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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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김효범
코치
김보현
스태프
매니저
천재민 ·
트레이너
최승조 · >

전력 분석
최수현 ·

통역
왕준일 ·

기사
임병길
가드
1 이동엽 · 3 이정현 [[주장|

C
]] · 5 김시래 · 6 김무성 · 7 홍경기 · 8 조준희 파일:부상 아이콘.svg · 9 김광철 · 14 김진영 · 15 나바 · 17 박민채 · 23 김근현
포워드
2 최승욱 · 13 차민석 파일:부상 아이콘.svg · 20 레인 · 24 신동혁 · 27 윤성원 ·
센터
11 이원석 · 21 코번 · 22 김한솔 · 31 김승원 · 32 조우성
타 한국프로농구 구단 명단
* 본 문서는 간소화한 것입니다. 선수단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 주세요.




김효범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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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7
2010














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

SEOUL SAMSUNG THUNDERS

파일:김효범2023-24.png

김효범
金孝範

본명
브라이언 김
Brian Kim
출생
1983년 11월 10일 (40세)
국적
[[캐나다|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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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교
포틀랜드 대학교 (편입)
뱅가드 대학교 (졸업)
신체
189cm|체중 90kg[1]
직업
농구선수(슈팅 가드 / 은퇴)
농구코치
종교
기독교(개신교)
프로 입단
2005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울산 모비스 피버스)
현역시절 등번호
34, 2, 28
소속
선수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5~2010)
서울 SK 나이츠 (2010~2012)
전주 KCC 이지스 (2012~2017)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17)
코치
[KBL 코치 외 경력 펼치기 · 접기 ]
뱅가드 대학교 (2017~2018 / NCAA)
그랜드 래피드 드라이버 (2019~2020) / NBA G리그)
서울 삼성 썬더스 (2020.12 / 인스트럭터)
서울 삼성 썬더스 (2021~)

1. 개요
2. 선수 시절
2.1. KBL 데뷔 이전
2.1.1. 대학 시절 김효범의 수준에 대해
2.2.1. 1~3년차, 모비스 시절 초기
2.2.2. 4년차, 전성기의 시작
2.2.3. 논란
2.2.4. 5년차, 두번째 우승
2.3.1. SK 1년차, 짧은 전성기
2.3.2. SK 2~3년차, 너무나도 빠른 쇠락
3. 시즌별 성적
4. 지도자 시절
5. 선수로서의 특징
5.1. 플레이 스타일
5.1.1. 원온원 퍼포머
5.1.1.1. 리딩과 안정감의 미흡함
5.1.1.2. 오프더볼 무브의 결점
5.1.2. 리듬슈터
5.1.3. 운동능력, 아트덩커, 행타임 퍼포머
5.1.3.1. 지나치게 예쁜 농구, 박스아웃의 미흡
5.1.4. 탑 수준의 대인수비, 부족한 팀 수비
6. 여담
7. 역대 프로필 사진



1. 개요[편집]


캐나다농구인. 현재는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슈팅 가드. 여러가지로 한국프로농구의 뜨거운 감자이기도 했던 선수로 디시인사이드 농구 갤러리에서는 그의 본명에서 파생된 브랄킴, 부랄킴 등으로 불린다.


2. 선수 시절[편집]



2.1. KBL 데뷔 이전[편집]


잠원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가족 전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성장, 캐나다 밴쿠버 옆에 있는 랭리라는 도시에서 살았다.[2]

월넛 그로브 세컨더리 스쿨 출신으로 쥬니어 스쿨 시절부터 학교 농구팀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주전 상당수가 170-180대 한국인인 팀을 이끌고 여기서 30점에 평균 득점과 더불어 블락을 제외한 스탯을 독식하며 팀을 주 4강으로 이끌면서 랭리시 MVP, BC주 올스타로 뽑혔으며 주 6위의 유망주에 랭크되는 등 유명세를 탄다. 특히 빈스 카터의 360윈드밀이나 마이클 조던의 크레이들 덩크, 코비의 비트윈더렉 덩크 등을 구사하면서 동양인 최초로 BC주 덩크왕에 오른 고2 시절은 당시 지역 일간지, 교포 신문에도 크게 나온 바가 있다.[3] 12학년 시절 24득점 8리바운드를 평균으로 하는 성적을 거두면서 캐나다 스포츠 다이제스트가 선정하는 고교선수 12위에 꼽히고 올 캐네디언 나이키 캠프에 초청받는 등 캐나다 고교농구의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경기를 지켜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관계자가 붙여준 별명은 코리안 조던, 그리고 NCAA 1부리그 WCC 컨퍼런스의 포틀랜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당시 NCAA 1부에 진출한 단 3명의 아시아인 중 하나로서 교포 잡지 KORAM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소개되기도 한다.[4]

하지만 NCAA 리그 적응에 다소 힘들어하면서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2년 9월 14일에는 UCLA와의 경기에 출전한 모습이 전파를 타서 한국에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를 본 해설위원의 평가는 공격력이나 하드웨어는 좋지만 팀수비를 비롯한 유기적인 움직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고교시절 혼자서 해결하는 공격농구에 익숙해진 탓에 리그의 수준차 때문인지 하여튼 적응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해 본인은 자신을 스카웃했던 코치가 사임, 새로 들어온 코치진의 인종차별 문제까지 겪으면서 팀 리빌딩 계획에서 배제당하고 레드셔츠 신분으로 1년을 허비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그렇게 그는 평균 2.4득점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전학을 가게 된다.[5][6]

