞ영함대에 어뢰정 4척도 격침, 남포호는 전쟁 중 별다른 기록도 없고[9] 나머지는 소구경 기관포를 장비한 발동선이 전부였다.

해군 전력의 열악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전쟁 초기 동해안에 상륙작전을 벌일 때 상륙정을 호위하던 함선이 20톤도 안 되는 어뢰정 4척이 고작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남침 초반의 해전을 제외하면 북한의 해군이 뭔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못하고 제해권을 확보하지도 못해서 그 이후에는 기뢰 부설같이 유엔군 상륙 저지를 하는 선에서 미약한 활동을 하게 된다.


1.1.6. 보급[편집]


북한은 그외에도 여러가지 준비를 했는데, 군량미를 보충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애국미라는 명목으로 쌀을 거둬들여 4만 8400가마를 모아 무기 구매 대금과 군량미로 썼다. 전차나 전투기를 운용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유류의 경우 원산과 장진호 부근에 연간 12만 5000톤의 정유능력을 지닌 정유공장을 만들었다. 또한 부족분의 연료는 루마니아로부터 10만톤의 유류를 구입해 비축했다. 그리고 소련에게 기술을 이전받아 소총, 기관총, 기관단총, 박격포 등을 자체 생산했고, 그에 필요한 탄약들도 생산했다.

이렇게 수입하거나 생산된 유류와 무기, 부품들은 약 60일 가량 사용할 수 있는 물량으로, 이는 8월 15일까지 적화통일할 목적에 맞춘 수치이다.


1.2. 파일:대한민국 국군기.svg 대한민국 국군의 초기병력[편집]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장비나 전면전에 대한 훈련상황은 열악했다. 전차나 전투기는 가지지 못했고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으며 자원도 부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게 원조를 요청했지만,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 우선순위에서 하위권이었다. 당시 미국이 비중을 둔 지역은 주로 유럽 방면으로 마셜 플랜을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할 경우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해 국군의 무장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으로 원조했다.

미국 국무부에서 애치슨 라인이라고 하는 통칭 극동방위선을 긋고 난 뒤 한국을 방위선 안에 넣지 않는 대신 스스로를 방위할 수 있도록 전투기나 전차, 초계정, 함포, 곡사포 등을 원조할 계획을 검토한 뒤 준비도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원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전쟁이 먼저 터져서 의미가 없게 됐다.


1.2.1. 보병[편집]


육군병력은 총병력 10만에서 해군과 공군을 제외하고 8개 사단 편제 하에 비정규군까지 합쳐 약 9만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장교단의 구성은 주로 일본 학병과 만주군 출신 장교(정일권, 백선엽)가 많았으며 일본 육사와 광복군, 중화민국군 출신의 군 경험자, 육군사관학교 1기~10기까지로 구성되었다.

일본육사 출신의 경우 구 일본군 대좌-중좌 출신의 중장년층(이응준, 신태영, 김석원)과 47기 이후의 청년층 (이종찬, 채병덕, 정일권, 이형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일본 학병출신은 대부분이 소위로 임관하여 전선에 있다가 해방된 경우였다.

국민당군-광복군 계열의 경우 중국국민당 정규군 중장 출신의 김홍일 장군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 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북벌기 등을 거친 장년층(이준식,박시창), 30년대 중국국민당 산하의 황포군관학교, 낙양군관학교 한광반 출신의 청년-중년층(안춘생)이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는데, 장교단에 대규모 병력을 운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였다. 사단급 운용 경험자는 중국국민당 정규군(국민혁명군) 중장을 역임하며 중일전쟁 기간 병단 참모장, 집단군 참모장, 사단장대리를 역임한 김홍일 장군이 유일하였으며 연대-대대급을 운용한 경험도 일본군 출신의 이응준, 김석원, 중국군 포병여대장 출신인 박시창 정도였다. 이들은 한국군의 원로 장교로서 한국전 개전 시 실무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참모총장인 채병덕(일본육사 49기)은 일본군 병기과 소좌 출신으로 실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사 훈련 측면에서도 38도선에서 지속되는 무력충돌과 후방의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대대-연대급 전술훈련조차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인민군이 1950년 2월까지 군단급 훈련을 완료할 동안 국군의 훈련수준은 중~대대급 전술훈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도 공비 토벌 등으로 훈련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다가 통합적인 훈련계획을 잡고 중대훈련까지 마친 상황에서 전쟁이 터졌다.

게다가 공산권, 남로당 출신 군인들이 자꾸 문제를 일으켜 이들에 대한 숙군(肅軍)인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이 일어나자 당시 6여단 예속 8연대 대대장 둘이 훈련을 명분삼아 부하들과 상의없이 월북해버리는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도 일어났다.

장비 또한 열악했는데 미국이 한국에 병력규모를 5만~6만 5천명으로 잡고 예산과 장비를 집행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위협이라는 명목으로 군 규모를 10만명으로 늘리면서도 미국과 상의 한번 안 한지라 미국이 추가로 늘어난 병력에 대한 예산 추가 집행을 하지 않았다.

보병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인 소총은 일본군이 남긴 99식 소총이 초창기 주력이었으며 이후 M1 개런드M1 카빈으로 대체되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고, 그 전날인 24일에 전군에 비상 경계령이 해제되어 휴가, 외출, 외박 등이 허용된 탓에 전체 병력중 40%가량이 부대를 비웠으며, 후방에 출몰하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3개 사단을 선발하여 2사단(대전), 3사단(대구), 5사단(광주)로 보낸 상황이었다. 이들 후방 배치 사단들은 공비 소탕작전 때문에 넓은 지역에 분산된 상태라 유사시에 빠른 집결이 어려웠다. 결국 전쟁이 터지자 급하게 후방사단을 다시 재소환해서 일선에 투입했지만 전황이 시급하다고 전술적인 투입이 아닌 모이면 바로 투입하는 방식으로 지휘도 제대로 안됐다고 한다.

거기다 전방에 배치된 부대를 6월 13일부터 20일까지 대대적으로 교체했는데, 우수한 지휘관과 병력을 최전선에 우선적으로 배치한다는 계획은 좋았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 주변 지형지물에도 익숙치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졌다.[10]


1.2.2. 포병[편집]


포병의 경우는 더욱 열악했다. 국군의 대표적인 포병 화력은 M3 105mm 경곡사포였는데 북한군의 최대 화력인 122mm 평사포와 견인곡사포에 비해 화력도 약하고 사정거리도 절반 정도였다. 122mm 포들은 10km이상의 사정거리를 지녔지만 M3 105mm 곡사포는 6.5km 정도다. 덤으로 수량도 91문밖에 없어서 6개 포병대대를 만든 후 가장 중요한 곳에다가 1개 포병대대를 잠깐 파견하는 식으로 운영하여 포병지원을 받기도 힘들었다.

대전차무기로 57mm M18 무반동총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대전차포의 경우 북한군의 T-34/85에게는 전면 경사장갑을 상대로 이론상 320m 이하의 거리에서만 효과가 있었고 철갑탄도 크게 부족했다. 덤으로 미국이 6파운더를 M1 57mm 대전차포로 라이센스 생산할 때 관통력 높은 분리철갑탄은 명중률이 좋지 않다고 생산하지 않았고 기존 철갑탄은 탄착각도가 30도만 넘어가도 탄자붕괴현상이 일어나서 경사장갑 상대로는 답이 없었다. M18 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도 구경이 작고 탄두 형상도 경사장갑 명중시 도탄현상이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메탈제트가 허공으로 분산되므로 T-34/85 상대로는 위력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대전차무기 운용 인원이 전차나 장갑차같은 기갑으로 보호받는게 아니라서 매우 위험했고 성과를 거두기 위해 근접할 경우에는 말 그대로 자기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물론 미군측 집계에 따르면 한국전에서 전차간 평균 교전거리는 400야드 수준으로 그렇게 길지 않았다.[11] 따라서 매복후 기습하는 방식으로 대전차포를 운영하면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있긴 했으나 이렇게 하려면 숙련된 인원이 쓸만한 지형지물을 만나서 미리 시간을 가지고 제대로 매복진지를 건설한 후 부대를 제대로 배치해야 가능한 일이었으며 위에 언급했듯이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무기의 저열한 관통력, 도탄현상, 탄자붕괴, 철갑탄 부족등의 각종 현상은 매복공격의 성공률까지 크게 떨어뜨렸다.

여기에 더해서 대전차무기들이 포병전력의 부족 탓에 보병지원에 투입되는 터라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나빴다.

결국 전쟁이 터지자 포병과 대전차무기는 빠른 속도로 손망실이 발생하였고 대전차무기는 제대로 된 활약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으로부터 각종 대포와 슈퍼 바주카를 입수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서서히 해결되기 시작했다.


1.2.3. 기갑[편집]


국군에게는 전차나 자주포는 한대도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 대부분을 산과 논이 차지해 전차 기동이 어렵다는 이유와 북침 같은 허튼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전차지원을 거부했다. 이런 생각 자체는 북쪽의 소련군사고문단도 한반도의 지형이 전차나 자주포 운용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만 소련군사고문단은 북한군에게 줄 전차 지원량을 요청 수량의 절반으로 조정해서 지급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판단보다 제대로 된 판단을 했다.

하지만 미국도 장기적으로는 한국군 내부에 기갑부대를 만들 필요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고 그 토대를 위해 전차를 대신할 장갑차인 M8 그레이하운드 27대와 M3 하프트랙 20여대만 지원해 이 장비들과 군견, 그리고 군마들을 합쳐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독립기갑연대를 겨우 구성했다.

M8 그레이하운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군이 위력정찰용 장갑차로 운용했는데 37mm 대전차포와 기관총 2정을 장비해 장갑차치고는 화력이 강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장갑차로서는 괜찮지만 전차를 맞상대하기에는 화력과 방어력의 부족으로 불가능했다. 애초에 37mm 대전차포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중형 전차 이상의 상대에게는 화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확인된 무기체계다. 즉, 그레이하운드는 동급 장갑차는 잘 잡아도 본격적인 전차 상대로는 무기력했다. 방어력도 정찰 장갑차라 소총탄을 간신히 막을 수준이었으니 대기갑전용으로는 부적당했다. 애당초 이 장갑차는 정찰용이고, 잘 쳐줘도 게릴라전이나 후방 화력지원용이었다. 게다가 분류상 병력수송장갑차도 아닌 정찰 장갑차인지라 병력을 싣고 다니면서 기계화보병처럼 사용할 수도 없는 차량이었다. 미국이 이 장갑차를 넘겨준 건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에 기갑부대 창설이 필요하기는 한데 전차나 자주포는 앞서말한 이유로 시기상조여서 운용방식이 전차와 비슷한 이 장갑차를 지원한 것이다.

육군본부도 그레이하운드를 대전차용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엔 통신기술이 낙후된 탓에 어느 부대가 살아남았고 어느 부대가 전선을 버티고있는지 서로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당시 기준으로 매우 뛰어난 통신성능을 가진 M8 그레이하운드를 주요 전방부대로 보내 통신을 할 의도였다.

하지만 전선의 장교들은 몰려오는 T-34에 대적하기 위해서 이 장갑차로 싸우라고 지시했고 T-34와 맞상대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현지 그레이하운드 지휘관들은 '만약 자신들이 후퇴한다면 병력들의 사기가 더 곤두박질칠 것이다'라고 생각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강행했다. 주 전술은 그레이하운드 1대가 유인하고, 매복해 있던 또 다른 1대가 무한궤도를 사격하는 것으로 실제 적 전차를 돈좌시키고 전차병까지 사살해 전투불능으로 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태생이 장갑차인 데다가 화력도 주력 중형전차를 상대하기엔 이미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무력한 게 밝혀졌고, 수적 열세가 너무 큰지라 결국 흥남 철수에서 파괴된 1대를 마지막으로 독립기갑연대 직속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사실상 전멸했다.

다만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레이하운드의 모형에 기재되어 있는 설명에는 1950년대 말까지는 한국군이 그레이하운드를 운용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건군기와 6.25 전쟁, 월남전 등 국군사를 다루는 블로거 오로라의 의견으론 북진 당시 그레이하운드가 전부 기갑연대에 있던 것이 아니라 몇 대씩 타 사단에 배속되었던 것과 1.4 후퇴 이후 극히 소량의 생존 차량들의 대한 처분 문제를 다룬 문서가 있다는 점을 들어 살아남은 차량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예시

M3 하프트랙도 기관총 1정이 무장의 전부고 20명의 병력을 험지로 옮길 수 있는 장점을 제외하면 특별할 건 없다.

결국 개전 초기에 별다른 성과없이 상당량의 기갑 장비를 상실한 한국군은 전쟁 중반 이후에 미국이 미군 전차부대를 지원해주기 시작하고 공여받은 전차로 자체적인 기갑부대를 만들기 시작한 후에야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1.2.4. 해군[편집]


해군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손원일 제독이 이끄는 해방병단은 미 군정에게 승인받은 유일한 한국계 군사조직이었으며[12] 나중에는 미 군정의 법령 86호에 의거, 조선해안경비대를 승격됐다. 이후 진해에 해군기지를 창설하고 부산과 여수에 특무정대를 창설한 뒤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 교육을 늘리기 위해서 특별교육대를 설치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해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정식으로 해군으로 발족했다. 한국 해군 전력은 23척의 소해정과 경비정 1척, 유류수송선 1척, 상륙정 2척과 전차상륙함 1척, 그리고 전투함인 구잠함 4척이 있었다.

소해정은 미국의 YMS 소해정과 일본제 JMS 소해정으로 남한에 주둔한 미 군정이 넘겨준 것들이다. 일본제 소해정은 일본군이 철수하고 남겨둔 것을 인수했다.

소해정이라는 특성상 나무로 만들어졌고 본래 소해임무를 수행하는 함정이지만 미군의 소극적 지원으로 이 함들로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함미에 육상에서 쓰던 37mm 대전차포와 기관총을 설치해 불법조업을 하는 일본어선이나 중국어선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의 상륙정과 발동선들이 병력들을 상륙시키자 옥계 방면을 경비하던 YMS 가평정 1척이 북괴군 선박들과 충돌, 1척 격침 및 1척 나포라는 전과를 얻었다. 하지만 소해정이라는 함정의 한계상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는 힘들었다.

LCI 보병상륙정은 약 200명의 무장병력이 탑승할 수 있지만 침략받는 입장에서 반격하거나 상륙전에 쓴 걸 제외하면 특별한 건 없다. 역시 전투함은 아니다.

LST 전차 상륙함은 인천 상륙작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양동작전인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그 외에는 보병수송으로만 썼는데 그도 그럴만한 게 당시 국군에는 전차가 한대도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M36 잭슨을 원조받고, 해병대에서 M4A3E8 셔먼을 1개 대대를 운용하고 나서야 전차 상륙용으로 쓸 수 있었다.

YO-1 연료운반정은 만재배수량 약 1400톤으로 실을 수 있는 유류가 1000톤 가량이었다.

경비정으로 있던 1척은 PG-313 충무공함인데 일본군이 철수하고 조함창을 인수했을 때 건조가 중지된 배를 개수했던 것이다. 손원일 제독은 이 함을 인수해 부품을 구해 건조시켰고 비록 일부는 일본이 만들었지만 한국 해군이 최초로 건조한 함정이 된다. 287톤짜리 소형정이었으나, 한국 해군이 보유한 최초의 배인데다가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몽금포 작전을 비롯한 여러 작전을 수행하는 등 많이 활약해서 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초반에는 제대로된 무장이 없어 기관총 1정이 전부였지만 나중에 40mm 기관포를 장비했다.

그러나 위의 배들은 전투용이 아니기에 전쟁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해전에는 기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손원일 제독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게 플로팅 도크 2대, 순양함 2척, 구축함 8척, 잠수함 3척, 각종 소해함, 구잠용 함정 등을 요청했고 저것들을 다 준다면 2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셜 플랜으로 당장 유럽을 지원해야 했던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후순위였고, 이 정도의 원조는 불가능했다.

손원일 제독이 이끄는 해군은 전투함을 원조받을 수 없게되자 전투함을 구매하기 위해서 해군 장병들의 월급을 일부 보태고 고물상에다가 물건을 팔거나 해군부인회가 삯바느질을 통해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돈이 1만 5천달러. 장교 월급으로 쌀 한말도 못사던 시기인걸 고려하면 거액이었다.

이에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이 4만 5천 달러를 보태주며 6만 달러로 모금액이 늘었고, 손원일 제독은 미국으로 떠나 450톤급 구잠함 4척을 구매했는데 이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백두산함이다. 원래 손원일 제독은 배수량이 더 크고 다양한 무장을 장비해 작전의 효율성이 좋은 타코마급 호위함을 사려고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인해 대신 해양대 등 민간으로 넘어간 이 배들을 구매했다.[13] 손원일 제독은 우선 백두산함을 구매한 뒤 배에다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수리까지 다시해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탄생된다.

나머지 지리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은 후에 구매해서 아직 한국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며, 개전 당시 전쟁에는 백두산함 한 척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군이 부산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보낸 특수부대를 태운 선박을 대한해협에서 격침했고, 이는 훗날 대한해협 해전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군은 이 함의 성능에 만족했는지 나중에는 총 9척을 운용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여순반란으로 인해 해군 내에 독자적인 지상전 부대가 필요하다는 신현준 중령[14]의 건의에 의해 2개 대대로 발족했으며, 개전 직전까지 도서 지역에서 빨치산들을 소탕하는 대게릴라 작전을 맡았다.


1.2.5. 공군[편집]


육군의 열약한 사정에 가려져서 그렇지 공군의 경우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 최용덕 장군과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해서 약 2000명의 병력으로 공군을 편성했지만 전투기, 폭격기, 공격기 같은 전투임무의 항공기는 단 1대도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는 훈련기 1대가 있었고 훈련기에는 기총이 달려있어서 전투임무를 충분히 수행 가능했다는 점에서 임정 시절보다도 퇴보한 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 박사나 주한 미 대사를 통해 100대 가량의 전투기, 폭격기, 연습기, 수송기 등을 요청했지만 역시 북침의 우려로 거부당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전투기를 지원해준다 해도 그걸 유지할 유지비를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게 이유였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국 공군에게는 전투에 쓸 항공기는 일절 원조하지 않았다. 미군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육군 항공대를 공군으로 독립시킨 상황에서 김정렬 총장이 공군을 창설했던 것도 미 고문단의 완강한 반대를 뚫고 간신히 성사시킨 것이라 그 이상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공군이 보유한 건 L-4, L-5 연락기와 T-6 텍산 연습기가 종합 22대, 일본이 버리고 간 연습기 Ki-9 몇대 정도다. 일본 항공기는 사진자료 외에 특별한 기록이 남은 게 없지만 미군이 쓸만한 항공기는 다 가져가 해체하거나 표적 연습 등으로 처분했고 한국 공군이 손에 넣은 건 성능이 떨어지는 극소수의 연습기밖에 없었다.

L-4 연락기는 일부만 철로 만들어졌고 대부분이 캔버스천과 나무로 만들어진 항공기로 미국이 한국군에 최초로 제공한 항공기다. 하지만 무장을 달 수도 없고 연락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전기도 없었다. 항속거리도 320km 정도라 작전반경도 짧았다. 더군다나 제공된 수량도 10기 뿐이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항공기 원조 요청을 해 L-5 연락기 10기를 추가로 지원받았는데 항속거리가 600km가 넘고 이번에는 무전기가 있어서 L-4 연락기보다는 낫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L-4 연락기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뿐 여전히 무장을 달 수 없고 방어력도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공비토벌 작전이나 북한과의 소규모 충돌에서 항공기를 잃기도 했고 2대가 월북해버려서 개전 시점에 이 연락기들의 숫자는 두 기종을 합쳐 12대만 남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공군의 꽃인 전투기와 폭격기를 계속해서 요청했지만 미국은 계속 거부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퇴역해서 처분하려던 B-26 머로더 폭격기 30대를 처분하지 말고 넘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호전적인 성격의 이승만이 폭격기들로 북진을 해버릴 것을 우려한 미국 측은 이걸 넘겨주지 않는다로 일축하고 비행기를 도끼로 파괴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가 안된다면 구매를 하자는 의견을 내놓고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모금을 벌여 총 3억 5천만원이 모금됐다. 당시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되는걸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돈으로 전투기를 구매하려 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하자 결국 민간업체를 통해서 캐나다에서 구매한 항공기가 T-6 텍산 연습기 10대다.

금속으로 제작된 이 항공기는 최고속도가 300km가 넘고 항속거리 또한 1,200km가 넘었다. 이 항공기들은 각자 다른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월북을 막기 위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종사 10명에게 맡겼다. 추가로 M2 기관총 20정, 탄약 5,000발, 1년치 부속품과 항공유도 구매했다. 개조를 하면 기관총과 폭탄도 장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제 Yak-9 프로펠러 전투기를 장비한 북한군 공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2.6. 보급[편집]


보급상황도 크게 열악했다. 애초에 미국은 한국에 6만명 수준의 군대를 보유할 계획을 잡았는데 실제로는 공비 토벌 등으로 인해 10만명에 육박할 수준으로 한국군의 규모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계획된 6만명 수준의 장비와 보급만 실시한 것이다. 이런 조치에는 이승만의 북진 주장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다.

