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남미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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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남미로 간 이유
4. 유사 예
5. 목록
5.1. 남미로 도주한 잔당
5.2. 기타 국가로 도주한 잔당
5.3.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잔당
6. 대중문화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남아메리카도주나치당 잔당들을 다루는 문서.


2. 전개[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치들공소시효 없이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당연히 나치 전범들도 순순히 잡혀 줄 마음은 없었고 연합군의 추적을 피해서 신분을 세탁하고 각국으로 도주했는데 주로 남미가 주 도피처가 되었다.

이 외에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완전포위되어 바다를 통해 탈출한 독일인들 중 상당수가 독일 본토가 아닌 남미로 항로를 잡아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바티칸 시국알로이스 후달 (Alois Hudal), 로베르트 라이버 (Robert Leiber)와 같은 나치 동정주의자들은 일명 '쥐 통로 (Ratline)'를 마련해서 수많은 나치 인사들을 도피시켜 주었다. 프란츠 슈탕글, 에리히 프리프케, 샨도르 케피로, 한스 울리히 루델, 구스타프 바그너, 알로이스 브루너, 딘코 사키치 등 수많은 전직 독일 나치들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들이 이 통로를 통해 해외로 도피했다. 한편 크루노슬라프 드라가노비치 (Krunoslav Draganović)와 같은 일부 전직 우스타샤 출신 신부들이 먼저 도망친 안테 파벨리치와 직접 통하는 산 지롤라모 랫라인(San Girolamo Ratline)을 구축하여 수많은 파시스트들을 탈출시켜 주었고 이외에도 오토 슈코르체니오데사구드룬 부르비츠의 침묵의 손길 (Stille Hilfe), 한스 울리히 루델의 전우협회 (Kameradenwerk) 등 나치와 연관된 여러 단체나 네오 나치 단체, 샤를 레스카, 오스왈드 모슬리, 페르 엥달같은 여러 파시즘 동조자들이 전범들의 도피 및 생활을 도왔다. 아예 전직 전범 출신들이 직접 세운 단체들이 앞장서서 전범들의 처우 개선 및 생활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독일 사회주의국가당이나 로돌포 그라치아니 등의 이탈리아 사회운동이 그 예시이다.

프리드쇼프 난센무국적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만든 난센 여권을

이렇게 남미로 도주한 나치 잔당들은 해당 국가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사례들도 왕왕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칠레로 도주하여 정착한 독일군 장교 미하엘 카스트로, 이 사람의 아들인 호세 카스트는 칠레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7년 대선 후보로도 출마하기도 했다.[1]

독일 나치 전범들만 도주한 것은 아니고, 많은 수의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파시스트들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우스타샤, 독일 국방군 점령 시기 나치 독일군에게 협력하던 벨기에우크라이나, 발트 3국, 불가리아, 덴마크 등지의 유럽 점령지들의 매국부역자들도 많이 따라갔다. 대규모 나치 전범의 탈출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안테 파벨리치부터가 크로아티아 사람이고, 지금도 시몬 비젠탈 센터의 도피 중인 나치 전범 목록을 보면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등지의 부역자들도 꽤 많다.


3. 남미로 간 이유[편집]


남미가 주 도피처가 된 이유는 남미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고[2] 유럽, 소련의 영향력이 비교적 미미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미에서의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지만, 미국 자신도 전범 처단에는 당사자인 유럽 국가들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일부 남미 국가들은 나치 인사들의 송환에 비협조적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던 후안 페론[3]과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곤살레스는 나치 인사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숨겨주거나 나치 전범과 부역자의 자국 망명을 묵인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이를 지휘했던 장관이 다름아닌 전직 우스타샤 수장인 안테 파벨리치. 덕분에 현재까지도 시몬 비젠탈 센터가 추적중인 나치 목록에 독일인 다음으로 많이 등재돼 있는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우스타샤들이다. 덕분에 구드룬 부르비츠, 오토 스코르체니, 한스 울리히 루델, 알로이스 후달, 오스왈드 모슬리, 샤를 레스카, 페르 엥달 등 친나치 인사이지만 전범은 아닌 이들의 지원과 더불어 수많은 전범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인 이민이 많았으며[4],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고국의 사정에 절망한 독일인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쳐들어온 동프로이센을 배를 이용해 탈출한 독일인들이 많이 이민을 갔기 때문에, 그리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고 미개발지도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나치 인사들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 중에서도 특히 백인의 비율이 높아서 백인인 자신들이 숨어살 수 있었고 또한 백인 우월주의에 찌든 인간들의 눈에 보기에는 당시로서는 미국과 유럽 다음 가는 문명세계이기도 했다. 그 중 부유했던 아르헨티나가 주 도피처로 선택되어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도주하게 되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다가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가 매우 유명하다. 체 게바라가 의대생 시절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한 집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이 도망친 나치 인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 관련 음모론에 자주 엮이게 되었고 남극 은신설이나 히틀러, 또는 히틀러 자식의 은신설 등의 수많은 도시전설이 나오게 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칠레 또한 옆나라 아르헨티나 못지 않아서 나치 전범인 파울 셰퍼와 발터 라우프 등이 칠레로 도주했고, 파울 섀퍼와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이 유착해서 일어난 콜로니아 사건이 있었다.