2003년에는 스티브 내시 등과 함께 캐나다 국가대표 15인 예비멤버로 연습경기까지 뛰었으나 결국 탈락한다. 그리고 2004년 유니버시아드 대표 때도 소집되었으나 한국 국가대표를 염두에 두고 고사한다. 전학 가서는 NAIA 리그 gsac 컨퍼런스 소속의 뱅가드 대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하여 평균득점 18점으로 컨퍼런스 득점왕, 6승 18패의 하위권 팀을 17승 7패의 중상위권 팀으로 올려 컨퍼런스 토너먼트에 올리기도 한다. 이후 2003년 말부터 경희대에서 한두번 연습경기를 가지고 미디어 워크아웃을 보여주는 등 KBL 진출을 염두에 두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덩크대회 우승, NCAA 진출, UCLA와의 경기, 캐나다 국가대표 엔트리 포함 등으로 교포 사회에서 유명하고 국내에서도 간간히 화제가 되곤 했으나 단발성이었다.[7]미디어 워크아웃으로 화젯거리가 되던 중 말에 이런 소문에 대한 증인들과 일부 영상이 증거로 나오고[8] 급기야 수만명 규모의 팬카페가 개설되고 NBA와 KBL 드래프트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각 커뮤니티에서는 몇 년간 그 기량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논쟁이 심심할만하면 일어났다.[9]


2.1.1. 대학 시절 김효범의 수준에 대해[편집]


김효범의 실력을 폄하하고 1라운드 픽을 비난할 때 김효범이 뛴 NAIA 출신이라는 점을 드는 경우가 많다. NCAA D3, 한국 하위권 대학보다 못한 리그이며, KBL 벤치 워머 수준이면 평정될 수준의 동아리 리그 출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링크된 글은 기자들도 참전한 것을 찾아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 대학 리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으며[10] 동양인이 미국에서 농구를 한다는 핸디캡에 대한 이해를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등 부정확하고 부정적인 쪽으로만 단정적인, 혹 해당 리그 선수들이 본다면 모욕적으로 느낄만한 표현들도 많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정보가 많이 없다보니 김효범에 대한 첫인상을 사실상 정립해버리는데 지분이 많은 글이다.

종목이나 리그 내 위상에 따라 D3랑 비교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농구는 대개 NCAA D2에 대응되며 운동선수에게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는 D3보다는 NAIA가 앞순위에 고려된다.[11]NCAA D2와 비교하자면 비슷한 수준이되 다소 깊이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지만[12] 실제로 중립 경기나 초대 경기를 중위권 팀들은 NCAA D2와, 상위권은 NCAA D1과 가진다.

당시 김효범이 NAIA에서 적을 두었던 뱅가드 대학교의 진용을 살펴보면 NCAA 1부 경험자가 3명이었다. NAIA나 NCAA 2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성이다. 한국에서도 일부 선수는 NCAA D1에서 제의가 들어오거나 진출이 가능하다고 평가받지만 어디까지나 한국 대학 선수 풀 전체를 통틀어서 극소수 나오는 특출난 경우이다. 낮게 잡아도 한국의 대학리그보다는 평균적인 수준이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상위권의 수준을 예로 가자면 칼 밥티스트의 테런스 존슨은 NCAA D1의 All-WCC팀을 독식한 에이스급 스윙맨으로 김효범의 매치업이었으며 그 유명한 인유어페이스 영상에 찬조출연한 콘코디아의 닉 밴더란은 PAC-12나 ACC 등의 메이저 컨퍼런스에서 뛰던 주전 센터인 등 한국인 수준에서 대적할 레벨을 넘어 KBL 용병으로 영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레벨의 플레이어들도 여럿 존재한다. 따라서 KBL 프로팀 이하의 수준에서 커버가 가능한 리그나 컨퍼런스는 절대 아니라 할 수 있다.[13][14]

이전에 김효범은 전적대인 NCAA 포틀랜드와 NAIA뱅가드가 붙으면 해볼만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사기꾼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김효범이 뱅가드에서 뛸 당시 포틀랜드는 당시 250위 근처의 약팀으로 NCAA D2 상위권이나 NAIA 최상위권 팀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김효범의 뱅가드가 리그 내의 강팀은 아니었기에 객관적인 전력의 차는 있지만 NAIA에서는 NCAA D1 레벨의 선수들을 매치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으니 자신감 어필 측면에서 아주 이해 못할 정도로 허황된 말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농구로 먹고 살 수준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는데 사실 이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NCAA D1에서도 최상급 아닌 이상 다 해당되는 만큼 비판이라기보다는 꼬투리 잡기에 가깝다.[15]

결론을 말하자면 미국에서 명함 내밀 대학은 아니고 용병들과 비교하자면 몇 단계 아래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 거품 논란이나 잠재력을 배제하고 그의 객관적인 대학 활약상만을 보더라도 KBL 1라운드 상위 픽이 되기에 모자란 것은 아니다.[16] 오히려 KBL 데뷔 이전에 김효범보다 수준 높은 대학 무대를 경험한 선수는 문태종, 문태영, 전태풍, 최진수 등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2.2. 울산 모비스 피버스 1기[편집]



2.2.1. 1~3년차, 모비스 시절 초기[편집]


파일:모비스시절의 김효범.jpg

처음 구단에 합류하고 비시즌을 보낼 때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렸다. 한국 입국 다음날 20분 가량 연습경기를 보고 유재학은 인터뷰로 'NBA를 노리는 선수 치고는 미숙하지만 이런저런 기대 없이 제로베이스에서 보면 상당히 좋은 선수'로 즉시전력감으로 판단하면서 첫인상 소감을 마무리한다.