애초에 지급된 물자의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비 토벌 등으로 인해 그나마 있던 물자도 빠른 속도로 소모하고 있었고 삼팔선에서의 국지 분쟁 등에서 미숙한 병력이 마구잡이로 탄약을 난사해서 미국 군사고문관들이 사격에 제한을 가하는 등 물자의 사용 측면에서도 비효율적인 면이 많았다.

결국 물자 부족과 정비 부족등으로 인해 개전 직전에는 소총, 대포, 트럭등 모든 장비에서 최소 15% 에서 많으면 35% 수준의 수량이 작동불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를 해결하려고 일제히 서울과 부평에 있는 정비창에 장비를 후송보내는 조치를 취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안그래도 부족한 장비 숫자가 더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후송보낸 장비와 그나마 비축한 물자는 서울과 부평이 조기에 함락되면서 상당수량이 북한군에게 넘어갔으며 일부 수량은 인천상륙작전때 재탈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장비 부족으로 인해 삼팔선 근방에 배치된 사단과 후방에서 공비 토벌을 하던 사단 간의 장비 종류가 차이나는 일이 많았다. 전방의 사단은 미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공병부대 등 각종 지원부대가 존재했으며 피복도 미군용을 받은 데 반해 후방의 사단은 구일본군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말 그대로 알보병만 있었으며 피복도 구일본군 피복을 약간 고쳐서 입었다. 당연하게도 장비 차이로 인해 동일한 인원이라고 해도 전투력의 차이가 났다.

군량미 부족 문제도 심각했다. 개전 직전에 비상령을 해제하고 병력의 상당수를 휴가보낸 이유도 군량미가 고갈 직전이었고 식량창고에 부식인 건빵만 조금 남아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농번기라서 모내기를 해야 할 일손이 필요하므로 청년들을 계속 군대에 잡아놓을 수가 없었고 휴가를 통해서 일손을 돕게 할 필요성이 높았던 것이다.

탄약의 경우에는 구일본군 공창이 있던 부평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구일본군 소총탄을 소량 생산하는 정도였고 시제품 소형 항공폭탄과 시제품 대전차지뢰가 약간 생산되는 정도였다. 개전 초반에 이들 물품은 대부분 불출되어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미제 보급품과 탄약은 앞서 말했듯이 서울과 부평이 조기함락되면서 북한군 손에 넘어간다.

결국 보급 문제도 미국이 참전하면서 서서히 개선된다. 다만 개전 초기에는 미군의 코가 석자일 정도로 미국쪽 수량을 채우기에도 빠듯했으므로 제대로 된 보급은 휴전선 근방에서 고착전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까지 가야 했다.


1.3. 국군의 초기 방어[편집]


개전 시각이나 첫 교전이 일어난 시각이 언제였는지 참전 용사들의 증언이 매우 엇갈리고, 당시 육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육본 정보국 첩보대 소속인 최학모 중위는 북한군 포성을 최초로 들은 시각을 새벽 3시로 증언한다. 채병덕 총참모장의 부인인 백경화 여사 역시 1960년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참모장의 공관에 남침에 대한 최초의 보고 전화가 온 시각을 새벽 3시로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또한 강릉의 안인진리에 침투한 북한의 육전대(해병대)의 상륙 과정에서 우리 경찰이 교전 중 전사한 시각도 새벽 3시라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육군 본부에서 동시다발적인 교전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 새벽 4시로 개전 시각을 서술하고 있다. 이때 육군본부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당직 장교는 당시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연락장교였던 김종필 중위였다. 바로 제4공화국과 김대중 정부 총리를 역임한 그 김종필이다. 당시 육군 정보국에는 정보국장 장도영, 북한관련 책임자 김종필, 군무원 박정희가 있었다.

김종필은 육본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깨웠고, 당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으나 육본 당직사령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에게도 바로 연락이 갔으나,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 2시에 들어간 채병덕 총장은 급보를 들었음에도 잠깐 깨서 통상적인 국지전일 거라고 한마디 하고 도로 잤다.

결국 전군에 비상이 걸린 것은 급보가 들어오기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난 오전 7시였다. 이때 국방부 장관 신성모"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며 전화코드 뽑아놓은 채 자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10시 30분이 넘어서야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보고를 받았다. 미군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트루먼 대통령이 휴가 떠나있는 것을 필두로 장관, 참모총장 등 모든 지휘라인이 부재 중이었다.

미국은 한국에는 산이 많고 그나마 조금 있는 평지들이 죄다 질펀한 논바닥이라서 전차가 기동하기 힘들 것이므로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와 같은 대규모 전차전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이는 교량 하중 문제도 그렇고 이후 UN군 전차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대규모 전차전은 없었다는 점, 당시 전차 중 가장 성능이 좋았던 영국군 센츄리온 Mk.3이 중국군의 습격보다 논 한가운데에서 아주 고생을 했다는 점에서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2차 대전 당시에도 산악 지역에서 대규모 기갑전력이 교전하는 일이 적었다. 프랑스 침공 당시 아르덴 산맥으로 통과하던 독일군 선봉 기갑부대들도 정해진 도로로만 기동할 수 있어 심각한 교통정체를 겪어야 했으며 훗날 1944년 12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연합군이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도 아르덴 일대에서 벌어진 아르덴 대공세와 휘르트켄 숲 전투에서 독일과 연합군 양측 모두 울창한 숲과 산 때문에 기갑전력들이 장점인 기동력을 살리지 못하고 대전차무기와 공군에게 맞추기 좋은 표적으로 전락했었다.

그러나 동일한 생각을 했던 소련군사고문단은 북한의 전차 요구를 절반으로 삭감했지만 전차 지원은 제대로 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생각이 너무 짧았음이 바로 드러난다. 산악지대건 뭐건 간에 전차를 보유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전투력 차이는 심각해진다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또한 미군은 북한의 전차는 대전차지뢰, 2.36인치 M9 바주카57mm 대전차포 정도의 대전차 화기면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공격용 무기'를 제외하면 미국이 한국에 줄 대전차화기는 저거 말고는 딱히 없었다. 세계 최강의 기갑 전력을 보유했던 독일과 전쟁을 벌인 미국이 왜 대전차화기가 6파운더 밖에 없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당대 독일군은 Pak 40, Flak 36, 판저 파우스트, 판저 슈렉을 사용하여 연합군을 괴롭혔으며 소련군의 ZiS-3, 영국군의 크고 아름다운 17파운더도 전장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미군의 대전차 전술은 공군의 공중 지원과 셔먼 파이어플라이, M10 울버린 대전차 자주포 같은 강력한 펀치력을 갖춘 대규모 기갑전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미군이 공격용 무기이자 산악지역에서 적절하지 않은 기갑전력을 제외하고 나면 남아있는 쓸만한 대전차포는 이미 2차 대전 당시에도 판터와 티거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못한 6파운더가 최대였던 것이다.

미군이 준 대전차포는 구일본군의 치하같은 폐물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85 전차들을 상대로도 이론상 320m 이내에서는 전면에서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장비였다. 그러나 이론상이라는 말 그대로 실제로 저렇게 초근접을 하면 전차의 주포탄과 공축기관총 세례를 선제공격으로 맞아서 인수분해당하기 딱 좋다.

백선엽 장군 등의 회고에서는 철갑탄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주장이 제법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직접 57mm 대전차포를 운용했던 참전용사들의 회고에는 분명 철갑탄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다만 철갑탄보다 고폭탄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는 증언이 있고 미 군사고문단의 장비 검열 기록 등에 기재된 내용을 봐서는 철갑탄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이 6파운더를 라이센스할 당시에 가장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분리철갑탄은 명중률이 낮다고 생산을 안하는 뻘짓을 한데다가 기존의 철갑탄은 착탄각도가 30도만 넘으면 탄자가 붕괴되면서 관통불가사태가 나므로 경사장갑에는 대응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영국은 이미 이런 결과를 노획한 6호 전차 티거로 실험해본 후 6파운더는 답이 없다고 느끼고 17파운더로 대전차포 주력을 이동한 지 오래였는데도 이걸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57mm M18 무반동포와 60mm M9 바주카는 대전차전에서는 6파운더보다 더 답이 없었다. 구경이 작아서 제대로 정타를 때려도 관통력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경사장갑을 상대로 착탄시에는 포탄의 형상 때문에 일단 도탄현상을 일으켜서 튕기는 상황에서야 발화하므로 메탈제트가 장갑이 아닌 허공을 상대로 발사되므로 안그래도 빈약한 장갑관통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덤으로 불발탄 확률도 높아서 착탄시 발화가 안되는 경우까지 많았다.

국군 대전차반들은 미군들의 호언장담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굴러오는 전차들을 사정거리 내로 끌어들여 정확히 사격을 했으나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자 멘붕에 빠져버렸다. 포병대가 나서서 M3 105mm 경곡사포로 적 전차에 직접 조준 사격까지 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당시 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이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까지 동원되었지만 이 역시 T-34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전차지뢰도 미국이 거의 공급하지 않았다. 개전 당시 사용가능한 대전차지뢰는 국내에서 시험생산한 180개가 전부였고 이걸로는 길목 몇개 막기에도 부족했다. 대전차지뢰는 미군이 지상군을 참전시킨 후에나 미군 사용분으로 조금씩 들어왔다. 대전차지뢰로 길목을 차단하고 매복한 대전차포를 사용한다는 기존전술이 작동할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미국이 6파운더 일반철갑탄이라도 긴급공수해온 후에는 청주 전투(1문으로 T-34 3대 격파)예시나 수원 화성에서의 교전(대전차포로 1대, 대전차 지뢰로 2대 격파) 그리고 개전 초기 7사단의 방어전에서의 활약(보병과 포병의 협동으로 다수의 전차를 돈좌 및 격파)을 보면예시 충분한 탄약과 훈련을 받은 병력들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예시

전차가 없는 전선에서도 열세였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 대령이 연대장으로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 제17연대는 황해도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공격해온 북한군은 전차가 10대로 적은 편이긴 했으나 방어하던 국군 17연대의 3배에 달하는 병력과 포병, 장갑차 등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17연대는 옹진반도 전투에서 전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게되자, 해군이 급히 파견한 상륙함 LST-801 천안함[15]과 소해정, 징발한 민간 선박을 타고 해상을 이용해 하루만에 인천으로 남은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였다.

원래 옹진반도는 38선 이남 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퇴로가 바다밖에 없었던 것과 전체 상황등을 감안할 때 비교적 성공적인 탈출 케이스였다. 이후 17연대는 낙동강으로 물러서기까지 말 그대로 용전분투하면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한민국 해병대가 아닌 대한민국 육군 부대임에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국군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장 수적으로도, 장비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농번기로 인한 대규모의 외박, 외출로 38선에 실제 배치된 병력은 편제보다도 더 적었고, 여기에 채병덕을 비롯한 군 수뇌부의 안일한 대처가 겹치면서 그나마 있는 전력조차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수적 부족으로 인해 당시 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을 투입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는데 당시 사관학생들은 1기생과, 2기생을 나누어 장교 교육을 이수하고 있었고, 1기생들은 교육이 거의 끝나 20일뒤 자대배치가 정해졌고, 2기생들은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1기생이 262명, 2기생이 277명 총합 539명으로 기타 지원 병력을 포함해 634명의 1개대대를 창설해 내촌-태릉 전투에 투입했다. 하지만 수적으로도 2배 이상 차이나는 북한군에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고 훈련도 제대로 못받은 2기생들과 아직 자대 배치도 못받은 1기생들로만 이루어진 급조된 대대가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리 만무했으며 무엇보다 전선에 투입된 다른 부대들에게 대부분의 무기를 지급했기에 이들이 가진 무장은 M1 소총, 경기관총, 박격포 소량이었다. 그나마도 소총이 성능이 좋아도 실탄이 56발 지급됐고 박격포탄 역시 50발 정도만 지급된 수준. 결국 첫전투에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후퇴했다고 한다.

게다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국군이 반격에 성공하여 해주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오보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오보가 이후 북한의 북침설에 악용된 것은 안 봐도 비디오. 심지어 제1사단백선엽은 이 오보가 진짜인 줄 알고 전선을 맞추기 위해 북진했다가 삼팔선 근처의 적 후방 지역에 고립되기도 했다.

그나마 문산파주시 봉일천 방면에서는 백선엽 대령의 제1보병사단이 건투하고 있었고, 춘천시홍천군 방면에서는 김종오 대령의 제6보병사단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이성가 대령의 제8보병사단이 강릉-주문진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사실 전방 4개 사단중 1사단, 6사단, 8사단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1사단은 임진강 선을 바탕으로 서울 함락 시점까지도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6사단은 포병으로 북한군 1개 군단을 초토화시키고 있었으며, 8사단은 대관령이라는 지세를 이용하여 군사력을 보존하고 강릉을 재탈환하는 등 건실한 방어를 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 주공인 포천시/동두천시-의정부시 축선. 이 축선은 계곡을 따라 개활지가 펼쳐진 데다 서울로의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침공회랑으로 딱 알맞은 곳이었다. 포천-의정부 축선은 3번 국도경원선 철도가 있는데, 추가령 구조곡의 영향으로 이 일대는 3번 국도와 경원선 철길을 제외하면 당시에는 아예 길이 없었다. 그래서 3번 국도는 해방 직후 미군정 시절부터 한 차례 개수를 하여 1번 국도(통일로 연선)나 5번 국도(춘천시-홍천군), 7번 국도(동해선) 연선보다 도로 상태가 괜찮았고, 바로 이 3번 국도가 바로 북한의 주 침공 루트가 되고 말았다. 이 3번 국도 라인으로 인한 6.25 전쟁 트라우마로 인해 전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동두천시-포천시-연천군 등 3번 국도 연선을 오히려 쇠퇴시켰고, 2022년 3번 국도 연선 일대는 매우 낙후하게 되었다. 3번 국도와 나란히 가는 세종포천고속도로2017년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이 3번 국도 방면을 지키고 있던 건 유재흥 사단장이 지휘하는 제7보병사단[16] 휘하의 2개 연대였다. 정상적이라면 3개 연대가 있어야 하지만 당시 사단 예비였던 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중인 2사단 25연대가 배속되어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25연대는 주둔할 병영 문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도 오지 못한 채 경상도 빨치산이나 소탕하고 있었고, 이 상태로 개전을 맞이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7사단은 그야말로 총제적인 난관이었는데, 25연대 배속 문제로 참모장 등 적지 않은 사단 본부 인원들이 파견나가 있었고, 그 외 고군반 교육 받으러 서울에 있던 정보참모라든가 및 연락 두절로 인한 소재 파악이 안 되던 군수참모 등으로 사단에 고위 간부라곤 유재흥과 작전 참모밖에 없었다.

이렇게 약화된 7사단 정면에는 북한군 3, 4, 15사단과 105전차여단 예하 전차연대 둘이 투입됐다. 특히 포천 전투에서 9연대 2대대가 대전차 무기 없이 소총과 기관총만으로 전차에 맞설 동안 대전차 중대가 만세교 남쪽에 대전차포 방열을 하고 초탄을 명중시켰으나, 장갑을 뚫지 못해 겨우 조준경만 빼들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편 이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에서 3연대와 25연대가 올라왔으나, 이들조차도 축차투입으로 찰나의 시간만 번 채 차례차례 의정부로 밀려나 ​의정부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6월 27일 새벽 1시에 비상국회를 연 신익희 의장은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황을 물어보았는데 신성모는 수도 이전을, 채병덕은 수도 사수를 주장하였다. 이에 국회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신성모와 채병덕은 자리를 떴다. 이후 엄청난 논쟁 끝에 결국 수도사수결의가 채택되었는데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를 거쳐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국회의 수도사수결의는 전달되지 못했다. 한편 신성모와 채병덕은 김홍일, 이범석, 지청천, 김석원을 초대해 군사원로자문회의를 열었다.[17] 김홍일은 다른 3인의 지지를 받으며 한강선 방어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병덕은 동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의 찬성을 얻어 서울 사수와 의정부 방면 역습을 밀어붙였다.

이름
출신병과
직책
주장
채병덕
일본 육군
육군총참모장
결전
신성모
영국 해군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결전
김홍일
국민혁명군
육군 참모학교 교장
지연전
유동열
한국광복군

결전
지청천
한국광복군
국회의원
지연전
이범석
한국광복군
전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지연전
김석원
일본 육군
제1보병사단장
지연전
이종찬
일본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결전

채병덕의 고집대로 육본은 후방 3개 사단(대구 3사단 22연대, 대전 2사단, 광주 5사단)을 7사단 정면으로 축차투입하는 우를 범했다. 이 투입은 상당히 개판이었는데 5사단의 경우 15연대 3대대와 20연대 3대대는 1사단으로 보내버리고 15연대 2대대와 20연대 1대대를 7사단 정면으로 투입했다. 2사단은 3개의 연대를 도착한 순서대로 그냥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5사단 휘하 연대가 쪼개져서 축차 추입되는 바람에 당시 5사단 사단장은 자신의 연대가 어딨는지도 파악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는 안봐도 비디오. 북한군은 이 축차 투입되는 연대들을 차례로 분쇄시키면서 의정부 축선을 돌파해버렸다.

의정부 축선의 방어진지가 차례로 무너지면서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고,[18] 마침내 전차가 서울 시내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국군 공병대는 어떻게든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막아야 한다는 압박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다. 이 때문에 서부전선(한강 북방)에서 여전히 전투중이던 수경사와 1, 2, 5, 7사단은 조직적 철수 기회를 놓치고 개별적으로 한강을 도하, 후퇴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야포, 차량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중장비와 상당수의 병력을 손실한다. 특히 개성-문산 축선의 1사단은 우익의 의정부 방면 붕괴와 한강교 폭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포위 직전에 개개인별로 흩어져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하여 부대 건제는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보유 중화기를 모두 상실하였고 병력의 손실도 막대하여 백선엽의 자서전에서 언급되기로는 개전 당시에는 8천명 이상이었던 부대가 한강 이남에서 재집결했을 때는 약 1,000~2,0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물론 한강 이북의 7만의 병력이 다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힌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전선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숨어 지내다가 국군이 반격에 나선 뒤에 하나 둘 합류했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한국전쟁 내내 반복된다. 다만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급한 상황에서 병력이 흩어지고 중장비를 손실한 것은 매우 큰 손실인 것은 자명하다.

국군 10만 중 3만은 후방지원부대여서, 2만은 6, 8사단, 5천은 한강이남 대전의 17연대와 영등포의 독립기갑연대, 그리고 15연대 3대대같은 후방경계부대, 그러면 4만 5천중 2만7천은 29일까지 한강도하 성공, 서울에서 숨거나 7월에 복귀한 숫자를 합하면 실제 피해는 약 16,000명이다. 7만 전원 전사설은 거짓이다.

한편 중동부전선 춘천과 강릉에선 6사단과 8사단이 지연전과 역공을 병행하며 부대 건제를 유지하며 철수를 진행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부전선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한강 이남으로 개별적으로 철수한 부대들을 모아 혼성 부대를 급조해 국군 재편성을 진행하면서 강북의 북한군과 대치한다. 이 과정에서 혼성 부대라 지휘 체계가 제대로 안 잡히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 이북의 북한군의 진격을 약 1주일 지연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미군 병력이 투입될 때까지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었다. 이 영향으로 사흘만에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조기에 북한군의 승리로 종결될 가능성이 보였으나, 미국이 하루 전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UN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된다.

파일: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png
1950년 6월 27일 열린 유엔 안보리 회의. 소련의 불참 속에 남한에 대한 파병을 결정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3호가 통과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개전 당일인 6월 25일 결의안 제82호에서 북한군의 철병과 유엔 회원국의 북한에 대한 지원 금지를 결의했고, 개전 사흘 째인 27일 결의안 제83호에서 원상회복을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남한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7월 7일 결의안 제84호에서는 미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군사와 자원을 지원할 것을 결의했다.

냉전이 끝날 때까지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소련이 의도치 못하게 불참하는 바람에 파병안이 가결된 것이라는 게 근 40-50년간 정설처럼 다루어졌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기밀 해제된 스탈린 정권 당시의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북한을 도와 참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보자"며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불원간 미-서유럽 동맹과 공산권의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전력 면에서 소련이 열세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예시 단 이는 전쟁이 이미 시작된 뒤에 보낸 편지라는 점에 주의하자. 스탈린의 주장은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이 가설에 대해선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 문서를 참조.

그리고 이 역시 관점의 차이인데, 당시에는 UN이 타이완섬에 있는 중국국민당중화민국(대만) 정부만을 공식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UN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해줄 때까지 UN 활동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유엔의 모든 회의에 대해서 계속 보이콧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상임이사국은 소련의 불참을 상임이사국의 거부권(비토) 행사가 아닌 불출석에 의한 기권으로 해석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4. 이승만 대통령의 피신[편집]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4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이 몽진의 혼란상을 살펴보면 실로 가관인 것이 입법부와 사법부와 부통령도 대통령의 피신 사실을 몰랐다.