4. 유사 예[편집]


남미 다음으로 나치 전범들이 애용한 곳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배하던 파시즘 국가 스페인국이었다. 비록 대전 말기에 히틀러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프랑코였지만 온갖 전범들이 자기 나라에 대놓고 들락거리는 마당에도 프랑코는 이들을 딱히 막지 않고 남미로 가는 루트를 주선해 주는 등 오히려 도움을 줬다. 이 탓에 스페인에 아예 정착해서 사는 전범들이 많았고, 남미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도 많이 쓰였다. 나치 전범에게만 온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무솔리니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린 이탈리아 파시스트나 공산 혁명으로 쫓겨 온 동유럽 왕족들 등 온갖 인사들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행동했다.[5]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미국 등 연합국에게는 결코 유쾌하게 보이지 않았고, 결국 스페인은 이 전범을 숨겨주는 일과 그 외 정치범 처형 등 여러가지 밉보일 이유 때문에 포르투갈과 달리 마셜 플랜에서 제안도 받지 못한 채 철저하게 제외되어 1970년대까지 남아공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다른 비슷한 사례로는 전직 게슈타포 인원들이 가까운 이집트, 레바논 등 아랍 국가로 도주한 케이스가 있다. 이러한 아랍 국가들은 전후 벌어진 중동전쟁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었고, 이 지역 독재자들도 남미와 비슷하게 나치의 여러가지 정치적, 군사적 노하우, 특히 대이스라엘 첩보전을 수행하는 데 이들을 써먹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던 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도피한 인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일도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에 크게 관심이 없는데다가 인재에 대한 수요까지 넘쳐나는 이들 지역은 갈 곳 없는 전직 나치 정보기관 인사들이 자리잡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국가로 도망간 나치 전범들은 신분도 숨길 겸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현지 인원들과 동화되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아민 알후세이니의 모병으로 이루어진 SS 사단인 한트샤르의 소속원들이 같은 종교를 믿는 이웃 튀르키예나 아랍 국가들로 도주하곤 했다. 알후세이니 본인도 레바논으로 도주했다.

미국캐나다, 호주와 같은 신대륙으로도 많이 도망간 편이다. 애초에 이민자 위주의 국가들인지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들어오기 쉬웠고, 특히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계 이민자들은 이러한 신대륙에 차고 넘치는 데다가 어중간한 동유럽 출신 부역자들은 피난민으로 위장하기도 쉬웠다. 심지어는 발레리안 트리파처럼 전후 자신이 반나치 활동가라고 대놓고 구라를 치면서 들어온 전범도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소련으로부터 인재 유출을 막고 대신 그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CIA와 같은 정부기관들이 앞장서서 그들의 도피를 돕고 대공업무 및 신기술 개발에 이들을 써먹기도 했다.

정반대로 외지, 특히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 부역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에 대해 잘 모르는 서독이나 프랑스 등지로 도피하여 살기도 했다. 스테판 반데라나 쇠렌 캄, 빅토르스 아라이스가 대표적이다.

비슷하게 몇몇 일본군 잔당들은 브라질로 도주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브라질이 친추축국 성향 국가라는 의견이 나오는데, 브라질은 약간 경우가 다르다. 위의 주석에 언급되었듯이 아르헨티나처럼 연합국에 이름만 올려 놓은 게 아니라 잠수함에 지상군까지도 투입해서 추축군과 싸우던 국가이다. 당장 전후 브라질의 독재자였던 움베르투 카스텔루 브랑쿠부터가 2차 대전 당시 참전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통치방식에 있어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시선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일본군 잔당들이 굳이 브라질로 피신한 까닭은 브라질에 일본계 브라질인이 많이 살기 때문에 섞이기 쉽기 때문으로, 지금도 일본 이외에 세계에서 일본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미합중국도, 캐나다도 아닌 바로 브라질이다! [6] 일본군 패잔병 문서 참고.

1990년대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면서 흑인들에게 온갖 백색테러를 저질렀던 군, 경찰 인사들이 흑인들을 피해 이주하는 화이트 플라이트 행렬에 섞여서 대거 해외의 백인 위주 국가로 도피하기도 했다.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온갖 패악질을 벌였던 혁명연합전선의 일부 잔당들은 뒤를 봐주던 라이베리아로 도피했다. 원래는 혁명연합전선에 쫓기던 난민들이 주로 라이베리아에 몰렸는데, 전쟁이 끝나니 상황이 반대가 된 것이다. 라이베리아는 내전이 너무 오래 이어졌고 이에 대한 처벌도 국가 상황때문에 거의 전무하다보니 정부에서든 민간에서든 이들에 대한 처벌 의지 자체가 없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아직도 라이베리아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개중에는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며 당당히 자신의 전적을 밝히는 자도 있고, 정계에 진출한 작자도 있다.