대체적으로 운동능력, 슛, 드리블 등의 개인기량은 완벽한 수준이라는 평가였으나 오프더볼 무브, 로테이션 수비, 패턴 공격 등 유기적인 플레이에 관해서는 미흡한 모습이어서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득점왕과 신인왕을 거머쥘 선수다, 아직 시합 나갈 기량이 아니다 등 극명한 온도차를 보였다.

이 논란을 실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의 커리어는 거품론으로 점철된다. 개인기량을 앞세워 시합을 주도하는 모습도 간간히 보여줬으나 기존 선수들과 어긋나는 리듬, 슛감각, 시합 감각 등으로 겉도는 모습을 많이 보이더니 전략의 다변화라는 기대와 달리 벤치에서 기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가장 주목받던 운동능력과 덩크마저도 동영상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수준이었고[17] 당시 거의 변태적이라 할 만한 캐링더볼 콜 때문에 드리블 기술마저 봉인되면서 코트 위에서 할 수 있는거라곤 운동능력에 의한 몸빵 뿐, 그에 논란은 압도적으로 거품론이 대세가 되었다.[18][19]

그래도 국내선수 중 가장 뛰어난 개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에, 훈련이나 연습경기 때는 팀내에서 상당히 도미넌트한 편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다. 특히 개인기량이나 하드웨어에 의한 자신감은 있기 때문인지 빈센트 그리어 같은 동급의 용병들을 상대로는 매치업, 특히 일대일 상황에서 의외의 우위를 보이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20] 여담으로 벤치멤버 시절에는 현주엽을 상대로 활약하는 경향이 있어서 LG전만 보면 영락없는 주전급 식스맨이다.

어쨌든 그동안 모비스는 2005-06 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플레이오프 준우승, 2006-07 시즌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잘 나갔지만 정작 본인은 결승전에서 단 1초도 기용되지 못하면서 벤치를 달궈야했다. 그러다가 우승멤버인 양동근, 김동우 등이 입대하고 용병제도가 바뀜에 따라 팀의 핵심인 크리스 윌리엄스도 떠나면서 2007-08 시즌에는 주전 자리를 맡게 된다.

2007-08 시즌에는 첫 경기 20득점, 두번째 경기 29득점에 한 경기 3점슛 성공 갯수 1위 기록을 갱신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타점을 버리고 타이밍을 선택한 빠른 릴리즈의 슛폼을 바탕으로 하는 외곽능력과 여전히 현란한 개인기로 팀을 이끌며 평균 두자리 수 득점을 기록하며 MIP 후보에까지 오른다. 리즈 시절 최고 주가의 정영삼과 함께 슈팅 가드 라이벌로 거론된 것. 하지만 현저하게 줄어든 운동능력, 아직도 미숙한 팀플레이 등으로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임을 보여줬고 설상가상으로 용병 선수들의 기량 부족으로 인사이드부터 털리고 그나마 버티던 함지훈조차 시즌아웃되면서 팀은 하위권 나락에 빠진다. 시즌 막판부터는 어느정도 팀플레이에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다.


2.2.2. 4년차, 전성기의 시작[편집]


2008-09 시즌은 김효범 커리어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해이다. 이제 한국 무대에서의 적응도 어느정도 완료되었으며 특히 비시즌 기간동안 허리교정이 효과를 보는 통에 탄력, 웨이트, 밸런스를 어느 정도 회복하면서 부상 후유증도 많이 완화되어[21], 2점슛 대비 덩크슛 비중이 13.6퍼센트로 거의 모든 상황에서 덩크가 가능함을 보여줬다.[22]

시즌이 시작되자 모비스의 에이스로 인정받으면서 크로스오버, 인유어페이스 슬램덩크, 장거리 풀업 점퍼 등 내외곽을 맹폭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슈팅 가드로서 시즌 초반에는 리그를 지배한다 봐도 무방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1~2라운드의 경기들은 듀얼가드, 에이스 스코어러, 락다운디펜더, 슬래셔, 원온원 퍼포머 등 다양한 모습으로 버릴 경기가 없을 정도였으며, 최전성기 정영삼을 상대로 기량의 차이를 보여주는가 하면 웬델화이트를 공수에서 대등하게 치고 받는걸 넘어 아예 제압을 해버리고 추승균 등을 전담마크로 락다운시키는 등 흡사 도장깨기와 같은 구도가 연출되었다.[23] 여기에 던스톤, 블랭슨 등 안정적인 용병 전력이 합류하고 임대선수로 들여온 김현중, 우승연까지 전성기를 맞아 시너지를 보임으로써 원래 잘해야 6강 턱걸이라고 평가되던 모비스는 정규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며 역대 최고의 파란을 일으킨 팀으로 꼽히기도 했다. 김효범은 KBL 데뷔 이후 최초로 올스타에 뽑혔고 이 시즌에는 덩크왕, 3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유일한 선수가 된다.[24]