국무회의의 각료들마저도 이 사실을 6월 27일 아침에 알았다. 국회는 전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6월 27일에 새벽 4시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했는데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없었다. 경무대를 찾아갔던 신익희조봉암은 부랴부랴 피난에 나섰고, 이승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사항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초 주한 미국 대사와 영부인 등이 극구 설득해서 몽진하게 되었다는 설과, 반대로 존 무초 대사가 수도 방위를 외치고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을 주장했다는 설이 있는데 둘 다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공을 보고 받고 사태의 대응에 나서서 25일과 26일 무초, 맥아더와 연락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대한민국 육군본부 등을 방문하였다. 26일 저녁에는 몇몇 인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피난을 건의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27일 새벽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에게 연락하여 미 대통령을 만나라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성모, 이기붕 등 여러 각료들이 경무대에 찾아와 피난 할 것을 다시 요청했으나 그때까지도 듣지 않다가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소식을[19] 듣고서야 부인과 비서와 함께 서울역으로 향했다. 무초는 같은 날 오전 7시 신성모 국방장관의 방문 이후에야 이승만대통령 이 새벽 3시에 먼저 서울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사실을 본국(미국)에 전보로 보고했다. 즉, 주변에서 피난을 설득했다는 사실은 맞으나 그게 무초는 아니다. 이승만/일생 문서 참조.

그리고 같은 날인 27일 저녁 7시 반 당시 KBS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2009)[20]이 대통령이 보낸 차를 타고 대통령이 머무르던 충남지사 관사에 갔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과장 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린다. #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1.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1.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

1.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1.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유병은 방송과장은 우체국, 대전방송국, 중앙방송국에 연락하고는 90여분 만에 밤 9시 생방송을 성사시켰다. "적군은 패주 중이며,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였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등의 인넷에 퍼진 내용은 실제로 이승만이 한 말이 아니다. 이승만은 위와 같은 "서울 사수" 방송을 한 적이 없고, 6월 27일 밤 9시부터 11시까지 이승만의 "특별담화 방송"이 단 3번 방송되었다. 그 이승만 특별담화 방송 육성음조차 전쟁간 손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 담화 방송이 있었다는 건 당연히 1950년대부터 알려져 있던 거지만 정확히 듣고 기록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다 미국의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방송감청부서)의 일일 보고서에서 그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가 존재한다.[21] FBIS는 일본 오키나와에 소재한 감청소이며, 남북한과 중국, 소련의 방송을 모니터링하여 일일 보고서를 작성하여 매일 미국에 통보했다.

일단 27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 탈환 발언을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계속 거짓말을 했으며, 북한군이 쳐들어오기 직전에도 그 거짓말을 철회하지 않은 것이다.

국방부 보도과와 공보처가 27일 오후 1시에 특별방송을 통해서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내용을 공식 발표한다.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였고,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하였고,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였다, 국민은 국방군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RG 263, Box 330)) [22]

그리고 27일 오후 4시에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튿날부터는 공군을 위시하여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국방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라는 특별발표를 하였다. 실제로 당시 주민들은 육군사령부가 시흥으로 이동하고,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 방송을 보고 두려움을 잠재웠다고 한다.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6(RG 263, Box 330)[23]

그러다 27일 밤 9시경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방송이 나왔다.

파일:500627.png

1950년 06월 27일 이승만의 실제 방송문 (축약)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방송을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이 방송에서 국군이 의정부 지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차의 엄호에서 진격하는 적군을 막지 못했고 적군이 서울 교외 가까이까지 진출한 상황인 건 밝히긴 하였다.

이승만 본인이 입으로 직접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라고 대놓고 발언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맥락상 서울을 사수한다는 늬양스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착각할만했다.

북한군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까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전투하는 소리를 들은 서울시민들은 불안을 느끼고 이승만 방송 전부터 피난을 시작했고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 폭파지시는 채병덕 당시 총참모장의 지시였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것에 대한 명령 주체자는 계속 논란중이고 이승만 대통령이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27일 대전에서 거의 혼자 있었고 정부와 군은 그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자세한 건 한강 인도교 폭파, 한강 방어선 전투 참고.

한편 6월 27일에 수원시의 미군 맥아더 사령부 전방지휘소[24]가 (잘못된 정보로) 오산으로의 철수를 결정하자, 이승만 일행은 7월 1일에 대전에서 부산으로 다시 피난을 가기로 한다. 보안상 대통령의 피난은 당연히 극비였기에 수행인원을 최소화해서 세단 자동차 한 대와 지프 자동차 두 대를 이용했다.[25] 경부선을 따라 피난하는 것이 일반적 루트이지만, 추풍령의 험로와 당시 좌익의 세가 가장 강한 도시였던 대구에서 공산 빨치산들의 기습을 받을 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이리(오늘날의 익산)를 거쳐 목포로 향했고, 목포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19시간 만인 7월 2일 오전 11시경 부산항에 도착했다.


2. 국군의 지연 작전과 미군[편집]


낙동강 전선과 인천상륙작전에 비해서 주목도가 정말로 낮은 것이 바로 한국군의 지연 작전이다. 그러나 국군의 지연 작전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사이에는 태평양이라는 지구에서 가장 넓은 바다가 있다. 중국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고심끝에 병력을 보내는 데 한두 달이 걸렸다. 그런데 미군은 심지어 다시 병력을 소집하고 재편성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벌어준 것이 국군이다.

앞서 설명되어있듯이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단이 중화기를 버리고 한강을 도하했다.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 없는 병력을 소집하고 지휘 체계를 구축하고, 부족한 소화기와 대포를 가지고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당시 국군은 전면전 수준의 훈련은 받지 못했지만 3년간 국지전과 무장공비 토벌이라는 실전을 바탕으로 국지전술엔 숙련된 군대였다. 중장비를 잃어버리고 다수의 병력이 흩어졌지만 분산된 병력들은 삼삼오오 복귀하거나 게릴라화 하였고 국지전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북한군의 중~대대급 부대들에 국지적 소모전을 통한 출혈을 강요하여 남진 속도를 늦추었다.

의외겠지만 중~대대급 부대들에 대한 국지적 소모전은 사단급 이상의 부대들이 작전을 속행하는데 크게 방해할 수 있는데 흔히 지연전 혹은 파비우스 전술로 알려진 이 전술은 끊임없는 출혈을 통해 부대의 전투력을 누적 감소시키고 보급선을 교란하여 정상적인 작전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신속한 기동 작전을 펼치는 경우 후속부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동전의 명수인 독일군의 경우 선두 기동부대와 후속 부대간의 간격을 적 패잔병 등 잔존 병력이 찌르는 것을 막기위해 적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포위, 섬멸하는 것을 강조했다.

북한군은 미군의 개입전 신속히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일종의 신속한 기동을 강조했는데 북한군의 기동전술은 기동전의 명수였던 독일군이나 제파식 전술의 끝판왕 소련군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미숙했다. 독일군의 기동전술처럼 국군을 물리적으로 포위, 섬멸한 것도 아니었고 소련군의 제파전술을 받아들여 공세종말점을 연장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국군을 향해 몰아치지도 못했다. 소련군의 제파 전술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북한군은 한강도하가 실패한 직후 한강 방어선을 우회하여 중부전선의 북한군과 합동하여 6사단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국군의 배후를 쳐야했는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3일 동안 강북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기 바뻤다. 여기에 본디 한강 이남 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포위하기로 했던 중부 전선 북한군은 6사단의 분전에 가로막혀 지리멸렬하게 패퇴하였다. 여기에 북한은 침략과 동시에 반동분자를 숙청한답시고 인민재판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눈 밖에 난 대한민국 국민들을 학살했으니 북한 점령하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심을 얻지도 못해 국군 유격대들이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북한군을 괴롭히는 것을 허용해버렸다.

김포사령부의 경우에는 영관급 지휘관들의 육탄 돌격을 통해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만약 국군이 미군이 도착하는 9월까지 북한군을 막지 못하고 부산까지 함락되었다면...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데 3일이 걸렸음을 감안했을 때 대단한 분전이었다. 동시에 얼마나 채병덕이 무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무튼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판단한 맥아더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특무부대'를 투입했다.


2.1. 서울 함락과 한강선 방어작전[편집]


1950년 6월 28일 서울 함락 당시 평양방송의 라디오 방송이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서울해방전투'라고 부른다.


6월 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보도. 서울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들은 오늘 28일 새벽에 서울 중심 지대에 돌입하여 리승만 괴뢰정부의 소위 중앙청을 비롯하여 서울시청, 검찰청, 방송국, 각 신문사,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 주요 기관들을 차지하였다. 28일 11시 30분, 영웅적 인민군대는 반공격을 개시한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6.25 전쟁에서 서울을 점령한 날 북한 평양방송 보도


이시영 부통령은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지인의 설득으로 수원으로 뒤늦게 피난가게 되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즉각 납북되었을 기세였다. 만약 그가 납북되었으면 당시 부통령도 나름대로의 헌법 기관이었던 만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등에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실제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제헌의원 등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 등이다.

북한군의 진격이 왜 지체됐는지 추정만 가능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동부 전선의 지지부진한 전황과 도하장비 및 전술적 역량 부족이 꼽힌다. 우선 북한군이 처음에 계획한,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하여 일제 섬멸한다는 전략은 국군 제6보병사단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의 제2군단의 진격을 3일이나 저지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가 늦어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 전투의 패배를 책임지고 북한군 제 2군단장은 해임당했다.[26] 2군단이 우회하여 수원을 점령함으로써 한강 이북에 배치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북한군 작계상 한강 이남에 가장 먼저 도달하는 것은 2군단이 되어야 했는데, 정작 2군단의 공격이 지지부진하니 1군단도 한강 이남으로 본격적인 도하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가설이다.

둘째로는 도하장비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은 서울 함락 하루 뒤인 6월 29일부터 탐색 목적의 소규모 도하공격을 실시하면서 빈틈을 노렸지만 연이어 격퇴당했고, 서울 함락 3일 후 시작된 본격적인 공세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7월 3일 복구된 한강 철교를 건넌 전차가 노량진 땅을 밟으면서였는데, 만약 북한군에 도하장비가 충분하여 전차를 비롯한 주력부대를 보다 신속히 도하시킬 수 있었다면 한강선에서의 지연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북한군은 도하작전시 침투부대 운용이나 대안상 화력 운용 등에서 여러 전술적 미숙함을 노출했고, 작전적 차원에서는 2군단의 우회공격이 실패한 상황에서 1군단에 의한 정면공격으로의 전환 역시 결심이 늦었다. 이것 역시 북한군의 도하가 지연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소련군의 제파식 전술을 북한군이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북한군은 2군단의 공격이 돈좌된 상황에서 1군단의 기세를 몰아 극심한 손실을 각오하고 신속히 도하하여 정면 공격을 하거나[27] 위력 정찰 등으로 국군의 주의를 한강 방어선에 끌어두고 주공을 신속히 동진시켜 상대적으로 약한 방어선의 고리를 공략하거나 국군 6사단의 배후를 쳐서 2군단과 합류해야 했는데 북한군의 전술, 전략적 식견은 그 수준이 되지 않았다.

그밖에 북한군이 지체한 이유에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국회의원들을 잡아들여 임시국회를 개최해서 공식적으로 항복 선언을 하게 하려 했으나 대부분 피난해서 실패했다는 설, 박헌영이 주장한대로 서울만 점령한다면 지하조직 세력 빨치산 주도로 남한 전 지역에서 북한에 동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알아서 무너질 것을 기다렸다는 설[28] 등이 있다.

그리고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적의 한강도하를 막은 국군은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적을 저지했다. 한강 방어선 전투 참조. 그리고 이 전투는 후일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로가 된다.

서울 함락 직후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어서 서울 점령 전투에서 국군 1, 2, 5, 7, 수도사단이 와해되었다. 제대로 편제와 장비를 유지한 것은 춘천의 6사단과 강릉의 8사단 뿐이었고, 대전으로 후퇴한 독립17연대와 영등포로 후퇴한 독립기갑연대, 독립23연대는 편제는 유지했지만 퇴각과정에서 상당수의 화기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모두들 비관하고 있는 순간 김홍일 소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김홍일 소장은 남북한 통틀어 유일하게 사단급 제대를 운용한 실전경험이 있는 지휘관으로,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 사단장을 맡아 일본군과 전투하여 승전하기도 했다. 공식 전사에는 채병덕이 임명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모 회고록에서는 권한도 없이 김홍일 장군이 마음대로 병력을 수습했고, 후일에 소급명령으로 지휘관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임명과 활동까지는 약 2일의 차이가 보이는데,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당시 국군에서 명망이 높던 김홍일과 이응준이 채병덕을 설득해서 한강선 일대는 김홍일 장군이, 수원방면은 이응준 장군이 병력을 수습하고 방어작전을 진행한 것으로 보고있다.

김홍일 장군은 먼저 병력을 수습했는데, 한강교 폭파로 인해 한강이북에 잔존한 사단은 중화기는 물론 소화기까지 모두 버리고 몸만 넘어온 상황이었다. 1사단은 건제를 유지했지만 지휘관을 찾지 못했고, 2, 5, 7, 수도사단(구 수경사)은 지휘체계자체가 와해되어버렸다. 김홍일 장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하여 한강선에 응집성 있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괜히 백선엽 장군이 "이분(김홍일)이 없었으면 조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다. 이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1군단으로 재편되어 국군 지연작전의 중추로 활동하였다. 거기에 지연작전의 개념을 구축하고 이에 기반으로 부대를 운용하였다. 사실 국군에서 지연작전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홍일 장군이 유일했는데, 중화민국의 국민혁명군에서 중장으로 근무하면서 실제로 군단급 부대를 운영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흔한 인식과는 달리 당시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피난을 갈 이유가 많지 않았다. 남한군이 이미 서울을 버리다시피 패주하고 있었고,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조선인민군이 '서울해방전투'의 승리로 전쟁의 승기를 잡아서 한반도를 단시간 안에 통일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의원들과 조선일보 사장 같은 고위층 인사들 중에서도 피난을 가지 않고 공산주의로의 통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국군 가족과 경찰 가족, 기타 생계와 관련된 이유로 반드시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을 가야할 이유가 있었던 시민들과, 시가전을 우려한 일부 시민들은 피난을 가려 했는데, 다음날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A, B선이 폭파되어 한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아지자 무책임한 군 당국은 거부할 수 없는 상관의 명령을 받아 폭파를 시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적전비행죄로 몰아 총살했다. 후일 명령을 집행했을 뿐 책임이 없는 것이 인정되어 1964년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긴 했으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한 재판이다.

자세한 것은 한강 인도교 폭파 항목 참조.

지상전의 중요성과 급박한 전개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이 당시 남한의 해군, 공군의 전황 역시 좋지 않았다. 전쟁 직전 대한민국 공군의 작전기는 제대로 된 전술기가 전혀 없었고 연락 및 정찰 임무에 사용하는 L-4/5 연락기 12기, 훈련기인 T-6 텍산 10기 뿐이었다. 그 중 L-4/5는 육군 항공대 소속이어서 공군이 직접 운용하지 못했기에 결국 공군이 운용 가능한건 텍산이 전부였다. 또한 비행기 성능도 열악하여 T-6는 정비병들이 급조한 폭탄가에 소량의 폭탄을 장착해 지상 공격을 해야 했고, L-4/5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서 후방석의 관측사가 1차대전 방식으로 직접 수류탄이나 박격포탄 등을 손으로 던져 투하해야 했다. 그나마도 수량이 부족해서 시제품으로 만든 소형 항공폭탄은 개전초에 모조리 사용해버린 후였다.

게다가 북한 공군은 당시 한국 공군에 전투기가 사실상 한 기도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개전 초기 김포비행장과 수원비행장에 공습을 가했다. 이 공습은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엄연히 공습이었던 만큼 김포공항에 주기된 미군 소속 C-54 수송기가 북한 공군의 Yak-9 전투기에게 파괴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북한 공군을 얕잡아봤다가 충격을 받은 미 공군은 급히 C-54등 수송기들을 후방으로 철수시키는 동시에 주일미군 소속 F-82 트윈 머스탱들을 투입시켜 호위를 맡겼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공중전도 벌어졌다. 당시 호위 임무를 맡고 있던 미 공군 소속 트윈머스탱 5기를 Yak-9 5기가 공격하여 공중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Yak-9 3기가 격추당하고 남은 2기는 후퇴했다고 한다. 미 공군측의 손실은 전무했다.

공교롭게도 한국 전쟁 최초로 제트기가 동원된 공중전도 위 전투 당일에 일어났는데, 김포비행장 인근에서 비행중인 IL-10 공격기 4기를 F-80 슈팅스타 4기가 공격, 손실없이 전부 격추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미군 등 UN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제공권은 UN군 측이 장악하게 되었다.

해군의 경우 남북한 해군 모두 질·양적 수준이 빈약해서 함대간의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 전투 전력으로 G-5급 어뢰정 몇 정이 있었고 한국 해군은 백두산함 1척과 충무공정이 있었지만 양측 모두 본격적인 교전을 치를 수준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야 전사 연구를 진행한 결과 해군도 활약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PC-701 백두산함이 북한군의 후방침투를 막은게 바로 그것이다.[29] 그리고 이것이 육해공 통틀어서 국군 최초의 승전이었다.


2.2.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투입[편집]


1950년 7월 5일경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군UN군의 첫 교전인 오산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미 육군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대대장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 혹은 '스미스 대대'라 칭하는 부대가 전투에 임했다. 대대장 찰스 스미스( Charles Bradford Smith , 1916~2004) 중령은 1916년 생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만 34세로, 주일미군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를 이끌고 투입되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540명(포병 134명 포함) 중 무려 181명(전사 150명, 실종 31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한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는 자신의 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참전했으며, 최종계급은 준장으로 1965년에 퇴역했다. 이후 2004년에 88세를 일기로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작고했다.한국전 첫 전투 美軍 스미스 특공대장 별세

이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 이하 총원 406명에 2개 중대로 이루어진 1개 보병대대와 52야포대대 A포대 13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수임무부대답게 당시 주일미군에서 정예병 취급을 받는 인원을 선정해서 배치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정확한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대대본부 -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Lcl. Charles B. Smith), 부대대장 대위
    • 대대 화기소대 - 소대장 소위
  • 제B중대 - 중대장 찰스 토머스 중위(Lt. Charles Thomas)
  • 제C중대 - 중대장 리처드 W. 다쉬머 대위(Cpt. Richard W. Thasimmer)
  • 제52포병대대 제A포대 - 제52포병대대장 밀러 페리 중령 (Lcl. Miller O. Perry)

어쨌거나 스미스 대대는 인원이 완편대대와 비슷해도 편제가 이렇다 보니 이 대대의 장교 총원이 15명 안팎에 불과했다. 원래 정상적인 대대는 3개의 보병중대와 1개의 화력지원중대에 1개의 (비전투) 지원중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대장이 5명이어야 하지만 스미스 대대는 보병중대가 단 둘 뿐이었고, 다른 중대들도 편제수에 미달이었으며 중대장부터 이미 2명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영관급 장교도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본인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위 이하의 초급 군인들뿐이었고 장교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1/3이며, 병사들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단지 1/6일 정도로 숙련도가 낮았다. 그나마 주일미군 중 가장 사기가 높고 상태가 좋은 부대라고 보낸 게 이렇다. 보병은 7월 1일 오전 8시 45분에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이륙했고 수원 비행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A포대는 배로 부산까지 간 후, 철도를 이용해 수원에서 보병대대와 합류, 한국군을 붙잡고 한강에서 지연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 수원에서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수원으로 북한군이 들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보를 들은 연합군은 재빨리 수원 비행장을 포기했다. 뒤늦게 오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스미스 부대를 태운 수송기는 악천후를 뚫고 7월 1일 부산에 착륙, 7월 3일 대전에 도착해 4일 오산에서 포병들과 합류한다.

5일이 되자 북한군이 이들의 진지로 전차를 내세우고 진격했다. A 포대의 105mm M101 야포 6문과 화기소대의 75mm 무반동총 둘로 전차를 공격했지만 무반동총은 전차를 관통하지 못했고, 고폭탄이 전차 주변의 보병들을 쓸어버리긴 했지만 전차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전차는 더 다가왔고 이제 보병들이 바주카를 발사했다. 2.36인치 바주카는 T-34의 장갑을 어떤 방향에서든 뚫지 못했다. 그러나 105mm 포의 대전차고폭탄은 효과적이어서 삽시간에 T-34 둘을 돈좌시켰다. 하지만 대전차고폭탄은 포대 전체에 6발 뿐이었고, 이게 다 떨어지자 다시 고폭탄을 쏘아대서 한 대의 궤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이 와중에 더 많은 북한군이 접근하자 스미스 부대는 105mm 야포 사격으로 전차를 하나 더 돈좌시키고 몇 대에 피해를 주었으며 적 보병들과도 교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동쪽에서 포격과 함께 더 많은 북한군이 접근하자 퇴각한다. 통신의 혼선으로 부대간의 연락이 끊기자 후퇴는 곧 패주로 변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대대는 15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 전사자 중에는 부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Osan_Map.jpg
당시 상황을 보여준 작전도

최초로 파견된 미군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고작 75mm 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도로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인민군과의 전력차가 너무 커서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입장에선 분한 일이지만 북한군의 고급 인력들 중엔 중일전쟁이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군대 치하에서 일본군과 국부군을 상대로 피터지게 싸우다 온 베테랑들이 많았던 데다 북한군이 사용하던 무기/전차들은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것들로 일본군이 사용하던 경전차들과는 성능면에서 차원이 다른 물건들이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T-34/85 전차를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위력을 알지 못하고 일본군 전차처럼 쉽사리 뚜껑을 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어느 미군북한군의 T-34/85가 돌파하는 것을 보고 쟤들 우리가 한국군인 줄 아나봐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공격 상당수를 방호해내는 북한군의 전차에 그대로 밀려버렸다. T-34/85 전차는 경사장갑을 채용하여 방어력이 중량에 비해 우수한 전차였고, 게다가 스탈린이 북한에 전차를 보낼 때 전차의 장갑을 조금 더 두껍게 해서 보냈다고 하는 헛소문까지 그럴듯하게 퍼졌다.이형근 장군의 증언 결국에는 야포와 같은 중장비를 거의 다 잃어버린 채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2.36인치 바주카와 75mm M20 무반동포의 위력 부족이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물론 이렇게 형편없는 대전차무기 지원 사실을 안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한국군이 대포쏘는 법 몰라서 이렇게 밀린 건 줄 아냐"며 당장 대전차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대공포인 90mm 대공포120mm M1 대공포의 공수를 요청했지만 미 국방부는 쿨하게 씹었다. 그 당시 미 국방부는 극동지역에서 대규모 대전차 화력은 필요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데다가 120mm의 경우에는 미국 내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엄선한 정예병력이 순식간에 패퇴하는 것을 보고 미국도 북한군의 실력을 점점 제대로 평가하게 된다.