이라크 내전에서 갖은 전쟁범죄 행위를 일삼던 해외 출신 ISIS 대원들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이라크 정부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그 신분을 숨기고 자신의 모국으로 은근슬쩍 도망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ISIS에 가담한 순간 국적이 말소되어 인정되지 않지만, 이렇게 모국으로 돌아오는 전쟁범죄자들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 지가 현재까지도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5. 목록[편집]



5.1. 남미로 도주한 잔당[편집]






  • 에두아르트 로슈만 - 라트비아 리가 게토의 책임자로, 굶주린 개에게 사람을 던져주는 등의 짓거리로 유명했으며 거의 35,000명이 이 작자에게 죽었다고 추정된다. [7]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해서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재혼까지 하며 잘 살았지만, 하필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중혼죄로 기소돼 쫓기는 과정에서 전력이 드러나 체포영장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도주실력이 워낙에 좋았던 탓에 아르헨티나를 잽싸게 떠나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며 숨어서 살다가 끝까지 체포되지 않고 1977년 파라과이에서 사망했다.

  • 클라우스 바르비 - 리옹 지역의 게슈타포 책임자로서 본인이 직접 수감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항복 후 미국 정보기관에 고용되었다가 1951년에 볼리비아로 도피하여 볼리비아의 군사독재자들에게 자신이 나치로 일했을 적의 고문 기법을 전수하기까지 했다. 1982년에 볼리비아에 민주 정부가 수립된 후 빚을 졌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1983년에 프랑스로 이송되었고, 1987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1991년에 77세 생일로부터 정확히 1달 전에 옥사한다.

  • 구스타프 바그너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브라질에 숨어 살다가 1978년 시몬 비젠탈 센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가 이스라엘, 폴란드, 오스트리아의 인도를 모두 거절함으로써 잔류할 수가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1980년 자택에서 가슴에 칼이 꽂힌 채로 발견된다.

  • 프란츠 슈탕글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바티칸의 알로이스 후달의 도움을 받아서 미군에 체포돼 있던 중 탈출한다. 이후 가족과 시리아에 머물다가 1951년 브라질로 가서 폭스바겐 공장에 취직한다. 그러나 로슈만과 달리 본명을, 자기 이름을 그대로 떳떳하게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1961년 서독정부에 기소돼 본국으로 끌려와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1971년 옥중에서 사망한다.

  • 발터 라우프 - 차에서 낮잠을 자다가 배기가스에 죽을 뻔한 경험을 되살려서 초기 유대인 학살방식이었던 가스바겐을 고안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후 시리아로 도피해 이스라엘 건국에 맞서기 위해 현지 정보기관에서 일했는데, 하필 그 해에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레바논으로 도주후, 이탈리아를 거쳐 에콰도르로 도피한다. 이후 다시 칠레로 도피해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자문역을 했고, 1984년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거기 거주한다. 당연히 수많은 나치 추적자들이 그를 쫓았지만 칠레 정부는 당연히 그의 송환을 거부했다. [8]

  • 파울 섀퍼 - 사이비 종교 단체인 콜로니아 사건의 주범. 히틀러 유겐트의무병 출신이었으며, 나치가 망하고 난 후 독일에서 컬트 종교를 운영하다 1961년 아동성폭행 수사를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치 전력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급하게 신도들을 데리고 칠레로 도주해서 거기서 계속 컬트 종교 콜로니아를 이끈다. 이윽고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자 섀퍼는 적극적으로 군부에 협조했고 그의 종교시설은 피노체트의 아우슈비츠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그는 독일대사관까지도 매수해가며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콜로니아의 40년 동안 탈출한 사람은 5명뿐이었고 수백명의 정치범이 그의 시설에서 죽어나갔다. 이후 어릴 적에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기소되어 1996년에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지만 2005년에 다시 잡혀와 2006년에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는 2010년에 옥중에서 8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 에리히 프리프케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로마 외곽 동굴에서 수백 명을 학살한 나치 전범.[9] 2013년 10월 15일, 100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죽었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인 묘 옆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의 매장을 거부했다.[10]



  • 피에르 다이 - 벨기에 렉스당 출신 나치 부역자로, 친나치 기관지에 몸담아 선동 및 선전 활동을 했다. 해외 나치 협력자인 샤를 레스카 (Charles Lescat)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로 도주해서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

  • 카를 베르넷 - 덴마크인 의사로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호르몬 교정 및 강제 거세, 각종 인체실험들을 실행했다. 전후 덴마크에서 체포되었으나, 심장마비를 가장해 빠져나온 후 듀폰을 상대로 자신의 호르몬 연구결과를 팔아넘기려고까지 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도주해서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

  • 헤르베르츠 추쿠르스 - 라트비아 부역자로, 악명 높은 아라이스 의용대 (Arajs Kommando) 소속이었다. 본래 라트비아의 비행사리가에서 도쿄감비아까지 비행기록을 세우는 등 가히 라트비아의 찰스 린드버그라 할 수 있는, 라트비아의 국민영웅이었다. 추쿠르스는 직접 국산 급강하폭격기인 추쿠르스 C-6bis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빅토르스 아라이스를 만나고 아라이스 의용대에 가입한 이후, 추쿠르스는 급격하게 흑화해 온갖 범죄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아라이스와 독일군의 수족 노릇을 자처해서 리가의 유태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는 럼불라 학살과 리가 시나고그 방화에 참여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의용대는 라트비아 거주 유태인의 절반을 죽였다. 전후에는 독일군 무리에 섞여서 브라질로 도주했다. 그 곳에서도 사업체를 만들고 직접 비행기를 몰며 비행사 노릇을 했는데, 그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활동했다. 추쿠르스는 의도적으로 접근해온 모사드 위장요원에게 우루과이에서 사업을 시작해보라는 제안을 듣고 몬테비데오로 향했고, 그 곳에서 모사드에 납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한다[12].