플레이오프 4강 첫 경기에서도 삼성을 상대로 덩크슛, 더블클러치, 외곽 등 전천후 폭격을 보여주면서 첫 경기를 쉽게 가져갔지만 이후 강혁애런 헤인즈의 투맨게임, 레더의 지배력이 되살아나고 이상민의 노련함 [25] [26] 등에 의해 시리즈는 업셋된다.[27]

당시 삼성은 함지훈을 김동우의 전담마크와 레더의 헬프디펜스로 봉쇄함과 동시에 김효범에게는 박영민의 전담마크 밑 로테이션으로 온볼플레이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28] 박구영과 대체 용병 토마스가 어느정도 터져줬지만 시즌아웃된 블랭슨, 김현중의 공백을 매우기에는 화력에서 역부족이었다. 김효범은 앨리웁, 토마호크 덩크 등 클러치 타임 때마다 몇 번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남기며 분전했지만 여러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리듬이 깨진 플레이로 팀의 막힌 혈을 뚫지 못했고 결국 내년을 기약하게 된다. 김효범의 KBL 커리어에서 가장 빛이 났던 시즌이지만 해피엔딩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2.2.3. 논란[편집]


이 시즌을 지나면서 두개의 화두가 불거져 나왔다. 첫번째는 과연 유재학 체제의 모비스의 조직 농구 때문에 김효범의 개인 기량이 죽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김효범의 실력은 애당초 과장된 것이었고, 이를 유재학 체제에서 키워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원래부터 이런 의문이 있긴 했지만 그간 거품론이 대세가 되면서 크게 논의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이 늘어나면서 김효범이 장기로 하는 돌파나 운동능력 같은 능력을 좀 더 활용할 필요가 있다거나 모비스 말고 다른 팀을 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아졌고 양측의 견해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29][30]

두번째 화두는 국적 문제다. 역시 벤치에서 삽 푸고 있던 시절에는 가볍게 오가던 논의였고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김남기 감독이 '이정도 기량이면 국가대표로도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귀화했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기량이 만개한 김효범의 국적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여기에 김효범 역시 '아직은 무리, 일단은 모비스 팀에 집중' 등 회피성 발언으로 군 기피의혹까지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31]

KBL 규정에는 부모나 조부모 중 한 명만 한국인이면 신청자격이 주어진다고 나왔는데, 사실 김효범의 부모는 모두 한국인이기 때문에 교포로서 국내선수 자격을 얻었다.[32] [33][34]

입국 기자회견에서 김효범은 한국 대표로도 뛰고 싶지만 병역 문제 때문에 결정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소망을 밝힌 것이 그에 대한 비판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국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캐나다 시민권을 포기해야 했는데, 한국 국적이 회복되는 순간 신체 건강한 김효범은 군대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김효범은 이후 끝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넘어갔고, 후에 귀화혼혈 선수로 KBL에 들어온 전태풍, 이승준, 문태영, 문태종이 불합리한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것과 대비되어 더욱 까였다.[35] 이런 일들이 겹쳐 그에게는 KBL의 허술한 제도의 헛점을 파고든 검은머리 외국인이라는 이미지가 커리어 내내 따라붙게 된다.


2.2.4. 5년차, 두번째 우승[편집]


2009-10 시즌은 FA 전 모비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즌이다.

입대했던 에이스 양동근의 귀환으로 지난 시즌보다는 비중이 약간 줄었고, 궁합이 잘 맞았던 김현중이 임대 기간 종료로 LG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건재한 함지훈과 던스톤의 인사이드진을 바탕으로 좀 더 안정된 팀 전력을 구축,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다. 거기다가 용병 출전시간 제한이 생기고 3점슛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돌파와 장거리포를 가진 김효범으로서는 유리한 상황이었으며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개선된 수비력까지 더해졌다.[36]

양동근과 함지훈, 던스톤을 주축으로 하는 공격을 보조하는 3~4옵션을 하다가 전술적으로 꼬이기 시작할 때 클러치 슈터로서 순도 높은 활약을 펼치는데, 특히 리그 최고의 공격력과 수비력, 그리고 파워를 가진 양동근-김효범 백코트 듀오는 유재학의 주문대로 리그 백코트진들을 밀어버렸다.[37] 혼혈 드래프트에서 용병급 스타들이 유입되고 팀내에서나 리그 내에서 스타로서의 스폿라이트는 줄었지만 사실 이건 에이스급 플레이어로 로스터가 채워진 팀 사정에서 나온 절제에 가까웠고 기량면에서 보면 시기가 공수에서 가장 균형잡힌 정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시즌 개막 직후는 교통 정리가 덜 되었든지 약간 해메기는 했지만 새로워진 3점 라인에 적응하고 시합 감각을 찾아감에 따라 팀은 무난히 플레이오프 안정권에 진입하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는 골득실차로 정규리그 2연패, 4강에 직행한다.