2.3. 미군의 연패(連敗)[편집]


스미스 대대가 패퇴하고 나서야 모(母) 부대인 미 제24보병사단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오산-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미 24사단은 무참한 피해를 입어가면서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했다.

평택-안성 전투, 천안 전투, 전의 전투, 대평리-공주 전투등의 지연전을 살펴보면 T-34 전차가 정면에서 돌파전으로 하거나 견제를 하는 사이에 북한군이 우회를 해서 반포위나 포위를 하는 동시에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고 통신선을 절단한 후 각개격파를 하는 식으로 미군을 말 그대로 발라버리는 전투를 수행한다. 덤으로 대전차지뢰를 깔아놓아도 피난민을 가장한 스파이로 대강 위치를 파악한 후 밤중에 모조리 지뢰를 제거하거나 신관을 분리해놓아서 T-34 전차가 지뢰밭을 고속으로 돌진하면서 통과하는 바람에 미군이 대처할 시간이 없어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깜짝 놀란 미국은 일본에서 M24 채피 경전차대를 부랴부랴 보냈지만 또 발렸다. 경전차로서 성능은 좋았지만 그게 T-34같은 중형전차와 정면승부가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며 주포도 75mm 전차포 M2–M6 계열인 M5라서 2차대전 유럽전선 기준으로 이미 대전차 성능이 부족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T-34 1대가 전투 중 궤도가 망가지는 등의 사유로 전투불능에 빠지는 동안 M24는 7대가 완파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미군이 머리를 짜내보니 T-34/85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미군 전차포는 M4 셔먼 전차의 76mm 포와 M26 퍼싱 전차의 90mm 포였는데, M26 전차는 일본에 없었고 M4 전차도 일본의 미군 공창에 조립하다 만 상태로 있는 것까지 탈탈 털어서 7대가 전부였다. 헤집어 찾다보니 먼지가 쌓여있는 소수의 퍼싱을 발견했지만 도저히 가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전차화기로는 개발은 해놨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바람에 필요가 없어 양산을 하지 않은 M20 3.5인치 RKT 슈퍼 바주카나 되어야 T-34/85를 격파할 수 있었다. 이 무기들을 부랴부랴 미국 본토에서 실어오는 동안 미군 24사단은 겨우 공수한 슈퍼 바주카 하나 들고 버티다가 대전에서 하루만에 인민군 3개사단에 포위당해 박살나버렸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미군 24사단의 화력은 여전히 막강했겠지만 그 동안의 지연전에서의 손실과 장비 상실, 대전차화력의 답없음 등의 악재가 터졌고 대전 전투 초기에 주력 방어부대들이 방어선을 버리고 보문산으로 철수하는 등의 사태가 터지면서 병력 부족에 화력 부족까지 발생하여 말 그대로 궤멸이라는 사태가 터지고 만 것이다. 실제로 대전에 남아있던 미군이 잔여 포병부대를 모두 합해서 혼성포병대를 만들어서 북한군과 포격전을 했지만 화력에서 압도당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답이 없었다.

결국 대전 전투에서 미 24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사단장인 윌리엄 F. 딘(1899~1981) 소장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낙오되었다. 어찌어찌 탈출한 딘 소장의 곁에는 극소수의 병력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후 거진 한 달 동안 북한군을 피해 남하하다가 결국 전라북도 진안에서 북한군에게 생포당했다. 이 날이 8월 25일이었는데, 하필 그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이후 윌리엄 딘 소장은 3년의 세월 동안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종전 후에 포로 교환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냐면, 사단 예하 부대장이 미국 딘 사단장 바로 옆에서 전사하고 사단 휘하의 1개 대대가 전 대대원이 모조리 다 전사한 데다가 딘 사단장이 슈퍼 바주카로 직접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단장은 낙오되어 도피 중에 인민군에 잡혀버렸다. 그렇게 모두들 소련이 김일성에게 넘겨준 잉여 T-34/85 전차들 앞에서 "탱크!!"를 외치다 개박살나버렸다.

이 전투는 후퇴과정에서 6.25 전쟁 최초의 명예훈장 수상자가 나왔을 정도로 처절했다. 전투 공병대대 소속의 조지 D. 리비(Sgt. George D. Libby) 중사가 그 주인공. 부상병을 싣고 철수하던 공병대대는 북한군의 사격을 받았고, 리비 중사는 도로 옆 도랑에 엎드려 총탄을 피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포병 트랙터(M5 Artillery Tractor)를 세워 부상병들을 실은 다음, 유일한 그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피탄면적을 줄이고 철수시켰다. 그 와중에 리비 중사는 몸과 팔에 많은 총상을 입고 과다 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의 미군은 2차대전의 경험은 없고 무장은 고물인 주제에 2차대전의 승리자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은 가득한 저숙련 보병대였고, 당연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2.4. 포로[편집]


여기서 잠깐 윌리엄 딘 장군이 포로가 된 사연을 보자면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월리엄 딘 장군이 약간의 호위 병력과 함께 피신하다가 전북 부안 산골 민가에서 휴식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이때 방에 들어가 쉬기 위해 군화를 벗었다가 북한군이 들이닥치자 군화 끈 묶을 시간이 없어서 맨발로 도망치다 잡힌 것인데, 뭐 군화 신었다고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전시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불과 수분이라도 전쟁 중에는 목숨을 좌우할 수 있으니 방심하지말고 유사시에 대한 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례로 제시되고는 한다.

다만 이것은 북한의 자료가 딘의 포로됨을 비난하는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서 이상하게 국군 정신교육시간에도 퍼져있는 이야기이다. 일명 복장 단정하자는 것. 60년대 제작된 북한 영화에서는 그런거 없이 그냥 북한군이 몰려오자 철도변에서 찌질대다가 비겁하게 손을 들어주신다. 이 영화에서는 채병덕대전에서 사살되는 장면이 나오니 고증은 엿바꿔 먹은 작품.

하지만 딘의 회고록인 딘 장군의 이야기나 기타 일반적인 기록은 이와는 다르다. 딘 장군은 후퇴 중 운전병의 실수로 대구로 가는 길이 아닌 전북 부안쪽 길로 접어들어 부대와 분리되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산길로 이동하는 도중 식수를 찾다가 능선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때 머리에 자상, 어깨에 골절 등 부상을 입고 기절했고, 같이 있던 병력은 수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떠나 대구에 있는 부대와 합류했다. 딘 장군은 중간중간 한국 민간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한 달 간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전라북도 진안에서 민간인에게 밀고를 받은 북한군에게 결국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한다.

밀고한 사람은 북한군의 치하를 받고 딘이 가지고 있던 미국 달러와 인민위원회가 보관한 을 받았으나, 이후에 부역자로 끌려가서 결국엔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사람이 총살당했다고 하는 건 딘 장군 이야기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2차 매체로 다룬 70년대말 어린이용 전쟁 실록 계림문고판 한국전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딘 소장을 밀고한 자는 전북 진안 운산리의 '한두규' 라는 사람이며, 밀고 과정중 딘소장의 부관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지역 수복 후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딘 소장의 감형 탄원으로 출소하였다. 한두규가 밀고한 사유로는 인민군의 현상금을 탐냈다는 설과 전쟁전 반공청년단에 몸담은 전적이 있어 인민군에게 발각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 자진해서 미국 장성을 넘겼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본인 말로는 딘을 구하고 같이 가던 중에 인민군을 만나서 딘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미국의 장군을 넘긴 죄를 지은 이 사람은 같이 월북하거나 도망가지도 않고 집에서 잡혔고, 이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이후 북한을 찬양하던 이들이 윌리엄 딘 장군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장성급 포로라는 괴설을 퍼뜨렸는데 사실 미국 독립전쟁 이래로 꽤 많은 장성급이 포로가 된 예가 많고 당장 2차 대전만 해도 필리핀에서 부대가 통째로 항복하는 바람에 조나단 메이휴 웨인라이트 장군이 포로로 잡힌 일도 있다. 이런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포로로 잡힌 미국장성' 얘기를 퍼뜨린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가히 알만하다.

참고로 딘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그의 사고 방식은 전사하는 것보다도 더 굴욕적인 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었으며, 그가 지휘했던 사단은 적에게 잡힌 포로 수가 가장 적은 사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데다가 제24보병사단은 가장 포로로 잡힌 숫자가 많은 사단이 되어버렸다.

딘 장군은, 종전 후 1953년 9월에 조선인민군 2사단 참모장인 리학구 총좌와 포로교환되어 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었다. 딘 장군과 포로교환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리학구 총좌는 긴 기간동안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

전쟁 당시 북한군은 초고속으로 남진하기도 바쁜데 포로가 있으면 귀찮다고 다수의 포로들을 FM 소련식으로 두 손을 뒤로 모아 노끈이나 철사줄로 묶은 뒤[30] 무릎을 꿇린 후 총살해버렸다. 이 주검들은 그대로 길가나 산 속에 방치됐다가 나중에 유엔군이 북진할 때 발견되었다.

총살조차 할 겨를이 없으면, "동무! 이제 곧 조국 통일되는데 왜 도망가시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는 식으로 귀가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항복한 남한군이 집으로 돌아가는 척 하다가 남쪽으로 다시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31]

하지만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군이 개전초기에도 한국군을 포로로 안 잡은게 아니라 잡히면 처형한 경우가 더 많았다.

다만 잡힌 포로의 계급이 정말 높을 경우에는 일부러 살려두기도 했는데 여러가지 용도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딘 장군도 그런 연유로 살아서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으며, 실제로도 리학구 총좌와 포로교환이 되었다. 딘이 소장 계급이 아닌 일개 병졸이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소련식 총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한편 전세가 낙동강에서 고착되자 개전초기 한강철교 폭파로 대량으로 생포한 한국군들을 해방 동무라고 하면서 상당한 인원을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거의 1개 분대당 2명 비율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기록을 보면 절대 감시하지 않고 알아서 싸우게 했다고 하는데 유사한 맥락으로 봐 줄 수 있다.


2.5. 한국군의 7월 지연작전[편집]


미국의 지상병력이 투입된 이유 작전경계선을 경부선과 경부국도로 잡고 경부선 및 경부국도를 포함한 서부는 미군이 담당하고 나머지 동쪽은 한국군이 담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군은 남아있는 병력을 동원해서 동락리 전투, 진천 전투, 청주 전투등을 통해 한반도 중앙부에서 지연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동해안은 제3보병사단의 23연대가 사실상 독립 23연대로 된 후 미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울진부터 영덕까지 순차적으로 지연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아군 오사 가능성 증대 및 한국군을 아직 미군이 북한군과 잘 구별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미군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지연작전을 수행하였기에 미군이 방어전을 펼칠 때마다 북한군이 살짝 우회기동을 하는 바람에 후퇴를 거듭하였고 이 때문에 항상 좌측방향이 뚫리면서 한국군도 후퇴를 거듭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천안 전투이후 장항선 방향 진격로가 열리면서 군산을 거쳐서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하는 길이 열려버렸는데 해당 방향을 담당할 미군이 없으므로 한국군의 붕괴된 부대인 5사단 잔여병력, 7사단 잔여병력, 경찰, 한국군 해병대들이 이를 떠맡아야 했으며 장항-군산-이리 전투 등의 전투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북한군 4사단과 북한군 6사단이 전라도를 점령하고 경상도 서쪽 방향으로 거대한 우회를 하는 일이 터지고야 한다. 미국이 이걸 알아차린 것은 대전 전투 패배 이후 방어선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항공정찰로 전라도에서 북한군이 쾌속진격하는 것을 목격한 후였다.


2.6. 미 공군의 활약[편집]


미 공군의 개입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이었으며 국군의 지연작전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물론 국군의 지연작전에서 국군의 처절한 살신성인, 초인적인 희생정신이 있었지만 미 공군의 화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것도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물론 오폭으로 인해 국군의 기동력이나 화력을 상실시킨 사건도 있었고, 민간인 학살사건[32] 등의 문제점도 있었으나 미 공군의 업적은 너무나도 많아 여백이 부족할 지경으로 엄청나게 많다. 현대에서도 제공권의 확보가 얼마나 전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예 중 하나이다. 미 육군이 군축의 여파에서 허덕이는동안 공군은 개전 3일차에 평양을 폭격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북한군의 주간기동을 봉쇄했다는 점일 것이다. 막강한 소련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습을 열악한 화력을 가진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방어하기가 어려웠는데, 미 공군의 주간 폭격으로 인해서 북한군의 전차와 북한군의 주간공습(攻襲)이 봉쇄되자 전차 자체의 효용성이 크게 저하된다. 지금도 야간에 전차를 사용한 전투는 상당히 어렵다. 백선엽 항목에도 나와 있는 명언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이 점을 노려서 국군이 북한군에게 기습을 가해 승전보를 울리기도 하였다. 즉, 북한군과 한국군의 가장 큰 전력차인 전차의 주 활동시간을 봉쇄해 버림으로써 한국군의 지연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만약 미 공군의 화력지원이 없었다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변변치 않은 무기로 막아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실전 사례에서 증명되었지만 변변한 중화기 지원이 없는 보병간의 싸움에는 1호 전차치하 같이 대전차전에서 부실한 전차들도 보병에게는 그야말로 사신으로 변모한다. 하물며 대한민국 국군이 상대하는 전차는 T-34였다.


3. UN군과 공산군의 전력 비교[편집]


기본적으로는 UN군이 우세하지만 UN군의 주력인 미군이 2차대전 후 대규모 군축의 타격을 입어서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2차대전에 비해서는 큰 힘을 쓰지 못한 것이 눈에 보인다. 특히 전쟁 초반에는 이게 과연 2차대전을 승리한 미국이 맞는가 싶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미군 참전과 역할을 참고하라.


3.1. 보병[편집]


전쟁 초반 보병의 훈련 경험과 장비 측면에서는 북한군이 위였다. 미군, 영국군, UN군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상당수의 정예병 군인들이 전역했고 지휘관들과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신병들이 많았다. 거기에 승전국이라는 입장이고 큰 전쟁을 두번이나 치룬 상황에서 당장 또다시 큰 전쟁은 안 일어날 것으로 판단하여 대대적인 군비 감축과 훈련 부족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일본에 주둔해있던 주일미군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기동하는 트럭이나 전차, 장갑차같은 이동 수단이나 무기는 가동률이 떨어졌고 포병이나 보병 등은 훈련 부족으로 당시 북한군에게 밀렸다. 얼마나 훈련부족이었는가 하면 한국군이 중대훈련까지 마친 상황이라면 주일미군은 대대훈련을 위한 검열단계에서 머무를 정도로 거기서 거기인 상황이었다.

거기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소수의 군사고문단 이외에는 주둔하지 않았고 지형지물을 익히지 않아 지리적 이점은 북한군이 우위였다.

그에 반해 북한군은 국공내전 당시 중국군 내부의 조선인 부대 3만명을 편입시켰고 구 일본군 출신, 팔로군 출신의 경험자들을 지휘관으로 삼았으며 소련의 군사 고문단의 훈련을 받아 사단급까지 훈련을 마치고 소련제 무장으로 장비한 군인이 육, 해, 공군을 합쳐 20만명 이상이었다.

이러다보니 미군의 주요 전력이 미 본토에서 한반도로 넘어올 때까지 일본에 주둔해있던 주일미군은 보병으로는 열세 그 자체였다. 그 결과 전쟁 초기에는 부산 교두보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점령당하고 스미스 대대의 패퇴, 딘 소장의 생포 등의 패배의 치욕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 미 본토와 UN 가입국들에게서 주요 전력이 한반도로 건너왔고 2차 세계대전의 경험자들인 예비군도 투입되어 있어서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중국군이 조선인민군을 돕기 전까지 거꾸로 조선인민군이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무기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UN군이 우수했다. 소총은 소련제 볼트액션 소총인 모신나강보다 우수한 반자동소총인 M1 개런드와 카빈 소총을 사용했다. 소총 이외 보병화기인 기관총, 기관단총, 박격포, 수류탄을 전부 설명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길고 화력이나 구경이 비슷했기에 넘어간다. 다만 가장 큰 차이점은 물량이다. 미군은 본토에서 보관하거나 운용중인 무기를 사용했고, 일단 의회가 지갑을 열고 공장을 돌려 '민주주의의 조병창'을 가동시킨 순간부터 물량에 있어서는 전혀 딸릴게 없었다. 반면 조선인민군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지만 전쟁중 손실되는 양을 보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북한 내부에 있었던 군수공장들은 대부분 미 공군과 영국 왕립공군, 남아공 공군 등의 UN군 항공세력의 근접항공지원 작전 등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기에도 해상과 공중이 막혀있었고 육로로는 시간이 너무 걸렸고 그마저도 제공권이 빼앗긴 상태라 보급로가 폭격당해 보급에 차질이 생긴다.


3.2. 포병[편집]


기본적으로 포병 전력은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북한군의 최대전력은 122mm 평사포와 견인 곡사포, 그리고 100mm 대공포, 76.2mm 야포였는데 당시 소련 기준으로 대구경 화력인 203mm, 152mm는 제공되지 않았다.

반면 미군의 주요 화력인 M115 8인치 곡사포, M1 블랙드래곤 곡사포, 155mm 곡사포, 105mm 곡사포, 90mm 대공포와 대전차포는 품질면에서 공산군 측보다 우월하였고 운용인력들 수준도 우수하였다.

그리고 역시 물량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또한 전쟁이 발발할 당시 북한군의 야포 보유량은 많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최대 화력인 122mm 포도 100문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신생국인 북한에서 저 정도 화력을 지닌 정도면 대단하기는 한데 상대가 미국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물량도 화력도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당시의 미군 포병 편제는 현재의 미군보다 그 수량면에서는 더 많다.

다만 전쟁 초반에는 기습적인 개전 + 주일미군에도 중화기가 부족 + 재고는 세계 각지에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신규생산능력은 군축으로 사망일보직전 등의 사례가 겹쳐서 미군도 충분한 화력을 발휘할 장비와 탄약이 부족한 실정이었으며 낙동강 방어전 중반에는 비축해놓은 105mm 야포탄이 고갈 직전이라 미국 본토에서 수송선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고속으로 항진해서 간신히 포탄 공급을 하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3.3. 기갑[편집]


북한의 기갑전력은 제2차 세계대전 소련이 주 전력으로 운용했던 T-34-76T-34-85 중형 전차와 SU-76M 경자주포였다. 이 기갑차량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주력전차로 상당히 우수한 성능을 지녔지만 미군의 상대가 되기는 힘들었다.티거잡던 IS-2나 IS-3를 줬다면 모르지만 나중에 중공군이 IS-2와 SU-122등의 중전차를 끌고 왔지만 미국등의 연합군은 M46 패튼, 센추리온 전차등의 현대 1세대 MBT까지 끌고와서 전황을 크게 뒤집긴 어려웠다.

미국의 주 기갑전력은 M4A3 셔먼 이지에잇(E8)M26 퍼싱, 당시 최신전차인 M46 패튼이었고, 그 외에 M24 채피와 국군에 공여된 M36 GMC가 있었다.

전쟁 초반에는 분명 미군이 기갑전력에서 북한군에 밀렸다. 화력, 방어력이 떨어지는 M24 채피로 T-34/85를 상대했는데, T-34 1대를 반파시키는 동안 채피 7대가 완파되는 등 북한이 상당히 선전했다. 이때 미국이 북한군의 기갑전력을 얕본 것도 있었으나 당장 주일미군에서 사용가능한게 M24뿐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기갑전력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자 상황은 180도 바뀌게 된다.

먼저 M26 퍼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티거 전차를 잡기 위해 개발한 전차다. 이 전차는 M3 90mm 포를 장착했으며 체급 또한 T-34보다 10톤 더 나가는 물건이다. M26 퍼싱의 개발용도가 중(重)전차 대적용인걸 감안했을 때 한 체급 아래인 중형 전차라면 상대하는게 큰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퍼싱에 장착된 90mm 포의 막강한 위력에 T-34는 많은 수가 파괴됐다. 다만 고질적인 엔진과 변속기 문제로 인해 초반에 투입된 퍼싱이 엔진 트러블 등으로 기동불능이 되어 버려지기도 했다.

M46 패튼은 퍼싱의 개량형으로 변속기를 바꾸고 엔진을 강화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T-34에게 밀릴 일은 없었다.

M4A3 셔먼은 90mm 포보다 위력이 약한 76.2mm M1 대전차포를 장착했지만 신형 철갑탄(HVAP) 사용시 T-34를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고 전차병의 높은 숙련도가 뒷받침되어서 북한군보다 유리했다.