  • 안드리스 리파겐 - 별명인 '드리스' 리파겐으로도 유명하다. 네덜란드갱스터이자 정치깡패로 나치가 들어서자 부역자로 변신했다. SS 국가지도자 보안국 (SD), 1939년 이후엔 게슈타포와 협력하며 비밀경찰 노릇을 했다. 적어도 3190명의 유대인이 그의 손에 의해서 독일에 넘겨졌고 많은 레지스탕스 조직이 와해되었다. 1943년부터는 지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업무를 맡았고, 유대인들을 속여 안심시킨 이후 재산을 빼돌려서 유용했다. 또한 다른 현지 부역자들(vertrouwensman)이 자신에게 유대인을 넘길 경우 그 수익을 일정량 분배해서 효율을 높이기도 했다. 전후 수배되었지만 독일의 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민간포로 신분이 되었고 1946년 벨기에 국경을 넘어 탈출한다. 이 때 자기가 먼저 탈출한 후 가족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정작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고 레지스탕스 멤버와 재결합한다. 이후 난센 여권을 악용하여 스페인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탈출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안 페론과 긴밀한 사이가 되어 안테 파벨리치와 함께 조언자 자격으로 정보조직 창설을 권유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리파겐을 추적했지만 리파겐은 이미 1973년 스위스의 한 사설병원에서 사망한 채였다. 피터 쿠이퍼스 감독의 2016년작 영화인 리파겐이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체자레 마리아 데 베키 - 검은 셔츠단 출신으로 로마 진군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바로 옆에서 수행하던 인물이다[13]. 1922년 토리노에서 노조원들을 공격한 이른바 토리노 대학살의 주요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고, 무솔리니 내각에서는 재무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을 맡았으며 소말릴란드 및 이탈리아령 도데카니사 제도의 총독을 역임했다. 디노 그란디의 베니토 무솔리니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이에 불복하여 이탈리아에 진입한 독일군에 대해서는 휘하 병력들에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할 것을 명하고[14] 자기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추적을 피해 알베르트 케셀링살레시오회의 도움을 받아 피에몬테로 도망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을 피해 파라과이 여권을 사용하여 아르헨티나로 도주한다. 이후 1949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자기를 쫓던 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주역이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함께 네오 파시즘 운동인 이탈리아 사회운동(MSI)을 지원했으나 그 내부에서 어떠한 특별한 직책을 받는 것은 전부 거절했다.1959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 알렉산더르 찬코프 - 불가리아 전 총리이자 독재자 출신으로 페트리치 사건 이후 사임한 이후로는 파시스트 운동가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로써 활동했고 이후에는 친독 망명정부의 총리로 임명된다. 독일이 임명한 친독 인사 치고는 반유대주의 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하는 등 영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전후 권력을 잡은 불가리아 조국전선에게 찬코프는 여전히 체포 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2차 대전이 종전하자마자 찬코프는 보그단 필로프와 페타르 가브로프스키 등 친독 인사들이 줄줄이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할 때 성공적으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고 거기서 1959년 사망하게 된다.



  • 그레고리 로즈만 - 슬로베니아의 사제 출신 나치 부역자로 강제 개종 및 대량 학살에 가담한 책임이 있다. 이후 이른바 '랫라인(Ratline)'으로 통하는 루트를 이용하여 아르헨티나에 몇 번 오가며 숨어있다가 최종적으로는 클리블랜드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는다.

  • 한스 울리히 루델 - 루델은 위조여권을 이용하여 전후 1948년에 나치들의 도피처였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서 잠깐 살았다. 그는 후안 페론과 금세 친해져 현지에서 나치 전범들의 탈출, 정착을 돕는 "전우협회(Kameradenwerk)"를 설립하고 도피해온 과거 슈츠슈타펠, 게슈타포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 당시 남미 각국 군대의 자문역을 해주며 쌓아올린 나치 잔당, 그리고 당대만 해도 아직 세력이 살아있던 군내 독빠들과의 인맥 덕에 나중에는 대전 중 군수기업이었던 서독 기업들의 해외영업을 도와주며 짭짤한 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루델이 군사 자문으로 전해준 지식은 나중에 포클랜드 전쟁 발발 시 아르헨티나군이 어떻게든 잘 써먹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바실로 라미 노소 장군도 루델의 연수생 출신이었다. 이후 1953년에는 서독으로 귀국하여 강성 신나치 운동을 벌이게 된다.