동부와 만난 4강전에서는 역시 미친듯한 파워와 운동량을 바탕으로 하는 올코트 프레스로 첫승을 가볍게 거머쥔다. 이후 2차전에서 석패하지만 4점 클러치 플레이를 비롯한 활약으로 팀을 캐리했고 나머지 경기를 가볍게 제압하면서 힘의 격차를 보여줬고 매 경기마다 클러치 골을 여러번 터트려주며 승리의 일익을 담당한다. 정규시즌에서 잠시나마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이광재를 아예 지워버리면서 기량의 차이를 보여줬으며 결승 상대는 KCC, 전태풍의 가공할만한 개인기와 아이반 존슨의 폭발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15득점 6어시스트로 제 몫을 함과 동시에 경기 막판에 체력을 빼놓는데 성공하고 함지훈의 대폭발에 힘입어 각각 클러치 골을 하나씩 넣어주며 역전승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2차전에는 팀의 공격을 주도하면서 경기 막판 연달아 슛을 폭발시키면서 경기를 가져가고 3, 5차전에서는 전태풍과 아이반 존슨의 폭발력에 맞불을 놓는 등 쏠쏠한 활약을 펼친다. 양동근을 탈탈 털던 전태풍을 제어하는 것은 덤. 결국 처음으로 주역으로서의 파이널 우승을 하게 된다.


2.3. 서울 SK 나이츠 시절[편집]



2.3.1. SK 1년차, 짧은 전성기[편집]


파일:김효범_SK1년차.jpg

여하튼, 김효범은 모비스에서 두 번이나 우승 반지를 끼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9-10 시즌 우승과 함께 FA로 풀렸고, 그를 노린 것은 전력 보강을 위해 혈안이 된 서울 SK 나이츠. 그리고 충격적인 발표가 이어지는데, 그의 연봉은 놀랍게도 5억 1,300만원이었다.[38]이는 김주성에 이은 KBL 두 번째 고액 연봉이었다. 과연 김효범이 그럴 가치가 있는 선수인가부터 어마어마한 논란이 또 다시 벌어졌다. 직전 시즌 성적이 평균 11.1점이었던 선수가 5억원씩이나 받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효범은 담담하게 자기 할 일을 한다고는 말하지만 연봉을 꽤나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다.[39]

오펜시브 능력에 대해서는 이 시기가 김효범 커리어에서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4라운드까지 평균 17~19득점에 3~4리바운드, 자유투 90, 야투 50, 3점 40대의 순도까지 높은 득점력을 기록하며 180~190클럽을 넘보는 활약을 하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전성기, 특히 친정팀 모비스를 상대로는 시즌 동안 평균 18.8 득점 4.1 리바운드 2.5 어시스트의 MVP급 플레이어로 변신해서 '내가 원래 이정도 실력이야!'라는 것을 시위하는듯 폭격을 퍼부었다.[40]

이전 시즌보다 파워와 높이는 다소 떨어졌지만 좀 더 빠르고 적극적인 움직임과 이전까지 선보이지 못한 개인기, 이전에 비해 숙달된 스크린 우회나 2:2 플레이 능력까지 발휘하면서 레더와 함께 5위를 수성하는 쌍두마차 역할을 해줬다. 특히 당시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던 동부의 김주성-윤호영-로드 벤슨 트리플 타워조차도 개인기로 농락한 유일한 선수였으며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올스타 득표에서 2위, 올스타 게임에서 MVP 수상을 하기도 한다.[41]

하지만 원래라면 김효범을 데려오면서 주희정과 챈들러의 2대2 옵션으로 득점루트 편중의 부담을 덜고 김민수, 방성윤이 3,4번에서 배치업 우위를 점한다는 시즌 대전략이 초반에 무너짐에 따라서 김효범의 부담이 지나치게 커졌다. 모비스 시절에 비해서 늘어난 출전시간에다가 본인이 해왔던 역할에서 주득점원 역할, 가드와 포워드는 물론이고 빅맨까지 종종 마크하는 해야하는 상황은 분명한 과부하였다. 레더와 김효범을 제외하면 SK에는 변변한 공격루트가 없어진 상황에서 집중 마크가 들어갔다.

특히나 김민수 방성윤의 부상으로 공백을 메우던 손준영까지 전력에서 빠지면서 김효범은 개인기록을 버리고 3,4번 포워드 롤까지 거드는 상황이 펼쳐짐에 따라 팀은 4라운드부터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김효범은 이때부터 MVP를 노릴 수 있는 경합에서 멀어지고 상당히 유력하던 득점, Best5 등 개인타이틀 상당수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 누가 봐도 가장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는 것이 김효범이었으나[42]결과적으로는 팀의 주포 역할만 이어받았을 뿐 떨어진 체력, 집중마크에 이어 모비스에서 늘어난 수비력까지 까먹는듯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5라운드를 지나서는 공수 양면에서 기세를 잃은채로 결국 팀은 작년과 같은 7위였으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사실 당시 리그의 판도를 생각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는 모레알 호화팀의 침몰이나 김효범의 부진보다는 예견된 비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SK에서 나머지 포지션은 기량 부족이나 부상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고 매치업을 제압할만한 포지션이라곤 5번의 레더나 2번의 김효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김효범이 아무리 날고긴들 문태영, 문태종 형제의 지배력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테렌스 레더 역시 크리스 다니엘스, 허버트힐, 크리스 알렉산더, 로드 벤슨 등을 상대로 딱 제 몫을 하는 정도였지 제대로된 지배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생애 최다인 평균 15.2점을 집어넣고, 3점슛 부분 1위에 오르며 방성윤이 부상으로 은퇴하고, 주희정이 무너진 SK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변하지 않은 팀 성적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고액의 연봉에 팀 플레이가 안 된다는 비난까지 겹치면서 돈값을 못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기록만 놓고 보면, 돈 값을 한 편인데, 팀 성적과 동료와의 시너지를 놓고 보면 아니올시다라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43]

그리고 팀 성적 부진을 이유로 SK는 연봉 삭감을 시도했는데, 여기서 또 충돌이 빚어졌다. 사실 개인 성적만 놓고 보면 삭감할 이유는 없었는데,[44] 주희정과 김효범이 모두 5억씩 받으면 샐러리캡이 다 차는 관계로 무리한 삭감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김효범이 연봉조정을 신청하면서 충돌하는 과정에서 KBL 연봉 체계가 개판이라는 것이 또 다시 드러났다.[45][46] 다년 계약이 아니라 FA 선수에게 높은 금액을 부르는 쪽이 이기는 입찰제 방식의 한계가 나타난 것. 정작 못하면 바로 삭감 크리였으며 연봉은 3억 6,000만원으로 깎였다.