이 외에 전쟁 중반에 온 영연방군 소속 기갑전력 중 캐나다의 M10 아킬레스 대전차자주포가 있는데, 셔먼 VC, 셔먼 IC, 셔먼 IC 하이브리드에 장착된 것과 같은 17파운더 덕분에 어떤 공산군 전차든 관통할 수 있었다.

당시 최신예, 최강 전차였던 영국군의 센츄리온 Mk.III와 현재도 몇몇 국가에서 쓰이는 중인 M47 패튼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다만 센추리온 전차는 북한 기갑전력이 괴멸된 상태에서야 도착해서 활약했다는 게 아이러니긴 하다.

더군다나 물량면에서도 북한은 불리했는데 셔먼 이지에잇이 500대 이상, 퍼싱이 300대, 그리고 패튼이 200대 이상으로 다른 기갑전력과 합치면 1600대 이상이 참여했다고 한다. 반면 북한군의 초기 물량은 T-34 계통이 242대, SU-76 경자주포가 150대 이상이고 후에 지원된 물량을 합쳐도 500대를 조금 넘는 숫자로 물량에서조차 많이 밀렸다.

거기다 기록에 따르면 철갑탄은 5발 밖에 탑제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고폭탄이었다고 한다. 이게 일격에 격파시키거나 방호력이 낮은 채피정도면 문제 없겠지만 동급 전차도 아니고 성능이 우위인 전차를 상대로는 한참 부족했다.

또한 북한의 전차 운용 방식에는 허점이 있었는데 소련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다보니 소련의 방식을 체용했고, 기갑전력의 기동력을 살려 전차를 앞세워 진군하지 않고 보병이 선두에 서고 보병의 속도에 맞춰 진군해 기동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T-34보다 성능이 위인 IS-2 스탈린 전차를 이끌고 왔지만 IS-2가 투입된 시점은 정면 충돌보다 국지전이나 고지전이 주로 벌어졌던 시점이었기에 이렇다할 전차전은 벌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IS-2들은 참호에서 고정포대나 자주포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충돌이 벌어졌다 해도 중공군이 보유했던 IS-2는 50여대 안팎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3.4. 해군[편집]


파일:아이오와_625전쟁.png
1952년 10월 17일, 전함 BB-61 USS 아이오와주포 사격을 가하고 있다.

세계 2위였던 일본 제국 해군을 완벽히 꺾은 미 해군이[33] 동구권에서도 가장 약한 해양력을 가진 북한 앞에 밀어닥쳤으므로, 바다는 완벽한 UN군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마무리될 즈음에 공산군 측이 점령한 바다동해, 서해 그 어디에도 단 한 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압록강, 두만강 하구에서 서해, 동해로 물이 흘러들어가는 곳까지가 UN군의 점령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공산군에게 해군 같은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정전협정을 하면서 UN군 사령관이 서해 5도를 기점으로 해서 NLL을 그은 것이다. UN군과 미군의 군사지원으로 성장한 한국 해군이라면 한반도 전역에 모든 을 차지한 채로 휴전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러기에는 관리해야할 구역이 너무 많고, 북한이 이러면 바다 이용을 하기 어렵다며 휴전 협정을 반대하는 통에 전략적 요충지인 서해 5도를 제외하고서는 전부 북한에게 넘겨줬다.

미 해군은 당시 공산 측에는 한 척도 없던 항공모함, 호위 항공모함을 11척이나 투입한 데다 아이오와급 전함, 각종 경/중순양함, 기어링급/플레처급/알렌 M. 섬너급 등의 구축함이 있었고, 타코마급 호위함, 캐논급 호위구축함, 버클리급 호위구축함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전투함, 소해함, 예인함, 유류수송함이 있었다. 다른 UN군을 포함하면 항모만 23척을 투입했다.

반면 북한에는 전투함이라고 부를만한건 G-5급 어뢰정과 여타 어뢰정 다수, 1천톤급 무장수송선 2척, 소형 발동선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발동선은 기관총이나 기관포를 다는게 고작이었고 배수량도 100톤이 안 됐다. 해군만큼은 소련 해군을 불러와도 미 해군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북한, 소련, 중국 세 나라는 항모는 한 척도 없었고 전투함의 숫자도 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성능상으로도 유리하다고 볼 수 없었다. 당시 중국 해군은 대만 해군과 비교해도 질, 양 모두 열세였고 소련 해군 역시 미 해군에 비해 열세가 명백한데다 그나마 소련 해군의 주력 함선들은 대부분 흑해, 발트해 등 유럽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서 당장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소련 극동함대의 전력은 당시만 해도 매우 빈약했다.

반면 미국은 호위항모를 포함해 전쟁발발시 15척의 항공모함을 운용했고 전쟁 종전쯤에는 34척을 운용했다. 거기다 2차대전 당시 엄청난 수의 전투함을 만들었고 대전이 끝나고 많은 수가 퇴역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것을 다시 운용하며 해군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여기에 당시 북한은 드러내놓고 군사지원을 할 수 없다는 소련의 지침과 서해와 동해를 동시에 수호할 수 없는 북한의 지리적 요건, 우방국인 중국과 소련이 육로로 연결되어있다는 점이 겹쳐 잠수함같은 비대칭전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000톤급 무장수송선 1척이 대한해협에서 백두산함에 격침당하고[34] 어뢰정 4척은 미 해군에 의해 [35] 사실상 북한 해군은 해상전 능력을 상실했다. 결국 해안에 기뢰를 깔고, 해안포를 설치해서 어떻게든 미 해군에 대항해 봤지만 결과는 4척의 소해함과 1척의 원양예인선 격침이 전부였다. 다만, 이 외에도 기뢰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의 지리산함[36]이 격침당하는 피해가 있었다.

그도 그럴만한게 기뢰는 둘째치고라도 해안포로 전투함을 잡으려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야 맞힐 수 있는데 미군의 전투함은 해안포 사정거리 밖에서도 대지타격이 가능했다. 대표적으로 아이오와급 전함 같은 전함급이나 순양함급 함선들은 북한 해안포 기지가 발견되면 그 즉시 사정거리 밖에서 주포포격으로 포대 전체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게다가 설렁 해안포를 함선에 맞췄다 하더라도 어지간한 위력으로는 전투함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없고 오히려 위치만 노출될 뿐이었다. 여기에 기뢰 역시 미 해군의 소해능력이 뛰어났고 일본 해군 출신이었던 인원들이 소해정을 운용해 기뢰를 제거했던 덕분에 그 피해가 적었다. 다만 기뢰 제거에 필수적으로 딸려오는 시간 소모 때문에 차기 작전에 문제가 발생했을 뿐이다.

미 해군 함재기의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 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이다. 이렇게 수치상으로만 보면 꽤나 피해가 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항공기 손실에 비해 사망자가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피해"는 기스난 것까지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해권을 일찌감치 빼앗긴 북한군은 미 해군 전투함정 및 해군 항공 전력의 지상지원과 대지타격 능력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아이오와급 전함이 쏟아낸 16인치 포탄을 비롯해 각종 포탄만 400만 발 이상이니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3.5. 공군[편집]


UN군 폭격기가 떴다 하면 공산군들은 겁을 먹고 땅굴 속에 숨기 바빴다. UN군 정찰기, 폭격기가 뜨는 동안에는 중국군의 주간 기동이 차단되는 셈이었다.

양측이 뒤엉켜서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UN군 폭격기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폭격을 퍼부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개발한 Yak-9 전투기와, Il-10 공격기 겸 경폭격기, 그리고 Po-2 등 소수의 구식 야간 폭격기, 일본이 두고 간 하야부사하야테 전투기를 전부 합쳐 230기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당시 신생국치고는 강한 전력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상대가 미국이었다.

단, 사족이지만 북한 공군이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항공기 전력은 사실상 이용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평양비행장에 방치되었던 Ki-43 하야부사를 수리해서 도색까지 칠하고 시험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결과가 영 아니었다고 전해지고, 결정적으로 이후 소련 전투기들이 대량으로 들어온 다음 아예 기록이 사라졌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애초에 유의미한 전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기는 하다. 대표적으로 2차 대전에서도 노획 항공기들은 부품 호환이 안 되는 관계로 대부분은 노획해도 연구용이나 기만작전용으로 소수만 쓰였고 대부분은 다 스크랩되었다.

북한이 전쟁 초반에 사용한 소련제 항공기는 2차대전 프로펠러 전투기다. 2차 세계대전 당시라면 모를까 시대가 제트 전투기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에 맞춰 미 공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한 프로펠러 전투기는 아래에 서술할 일부 고성능 기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퇴역시키고 예비역으로 돌리거나 신생국에게 넘기거나 표적 연습으로 처분했다. 대신 제트 전투기를 개발, 운용하였는데 공군 전투기는 제트기인 F-80 슈팅스타F-94 스타파이어F-84 썬더제트, 고성능 프롭기 F-82 트윈 머스탱이 있었고 해군 전투기는 제트기 F9F 팬서, F3D 스카이나이트, 고성능 프롭기 F4U 콜세어F7F 타이거캣이 있었다. 폭격기와 공격기로는 2차대전 당시 일본에 원자 폭탄을 떨어트린 B-29 전략폭격기와 B-26 인베이더 지상공격기, A-1 스카이레이더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수송기, 연락기, 초계기 등 모든 전력이 북한 공군과 비교가 안 됐다.

이 외에도 영연방의 기체들도 활약했다. 호주 공군의 제트기 글로스터 미티어 F.8은 공대공 전투에선 제트기에 밀렸지만 레시프로 상대로는 공대공 전투에서도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나중에 MiG-15가 등장한 이후로는 지상 공격 임무에서 활약했다. 영국 해군의 고성능 프롭기인 슈퍼마린 시파이어 FR.46/47은 지상 공격과 정찰에서 활약했으며 당시 최강의 프롭기였던 호커 시퓨리는 북한의 MiG-15를 격추하기도 했다. 해상 전투/정찰기로 페어리 파이어플라이가 쓰이기도 했다. 이외에 드 해빌랜드 호넷이 참전을 위해 실려오다가 종전을 맞았다.

승무원들의 훈련 경험과 숫자도 큰 차이가 났는데 북한 공군은 소련에서 기체가 인도되고 훈련을 거쳐 180명의 조종사가 있었지만 한 기체당 한명씩 잡아도 50명 가량 부족하고 예비 인원까지 포함하면 150명이 부족했다. 기존 승무원들조차 훈련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조종사는 20~3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기체가 인도된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 8월 15일에 맞춰 통일하겠다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게 패착이었다.

예비 부품도 부족했는데 부품은 전체 항공기의 20~40%만 모였고 파손되어도 일부 항공기는 수리조차 불가능했다. 한술 더 떠서 북한에 인도된 기체 중 정비는 2, 3번 받은게 고작인 기체도 있었고 잡동사니로 만든 기체도 있어서 전쟁 중 추락하거나 기동조차 안 된 기체도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이러한 조건이다 보니 2차대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조종사들과 우수한 성능의 전투기를 보유한 미 공군이 일찌감치 제공권을 장악하고 북한 전역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그나마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과 중국에 MiG-15 제트 전투기가 제공되고 역시 2차대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소련 조종사들이 참전하면서 미 공군의 모든 제트 전투기에 우위를 점했고 B-29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B-29는 2차대전 상대한 것이 괴멸직전의 답없는 일본 육항대/해항대였기에 그 충격이 더 심했다.

하지만 미 공군과 큰 전투를 벌이기 싫었던(=확전을 염려했던) 소련이 작전구역을 북한 지역으로 한정지은데다 MiG-15에 맞서 미 공군이 F-86 세이버 개량형을 투입하면서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고, B-29 역시 주간폭격에서 물러났을 뿐이지 전쟁 내내 야간폭격기로 계속 운용되었다. 이후 B-29이 물러난 주간폭격에는 비교적 속도가 빨랐던 A-26이 대신 투입되었다. 여담으로 계란볶음밥 먹다가 사망한 것으로 유명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사망원인 역시 A-26이 투하한 폭탄에 의해서였다.


3.6. 비대칭 전력[편집]


결과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라는 전력을 지닌 미군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미국은 당시 일본에 사용했던 원자폭탄을 100개 이상 보유했고 중국군의 참전에 전선이 밀리자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이 계획에 대해 검토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의 반대와 원자폭탄을 사용할시 소련의 참전 위험성과 중국까지의 전선 확대로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유엔군 내부에서는 원자폭탄 사용의 반대 의사가 높았고 북한을 점령하는것이 아닌 휴전을 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자 원자폭탄의 사용은 불허했다. 맥아더는 원자폭탄 만이 중국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리지웨이의 활약으로 전선을 밀어붙이고 있었던지라 그 의견 역시 의미가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맥아더의 해임으로 원자폭탄의 사용은 불발되었다.


3.7. 보급 및 수송[편집]


보급에서도 UN군과 공산군은 압도적인 격차가 있었다. 전투기나 전차를 운용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유류를 예를 들자면, 북한은 원산과 장진호 각 방면에 연간 12만 5천 톤의 정유 공장을 두고 있었고 루마니아를 통해 유류 10만톤을 구매해서 상당량의 유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계산대로면 최소한 북한이 보유했던 유류는 20~30만톤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은 해상으로 실어나른 유류량이 무려 약 2,188만톤이었으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양이다.

더군다나 미군은 미 본토와 일본의 군수 기지를 활용해 물자를 조달했다. 북한은 부족한 해군력, 제해권과 제공권의 상실로 인해 미군의 군수 공장을 타격할 수 없었다. 덕분에 UN군은 탄약, 부품, 유류 등 군수 물자를 비교적 안전하게 전선에 보급했다.

반면 북한은 미 공군과 미 해군의 타격으로 군수 공장들이 대부분 완파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공장들도 심각한 타격을 입어 중국에서 생산된 물자들을 지급받아 버티는 실상이었다.

게다가 북한은 처음 생산된 무기와 탄약, 유류를 2개월 분량으로 맞추고 있었는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소모율이 너무 커지고 미 공군의 공습으로 병기고나 유류저장소가 파괴되면서 버티는데 한계가 있었다.

수송면에서도 당연히 미군이 훨씬 우위였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미국 본토와 일본에서 병력과 무기, 물자를 보급수송선과 수송기를 이용해 안전하게 수송했고 해상쪽으로는 타격이 없던 부산항에 물자를 수송해 열차나 트럭을 이용해 운송했다.

반면 북한쪽은 빼앗긴 제공권으로 트럭이나 열차로 물자를 수송해도 공습으로 파괴되기 일쑤였으며 후에 소련이 17000대의 트럭을 제공했지만 길어진 전선과 부족한 유류, 미 공군의 공습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 큰 의미가 없었다. 해상과 공중에서 보급받을 수 없어 열차를 통해 군수물자를 운반한 공산군이지만 이 역시 미 공군과 해군의 폭격으로 인해 철도가 파괴되고 운송이 차단되었다.중국군의 개입 이후 교량을 다시 만들어 공습을 막기 위해서 힘썼는데 한국 공군이 벌인 작전중 가장 큰 활약인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이 이때 실시되었다.

식량면에서는 미군은 안정적으로 전전선에 병사들에게 C레이션을 비롯한 전투식량을 나눠줬는데 UN군을 비롯해 포로나 상황에 따라서는 민간인들에게도 식사로 줄만큼 식량 배급이 잘됐다고 한다.

다만 낙동강 전선 방어전 당시엔 전선에 보급할 탄약, 국군과 피난민을 먹일 식량 수송만으로 수송쿼터가 가득차 1달치 식량을 저장하는 목표를 오랫동안 달성하지 못했다. 유통기한 지난 C레이션을 까보고 먹어도 된다 판정해 배급했을 정도로, 1일 수송량=1일 소모량 일 정도로 피말리는 상황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식량배급이 처참했다고 하는데 본래부터 북한 지역은 남한보다 농업 생산력이 뒤떨어지는 편이었고 북한 주민들로부터 애국미라는 명목으로 쌀을 거둬들여 4만 8400가마를 모았다고 하지만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할 때 상당량의 쌀을 현물로 줬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군은 각 지역을 점령하고 점령지에서 강제로 식량을 공출했으나 이로인해 점령된 지역의 민심이 등을 돌렸다. 게다가 이런 방식의 약탈에도 한계가 있고 수송능력이 떨어져 병사들의 배급량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4. 국군의 무장강화[편집]


전쟁발발 이전에는 호전적인 이승만 대령의 발언으로 미국은 남한이 공격용 무장을 보유할 경우 선제공격을 가해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한국의 역량 부족으로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무장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국군 입장에서는 시원찮은 병기들을 계속 써야 했으나 전쟁이 터지고나서 그런 문제를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장 강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다만 전쟁 이전에도 미국이 한국군 전력을 강화시켜주고 있었으니 전쟁 이전에는 신경도 안썼다는 식으로 오해하지는 말자. 전쟁 초반에 한국군이 굴린 장비도 전부 미국한테서 받은거고 추가적으로 전투기 전차, 초계정, 함포 등을 지원할 계획도 잡혀 있었다. 실현되기 전에 전쟁이 터져서 그렇지...

차이점이라면 전쟁발발 이전에는 미국이 한국정부가 제시한 북진론을 막고 자신들이 준 장비를 적응하기 힘들어할까봐 천천히 적응시켜가면서 한국군 전력을 강화시켜주는 느긋한 방법이었다면 전쟁발발 이후에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봤기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대대적으로 한국군 전력을 강화시켜주는 폭발적인 방법으로 방법의 차이만 크게 바뀌었을 뿐이었다.


4.1. 보병[편집]


육군의 기본 무장인 소총을 일본제 소총인 아리사카에서 M1 개런드M1 카빈으로 바꾸었다. 이 소총들은 사정거리도 길고 볼트액션 방식이 아닌 반자동 방식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일본제 소총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M1 소총들은 전쟁전의 국군에서도 가지고는 있었지만 충분한 수량은 아니었고 국군 전체를 무장시키기에는 수량이 부족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후 보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국군 전부를 무장시킨 것뿐만이 아니라 학도병까지 무장시킬 정도로 많은 양이 지급됐다.

물론 당시의 한국군 병사 체격에는 큰 M1 개런드나 M1918 브라우닝이 휴대하기에 불편하고 무겁긴 했지만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지긴 어려웠고 적어도 공산당측의 모신나강을 비롯한 각종 볼트액션 소총보다는 성능이 우월했으므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대전차무기로는 기존의 2.36인치 바주카로는 북한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파괴하는데는 위력이 약해 3.5인치 슈퍼 바주카가 지급돼 T-34를 상대할 수 있게 됐다.


4.2. 포병[편집]


북한군에 비해 짧은 사정거리와 적은 수량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던 포병은 비약적으로 능력이 증가되었다.

곡사포로는 기존 M3 105mm 곡사포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성능이 좋은 M2 105mm 곡사포가 지원되었고, 그외에 박격포나 곡사포, 대공포 등도 충분한 수량이 지급돼 국군의 무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지원받은 포중에는 155mm 곡사포도 있었는데 이 포는 당시 북한이 가지고 있던 최고 화력인 122mm 곡사포나 평사포보다 화력면에서나 사정거리에서나 우위에 있었다.


4.3. 기갑[편집]


개전 당시 국군의 기갑장비는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흥남철수작전에서 파괴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씨가 말랐다. 정부에서는 국군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게 하기 위해서 경상남도 동래군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과를 설치하고 전차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전차병이 워낙 부족해 소년전차병을 모집해 부족한 인원수를 채워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인원이 아니라 전차였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서 전차를 생산한다는건 불가능했으므로 전차를 다른 나라로부터 원조받아야하는 입장이었고 이걸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하지만 미국 또한 미군이 사용할 전차도 수량이 빠듯해서 전차 지원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급한대로 지원받은게 M36 GMC 대전차자주포였다. 이 자주포는 주포의 위력에서만큼은 M26 퍼싱 전차나 M46 패튼 전차와 동급이었다.[37] 다만 방어력이 떨어지고 오픈탑식 포탑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일단 북한군의 주력전차인 T-34는 유엔군의 공격으로 괴멸되었고 중국군 개입 후에는 전차들 간의 전면전이 펼쳐지지 않아 위험요소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서 M36 잭슨이 지원되었다. 교육용으로 처음에는 M36 잭슨 전차를 도입했는데 원래 분류는 대전차자주포지만 국군에선 경전차로 분류했으며 처음에 6대가 도입되었고 추가도입이 계속돼서 대한민국 최초의 전차부대인 51, 52 전차중대를 창설하고 소년전차병으로 이루어진 57 전차중대를 창설했다.

총 9개 전차중대가 창설되고 각 중대는 당시 미국 전차중대 편제기준으로 M36 GMC 구축전차 22대, M32 구난전차를 1대씩 배치했다. 198대의 M36 GMC 구축전차를 9개 전차중대로 편성한 뒤 3개 전차중대를 엮어 3개 전차대대를 편성하여 각 대대당 66대의 M36을 보유했다. 잭슨 전차는 비록 완벽한 전차로 보기는 힘들었지만 국군 최초의 대전차무기 장비 차량으로 전선에 있는 국군의 사기를 높이기에는 충분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16대를 지원받았다. 그외에도 M24 채피 경전차를 1개 중대급으로 교육용으로 도입했는데 전쟁 초반 T-34에게는 상대가 안되던 그 전차가 맞다. 일단 교육용으로 도입됐기에 전차병 양성에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2~3개월 뒤 대만으로 넘어갔다.