  • 요한 폰 레르스 : 나치당의 반유대 선전활동가로 유독 친이슬람적인 사상을 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페르 엥달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가 그의 친이슬람 행보에 관심을 보인 아민 알 후세이니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로 이동했다. 이후 나세르 정권 치하에서 반유대 선전을 담당했다. 예나 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재직 중일때부터 반유대 사상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었다. 이집트에 숨은 이후로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오마르 아민으로 바꾸었다. 일본어를 포함하여 5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






5.2. 기타 국가로 도주한 잔당[편집]



  • 베르너 폰 브라운 (미국) - 남미 외의 케이스에서는 가장 유명한 케이스일 것이다. 정확히는 로켓 기술을 위해 미국이 앞장서서 도피를 도왔다.

  • 헤르미네 브라운슈타이너 - 라펜스브뤼크 및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의 간수 출신으로, 1000여명 이상의 살해 혐의가 있다. 신분을 숨기고 미국에 정착하여 살려다가 발각되어 서독으로 추방당했고, 전후 역사상 첫 번째로 미국에서 추방당한 나치 전범으로 기록되게 된다.

  • 호르스트 슈만(미국, 가나) - 아우슈비츠의 악명 높은 각종 인체실험들을 지도한 의사로 미군에 체포되었으나 1년도 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그대로 독일에 거주했다. 그러나 1951년 총을 구매하다 전력이 드러나 영장이 발부되자 그대로 미국으로 도피했다. 한동안 소재가 파악되지 않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 가나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제2의 슈바이처"랍시고 기재되었고, 당시 그를 비호하던 콰메 은크루마 정권이 1966년 무너지자 그대로 서독으로 압송되어 끌려온다. 슈만은 법원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지만 6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된다. 정작 슈만은 1983년 11년을 더 살고 사망했다.

  • 야키프 팔리(미국) - 미국에서 추방된 95세의 전범. 우크라이나인 부역자였으며 수용소의 경비병이었다. 이미 2001년에 전력이 드러났지만 그는 자신은 학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게슈타포 및 무장친위대 훈련을 받은 사실과 라인하르트 작전가담이 확인되어 2004년 국적을 박탈당하고 이민국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으나 독일, 우크라이나, 폴란드 모두 그를 환영하지 않아 무국적 상태에 놓였고 추방 절차가 지연되었다. 이후 2018년 퀸즈에서 독일로 추방되었으며 2019년에 사망했다.

  • 알지만타스 다일리데(미국) - 리투아니아인 부역자였으며, 빌뉴스 게토의 경찰이었다. 1997년 전력이 드러나 국적이 박탈되었으며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다시 기소되었지만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수감되지는 않았다. 이후 2015년에 사망한다.

  • 미하일 고르슈코프(미국) - 에스토니아인 부역자였으며, 게슈타포 대원으로 3000명이 사망한 슬류츠크 사건에 관여한 것이 드러나서 2002년 국적이 박탈되었다.

  • 헬무트 오버란더(캐나다) - 아인자츠그루펜 대원이었으며, 전력이 드러난 1994년 이후 현재까지도 캐나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그의 국적을 박탈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2021년 국적 박탈 소송 중 고령으로 사망했다.

  • 블라디미르 카트류크(캐나다) - 우크라이나인 부역자였으며, 156명이 사망한 벨라루스 카틴 학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시몬 비젠탈 센터의 추적 대상이 되었고, 캐나다 정부가 그를 기소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실 처벌은 되지 않은 채 2015년 사망했다. 본인은 생전에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 알로이스 브루너(시리아[15]) - 시몬 비젠탈의 생전 마지막 추적대상으로 유명하며 전후 시리아 정보기관에서 일했다. 모사드에서 1961, 1980년 두 번에 걸쳐 우편폭탄으로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경상만 입고 살아남아 추적자들을 조롱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간 큰 행위까지 벌였다. 이후 프랑스, 독일 정부는 브루너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시리아에서는 무시한 끝에 2014년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 아리베르트 하임(이집트)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의사였으며, 수많은 각종 인체실험들을 자행했다. 전후 미군에 잠시 체포되었다 풀려났으나 1961년부터 서독 정부가 전범들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영장이 내려온 즉시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를 거쳐 이집트로 도주한다. 이후엔 가족 외에 모든 연락을 끊고,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아랍식으로 개명하는 등, 대놓고 사람들을 도발한 알로이스 브루너와는 달리 절대 외부에 노출되려 하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그 탓인지 모사드가 2009년까지 정말 기를 찾고 추적해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저 기사를 통해 그가 1992년에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 오토 스코르체니(스페인국) - 연합국에서 자신을 정보원으로 쓴다는 소식에 수용소를 탈출해서 잠시 스페인으로 도피했다가 아예 정착하며 전범들의 도피를 지원한다.

