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팔도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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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강산 시리즈
영화
팔도강산 (1967)
속 팔도강산 (1968)
팔도 며느리 (1970)
내일의 팔도강산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 (1972)
우리의 팔도강산 (1972)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1974~1975)
종착역 (2008)




파일:꽃피는 팔도강산.jpg


1. 개요
2. 특징
3. 출연진·설정
4. 수상



1. 개요[편집]


1974년 4월 14일부터 1975년 10월 17일까지 KBS에서 방영된 일일 드라마다.


2. 특징[편집]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근대화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영화 팔도강산이 성공하면서 속편 행진을 이어가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TV수상기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자리잡기 시작한 안방극장에서도 산업화의 성과를 보여주고자 TV 드라마로 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과 기존 팔도강산 시리즈의 줄거리를 연결하려고 내일의 팔도강산의 결말 부분이 강제로 수정되어져서 내용이 엉성해지는 일도 있었다.

여하튼 1974년 KBS에서 팔도강산 시리즈를 TV 드라마로 제작했는데, 당시 연출은 김수동 PD였다. 제작 목적이 목적이다보니 참신성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기는 했지만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데다가 캐스팅도 당시로서는 초호화였고 각 정부 부처와 기업에서 대대적으로 협찬에 나섰기 때문에 영화판과 마찬가지로 당시로서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고[1] 대한항공이 유럽에 취항하자 이를 홍보하기 위해 프랑스로 해외 촬영을 나가기까지도 했으며, 줄거리도 하도 우려먹은 부분이 많다는 지적에 따라 멜로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넣었다. 여하튼 내용 자체가 구리구리한 면이 있어도 기업들의 성공담이나 정부가 홍보하려고 하는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군데 군데 집어넣으면서도 건설현장과 명승지를 돌아다니면서 펼쳐지는 일들을 홈드라마적인 요소와 잘 엮었던 점이 컸다. 그래서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주5회 방송으로 장장 398회에 걸쳐서 방영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당시에 제작된 홍보물 가운데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다.

하지만 꽃피는 팔도강산 집필은 윤혁민 작가에게 있어서 불편한 경험을 남겼다. 비록 인기를 끈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제작 의도가 의도이다보니까 새마을운동이나 유신 홍보, 박정희 정부 찬양 대사를 군데군데 집어넣을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시청률이 높았던 만큼이나 시청자들에게 많이 까였던 드라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 잡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고.

여담이지만 신봉승 작가도 꽃피는 팔도강산 집필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중앙정보부로부터 꽃피는 팔도강산의 집필을 맡으면 원고료를 비싸게 주는 것은 물론이고 드라마가 잘되면 새마을훈장도 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정책홍보성 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꽃피는 팔도강산의 집필을 거절했고, 중앙정보부에서 찾아올까봐 열흘간 잠적한 끝에 윤혁민 작가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많은 인기를 끌었음에도 꽃피는 팔도강산에 대한 자료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당시 비디오테이프는 가격이 비싼 데다가 방송사 내에서 TV프로그램이 문화자산이라는 인식도 드믈었기 때문에 팔도강산 방영 직후 테이프를 재촬영하는데 썼다. 그래서 영상자료는 고사하고 대본조차 보존이 안 됐다.[2] 1975년 봄 개편을 앞두고 2시간 짜리 총집편을 방영한 것을 보면 그래도 이때까지도 일부 방송영상 자료는 남아 있었지만 이후로는 나머지 방송 영상들은 테이프 덮어쓰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중에 KBS 방송 관계자들도 TV 프로그램 제작목적으로 이 드라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낼려고 했을 때 자료가 부재한다는 사실에 한탄해있을 정도. 그만큼 당시 TV프로그램 보존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2006년에 포스코는 윤혁민 작가와 김수동 PD, 황정순, 최은희, 장민호 등 해당 드라마의 출연진 및 제작진 9명을 초청한 바 있고,[3] 2008년에 꽃피는 팔도강산이 중국판으로 리메이크된 후 방영되었다. 물론 팔도라는 말 자체가 한국에서나 쓰이는 말인 만큼 제목은 개명되어서 노반(老伴)으로 정해졌다. 한국에서도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 MBC에서 종착역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기는 했지만 그저 그런 드라마로 묻혀진 데 반해서 중국에서는 시청률 9.57%가 나오기도 했을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3. 출연진·설정[편집]


협동한의원 원장인 김희갑황정순은 딸만 일곱을 두었다(영화판에서는 1남6녀). 큰딸 최은희는 국립과학기술연구소 장민호 박사와 서울에서 살고 있고, 둘째 도금봉은 유랑극단 단장을 하다 농사를 짓는 박노식전라도에 살고 있다. 셋째 김용림은 목장을 운영하는 황해경기도에서 살고, 넷째 태현실6.25 전쟁 때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 박근형속초시에서 횟집을 하고, 다섯째 윤소정포항제철에 다니는 간부 사원 문오장포항시에 살고, 여섯째 전양자울산 공단 내 석유회사에 다니는 오지명울산에 살고 있다. 막내 한혜숙스튜어디스로 일하는 워킹우먼이고 그의 연인은 재벌 후계자임을 숨기고 막노동을 하는 민지환이었다.

최은희의 딸로 김자옥, 태현실의 아들로 백윤식이 출연하는 등 한국 최고의 배우들과 촉망받는 신인들이 총출연한 초호화 배역이었으며, 당시 녹화 차량을 이용헤 제작한 최초의 드라마, 프랑스 파리 현지 녹화를 한 최초의 해외 로케이션 드라마, 주요 일간지에 전면 컬러 광고를 집행한 최초의 드라마, 최다 야외 녹화, 회당 최고 제작비 기록을 갖고 있었다.


4. 수상[편집]



[1] 당시에는 자가용이 사치품인지라 고속도로에 자동차가 별로 다니지 않았을 때였고, 그래서 자동차를 다니는 장면들을 찍기가 난감했는데 이럴 때 경찰에서 일부러 길을 막았다가 한꺼번에 풀어서 도로가 자동차로 붐비는 장면을 만들기도 했다.[2] 당시에 방송사에서 녹화된 테이프를 방송이 끝나면 방송분을 지우고 다시 재활용하는게 관례화되어 있어서 당대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의 자료는 TBC를 제외하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얼마나 알뜰하게 썼는지 녹화용 비디오 테이프가 도입된게 1964년도인데 1960년대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힘들고 1970년대 프로그램도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은 겨우 몇편씩 보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나마 어렵게라도 접할 수 있는 자료들은 주로 뉴스 보도자료나 다큐멘터리, 특집프로그램 위주다.[3] 원래 포스코 측은 스태프 및 출연진 20명 전체를 초청 대상으로 잡았으나 김희갑 등 6명은 이미 작고했고, 박근형과 전양자 등 4명은 촬영 스케줄 등의 개인 사정으로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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