2.3.2. SK 2~3년차, 너무나도 빠른 쇠락[편집]


2011년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진 신선우 감독이 사임하고, 문경은이 감독 대행을 맡는다. 문경은 감독 대행은 김효범의 공격능력에 대해서는 유한 모습을 보였으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얼핏 봤을 때 공격은 프리롤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공을 잡는 시간이 단축되고 여전히 빈약한 포워드 뺌빵을 이제는 대놓고 보내면서 수비 쪽으로의 부담이 커졌다. 지난 시즌 누적된 피로에 이은 피로골절, 무릎 부상, 디스크 재발 등으로 비시즌 동안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3라운드까지는 평균 16득점으로 준수한 공격력을 보여 이따금씩 공격으로 팀을 이끌어나가며 클래스를 보여줬으나 팀은 만들어지지 않은 채 거기다 사정 상 포워드 붙박이가 되면서 본인 경기 리듬까지 잃어버리고 이후 피로누적, 발목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한다.

2011-12 시즌에는 어찌 보면 김선형-김효범이라는, 모비스 시절 양동근 김효범 백코트의 재림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따끔씩 상대 수비를 번갈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질만하기도 했다. 한국농구에서 일대일이 되는 단 두명의 가드가 백코트를 이루었고 김선형을 드래프트한 전임 감독 신선우의 구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2012-13 시즌은 김효범에게 잔혹한 시즌이었다. 이전 시즌 연봉 협상에서 구단의 후려치기나 부상 문제, 그에 파생된 멘탈 붕괴 등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태업 논란까지 팬들 사이에서 나왔는데 최부경, 박상오라는 블루워커들의 투입과 애런 헤인즈의 영입으로 밸런스를 맞추면서 본 포지션을 되찾는 것인가 싶었으나 그사이 그의 롤은 김선형, 변기훈에게 완전히 넘겨버렸고 공수 전술에서 그의 비중이 아예 사라졌다. 한마디로 팀 플랜에서 배제한 것이다. 어쩌다 터지면 쓰겠지만 굳이 아쉽게 의존하면서 쓰지 않겠다는 천명인 셈이었다. 그렇게 평균 2.2득점을 기록하며 벤치에 박혀있고, 팀은 정규리그 1위로 치고 나갔으나 역할 축소 - 감각 상실 - 역할 축소의 무한반복이 이어지면서 데뷔 이래 최악의 상황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그는 누구보다도 빠른 쇠퇴를 겪어간다. 감독인 문경은은 김효범을 KCC의 코트니 심스를 영입하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면서 1:2 트레이드를 통해 크리스 알렉산더와 함께 KCC로 이적했다.


2.4. 전주 KCC 이지스 시절[편집]


파일:2012-13 KCC 김효범.jpg

이적 후 첫경기나 친정팀 SK와의 첫경기에서는 리듬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지만 이외에 오리온스전 23득점, LG전 26득점, KT전 30득점, 한 쿼터 3점슛 15득점 신기록, 시즌 자유투 성공률 96% 등 남은 시즌 동안 평균 13.8득점으로 안정된 공격력을 보여준다.[47] 이때 모습만 보면 아직 개인기량만큼은 리그 최상급 수준으로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한 셈. 그리고 나름 꼴찌 팀 KCC를 먹여살린다. 팀은 겨우 10승을 채우고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개성이 강한 박경상, 강병현과도 원투펀치로서 어울리려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수비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 이적 후 눈물의 인터뷰로 호소한 농구에 대한 열정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줬다.[48]

파일:전주 KCC 김효범 2013-14시즌.jpg
2013-14 시즌이 개막되고도 김효범은 강병현과 원투펀치를 이루면서 1라운드 6승 3패라는 쾌조의 스타트를 끊는다. 비록 그때보다는 몸상태나 기량이 못하지만 흡사 모비스 5년차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KCC로 신인 김민구가 합류하면서 팀의 미래는 의외로 밝아지는 듯했는데 팀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뛰어난 개인기량에 시야까지 가진 김민구가 볼을 가져가고 슈터로는 장민국 등에게 역할이 몰리면서 출전시간이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김효범이 경기 감각을 유지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김민구 본인은 나무랄데 없는 완벽한 기량을 가졌으나 역설적으로 그 뛰어난 기량 때문에 그와 장민국에게 비중이 몰리고 벤치 멤버들이 죽어버리면서 팀이 몰락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버렸다. 허재 감독은 간간히 김효범을 클러치슈터로 기용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평소에 공도 못 만져보다가 갑자기 들여보내서 슛 쏘라고 하는데 먹힐 리는 만무하고 도리어 클러치 턴오버만 양산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팀은 또다시 나락에 빠지며 7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파일:2014-15시즌 KCC의 김효범.jpg
2014-15 시즌을 앞둔 비시즌 기간동안 김태술강병현과 맞바꿔서 리딩가드를 보완하고 하승진이 소집해제되면서 인사이더까지 강력해진 KCC는 우승후보로 꼽히게 된다. 하지만 김민구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치며 선수생활이 불투명해진 상태로 나가리가 되었다. 김태술은 아시안 게임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감각 상실로 역대급 먹튀짓을 하고 있다. 하승진 역시 이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불의의 부상으로 들쭉날쭉하는 등 팀은 여전히 막장으로 9위에 랭크. 김효범은 어쩌다 갑자기 주전으로 뛰게 되었지만 평균 5.8득점이라는 주전과는 거리가 먼 기록을 남기며 연봉은 2년 연속 반토막이 난다.[49]