  • 요아힘 파이퍼(프랑스) - 형기를 마치고 1956년에 SS 동료들의 도움으로 포르셰의 직원이 되지만, 어쨌든 전범이었기에 기피대상이었고 거기에 1960년대에 서독의 전범추적이 거세지고 실제로 보베 학살혐의로 재판에 고발까지 당하자 겁대가리도 없이 한때 침략했던 국가로 도피해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다가 후에 한 잡지의 폭로로 발각되었다. 이후 1976년 살인예고를 받고,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진짜로 자택에서 살해당한다. 이 일로 기소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누구도 사실상 책임을 묻지 않아 수사는 흐지부지 끝났다.

  • 스테판 반데라 (서독) - 약간 특이한 케이스로, 주 무대가 우크라이나폴란드 등지였던지라 전후 자신의 범행과 접점이 없던 서독으로 망명한 케이스이다. 전후에도 네오 나치들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계속 하다 KGB에 추적당해서 죽었다.

  • 쇠렌 캄 (서독) - 덴마크무장친위대원으로, 나치 점령 시기 덴마크에서 언론인 탄압 및 카를 헨리크 클레멘센 (Karl Henrik Clemmensen) 암살에 관여한 혐의가 있다. 전후 독일에서 독일인인 척하면서 살고 있었으나, 1968년 살인혐의로 기소되고 나서 부터 오랜 법정공방에 돌입한다. 클레멘센의 후손들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까지 그의 살인혐의를 입증하고자 노력했으나, 여러 국제적 및 법적 문제가 얽히면서 그의 덴마크 송환은 불발된다. 결국 독일 땅에서 편히 눈을 감았다.


  • 체림 수브조코프 (미국) - 체르케스인 경찰이자 무장친위대원으로, 무장친위대 북캅카스 군단 소속으로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학살에 관여한 바가 있다. CIA에 해당 사실을 시인하는 대신 숨어 살다가 SS 부역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고 1985년 9월 6일, 집에 파이프 폭탄이 투척되어 그대로 즉사한다.

  • 르네 라그루 (스페인국) - 벨기에 플란데런 출신 무장친위대원으로,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스페인으로 도주해서 죽을 때까지 거주한다.

  • 빅토르스 아라이스 (서독) - 라트비아 부역자로, 악명높은 아라이스 의용대 (Arajs Kommando)의 지도자였다. 아라이스와 그의 의용대는 전쟁 동안 26000명을 죽였다. 라트비아 리가 게토에서 럼불라 숲 학살에 가담했고, 라트비아 유대인의 절반을 죽인 혐의가 있다. 유대인을 직접 강간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영국 포로수용소에 잠시 들어가 있다가 독일인인 척을 하면서 함부르크 인쇄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던 1979년 함부르크 법원에 기소당해 집단학살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88년 옥사한다.

  • 칼 린나스 (미국) -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로, 타르투 수용소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혐의가 있다. 결국 해당 혐의가 발각되어 같은 부역자 표도르 페도렌코와 함께 1987년 소련으로 추방된다. 사형선고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추방된 지 3달도 안 되어 병으로 사망한다.

  • 표도르 페도렌코(미국) - 우크라이나인 부역자로,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근무했다. 우크라이나인 소련군 패잔병 (Trawniki) 출신으로 전향해서 트레블링카에 배치되었다. 트레블링카에서 처형인 임무를 맡다가 전후 서독을 거쳐서 미국으로 탈출한다. 1987년 혐의가 발각되어 미국에서 추방되었고 소련으로 송환되어 그대로 처형당했다.

  • 알렉산데르 라크(캐나다) -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로, 에스토니아 예갈라 강제수용소 (Jägala concentration camp)의 책임자였다. 예갈라 수용소에서 약 10000여 명을 죽인 혐의가 있으며 수용자들과 집단난교를 하기도 했다. 전후 캐나다로 도피했지만, 예전 동료들이 속속들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1960년 차고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모사드에 의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 미콜라 레베드(미국) - 우크라이나의 반데라주의자로, 우크라이나 국가정부에 참여해서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을 주도했다. 이후에는 나치와도 갈등을 빚다가[1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소작전을 도왔다. 이후 미국으로 도피해서 1990년대 죽을 때까지 뉴욕 퀸즈에 거주했다.


  • 차타리 라슬로(캐나다) - 헝가리 왕국의 경찰이었다. 현재는 슬로바키아에 위치한 코시체(Košice)에서 경찰로 근무했으며, 15,700여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추방하거나 강제수용소의 여성 수용자들을 채찍으로 내리치고 맨손으로 땅을 파게 하는 등의 가혹행위를 가하거나 도시 거주민들을 폭행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법정에 의해 기소되어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차타리는 이듬해인 1949년에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가장하고는 캐나다로 도피하였다. 1955년 캐나다 시민권을 발급받고 몬트리올에서 미술품 거래상으로 살아갔으나 1997년 시민권에 대한 문제점이 발각되어 시민권이 취소된다. 다만 전범으로 기소되진 않았고 헝가리로 다시 돌아가 부다페스트에서 조용히 사는 듯 했으나 그의 나치 부역 행각이 궐석재판으로부터 무려 63년 만인 2011년 9월에 시몬 비젠탈 센터에 의해 발각된 후 헝가리 법원에서 조사를 거치고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1948년 차타리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기각되었고, 2013년 8월 10일에 차타리는 병원에서 폐렴으로 향년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오토 에른스트 레머 (이집트, 스페인) :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을 이끌다 정당이 불법 판정을 받고 해산당한 이후 이집트로 도피하여 나세르 밑에서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이후 1980년대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 또 네오 나치 활동을 했고, 자신의 행동 및 유대인 탄압, 전쟁범죄를 정당화하는 잡지를 발간하다가 다시 법망의 추적을 받게 된다. 결국 또 스페인으로 도피했고, 1997년에 거기서 사망한다.




