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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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설가 나도향.jpg

이름
나도향(羅稻香)
본명
나경손(羅慶孫)[1]
필명
나빈(羅彬)[2]
본관
나주 나씨[3]
출생
1902년 3월 30일
한성부 서서 용산방 청파1계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1가 56번지)[4]
사망
1926년 8월 26일 (향년 24세)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통5정목 32번지
(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학력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 / 중퇴)
와세다대학 (영문학 / 중퇴)

도향(稻香)[5]

1. 개요
2. 생애
3. 작품



1. 개요[편집]


대한민국소설가. 본관은 나주(羅州),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며[6], 다른 필명은 빈(彬)이다.

독립유공자 나병규는 그의 조부이다.

2. 생애[편집]


나도향은 1902년 음력 3월 30일 한성부 서서 용산방 청파1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1가 56번지)에서 양의사인 아버지 나성연(羅聖淵)[7]과 어머니 김성녀(金姓女)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학에 뜻을 두었기에 1919년 중퇴한 뒤 조부의 장롱에서 돈을 훔쳐 와세다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당시 부친 나성연은 본업인 의사일을 멀리하고 은둔하여 독서에만 몰두하였고, 조부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가세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이 때문에 나도향은 학비 부족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귀국 직후인 1920년에는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백조》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줄기차게 소설을 써나갔다.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인정받으며 나운규에 의해 영화화된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에는 작가의 처지와 비슷한 예술가 지망생들로서 주관적 감정을 토로하는 데 그쳐, 객관화된 '나'로 형상화되지 못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일종의 습작기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을 고비로 빈곤의 문제 등 차츰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극복의지를 드러내는 주인공들을 내세움으로써, 초기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사실주의로 변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변모의 현실화로 나타난 작품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이다. [8]

이토록 많은 작품을 쓰는 동안 이름을 떨쳤으나, 1926년 8월 26일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통5정목 32번지(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제분협회빌딩 옆 자리)의 자택에서 위장병으로 인해[9] 24세의 너무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다.# 1980년 초반만 해도 1927년에 사망했다고 인명사전에 잘못 기재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나도향은 생전 몇 번의 연애 및 짝사랑을 하였으나 모두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안동보통학교 교사 시절에 일본인 여교사 마츠모토와 교제했지만 당시 조선인과 일본 여교사와의 결혼은 모든 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하여 끝내 헤어졌고 백조 시절에는 기생 단심과 깊은 관계까지 가는 듯 하였으나 그녀가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바람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5년에 마산에서 머물때는 장영옥이라는 여성을 짝사랑했지만 하필이면 이 즈음 폐결핵에 걸려 단념해야 했다. 요절하기 직전에는 일본에서 동아일보의 여기자인 최의순[10]을 짝사랑했지만 그녀는 나도향의 고백을 거절했고 결국 그녀가 부자에다가 색동회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아동문학가 진장섭과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나도향은 실연의 아픔을 뒤로하고 귀국하여 고향 집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여담으로 병으로 몸이 수척해지고 가난 때문에 차림새도 좋지 않아 고향 가족들이 돌아온 나도향을 보고 처음에는 웬 거지가 왔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나도향의 묘지는 본래 서울 이태원의 공동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태원이 개발되면서 묘지를 이장하였다가 행적이 묘연하다고. 나도향의 후손들도 그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3. 작품[편집]


※ 주로 수위 높은 성인향의 소설을 남겼다. 대부분의 소설이 치정관계를 다루었다.
  • 소설편집추억 (1921년)
  • 젊은이의 시절 (1922년)
  •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1922년)
  •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 (1922년)
  • 환희 (1922년) - 유일한 장편소설. 자전적 소설로, 부잣집 첩으로 간 옛애인이자 기생인 단심을 망하라고 저주하는 소설이다.
  • 십칠원 오십전 (1923년)
  • 속 모르는 만년필 장사 (1923년)
  • 춘성 (1923년)
  • 여이발사 (1923년)
  • 은화 백동화 (1923년)
  • 행랑자식 (1923년)
  • 자기를 찾기 전 (1924년)
  •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 (1924년)
  • 의사의 고백 (1925년)
  • 계집 하인 (1925년)
  • 벙어리 삼룡이 (1925년) - 3차례 영화화되었다.
  • 물레방아 (1925년) -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 꿈 (1925년)
  • 한강변의 일엽편주 (1925년)
  • (1925년) - 영화화되어 나도향 작품 중 제일 유명하다. 하층민들의 무의미한 삶과 성생활을 다루었다.
  • 지형근 (1926년)
  • 화염에 싸인 원한 (1926년)
  • 청춘 (1926년)
  • 당착(撞着)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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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손(慶孫)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인데, 나도향은 할아버지 중심적인 이 이름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사실 이 이름은 조부 나병규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조종대가 지어준 것이라 한다.#[2] 논어 옹야(雍也)편의 문질빈빈(文質彬彬:형식과 바탕이 조화를 이룬다)에서 따온 필명이다.[3] #[4] #[5] 도향(稻香:벼 향기)은 친구 박종화가 지어준 아호이다.#[6] 본명인 나경손은 조부 나병규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조종대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문학에 뜻을 품었던 나도향은 조부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를 이어 한의사를 시키려는 모습 때문에 조부와 사이가 무척 안 좋았고 자신의 본명도 무척 싫어했다고 전해진다.[7] 1883~?. 1902년 5월 2일 20세의 나이로 도쿄 시바(芝)구 아타고(愛宕)정의 자선병원에서 의학수업을 받기 위해 효고현을 통해 입항한 사실이 있다.# 1909년 4월 20일 대한흥학보 대금으로 30전을 납부했다.# 1911년 5월 9일, 대한의원부속의학교 졸업자로서 의술개업인허장 제55호를 받고 의사가 되었다.# 이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외과를 졸업했다.# 여담으로, 평소 의학보다는 문학과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던 탓인지 의학교 졸업 때 성적이 전체 최하위였다. 그래도 졸업 직후에는 외과로 개업하였으며, 1924년 부친 나병규가 별세하자 가세를 유지하기 위해 의사일에 성심성의를 다했다고 한다.#[8] <네이버 지식백과> 나도향(羅稻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9] 폐결핵 때문이라고도 한다.[10] 얼굴도 예뻤지만 동경여자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를 나온 수재에다 글재주가 있어 유학생들의 연모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