파일:2015-16시즌의 김효범.jpg
그리고 2015-16 시즌, 스팟업 3점 슈터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개막 두번째 경기에서 19점을 올리며 팀의 첫 승을 도왔는데 시즌 초반 서술 시점에서는 0득점-19득점-3득점-8득점-13득점 들쭉날쭉한 경기력을 보였는데 새로운 공인구와 다시 바꾼 슛폼 탓인지 기복이 있었으나 여전한 클러치 능력으로 외곽슛만큼은 쏠쏠한 모습을 보여줬다. 점수를 올리지는 못해도 팀에서 신명호 다음가는 수비력으로 그것을 보충하였고 식스맨임에도 은근슬쩍 팀의 2~3옵션급 활약을 펼쳐 커리어 5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다만 비중이 늘어나면서 은근슬쩍 당시 주전이였던 김태술을 밀어내고 선발, 주전으로 출전하는 바람에 거의 유력했던 식스맨상은 신명호에게 돌아갔다.

6라운드 후반부터 4강 플레이오프까지는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4강 플레이오프 4경기 동안 평균 득점 3, 야투율 18%, 3점 성공률은 겨우 10%, 한마디로 10개 던져서 하나 겨우 넣는 수준이다. 수비 때문에 쓰긴 쓰는데 공격에서는 저게 과연 선수인가 싶을 정도의 부진한 모습이었다. 이 시점까지는 팀 에이스인 안드레 에밋과 하승진, 전태풍이 돌아가면서 무쌍을 찍어대는 바람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지만 챔프전 때는 딱 정규시즌 본인 몫에서 약간 더 활약하지만 이번엔 또 반대로 주축인 하승진, 에밋 등이 이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전력의 차이가 확 나버리는 바람에 또 묻혔다.

2016-2017시즌 개막 당시에는 대권 도전을 위해 갖춰진 에밋, 하승진, 전태풍 등 주요 전력이 수술로 시즌아웃된 상황, 갈비뼈 부상을 달고 분투하지만[50]또 이참에 망한 시즌 리빌딩이나 하자는 팀의 방침에 따라 또 다시 송교창, 김지후 등에게 길을 비켜주게 된다. 2017년 1월 4일 울산 모비스의 송창용과 트레이드되면서 7년만에 모비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2.5. 울산 모비스 피버스 2기[편집]


귀환하고서 시즌 막바지 3점 슈터, 속공 트레일러, 에이스 스토퍼로 어느정도 쏠쏠히 활약할 기량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이대성의 복귀 이후 다시 길을 비켜주는 모양새로 플레이오프 때는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아직 몇년은 더 뛸 수 있는 기량이고 내년에도 구단에서 활용 계획이 있었지만 모교의 스태프 제의, NBA 캠프 등에서 좋은 제의가 와 지도자로 출발을 시작하려는 듯하다. 농구계에서는 여러가지 의미로 알려진 선수라 기사가 많이 나올법도 했지만, 논란을 예상했는지 본인의 요청으로 은퇴 보도자료를 자제시켰다고 한다.


3. 시즌별 성적[편집]


역대 성적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05-06
모비스
30
22/65
(33.85%)
15/52
(28.85%)
9/16
(56.25%)
98
30
18
4
2
2006-07
41
44/94
(46.81%)
11/56
(19.64%)
19/29
(65.52%)
140
52
24
43
8
2007-08
53
128/253
(50.59%)
82/256
(32.03%)
102/122
(83.61%)
604
114
80
36
16
2008-09
54
114/197
(57.87%)
111/251
(44.22%)
95/119
(79.83%)
656
98
133
32
14
2009-10
54
131/229
(57.21%)
95/256
(37.11%)
52/65
(80.00%)
599
115
67
40
13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10-11
SK
54
174/341
(51.03%)
110/295
(37.29%)
142/164
(86.59%)
820
146
93
49
17
2011-12
41
65/150
(43.33%)
86/237
(36.29%)
24/33
(72.73%)
412
77
48
19
7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12-13
KCC
44
96/198
(48.48%)
71/208
(34.13%)
41/43
(95.35%)
599
115
67
40
13
2013-14
49
61/134
(45.52%)
42/135
(31.11%)
35/36
(97.22%)
283
63
35
17
3
2014-15
46
39/94
(41.49%)
55/162
(33.95%)
9/10
(90.00%)
252
56
42
24
2
2015-16
54
57/137
(41.61%)
100/266
(37.59%)
19/29
(65.52%)
433
96
27
29
4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16-17
KCC/모비스
47
41/101
(40.59%)
54/157
(34.59%)
10/12
(83.33%)
254
80
32
14
4
KBL 통산
(12시즌)
597
972/1993
(48.77%)
832/2331
(35.69%)
557/678
(82.15%)
4,997
1,005
630
292
91