  • 클라스 카렐 파버 (서독) - 네덜란드 부역자로 같은 부역자인 헹크 펠드메이어르 아래의 펠드메이어르 존더코만도 처형대(Sonderkommando Feldmeijer execution squad)에서 일하면서 최소 22명의 반나치 인사 및 유태인을 직접 살해한 혐의가 있다. 전후 1947년 유죄 판결을 받아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독일로 도주하여 시민권을 얻고 잉골슈타트에 정착하여 아우디에서 일했다. 네덜란드는 꾸준히 파버의 송환을 독일에 요청했지만 독일 정부는 계속 거부하였다. 2009년 파버는 시몬 비젠탈 센터의 가장 중요한 전범 추적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이 네덜란드를 지지하고 나서고, 네덜란드가 파버에 대해 유럽 체포 영장을 발부하면서 독일에게 압력을 가하자 결국 2012년 독일 법무부는 잉골슈타트 사법부에 전범에 대한 종신형을 집행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파버는 2012년 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사망하고 만다. 이에 분노한 네덜란드 시민들은 당시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의 방란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브레다(Breda)라는 마을은 가우크의 방란에 항의하며 마을 이름을 잠시 '가우크 말고 파버(Gauck nicht, Faber wohl)'로 개칭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도주한 수많은 나치 전범 및 부역자들이 시몬 비젠탈 센터에 쫓기고 있다.


5.3.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잔당[편집]



  • 마르틴 보어만 - 1972년에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확실하지 않다가 1998년 DNA 대조 검사로 공인되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사망처리였으나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남미 대륙 도주설이 유력했던 인사 중 하나였다.


6. 대중문화[편집]


김형배 화백의 1984년 연재 만화로, "히틀러와 UFO"라는 일본 3류 저널리스트 '오치아이 노부히코'의 음모론 서적을 기초로 작화했다.[17] 이 만화에서 히틀러의 UFO 기지는 아르헨티나에 있었다.

  •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후기 곡 'No one is innocent'에는 "God save Martin Borrman, and Nazis on the run"이라는 가사가 존재한다. 이 곡 자체가 섹스 피스톨즈 해산 이후 제작된 세미 다큐멘터리 그레이트 록앤롤 스윈들에 삽입된 곡인데, 영화 상에서 보컬 쟈니 로튼이 탈퇴하고, 시드 비셔스가 이탈한 뒤, 나머지 멤버 두 명이서 브라질로 날아가서 리우데자네이루에 은거하고 있는 열차 강도 로널드 빅스를 보컬로, 마르틴 보르만[18]을 베이시스트로 영입해서 새로운 섹스 피스톨즈를 만든다는 엉터리 내용이다. OMG 영화클립





  • 마블 코믹스캡틴 아메리카에서도 제모 남작이 전후 남미로 도주해서 한 동안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으나 캡틴 아메리카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스터스 오브 이블'이라는 빌런 조직을 결성하여 캡틴 아메리카와 어벤저스랑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바위에 깔려 사망하게 된다.

  • 헬보이에서도 당연히 등장. 나치 과학자 중 하나인 헤르만 폰 클렘프트가 이곳으로 도망쳐서 새로운 제3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클렘프트가 나치 잔당에게도 미친 놈 취급 받은 것은 함정

  • 영화 오명브라질 리우로 도망간 나치 잔당들을 추적하는 스파이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잔당들은 무려 우라늄을 몰래 빼돌린다고 나오지만.... 이 사실이 밝혀진 후 빠르게 맥거핀화 (....) 감독이 감독인 데다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로맨스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 심슨 가족에서는 히틀러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바트가 남반구에 변기물이 어떤 방향으로 도는지 궁금해서 아무데나 전화를 걸다가 스쳐지나가는 장면으로 나온다.

  • 심슨 가족 시즌 25 에피소드 16, 독일과 브라질이 축구 결승전을 하는 장면에서는 한 브라질인이 독일인에게 “나치 놈들!” 이라고 야유하자 독일인은 그 브라질인에게 “나치 숨겨주는 놈들!” 이라고 야유한다(…). 둘 다 맞는 말 하고 있으니까 싸우지 말라고 중재해주는 뒷 자리 관중은 덤.클립

  • 소서러에서 중간에 등장하는 마르케스란 이름의 노인이 주인공과 행동을 함께 하는데 뉘앙스상 남미에 몸을 숨긴 전직 나치로 추정된다.[19]