해병대의 전차도입이 육군보다 빨랐는데 해병대는 M4A3E8 셔먼 전차를 1개 중대급으로 도입했다. 76.2mm 주포에 신형 철갑탄을 사용하면 T-34를 격파하기에는 충분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상당수의 미군이 철수하면서 총 388대의 M4A3E8이 국군으로 넘어오고 M36 잭슨 구축전차 216대를 포함해 총 604대의 전차를 보유하게 된다.

그 외에 치하 개량형크롬웰 전차도 노획한 뒤 아주 잠시동안 운용한 경력이 있다. 치하 전차는 공산당측에서 노획하거나 한국 내에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방치된 걸 고쳐서 운영한 것으로 보이며 이 중에서 북한군에게 재노획된 것도 있어서 존재가 드러났다. 크롬웰 전차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을 다시 노획한 것이기에 영국군이 전차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다시 회수해갔다.


4.4. 해군[편집]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손원일 제독이 백두산함 이후 새로 구입한 지리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까지 한국에 들어왔다. 450톤급의 이 함정은 구잠함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 잠수함을 잡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 백두산함과 마찬가지로 돈이 부족해서 포탄은 100발 정도 밖에 못 실었으나, 전쟁이 터지자 미국이 포탄을 꽉 채워줬다. 북한 해군은 전투함이 없었고 그나마 쓸 수 있던 1000톤급 수송선, 어뢰정 4척은 이미 대한해협 해전주문진항 해전에서 한국 해군에게 격침되었다. 남은 군함들은 대부분이 수송선이었고, 소형 발동선 등은 40mm나 20mm 기관포를 장비한 것이 고작이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해군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1951년, 한국 해군에게 호위함 5척, 구잠함 2척, 구잠정 5척, 어뢰정 4척, 상륙정소해정, 유류정과 예인정 등 약 30척의 함정들을 한국 해군에게 제공했다. 구잠함은 한국 해군이 운용하던 백두산함과 똑같은 함정으로 한라산함과 묘향산함으로 함명을 지었고 다른 백두산함과 마찬가지 함포지원사격으로 적 지상군을 격멸했다. 여기에 PCS 수성급 구잠정 5척도 인수했고 미 해군의 PT 어뢰정 갈매기급 4척도 인수했다.

호위함으로는 PF급 만재 배수량 2400톤급의 타코마급 호위함을 인수했다. 이 배는 전쟁 전 손원일 제독이 돈주고 산다는데도 미국이 안판다고 했던 전투함이다. 이 함들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미 해군에서 운용했을 때는 함종을 빨리 받은 대동함이나 낙동함같이 일찍 만들어졌지만 한국에 도입된 시기에 맞춰 함명과 함번을 정했기 때문에 미 해군에서 사용한 선체번호와 함명에 상관없이 이름을 지었다. 또 독특한 점이 있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70척의 타코마급 호위함중 30척이 소련에 랜드리스로 넘어가 전쟁이 종전되고 27척을 돌려받았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드는 경비를 삭감하고자 그냥 넘겨줬다.

처음 타코마급 호위함 2척을 인계받아 두만함과 압록함으로 명명했고 이 함정들이 신미도 전투에서 북한군 전투기들과 교전을 벌여 1대를 격추시키고 4대에 큰 손상을 입히는 전과를 세운다. 이중에서 압록함은 미 해군 수송함과 충돌사고가 일어나 중파되었고, 다시 미국에게 돌아갔다. 결국 미 해군은 압록함에 수리불능판정을 내리고 연습용 표적함으로 지정해 파괴했다. 그러나 신미도 전투로 우리 해군은 미국에게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이에 2척을 더 받아 낙동함과 대동함으로 함명이 정해졌다. 나중에는 새로 PF급 호위함을 받아 임진함이라고 명명했다. 북한 해군의 궤멸로 더는 해전의 소요가 발생하지 않으니 우리 해군은 지상에 대한 함포사격과 철도파괴를 주임무로 삼았고, 해안의 깔린 기뢰들을 제거하는 소해임무 역시 수행했다.


4.5. 공군[편집]


제일 빨리 지원이 이뤄진 곳은 공군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당장 전투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더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미국은 주일 미 공군에 있는 전투기를 지원한다. 이때 지원받은 게 F-51 머스탱이다.

2차대전 당시 '하늘의 황제'로도 불렸던 머스탱이었지만, 당시 이미 프로펠러 전투기들이 퇴역하고 제트 전투기가 대세가 되던 시대였는데, 그럼에도 이러한 전투기를 준 건 당장 제공할 전투기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일 미 공군이 보유하던 전투기는 당시 미국의 최신 제트 전투기인 F-80 슈팅스타 380대와 F-82 트윈 머스탱 32대, A-26 인베이더 지상공격기 29대, B-29 폭격기 30대 정도였다.

하지만 이중에서는 지원될만한 항공기가 없었다. F-80 슈팅스타는 당시 미국의 최신 제트 전투기여서 미국으로서는 넘겨주기가 껄끄러웠고, 설사 넘겨줬다 하더라도 그 당시 한국 공군의 역량상 슈팅스타를 다루는건 불가능했다. 한국 조종사들 중 당장 장기간 훈련을 받지 않고도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었던 건 고작 10명 정도였다. 게다가 슈팅스타는 제트기인만큼 프롭 전투기들보다 유지 보수하는데에 인력과 시간,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서 정비병조차 제대로 된 인력이 없던 당시 한국 공군이 다루기는 무리였다.

한국 공군이 익숙한 건 일본 전투기였는데 이 비행기들은 우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격투전을 벌이는데에 특화되어있었다. 반면 미국제 전투기는 기체가 무겁더라도 빠른 속도와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한번 공격할 때 확실하게 공격하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상승 속도나 안전 고도 확보, 우회같은 점에서 큰 차이가 나며 그 차이는 단기간의 훈련으로는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미국제 항공기 가운데 국군이 다뤄본건 L-4, L-5연락기와 T-6 텍산 연습기가 전부였는데, L-4, L-5 연락기는 제대로 된 철제 항공기가 아닌지라 논외로 치고 T-6 텍산 연습기가 그나마 익숙해질 수 있었던 기체였지만 당장 텍산 연습기를 건국기로 부르던 당시 상황에 텍산 연습기를 타고 월북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종사 10명한테 맡겼기 때문에 항공기 지원은 10대밖에 못 받았다. 숙련도 부족으로 F-80 슈팅스타는 다룰 수 없어서 제외. F-82G 트윈 머스탱은 장거리 호위전투기로 장거리 비행은 가능했지만 당장 한국군에게 필요한 지상지원이 불가능했다. 지상지원이 불가능한건 아니었지만 이 전투기 자체가 지상공격을 하도록 만들어진 전폭기가 아닌데다가 머스탱 2대가 묶인 전투기인지라 조종사가 두 명은 필요했다. 10명이 2명으로 나뉘어 5대 밖에 지원 받지못하니 기체 대수가 줄어 문제가 됐던 것. 물론 열 대의 전투기로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건 불가능이지만 어찌되었건 당시에는 기체 대수까지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A-26 인베이더 지상공격기는 지상공격기로 특화되어있지만 전투기가 아니다. 지상지원이 필요하다고는 하나 적 공군이 아직 건재했고 공중전도 감안해야된다는 조건도 겹쳐 제외. 또한 A-26을 조종하려면 숙련된 조종사가 2~3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력 문제도 섞여있었다. B-29는 폭격기인지라 위와 같은 이유로 일찌감치 제외. 미 해병대같은 경우라면 F4U 콜세어A-1 스카이레이더 같은 항공기도 고려해볼 수 있지만 당시 일본에는 없었다.

결국 어떤 전투기를 제공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선정된게 F-51 머스탱이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이 종료되고 2차 대전 당시 주력전투기 대부분을 퇴역시켰다. 제트 전투기를 다수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포함한 기존에 퇴역시킨 프로펠러 전투기들의 유지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수량은 해병대에서 운용하고 예비역으로 보관했고 나머지는 고철처리하거나 신생국에 헐값으로 팔았다. 일본에 보관된 F-51 머스탱은 F-80 슈팅스타의 조종이 익숙하지 않아 일단 보관하고 있었던 거고 나중에는 표적연습으로 삼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전폭기라는 조건상 지상과 공중전에 활용가능하고 항속거리는 일본에서 한국까지 오는 것도 문제없고 선회속도도 괜찮으며 무장 또한 로켓부터 500파운드 폭탄, 6정의 기관총으로 강력한 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시험비행과 맥아더의 전쟁 시찰시 호위기로 뽑혀 북한군 야크 전투기를 격추시킨 전적도 있다. 하지만 장시간 훈련 자체가 불가능한 전선 상황에 일본의 기후가 좋지 않은 조건이라 6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훈련도 못받고 정신 교육만 실컷받고 7월 2일에야 날씨가 개서 이착륙 훈련을 했는데, 총 비행 시간이 평균 30분이었다(...). 전선이 불리해지자 결국 머스탱들이 대구 비행장에 착륙, 미군사고문단 딘 헤스 소령이 이끄는 군사고문단과 함께 바우트원 대대, 통칭 한판승부라고 불리는 부대를 창설했다. 훈련시간이 워낙 짧은 탓에 일본에서 한국까지 직접 비행해왔다고 한다.

첫 전투에서는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4대 2개 편대로 나누어 적군을 공격했고 전차 2대와 차량 몇대 유류 보관소 1개소 탄약 보관고 1개소를 파괴했다. 훈련이 부족해 폭탄이나 로켓을 사용하지 못하고 기관총 6정이 전부인 당시 상황에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번째 출동에서는 당시 한국 공군 최고 에이스였던 이근석 대령의 기체가 추락하면서 이근석 대령과 머스탱 1대를 잃었다(격추당한건지 아니면 표적고착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상황은 당시 한국 공군을 절망에 빠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기도 전투기지만 최고 에이스였던 이근석 대령은 한국 조종사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는데 그런 그가 허무하게 죽었으니 그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딘 헤스 소령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고, 한국 공군은 딘 헤스 소령이 이끄는 군사고문단의 지시로 훈련을 받는다.

출격 명령이 내려지면 딘 헤스 소령과 미군이 대신 나가거나 같이 출격하여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머스탱 두 대가 더 추락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에게 준 머스탱을 회수해 미 공군에 편입시키자는 의견이 미국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딘 헤스 소령이 상부를 설득하여 비행대가 해체되는건 막았다. 바우트원 대대는 전장의 상황에 따라 사천, 진해, 여의도, 제주도 등 여러 비행장을 옮기고 추가로 머스탱을 지원받아 훈련과 전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비롯한 작전들을 수행해 한국공군의 단독작전권도 되찾았다. 총 8495회 출격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100회 이상을 출격하는 조종사도 나왔으며 확인된 전과만 적 899명 사살, 건물 1770동, 차량 459대, 탄약 및 연료집적소 1285개소, 철교 및 인도교 124개소, 포진지 521개소, 철도 1014개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평양 대공습에 참전하고 유엔군이 실패한 승호리 철교 폭파를 성공시켜 한국 공군을 과소평가했던 미군이나 다른 나라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추가적인 머스탱 공급이 필요했지만 주일 미 공군이 가진 머스탱은 극소수였고 결국 미국 본토에서 주방위군용으로 운용하던 프로펠러 전투기를 찾아냈는데 미국 서부에서 운영하던 머스탱이 미국 동부에서 운영하던 P-47 썬더볼트보다 당장 한국에 지급하기에 좀 더 가까워서 P-51 머스탱이 추가 지원된 것이다.

전쟁기간에 지원받은 항공기 133대 중 80대는 머스탱이었고, 그 밖에 C-47 수송기 1대와 각종 연락기, 연습기를 제공받았다.


5. 낙동강 방어선과 남진 저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당시 대한민국은 제대로 전쟁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 데다가 국가 차원의 전쟁 계획도 없었고, 육군 차원의 방어 계획이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1950년 3월에서야 나왔다. 각 사단들이 이를 받아서 작전 계획을 짠 건 그해 5월이 되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있던 병력과 물자를 너무 이른 한강교 폭파로 제대로 날려 먹은 대한민국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서울을 대신하는 임시수도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 자리 잡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임시 수도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은 너무도 열악해 호남 방면은 사실상 방어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호남 지역에서 일부 잔여 국군 부대와 경찰 병력 등이 지연전을 펼치면서 소규모 교전을 벌였으나 전황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당시 호남 지역을 공격하던 방호산의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전투 이전까지 별다른 대규모 교전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7월 20일 대전과 전주가 북한군에게 점령된 뒤 23일 광주, 26~27일 여수 점령 등 대한민국의 방어선은 계속 동남으로 밀려나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은 대한민국의 90%를 점령한 상황이었다.

8월 초의 시점에서 미군은 산악지대에서의 방어선 건설 및 방어를 사실상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지연전의 결과 일반적으로 설치하던 길목을 막는 방어선은 쉽게 북한군이 우회해서 포위한 후 협공을 가하기 때문에 답이 없었고 충북 영동지역에서 벌어진 원형 방어진 도입 및 대규모 부대가 원형 방어진을 방어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는 북한군의 우회공격도 막아낼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포위되므로 만만치 않은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거대한 강을 방어선으로 선정하고 강 양쪽의 개활지에서 북한군이 도하를 시도할 때마다 저지하는 것이 남진을을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낙동강 전선이 유력한 지형으로 선정되었다.

파일:korean_war_north_invasion_line_kor.png
* 통영은 8월 17일 북한군에 의해 일부 점령[38]되었다가 19일에 탈환되었다.

물론 낙동강의 흐름 특성상 미군이 담당한 서부전선, 특히 칠곡~함안을 남북으로 잇는 구간에서 낙동강과 그 지류를 끼고 막긴 했지만 낙동강이 부산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남강 합류부 부터는 강을 방어선으로 삼기에는 위치, 방향이 모두 안좋으므로 거기서부터는 남해안까지 고지를 중점으로 한 산악방어선을 펼쳐야 했으며 마산 - 대구 가도등 중요한 교통로도 보호해야 했기에 마산 전투같은 산악전도 벌어진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 4사단과 북한군 6사단이 전라도를 경유해서 경상도 서부를 공격하는 우회작전을 뒤늦게 알아차린 탓에 간발의 차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하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원래는 대전 전투 패배로 이미 반신불수가 된 미국 제24사단으로만 낙동강 서부전선을 막으려고 했으나 뒤늦게서야 경상도 서부를 공격하는 북한군 사단이 2개라는 것을 알아채고 미국 제25사단을 황급하게 일선에서 빼낸 후 재배치를 해서 간신히 방어선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북한군 6사단이 목포나 여수를 점령한 이유는 원래 남침 계획에 따라서 북한 본토로부터 해상보급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한국 근처의 제해권은 유엔군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일에 쓴 2일간의 시간이 치명적이었다. 이런 곳을 점령하지 않고 그대로 경상도 서부로 진격했으면 낙동강 방어선을 제대로 만들기도 전에 돌파에 성공해서 6.25 전쟁을 북한군의 승리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북부의 경우에는 한국군이 안동같은 중요 요충지를 확보하려고 했으나 화력이 강하지 않으면 강 상류에서의 방어선은 쉽게 붕괴되고 병력도 부족하므로 결국 대구 근처까지 밀려서 영천·신녕전투같이 대구 북부부터 동해안까지의 산악전을 펼치게 된다. 동해안의 경우에는 영덕 방어전에서 최종적으로 밀리면서 포항까지 방어선이 내려갔다. 그래서 낙동강 방어선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높지가 않다.

어찌되었든 실제로 확보한 낙동강 방어선은 내부에 대구 - 경주 - 부산 - 마산 - 대구같이 원형의 교통망이 있는데다가 부산 외에도 마산과 포항같은 항구도 존재하고 영일비행장을 기지로 한 미국 공군의 지원도 받을 수 있으므로 더 이상 물러설수가 없는 방어선이었다. 물론 그 아래로 데이비드선이 있긴 했지만 이건 경상남도 경계의 산악지대만으로 구성된 방어선이며 모든 교통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 모양인지라 유사시 병력의 측면이동이 어려워서 여기까지 밀리면 그냥 한반도를 포기하는 수순에 돌입하게 되므로 후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실제로 확보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낙동강은 중간에 크게 만곡을 그리면서 흐르는 구간이 있는데 이런 지형적 특성을 노리고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서 창녕군 일부 지역까지 파고들어 창녕·영산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북한은 대구 남쪽의 창녕을 기반으로 해서 대구를 북, 서, 남쪽 3면으로 협공하려 했으나 창녕에서 국군의 분전으로 대구가 남쪽까지 포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현재 창녕지구 전승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따라서 실제로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잡은 면적이 좁았지만 낙동강이 지나면서 육로 교통의 요지인 칠곡, 대구 일대가 방어전선의 중심격이었고 이곳에서의 혈투가 워낙 인상 깊어 이름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붙어서 통용되고 있다.

본 항목에 있는 일일 전선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도 제주도울릉도 같은 도서 지역들은 북한군이 진입하지 않았다. 부산으로의 진격에 사활을 걸고 있는 와중에 바다 건너 섬까지 병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본토를 완전히 장악하고 자잘한 도서 지역들을 공략하는 것이 북한 측의 큰 그림이었을 수 있었겠지만, 의외로 국군의 저항이 극심한데다 설상가상으로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과 비슷하게)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몰려든 피난민들과 현지인들 중 청장년들을 닥치는대로 육군과 해병대에 징집시켜 부산과 제주도 훈련소에서 양성 후 전선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어 이들의 전체적인 계획 자체를 무산시켜버렸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은 북한 출신 5만 명과,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반(半)강제로 모은 민병대가 5만 명을 더해 총 1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UN군은 20만 명으로 병력이나 화기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특히 공군과 해군의 전력은 일방적이어서 동해안 지방에서는 미군 전함에서 막강한 함포 사격으로 북한군 방어진에 구멍을 숭숭 뚫을 정도였다.

그러나 방어할 때에는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한미 양군의 정예 2개 사단+2개 연대들을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군함에 실었다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서 급히 다시 내려 투입했다가를 2회 반복하며 약 2개월간 해상에서 대기하느라 전력과 시간을 소모하였다. 이 정도의 군단급 병력이면 충분히 북한군 진영을 뚫고 나갈 정도의 전력이 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서울에 도달할 때까지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날 것이 예측되었고 그나마도 이건 모든게 잘나가는 상황인데다가 실제 상황을 감안하면 진격하던 병력이 매복이나 당해서 개박살날 위험성이 컸다. 실제로 경상남도 구간에서 방어선을 진주까지 밀어내려던 킨 작전이 매복에 제대로 걸려서 실패한 사례까지 있었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더 큰 한 방을 노리고 있었으니 어쨌든 최정예 군단급 병력이 전선에서 빠진 영향은 컸다. 당시 국군이나 미군이나 보병의 훈련도, 경험, 사기가 바닥을 기어 전투력이 북한군보다 부족한 면도 있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직후인 8월 초부터 하순까지 교통의 요지인 대구를 목표로 공격을 가해왔다. 특히 대구 북방을 담당하던 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북한군 주공인 3, 13, 15사단과 1사단의 일부 병력이 집중돼 유학산-수암산-다부동을 잇는 선에서 엄청난 격전이 벌어진다. 이것이 다부동 전투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두지휘를 감행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비롯해 1사단 장병들은 1:3의 전투력 열세 하에서도 어떻게든 방어선을 지켜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의 피해를 보았다"는 백선엽 사단장의 회고대로 제1사단은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끝끝내 방어선을 사수해냈으며, 결국 누적되는 피해를 못 견딘 북한군이 대구 공격을 포기한 8월 하순을 기해 낙동강 전선 최대의 위기는 종식된다. 미 극동사령부와 8군 사령부는 다부동 전투가 일단락된 시점에서 피아 전력차가 완전히 역전,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의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낙동강 전선을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이곳을 완전히 사수한 것으로 오인되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때 나마 일부 무너졌다. 물론, 이미 밀고 내려오면서 북한군의 전력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국군과 유엔군이 바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당시로서는 위기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특히 8월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을 무시하고 곧장 9월 공세를 벌이던 9월 8일, 국군 8사단은 일시적으로 대구와 경주를 잇는 동서축선 보급로의 요지 영천을 상실한다. 이날 월튼 워커(1889년~1950년) 장군은 정일권(1917~1994) 3군 총사령관에게 예고 없이 찾아와 아래와 같은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고 있는 2개 사단을 골라둘 것

지명도가 높은 각계각층 명사들 10만 명의 리스트를 준비해 둘 것

반공단체의 지도층 및 경찰 간부들을 민간인 리스트에 포함할 것

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두기 바람[39]


정일권은 순간적으로 미국이 도망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해당 명단은 미국이 철수할 때 소개할 인원들의 명단을 짜라는 얘기인데 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은 당시 철수 계획을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미군의 이러한 생각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선적으로 강행한 1953년도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증명됐다. 행선지는 하와이 또는 제주도쯤일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정일권은 너무 중대한 문제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개전 초 신속하게 몽진을 하였던 이승만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라고 화를 내었다.[40]

다행히 위기는 일시적이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15사단에는 후속 전과 확대 부대가 없었으며, 2군단이 상대적으로 전선이 안정되어 있던 1사단, 6사단에서 병력을 동원하고 육본 예비대까지 끌어모아 영혼의 한타 역습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이 영천 전투에서 무리하게 경주로 향하던 북한군 15사단이 격멸당하고 영천이 탈환되면서 워커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UN군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했다. 낙동강 전선은 밀리고 밀리다 못해 부랴부랴 만든 전선이 아니었다. 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이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교전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즉 붕괴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설정한 전선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에게 조금씩만 땅을 양보하면서 지연전을 펼쳤고, 낙동강 전선에 도달한 순간 북한군의 전투력에 한계가 오면서 지연전이 아닌 지역 방어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실제로 점령한 낙동강 방어선은 애초에 계획한 것과 달랐고 후방의 데이비드선은 장기간 방어에 부적당하여 부산 교두보 철수시 지연전 목적이나 달성할 수준이었다. 이래서 낙동강 방어선의 전선이 일부 붕괴하였을 때 미국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마주했으므로 부랴부랴 철수 계획을 세운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계획 도중에 전선을 다시 회복했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구, 칠곡, 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 왜관 전투, 영천·신녕전투, 남쪽의 영산, 진주, 마산 일대에서 벌어진 영산 낙동강 돌출부 전투, 마산 전투 등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 전선을 절단할 수 있었던 대구를 놓고 벌인 다부동 전투, 대구, 포항을 포위할 수 있는 영천이라는 아킬레스건을 두고 벌인 영천·신녕전투, 부산과 가까운 마산을 두고 벌인 마산 전투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워커라인 후방으로 적이 침투, 전선이 무너지며 대한민국이 끝장날 뻔했다. 다만 국군과 유엔군들이 밀려 낙동강 전선에 몰림으로써 연적선이 줄어들어 전력보강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공세 종말점에 거의 다다른 인민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이 전쟁 발발 직후의 상황을 수습할 기회도 됐다. 즉, 아무리 국군이 부실하고 유엔군이 부랴부랴 도와줬다고 할지라도, 몇 차례의 공세만 막아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 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전후방의 종심이 짧았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을 돌파당해 적의 남하를 허용했다간 곧바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6. 인천 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대반격[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인천 상륙작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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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새벽,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된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북진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낙동강 방어선 근방에 진지를 만들어놓은 북한군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상륙작전 소식이 전달된 후 북한군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전선이 붕괴되는 것을 파악한 북한 측에서는 상륙작전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보급선이 절단되었으므로 인민군에 전원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었으며, 30일에는 낙동강에서부터 북진하던 국군과 상륙군이 드디어 만나기에 이르렀다. 10월 1일,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였다. 후에 이것이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상륙작전 항목을 참고.