  •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주요 무대가 되는 코르토 말테제는 남미지역의 외딴 섬 국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도망친 나치 잔당들이 세운 거대한 연구시설인 요툰하임이 세워져있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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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나치 군장교로 활동했던만큼 반이민 정책을 주 골자로 정치공세를 펼쳐 극우세력의 지지를 유도했다.[2] 정말 적극적으로 싸운 곳은 잠수함지상군까지 파견한 브라질밖에 없고, 나머지는 일부 국가가 참전을 선언하거나 파견하기는 했으나, 생색 내기 수준이었고, 거의 다 1943년 이후에 참전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칠레는 1945년 전황이 회복 불가능해지자 어쩔 수 없이 연합군에 줄서기한 수준.[3] 아이러니하게도 후안 페론 본인은 백인과 아르헨티나 원주민 테우엘체 족의 혼혈인(1/4 원주민, 3/4 백인)이었기 때문에 집권하는 동안 아르헨티나 원주민들의 권익향상에 신경을 쓴 인물이었다. 사실 브라질아르헨티나의 지도자였던 제툴리우 바르가스후안 페론이나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건 똑같았기는 했지만 다른 사상도 같이 짬뽕되었던 덕택에 인종차별 색채가 옅어졌고 결과적으로 중도화되었던 것이었다. 후안 페론 개인은 반유대주의 성향이 없어서 이스라엘과도 수교하고 장관들 중에도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 있었다.[4] 체 게바라의 여행담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도 독일계 아르헨티나인들이 가끔씩 나온다. 가브리엘 에인세라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도 독일 이민 후손이다.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아버지가 독일계 스위스인 이민자의 후손이다. 안데스 산맥 건너편인 칠레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아르헨티나와 칠레 모두 스페인어의 발음이나 어휘 등에 과거부터 유입된 독일계 수도사 및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독일어 흔적이 알게 모르게 남아 있다. 박주호의 아내 안나도 스위스 사람이지만 출생지는 아르헨티나라서 독일어 억양이 섞인 스페인어를 쓴다.[5] 이는 옆 나라 독재자인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살라자르는 프랑코만큼 대놓고 많은 수의 나치 전범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6] 실제로 브라질과 일본을 오가는 수요가 상당히 많아서 일본항공은 2010년 파산선언하기 직전까지 도쿄 출발 로스앤젤레스뉴욕을 경유해서 상파울루까지 항공편을 띄웠을 정도였다. 다만 일본에서 브라질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도쿄가 아니라 시즈오카현하마마츠시다. 브라질 총영사관도 여기에 있으며, 지역 내에서 포르투갈어는 한국어나 중국어보다도 높은 중요도를 갖고 있다.[7] 훗날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영장을 발부했을 때 확정된 인원만 따져도 어린아이 800명 포함 3,000여 명이다.[8] 나치 추적자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정작 라우프는 에콰도르에 있던 시절 수 차례 모사드와 접촉해서 협력했다는 기록이 CIA 문서에 남아있다. 링크1 링크2 처음에는 단순히 시리아 정보기관 시절 정보들을 팔아넘겨 생존을 보장받는 정도였다면 후에는 아예 중동 국가들에 그를 은밀히 투입시켜 고정 스파이로 써먹으려는 계획까지 있었다고.[9] 성 비오 10세회 문서 참고.[10] 프리브케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아르헨티나 남부 관광명소인 바릴로체로 도망쳐 40년 이상 호텔 지배인으로 살다 1995년 이탈리아로 송환돼서 재판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인류의 존엄에 대한 모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11] 참고로 아내 역시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 근무한 전범이었다.[12] 탄흔이 몸 이곳 저곳에 남아있었고, 두개골이 으깨져 있었다.[13] 흔히 로마 진군 하면 나오는 이 사진에서 무솔리니 바로 옆에 서 있는 대머리에 콧수염 달린 사람이 바로 데 베치다.[14] 당시 데 베치 휘하의 이탈리아 왕국군 병력은 이에 불복하여 피옴비노에 상륙하는 독일 국방군 병력을 상대로 용맹하게 응전해서 100명 이상 사상자를 내고 200명 가량을 포로로 잡았다. 그럼에도 데 베치는 그 포로들을 전부 풀어주고는 국방군 측에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할 것을 명했다.[15] 쿠르트 발트하임이 사망했던 당시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로 화환을 보냈던 국가 중 하나이다.[16] 게슈타포가 현상금을 걸었다.[17] 오치아이의 음모론들은 알게모르게 한국의 UFO/음모론자 빅텐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국 출판업계 특성상 미스테리 서적도 일본 서적의 해적판 형식으로 나오는 책들이 적지 않았을것으로 사료되기 때문. 90년대에 나온 한국의 그쪽계열 모 서적(내용 자체는 환뽕이 치사량에 달했다)에서조차 일본식 표현 (유대 자본 배후를 유다야 신디케이트라고 표현했다. 일본어에서 유대인을 지칭할 때 ユダヤ라고 한다)이 간혹 보일 정도면....[18] 설정상 남미에 숨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19] 유대계 살인청부업자가 그를 죽이고 대신 폭약 운반에 동참한다.[20] 쌍제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치 잔당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면을 가정한 것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