상륙작전하면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교할 때 전략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인천 상륙작전은 모루가 있는 상태에서 망치의 전형적인 우회 기동이었던 반면, 노르망디의 경우는 모루가 없는 상태에서의 직접적인 적진 상륙이었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선에 북한의 주전력이 모여 있고, 이를 후방 상륙을 통해 고립시키고 격파한 것이 인천상륙작전이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아예 새로운 전선을 개척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동부 전선을 탱킹하던 소련군을 모루라고 생각한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소련군이 서부전선(미군·영국군)에다 도움을 요청하면서 생겼던 작전이었다.

어쨌거나 인천 상륙 작전에는 UN군들과 육군 17연대와 해병대 1연대가 참여하였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수행된 팔미도 등대 점거 및 점등 작전에 미 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Clark)의 지휘 하에 KLO 부대 최규봉, 대한민국 해군 장교 연정, 육군 장교 계인주 등의 한국인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양동작전을 위해 장사 상륙작전도 개시되었으며 장사 상륙작전은 부실한 준비와 함께 학도병을 주축으로 한 미숙련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목적을 달성한다.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북한군의 허를 찔러서 손쉽게 달성되었으나 북한군이 후방에 있던 거의 모든 부대를 끌어모아서 서울 방어전에 투입했기에 서울 탈환은 9월 28일에나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스탈린이나 모택동의 충고를 무시하고 낙동강 전선의 1급 부대들은 극소수만 서울 방어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결국 한국군과 유엔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서울이 점령됨으로써 보급선이 거의 완전하게 잘리고 만다.

UN군의 본래 참전 목적이 남한 방어였던 만큼 38도선을 넘는 데는 유엔의 결의가 필요했으며, 이 즈음 북한과 중국이 접촉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UN측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국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UN군 또한 38도선을 넘었다. 10월 1일 북진을 시작한 바로 다음 날 국군은 원산을 기습 폭격 후 상륙해 10월 9일 원산을 점령하였다. 서부 전선에서도 북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부 전선에서 국군이 진격했던 날보다 무려 10일이나 늦게 진격을 했는데 이는 38선 이북 지역으로 진격하는 데에 따른 유엔의 결의안이 소련에 의해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당 안건은 안보리가 아닌 총회에 밀어붙여서 가결시켰다. 총회에서 가결된 결의안은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총후퇴하던 북한군은 자신들의 영역이 먹힐 위기에 처하자 기를 쓰고 방어전을 펼쳤으며, 동한만과 황해도 지역에서 1주일이 넘도록 피의 사투가 이어졌다. 특히 개성 북부의 천마산, 두석산 등지에서 엄청난 혈전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인천 상륙 작전의 결과 낙동강 방어선에 쏠려있던 대부분의 병력이 말그대로 증발했고 간신히 북으로 건져낸 소수의 병력 만으로는 병력 수에서도, 화력 면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월한 UN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예성강철교를 방치했다가 미군에게 강행돌파를 당한 후에 미군 병력이 북한군 방어선의 후방이라고 볼 수 있는 한포리를 점령하면서 북한군의 마지막 정예부대가 T-34 전차같은 중장비를 다 버리고 인원만 원산 방면의 산악지대로 분산철퇴하면서 방어선이 총붕괴된 영향이 컸다. 그 이후에는 사리원시에서의 산발적인 저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평양으로 가는 길을 막을 북한군이 없었다.

이때 김일성은 10월 11일 밤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는 방송을 내고 바로 몇 시간 뒤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 강계로 도망쳤다. 이 당시 평양방송에서는 정부가 신의주로 철수했다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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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내에서 육군 1사단백선엽 사단장미군 장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41]

거기다 10월 12일 전황이 UN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모든 무기와 병사들을 철수시키고 노약자와 환자는 소련 영토 안으로 이동시키며 만주에 망명 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한다.

종횡무진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소련의 앞잡이 김일성이가 5년간 암흑정치를 펴고 일천만 북한 동포를 못살게 하던 평양은 정의의 진격으로 마침내 탈환되었다. 이제 괴뢰집단의 아성이던 건물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다.


UN군이 38선을 넘어 1950년 10월 19일엔 수도 평양까지 함락시키고 계속 북진해오자 김일성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지상군을 보내달라고 싹싹 빌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제2차 세계대전마셜 플랜, 베를린 봉쇄를 보고서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직접 대립하기보다는 차라리 북한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는 게 더 낫다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수천만 사상자를 낸 소련으로서는 팔팔한 미국과 정면충돌하기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두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소련 대사로부터 그의 명령을 전해들은 김일성은 참 하기 힘든 결정이나 스탈린의 명령을 따르겠다며 사실상 북한을 포기하려고 마음먹는다. 허나 이 계획은 후술된 중국군의 참전으로 취소된다. UN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950년 10월 19일에는 평양 탈환작전을 통해 평양시에 입성하였고, 10월 26일에는 초산 전투를 통해 압록강에 인접한 초산군에 이르렀으며 11월 23일에는 함경남도 혜산군, 11월 26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시까지 도달한다.

이때 북한에게 남은 영토라고는 신의주시 주변의 자투리 땅과 임시수도 강계군(당시 북한명 '강계시') 주변의 개마고원, 그리고 6진으로 대변되는 격오지 두만강 유역 밖에 없었다. 병력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고 병력을 더 충당하려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지역을 UN군이 전부 장악하고 있으니 북한 당국 입장에서 사형 선고를 넘어서 사형 집행 직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북진통일이 눈앞에 있었으며 남한 정부, 국군, 국민들 너나 할 것 없이 곧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조국통일 기념 우표도 발행할 정도였다. UN군 역시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7. 중공군 참전, UN군 후퇴 및 반격, 38선에 교착된 전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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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중국은 내부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공산당이 장악한 대륙을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했고, 아직 곳곳에서 저항 중인 국민당군 잔당도 정리해야 했고, 국민당 정부가 도망친 마지막 거점인 대만도 해방해야 했다.

그런데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 정부가 몰락할 때까지도 동북아시아에 무관심했던 미국은 대한민국 방어를 명분으로 이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미 해군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에 포진하면서, 압도적인 미국의 해군력 때문에 1950년 10월에 예정되어 있던 중국의 대만 침공 작전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유엔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북한 지역을 폭격하던 미 공군이 종종 중국 영공을 침범하면서 만주 지역을 오폭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중국 내부에선 미국이 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겨냥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증폭되었다.

김일성은 전황이 밀리기 시작한 9월부터 다급히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6.25 전쟁 개입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아직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덜 된 인민해방군의 상태와 북한 멸망을 방기하는 듯한 소련의 소극적인 태도에 처음에는 개입을 주저했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황이 역전되고 10월 1일 제3보병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넘은 지 이틀이 지난 10월 3일 저우언라이인도를 경유해 "현재 조선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조선인들 간의 내전이므로, 남조선군만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으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의 최후통첩성 성명을 발표하였다. 물론 맥아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북진을 개시했다.

이윽고 한반도 출병에 앞선 최종회의에서 마오쩌둥순망치한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싸우느니 조선에서 싸우는게 낫다"며 주전론을 내세웠고, 저우언라이는 "유엔군이 북중국경에서 멈출 지도 모르니 일단 개입은 자제하고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린뱌오는 "우리가 미국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비관론을 각각 제시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펑더화이는 "조선의 지형을 고려해서 신중히 작전을 세운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주더가 여기 찬성함으로써 10월 8일 한반도 출병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과 나라를 지키자)"이란 명분 아래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만주 지역의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10월 16일 인민지원군 선발대가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넜고 한반도로 진입했고,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10월 19일, 30만 명에 달하는 본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말 국군·유엔군이 청천강까지 건너 압록강 유역에 도달했을 때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인해전술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이 당시 참전한 중국군을 '닥치고 머릿수로 밀어붙인 군대' 수준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많은데 병력 규모가 상당한 점은 맞지만 단순히 물량만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다. 이때 6.25 전쟁에 참여한 중국군은 중일전쟁과 끝난지 얼마 안된 국공내전에 참여하여 일본 및 국민당과의 전쟁을 겪어본 베테랑들이었다. 흔히 국민당이 일본군과 주로 싸웠고 공산군은 도망다니기만 했다는 점 때문에 공산군이 정예군이 아니었으리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공산군은 그런 국민당을 이겨버리고 중국 대륙을 집어삼킨 엄청난 정예군이었다. 때문에 당시 중국군은 무식하게 총알받이를 앞세워 돌격만 하는게 아니라 수많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집단 운용하여, 신속하게 한 곳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상대의 지휘 체계를 혼란시켜 부대 전체를 와해시키는 포위 전술을 구사하였다.

쉽게 말해,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술은 보병판 전격전이라고 보면 된다. 고대 로마 때부터 이어져 온 '한 지점에 대량의 병력을 집중시켜서 실질적인 전력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한다'는 포위섬멸 전술이었고, 중국군은 6.25 전쟁에서 대체로 공세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공격자의 장점인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라는 점을 매우 잘 활용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병사들의 숙련도 및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야 했으나 앞서 말했듯이 중국군들은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 이 방식이 가능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도 장비의 질이 자신들보다 더 우위인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이미 이런 기습 교리를 충분히 숙달될때까지 익혀둔 상태였다.

또한 중국군 총 지휘관인 펑더화이가 미군과 한국군의 약점을 간파한 것도 주요했다. 내용인즉, 미군의 경우 강력한 공군과 기갑 부대의 화력 그리고 차량에 의한 물자와 병력 수송에 크게 의존(도보 행군을 기피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행동 반경이 주로 도로와 평지로 제한되었다. 당시 중국군은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이들은 도로와 평야보다는 산악을 통해 이동하였기 때문에 도로와 평야만 전진하던 미군은 산악을 통해 기동하는 중국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한반도 전역으로 뻗어있는 백두대간을 기동로로 사용하는 중공군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 지 몰랐고, 이 인민의 파도에 휩쓸리면 전투기와 전차를 써보지도 못한채 수류탄과 총검의 시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군은 신속하게 우회하여 UN군의 후미와 측면에 있는 보급로와 퇴로 등을 차단하며 공격해왔다. 낮에는 주로 숲속에 매복하고 가만히 미국의 공중정찰을 피하다가 야간에 기습하였는데,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로 야간 시야 확보가 잘 되지 않은데다 전장조차 수풀이 우거진 산지여서 공군과 포병을 통한 미군의 화력 우위를 전혀 살릴 수 없었다. 때문에 기갑 차량과 포병, 공군이 충분해도 중국군의 접근을 저지할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전선은 주로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 사단이 전방을 맡고, 후방에는 한국군이 배치되었는데, 당시 펑더화이가 평했듯 한국군은 중국군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으므로 UN군 주 패전 레파토리는 산길을 통해 이동한 중국군이 후방에 있는 한국군 사단부터 깨부순 뒤 UN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시키고 포위 섬멸하는 형태였다. 이런 일이 거듭된 것은, 그저 아군과 적군의 대치선만 생각하여 적의 이동 경로를 면밀히 살펴보지 못한 UN군 수뇌부의 실책이 컸다.

장비와 보급은 상대적으로 열약했지만 한반도와 붙어있는 지리적인 유리함을 이용해 기동력을 살린 포위 섬멸전을 구사한 결과 매번 공격할 때마다 우위를 점하였다. 중국군은 UN군의 후미에 침투하여 각각의 부대를 분리 · 고립시킨 뒤 병력을 집중시켜 각개격파 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UN군 지휘관들의 보고를 보면, 중국 본토의 중국인들이 몽땅 참전한 것 같았다고 하고 있다.

중국군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통계가 비밀스러운 점이 많아 한국 전쟁 당시 중국군의 병력 숫자는 공표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통계는 죄다 추정치로, 30만부터 300만설까지 다양하다. 아무래도 병력상 우위였던 것이 사실인지라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100만명 안팎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많으며, Zhang, Shu Guang은 135만명이라고 주장했다. 간혹 중공군의 숫자가 유엔군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적었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는 중공군은 전방 부대의 약 30만명의 병력만 계산하고 유엔군은 후방에 있는 병력까지 합쳐 계산해서 나오는 오류이다. UN군 42만명 중 육군은 30만 남짓이고, 이 중 북한까지 진격한 전방 부대는 약 13만명 정도이다.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하자 더글라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중국에 대한 핵폭격을 실행하고 장제스중화민국 국군을 중국 남부에 상륙시키는 등 거의 3차 대전을 고려한 반격을 계획했으나, 이 핵폭격 문제로 트루먼 대통령과의 정치적 갈등을 빚어 나중에는 아예 해임당하게 된다. 처음엔 핵공격을 원하는 장병들이 많았고 트루먼도 핵폭격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를 기겁하게 했다. 당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핵무기만은 안 된다고 거의 애걸복걸했다 한다. 결국 트루먼은 핵폭격 반대론자가 된다.

중국군의 개입 과정에서 10월 공세가 틀어졌고, 11월 공세에서는 미군 1개 사단이 거의 전멸하고 한국군 사단들 대부분이 편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삽질을 계속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어 평양까지 내줘야 했고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 시기 중국군의 보급 및 전투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빠른 후퇴였다는 평도 많다. 정작 중국군은 UN군이 평양-원산선 일대에서 방어를 유지할 거라 판단하고 신중하게 진군하다가 평양을 빠져나간 걸 알고서야 급속 진격에 돌입했다.

동부전선쪽도 만만치 않아서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당했다. 미군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이 시기에 최악의 혹한 속에서의 전투를 경험하였으며, 직접 에 맞아죽는 이들보다 동장군에게 죽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였다.[42] 전선은 평택, 오산까지 내려왔다. 이때 UN군은 전선이 금강까지 밀리면 한반도를 포기하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200만 명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대만처럼 후일을 도모하는 옵션도 검토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은 UN군이 멘탈을 추스르고 전열을 가다듬자 한계에 봉착한다. 기본적으로 항공 전력이 없었던 중국군은 철저하게 인력 위주의 포위·섬멸·각개격파 작전으로 UN군을 압박하였는데, 전열이 듬성듬성 길게 퍼져있었던 참전 초기에는 큰 재미를 봤었지만 전선이 좁아지고 병력 배치가 조밀해지자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중국군의 급작스런 참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UN군 측의 패닉에 가까웠던 대응이 점차 원상태로 돌아온 것도 있었다.

게다가 커티스 르메이를 비롯한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 및 소개작전으로 북한 지역에서의 보급은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결국 중국 측의 보급은 길게 늘어지게 되었다. 항공전력이 없다시피했던 중국은 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으며 보급은 미 공군의 공습에 털리기 일수였다. 결국 보급 문제로 중국북위 37도선에서 지평리 전투를 시작으로 한 달간이나 발이 묶이고 만다. 다시 말해, 중국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었으며 이후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자 3월 14일, 다시 서울은 UN군 손에 재탈환되었다. 중국군은 집단으로 패주하여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삼팔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은 중국 인민지원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UN군을 영구적으로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4월 22일 총 7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춘계 대공세(중공군 5차 공세, 4월 공세)를 감행한다. 서울을 노리고 서부 전선에 주력 부대를 대거 배치한 중국군은 UN군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4월 30일 서울 북쪽 8km 지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미 1군단을 섬멸하고 5월 1일 노동절서울에서 대규모 시가 행진을 벌이겠다던 중국군 수뇌부의 자신감과 달리 설마리 전투파평산 전투에서 공세탄력이 크게 꺾인 중국군은 끝내 서울을 재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중공군은 다시 한번 승기를 잡기 위해 5월 중순 2차 춘계 공세(중공군 6차 공세, 5월 공세)를 감행했지만 이 공세 역시 실패, 5월 말부터 시작된 UN군의 대반격을 얻어맞고 캔자스-와이오밍 선까지 후퇴하여 지금의 휴전선 비슷한 모양의 전선이 형성된다.

중국군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UN군을 상대로 벌였던 이 전투들로 인해 중국 인민지원군은 세계에 인구수 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미군태평양 전쟁 초반의 일본군, 한국 전쟁 초반의 북한군에게 몇 차례 패전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대규모로 후퇴하진 않았고 결국엔 재정비하여 전선을 밀고 나가서 결국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에게 승기를 잡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에게 승기를 잡게 되어 역전에 성공했었지만, 인해전술이었던 중국군과의 이 전투에선 큰 피해를 입고 육로를 통해 대규모로 후퇴해야 했다. 다만, 후퇴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서울 방어에는 끝끝내 성공한다.


8. 고지전[편집]


파일:고지전1.jpg
고지전이 펼쳐진 주요 격전지[43]

중공군의 서울 재점령 실패 및, 전선 고착화가 이루어지자. 6.25 전쟁은 전격전에서 국지전 양상으로 변화한다. 양측은 서로에 대해 전면 공세를 포기하고, 전선 주변의 전술적 요지를 두고 벌이는 고지전으로 전환된다. 6.25 전쟁의 66%에 해당하는 2년이 넘어가는 기간동안 엄청난 규모의 소모전이 펼쳐지지만 중공군의 1951년 5월 공세 반격 완료 직후인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1951년 10월 UN군이 실시한 추계 공세로 전 방면에서 전선이 대략 10km 정도 북상한 것과 휴전 직전에 벌어진 금성 전투로 금성 돌출부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이때 형성된 전선의 모양이 휴전시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측 모두 더 이상 상대 진영으로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봤자 소모되는 인력과 자원에 비해 이득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전 초기 북한군만 상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고 보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벌어졌지만, 대규모 병력이 투입된 중국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기엔 부담이 심하다고 여겼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이 종전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면전을 벌이기엔 아무리 미국이라도 부담이 컸으며, 미국 내 여론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개전 초기의 호의적 여론이 돌아서서 전쟁을 끝내야 된다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무엇보다 '북한 지역'을 점령해야할 당위성이 떨어졌다.[44]

한편 중국군은 보급 문제와 항공 전력의 미비로 남하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중국 역시 '북한'을 도와주러 온 것이지 중국 인민의 피를 흘려가며 북한을 위해 '남한 땅'을 점령해주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 당시 열강들의 1차 목적은 어쨌거나 한반도가 완전히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이든 남한이든 존속만 하면 되었지 더 넓은 영토를 가지는 것은 큰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남북한 모두 당사자 입장에서는 멸공/적화 통일을 원했겠지만 UN과 중국은 생각이 달랐다.

특히 한반도의 기후는 참전 군인들의 염전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이 당시 UN군 참전수기를 보면 한반도의 극악한 기후에 대한 언급이 꼭 나오며, 수뇌부 입장에서도 비전투 손실인력이 많아지는 것은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괜히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 등 한반도의 맹추위를 겪고 나서 양측 수뇌부가 휴전 협정에 들어간게 아니다.

결국 상기한 이유들로 양측 모두 더이상의 전면전은 원하지 않았으며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중공군은 최대한 저비용 고효율을 내기 위해 공세에서 수세로 변경,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전선에 만리장성 길이에 버금가는 규모의 지하 갱도진지를 건설했고, 이를 분석한 UN군은 '이거 핵무기 없이는 못 뚫겠는데?' 라는 판정을 내렸다.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한반도의 산악지대 기반으로 건설된 진지에 숨은 중공군을 괴멸시키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돌파하려면 대량의 보병 사상자를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속 북진하다가는 소련이 참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반도에서 벌이는 전쟁이 과연 소련과의 전면전을 감수해도 괜찮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면서 결국 현 전선을 유지하고 휴전을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이에 따라 1951년 6월부터 본격적인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전쟁의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정확히는 이승만김일성) 모두 휴전제안에 불복했고, 각자 지원세력의 결단때문에 휴전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현 전선을 그대로 휴전선으로 할 것인지, 위도에 따른 전선으로 할 것인지, 개전 이전으로 할 것인지 어느것도 결론이 나지 않은 지리한 상태에서 단 1㎢라도 더 넓은 땅을 먹기 위해 최대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 지물을 손에 넣기 위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파일:51년 동부전선(양구).png
1951년 동부전선 양구지역 주요전투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UN군이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 때문에 개성시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정하자, 한국으로서는 최소한 동부전선에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이를 만회할 입장이었다. 이로인해 1951년 여름~ 겨울 사이 국군과 미군은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가해 도솔산 전투를 시작으로, 펀치볼 전투, 피의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승리하여 양구, 고성 일대의 전선을 북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물론 연합군의 공세를 받아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군 12, 13사단에 비하면 적긴 했지만 목적을 달성한 대가로 국군과 미군 또한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기에, 1951년 겨울 전후로 쌍방 양측은 1953년 초까지 군단급의 대규모 공세대신 전선 근방의 허점을 노린 집요한 쌍방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중공군 개입 이후 북한군은 일부 전선을 제외하면 최전선에서 거의 빠지게 되고, 전투는 대부분 중공군이 담당했다. 북한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데다 부족한 인구수로 전시생산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한편 남한은 북한의 2배가 넘는 인구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개전 초기의 피해를 복구하고 60만에 달하는 징집병을 뽑아내어 전선의 대부분을 담당하면서 전쟁 중후반부터는 대결 양상이 국군과 중공군의 대결 위주로 넘어갔다. 그리고 미국의 체계적인 전술훈련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 1952년부터는 국군이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크게 성장하여 전쟁 후반 대표적인 격전인 백마고지 전투, 금성 전투 등에서 선전했다. 물론 중국군이 병력을 100만 이상으로 늘리면서 초기 고참병들 위주의 정예가 아니게 되어 질적 수준이 떨어진 점은 있지만 국군이라고 병력을 급격히 늘리는 상황에서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군 조직 자체가 발전하면서 중국군을 상대로 선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9. 휴전[편집]




중국군의 춘계공세와 UN군의 반격 이후 1951년 10월 UN군의 추계공세 정도를 제외하면 양측 모두 더 이상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선전했지만, 중국군은 근본적으로 보병 위주였고, 보급의 수준도 낮아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한내에서만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잘 준비된 DMZ의 미군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중국군의 연이은 공세 전략을 UN군측이 파악하고 대비를 하게 된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한국군을 돌파하는 건 가능했지만 이 역시 부담이 이전보다 커졌고, 순망치한이 명분인 이상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김일성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애시당초 그의 군대는 1950년 가을에 소멸되고 없었으니 중국의 뜻을 따를 수밖에. 한편 미국은 사실상 필수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지역의 방위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대를 한국에 투입한 상황이고 한국군의 역량이 만천하에 증명된 이상 중국을 확실하게 밀어내려면 다른 지역 어딘가를 포기할 정도로 미군을 증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한반도는 이미 독립때부터 직접 관리하기보단, 다자간 관리를 하되 어느나라도 독점하지 못하는 땅으로 두려는게 미국의 판단이었고, 설사 중국까지 진격하더라도 소련의 참전가능성이 있었기에 더 이상의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주의 중국군 기지를 미공군이 일부 폭격했을때 소련은 미국에게 강력히 항의했기 때문에 소련의 참전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남한을 지킨다는 초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발을 뺄 때라고 판단했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고 말했다. 맥아더도 길길이 뛰었지만 이미 트루먼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맥아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곧 미국의 각종 신문 1면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맥아더의 해임 기사가 실렸다.

1951년 6월 경,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년간 협상을 지지부지 끄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지전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연일 UN 공군으로부터 맹폭격을 당하느라 죽을 맛이어서 소련에 휴전을 간청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한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북한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주요 도시의 비행장과 공장 등이 UN 공군의 직접 공격대상으로 선정되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원산은 공군의 공격에 더해서 해군의 포격까지 받았는데, 미국은 휴전 위반에 대비하여 경고로 이 지역에서의 포격을 휴전 발효 직전까지 수행했다. 당연하지만 당시 북한의 해공군 전력은 이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에는 휴전까지 북한군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되어 무차별 폭격을 받는 등 북한 전역이 공군의 폭격 대상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묘사한 바도 있고, 평양 시내를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비행기가 적절한 목표를 못 찾아서 폭탄을 쓰지 않고 귀환한 사례도 있다. 당시 미군이 설정한 폭격 목표는 2층 이상의 모든 건물이었다. 요컨대 평양의 비행구역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하나도 안 남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협상을 끌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협상이 지연된 이유는 21세기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의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유는 스탈린의 고의적인 지시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이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미국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 케임브리지 5인조를 통해 미국의 핵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경멸했으며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에 패배하면, 압도적인 핵전력을 보유한 미국(1950년에 원폭 300개 소유.)이 중국과 소련(당시 원폭 5개 소유)에 핵공격을 퍼부어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스탈린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교착 상태의 한반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묶어놓고 싶어했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져 피를 흘리는 것은 중국과 북한이지 소련이 아니었다. 소련은 한반도에 중요한 무기와 물자를 지원하고 군사고문단이나 소수 파일럿 정도만을 파견했지 실질적인 전투 병력은 거의 안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협상카드는 다름 아닌 MiG-15였다. 당장 중국은 6.25 개전 3일만에 대만해협에 미 7함대가 항모를 띄우자 아무 것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대로 전무한 공군력을 가지고는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소련의 전투기를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했고, 스탈린은 이를 지렛대 삼아 상술한 6.25 전쟁의 장기화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중국에 전부 외주를 줬다. 결국 스탈린1953년에 갑작스레 사망하고서야 협상이 급물살을 타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협상 자체만 놓고 보면 협상 과정 중 가장 문젯거리였던 것이 포로 처우의 문제였다.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할 때, "일괄 송환"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 송환" 할 것인가? 즉 전자는 포로 본인의 의사는 묻지 않고 포로의 출신국으로 일괄적으로 보내는 것이고, 후자는 포로 본인이 새롭게 살고 싶은 국가를 자유롭게 골라서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최인훈소설 『광장』에서 주인공이 반복하는 중립국! 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 측은 일괄 송환에, 유엔 측은 자유송환에 지지를 표명했다는 것. 소련과 중국과 북한은 자유 송환을 할 때 행여나 "자유 진영을 선택하는 자국민" 이 나타날까 근심했던 것이다. 반면 일괄 송환을 하게 되면 당사자의 의견이 드러나지 않고, 그들은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포장하여 선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붙잡힌 북한군 포로의 상당수는 북한군이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징집한 남한 출신들이기 때문에 자유 송환으로 결론나면 이들 전원이 남한으로 갈 것은 분명했다. 중공군도 마찬가지로 항복한 이후 국부천대중화민국으로 귀순하는 병사들이 꽤 있었다.

포로 송환문제의 이면에는 이처럼 6.25 전쟁의 이념성이 드러난다. 양쪽이 정말 이를 악물고 두 주먹 꽉 쥔 채 크게 맞붙었던 마지막 시점인 춘계 대공세가 끝난 이후, 더 이상 물리적 힘으로 부딪쳐서 상대방을 꺾는 것이 한 쪽은 불가능하고, 다른 한 쪽은 그럴 가치가 없다고 결정한 것.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명분과 정당성, 이념으로 상대방을 꺾는 것일 뿐이었다. 당시 세계의 거대한 두 축은 이와 같이 6.25 전쟁을 자신들의 이념 전쟁으로 변모시켰고 그만큼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휴전의 결과로 제시될 최종적 휴전선이 정해지기 전 최대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 지물을 손에 넣기 위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휴전 협상 타결 전 최대한 북쪽으로 진격하기를 원하는 UN군이 주로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공산군이 주로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그 반대도 적지 않았는데 물론 휴전 시점에 전술적, 전략전 요충지를 최대한 점유하기 위해서였으며, 미국이 개성시를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 한국으로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하려면 최소한 서부에서 내준 땅 이상으로 중동부 영토를 차지해야 했기 때문에 절박한 입장이었다.

결국 목적은 달성했지만 2년간에 걸친 고지 전쟁 과정에서만 5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전투로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저격능선 전투, 화살머리고지 전투 등이 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는 영화 고지전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휴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1953년 6~7월에 발생한 인명 피해는 그 이전 전체 기간과 비교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노병이 말하는 진짜 전쟁의 모습

1953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단독으로 거제도 등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였던 공산군 포로들을 석방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 참고. 당시 대한민국은 휴전 협상 당사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소외된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미 미국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당장 1952년 8월 2일, 부산에서 이승만이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범인은 CIA요원으로, 이유는 협상에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에버레디 계획으로 여러 번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한다.

에버레디 계획의 밝혀진 골자는 다음과 같다. 출처는 이곳.

1. 한국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유엔군 명령의 실천을 보장하라고 요구
2. 반항하는 지휘관은 미 8군 사령관에 충성하는 사령관으로 교체
3.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한국군에게 연료와 탄약 지원 중단
4. 한국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관 명령을 준수할 것을 요구
5. 반항하는 군사 및 민간 지도자를 구금
6. 유엔군 이름으로 군사정부를 공포

그리고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이 긴급히 방한, 이승만 대통령과 160시간의 언쟁 끝에 결국 소위 "소휴전 회담" (Little Truce Talks)이라고 불리곤 하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미국 간의 혈맹이 시작되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소휴전 회담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한국과 미국은 상호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게 최초 2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 줄 것과, 차후의 장기 원조에 대해서 보증한다.
3. 한미 양국 정부는 휴전 이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회담을 중단한다.
4. 미국은 한국의 육군 20여 개 사단 및 그에 상응하는 해군과 공군의 증편에 대하여 승한다.
5. 한미 양국 정부는 정치회담에 앞서 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당시 이승만의 행동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포로들에 대한 일괄 송환의 가능성을 본다면 인도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같은 행위는 국제법 위반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이 표현상으로는 '포로 석방'이라서 단순히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곱게 풀어준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석방이지 대탈주에 가까웠다. 당시 포로 수용소의 경비 및 관리는 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다. 따라서 '포로 석방'을 위해 한국군 및 한국 경찰 당국과 반공 포로들이 사전에 계획하여 일시에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탈출하고 이를 군과 경찰, 기타 민간인들이 적극적으로 탈출을 도와준 것. 실제로 UN군이 탈출을 진압하기 위해 가한 사격으로 인해 사망한 포로들도 존재했으며, UN군과 한국군/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해 또 한 번 국면이 전환, 2차 화살머리고지 전투, 425고지-406고지 전투, 사미천 전투를 끝으로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밤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었다.

참전용사 증언에 의하면 이때 휴전 5분을 남겨두고 모든 탄약을 전부 소비했다 한다. 그리고 약속의 밤 10시 정각이 도래함과 함께 쌍방사격금지가 발효되었다. 참전용사들은 3년간 수없이 내내 듣던 총격과 포탄소리가 밤 10시 정각이 지나는 순간, 일순간 멈출 때의 그 정적감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예시

이렇게 기나긴 3년 1개월의 전쟁은 미완의 결말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


10. 휴전 직후 행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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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승만 대통령 연설모습

파일:external/kinimage.naver.net/KBS_%C6%AF%BA%B0%B1%E2%C8%B9_%C7%D1%B1%B9%C0%FC%C0%EF_9%C6%ED_%B3%A1%B3%AA%C1%F6_%BE%CA%C0%BA_%C0%FC%C0%EF.HDTV.720p.x264..mkv_000237994.jpg
평양 김일성 내각수상 연설모습[45]


11. 휴전 협정 이후[편집]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남한과 북한은 준 전시상태로서 기나긴 휴전에 돌입했다. 이후 냉전기간 동안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다가, 탈냉전 시기 여러 번의 공동선언과 정상회담으로 남북간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 적도 있으나, 북한측의 권력세습이나 지속되는 대남도발들을 볼 때 모두 화전양면전술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휴전 70년이 지난 2023년 현재도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자유왕래가 불가능하다.

12. 전투 목록[편집]



연도
전투
교전국
형태
1950년
옹진반도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대한해협 해전
대한민국
북한 또는 소련

1950년
춘천-홍천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주문진항 해전
UN(미국,영국)
북한

1950년
한강 방어선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동락리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장항-군산-이리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대전 전투
UN(미국)
북한

1950년
청송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다부동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마산 전투
대한민국, 미국
북한

1950년
영천·신녕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장사 상륙작전
대한민국
북한

1950년
인천 상륙작전
대한민국, UN
북한

1950년
평양 탈환작전
대한민국, UN(미국,영국)
북한

1950년
초산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0년
장진호 전투[46]
UN(미국, 영국)
중국

1951년
1.4 후퇴
대한민국, UN
중국

1951년
금양장리 전투
UN(터키)
중국

1951년
횡성 전투
대한민국
중국

1951년
지평리 전투
UN(미국, 프랑스)
중국

1951년
설마리 전투
UN(영국)
중국

1951년
파평산 전투
대한민국
중국

1951년
현리 전투
대한민국
중국

1951년
용문산 전투
대한민국
중국

1951년
가칠봉 전투
대한민국
북한

1951년
펀치볼 전투
대한민국, UN(미국)
북한

1951년
피의 능선 전투
대한민국, UN(미국)
북한

1951년
단장의 능선 전투
UN(미국, 프랑스)
북한

1952년
백마고지 전투
대한민국
중국

1952년
저격능선 전투
대한민국, UN(미국)
중국

1953년
폭찹힐 전투
UN(미국)
중국

1953년
금성 전투
대한민국
중국


[1] 7월 5일 12사단으로 개명[2] 이후 조선일보는 6월 28일을 끝으로 10월 23일까지 발간되지 않는다. 10월 23일 발간호에서 조선일보는 사장 방응모를 비롯한 다수의 임원이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되어 재발간이 미뤄졌다고 밝혔다.[3]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을 할 때 독일의 죄수 몇 명한테 폴란드군 군복을 입혀서 독일 국경에서 알짱거리게 하는 자작극을 벌이고 그 자작극을 토대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김일성도 독일처럼 자작극을 벌이고 그것을 명분으로 침공했다는 설도 있다.[4]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은 3-4개월이면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 땅은 히틀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었고, 모스크바 육박전을 할 때에는 이미 러시아의 한겨울인 11월이었다. 동계장비를 생각하지 않았던 독일이 전쟁을 말아먹었던 원인이다.[5] 미 해군의 F4U 콜세어는 6.25 전쟁 기간 해군기로서는 유일하게 에이스를 배출한 기체이다.[6] 소련 해군은 한번도 미 해군을 앞섰던 적이 없다. 소련 해군이 잠수함 전력에 많이 투자하거나 대함미사일 및 어뢰의 화력에 집착했던 것도 함대 간 전면전에서는 미 해군에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었다. 반면 미 해군의 무기체계는 상대적으로 개별 화력보다는 신뢰성과 수량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7] 대한해협 해전에서 아군과 교전했던 함종불명의 선박인데, 실제 북한 해군 소속이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후술된 내용의 각주를 참조.[8] 다만, 해당 항목에 나와 있다시피 소련 해군 소속 함정일 수도 있다.[9] 정황상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10] 후일 이형근의 10대 의혹으로 비화된 이유 중의 하나다.[11] 한국 전쟁의 전차전(上) : 소대장들의 전투[12] 나머지는 미 군정에 의해 모두 해산되었다.[13] 대신 타코마급 호위함은 휴전 이후에 받았다.[14] 당시에는 함정 장교.[15] 함장 김옥경 대위.[16] 당시 명칭은 (구)수도사단이었고, 한강 방어선 이후 수도 명칭과 1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에 넘기고 한동안 해체되었다.[17] 이응준은 기차편으로 상경하느라 불참.[18] 그나마 전차도 못 뚫는 열약한 장비로 분투하던 국군 및 북한군의 삽질이 겹쳐 2일을 벌 수 있었다.[19] 이것은 거짓보고였다. 이때 북한군은 청량리까지 오지도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피신시키기 위해 이런 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20] 그의 인생 연표가 있는 블로그.[21] FBIS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22] 장영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 근현대사 연구 67, 2013.12, 985쪽[23]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24] 당시 맥아더는 일본 도쿄에 있었고, 전방지휘소는 맥아더의 지휘를 받아 움직였다.[25] 이철원 공보처장, 황규면 비서가 수행하고,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이 경호경찰 4명과 경호임무를 맡았으며,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개인비서 김옥자씨가 동행했다.[26] 6사단은 그 후 동락리 전투에서도 북한군 연대 하나를 전멸시키고 소련제 무기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27] 독소 전쟁 당시 소련군은 히틀러의 반대로 대충 형성된 독일군의 드네프르강 방어선을 그대로 밀어붙여 돌파한 이후 전차군을 활용한 협격 공세로 독일군 제 8군을 거의 포위 섬멸할 뻔 했다.[28] 그러나 빨치산은 국군과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덕분에 거진 사멸한 상태였다.[29] 단 이에 대해서는 당시 백두산함이 교전한 선박이 정말 북한군 소속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건 대한해협 해전 문서 참조.[30] 임진강 전투를 다른 파란 눈의 아리랑이란 자서전을 보면 군용 전화줄도 썼다.[31] 실제로 2차대전 극초기 프랑스 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마구 헤집고 파리까지 달려가자, 프랑스군은 한참 독일군 지나가는거 구경하다가 자신들을 포로로 잡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집으로 갔다. 롬멜도 항복하기 위해 두팔 들고 몰려오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보고 "비켜!"하고 그냥 제치고 지나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전쟁 초기도 대략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보면 될 듯 하다.[32] 당연히 북한에서는 미군을 비난할 때 쓰는 소재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를 과대포장하여 특정 인사의 발언만 인용하고 한 가지 발언만 무조건 맞다고 하여 '미군보다 소련군이 낫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미군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소련군 등의 잘못이 문제가 아닌 건 아니다.[33] 최전성기 일본 제국 해군은 단순 톤수(58만 톤)로도 동시기 소련 해군(15만 톤)을 400% 가까이 초과했으며, 이전까지 전력의 중핵이었던 전함전력에서는 야마토급 전함을 보유하여 동시기 세계 최강이었던 대영제국 해군마저 능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본 제국 해군을 전멸시키고 태평양 패권을 장악한 것이 미 해군이다.[34]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대한해협 해전 문서에서 "소련의 주장" 문단으로.[35] 이 해전으로 북한 해군의 제2 어뢰정대는 5척의 어뢰정 중 4척을 손실하면서 사실상 괴멸한다. 그런데 북한은 아직까지도 여기서 살아남은 1척의 어뢰정이 미 해군 순양함 "발찌모르"를 격침시키고 무사 귀환했다고 뻥을 치고 있다.[36] 백두산함과 같은 PC급 구잠함으로 한국 해군에서 도입한 4척의 PC급 중 마지막 함선이었다. 참고로 지리산함의 함번은 704 였는데, 전쟁 중 혼자서만 격침당하는 바람에 이후의 대한민국 해군은 절대 숫자 4를 함번에 넣지 않는다.[37] 만들어진 시기는 잭슨이 먼저다. 포의 위력을 잭슨에서 확인해 두 전차에도 탑제된 거다.[38] 17일 01시경 북한군의 제7사단 51연대 및 104치안연대가 원문고개 서쪽(당시 통영군 광도면)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즉응한 한국군 해병대의 상륙(김성은 부대, 통영 상륙작전)으로 17일 03시부터 통영군 군내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18일 다시 후퇴하였다.[39] 정일권 회고록 233~238페이지[40] 이승만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의 피난을 권유받은 시점도 대략 이때로 추정된다. 품에서 권총까지 꺼내 들면서 딱 잘라 거절했지만, 서울을 버릴 때의 언행을 보면 정말 부산을 끝까지 사수했을지는 미지수다. 만일 미국이 철수를 할 시점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이 철수를 반대했다면 결국 떼놓고 갔을 텐데, 그러면 최후의 선택지는 제주도에 정부를 차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41] 제1 기병사단 더 퍼스트 팀의 사단장이었던 조지 게이일 가능성이 높다.[42] 물론 개개인의 방한장비가 미군보다 못했던 중공군 동사자는 더 많았다.[43] 군사분계선의 모양이 정확하지 않으며, 특히 서부전선과 그 일대의 판문점, 문산의 위치가 실제보다 서북쪽에 있다.[44] 대한민국은 헌법으로나 국민 여론이나 북한 땅을 '미수복영토'로 보지만, 제3자인 미국 여론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어 남베트남의 공세를 미군이 미온적으로 도울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45] 당시 김일성은 북한 내각수상이었으며 주석으로 취임한것은 1972년 8월 종파 사건 이후의 일이다.[46] 흥남 철수는 이 전투의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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