4. 지도자 시절[편집]


이후 모교인 뱅가드 대학교에서 코치로 활동하면서 졸업하고 G리그 그랜드 래피즈 드라이브에서 코치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미국 농구를 체험하려는 한국 선수들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최진수에 이어 간만에 NCAA에 진출한 이현중 역시 김효범의 주선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후 2020-21시즌이 진행중인 가운데 서울 삼성 썬더스와 인스트럭터로써 단기 계약을 체결하고 KBL 무대에 복귀했다. 삼성이 지명한 1순위 신인 차민석과 그외 나머지 1군무대에 올라오고 있지 못하는 선수들의 육성을 전담하여 맡았었다. 그리고 2021-22 시즌을 앞두고 삼성에서 정식 코치로 선임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2년 연속 1순위로 신인 이원석의 육성전담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5. 선수로서의 특징[편집]


좋은 쪽이든 싫은 쪽이든 한국 농구에 시사하는 점이 많은 선수다. 스크린 없이도 내외곽에서 통용될만한 원온원 능력을 비롯한 개인 기량의 부재, 운동능력과 하드웨어의 열세, 현란한 퍼포먼스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쇼맨쉽의 부재 등은 경기 내적으로 한국 농구의 결핍된 부분이고 경직되고 타율적인 분위기에서 학업을 등한시한 운동 기계 양성은 한국 농구의 병폐이기도 하다

김효범은 이에 대한 해답을 모두 갖춘 선수였다. 그는 용병들을 이길 정도로 강력한 원온원 능력을 보유하고, 전술을 개인기량으로 깨트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트레이닝을 통해 하드웨어에서 동양인의 한계를 완벽하게 극복했으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팬들에 대해서도 이를 아끼지 않고 보여주는 쇼맨쉽을 가져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덩크, 3점, 올스타 MVP를 모두 석권한 스타성을 지녔다. 또한 이런 능력들을 자율 농구를 통해 계발했고 학업에도 소홀하지 않은 학생 선수이기도 했다. 또한 농구에 대한 견해로 항상 크고 작은 마찰을 겪음에도 연습벌레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자기관리와 성실함을 갖췄다.[51]

그리고 그는 상당히 많은 논란과 화두를 던져준 인물이다. 경기 내적으로는 그 정도의 개인기나 슈팅 재간을 가졌음에도 선수로서 초라한 커리어로 만개하지 못한 점[52], 개인기의 활용과 팀플레이의 조화가 양립하지 못하여 기량에 비해서도 유독 대접이 좋지 않은 점 등에 대해서 곱씹어볼 여지가 많다. 경기 외적으로는 교포에 대한 대우 문제, 병역 부과 여부와 형평성, 국가대표 선발과 국내 프로선수의 존재 의의, FA 계약의 맹점 등이 그로 인해서 던져진 화두였다.


5.1. 플레이 스타일[편집]


용병을 포함해서도 최고라는 평이 있을 정도의 출중한 일대일 능력, 아트 덩커라고 불릴 정도로 탈아시안급 운동능력, 스크린 없이도 림어택부터 롱3까지를 섭렵할 수 있는 슛재간이 김효범의 특징이다. 점퍼를 중심으로 시합을 풀어가되 페이스업 상황에의 테크닉은 전태풍과 더불어 리그 최고로 꼽히던 리듬 슈터이자 슬래셔 스타일의 선수이다. 또한 원온원으로 터프하게 상대방을 락다운하는 대인 수비수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수 양면에서 다소 모자란 오프더볼 무브는 그의 대인 수비력과 개인기량의 활용을 까다롭게 만들었고, 속공 가담 능력이나 박스아웃의 부족은 본인의 운동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여러모로 흑인 선수들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재능을 가졌지만 또 동시에 한국에서 성장한 선수였다면 용납되기 힘든 단점들도 동시에 공유하던 선수라고 할 수 있다.[53]


5.1.1. 원온원 퍼포머[편집]


유재학은 2007년 챔피언 결정전을 승리로 이끌고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술로 제어할 수 없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김효범은 그 예외이며 전술을 개인기로 부술 수 있는 선수라고 평가하였다. 모비스에 있던 시절 김효범은 용병까지 포함하여 일대일 능력에 있어서는 일인자로 비록 팀컬러 문제로 출전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독보적인 개인기를 보유한 테크니션으로서 미래를 보장받은 선수였다. SK로 이적하고서도 역시 용병 포함하고도 리그 최고라는 평이 건재할 정도로 개인 공격에 관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현란한 훼이크에 이은 폭발적인 퍼스트스텝은 김효범의 전매특허였다. 크로스오버를 포함하여 기존 한국선수들의 고질병인 엉성한 드리블과 뻣뻣한 돌파에서 탈피한 리드미컬하고 그루비한 드리블, 유로스텝으로 대표되는 독특하고 위력적인 스텝, 스킬로 수없이 많은 앵클브레이킹 상황을 만들어냈다. 마무리 무브로 선보이는 핑거롤, 더블클러치, 덩크 등 역시 김선형이라는 차세대 스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구경하기 힘든 것이었다. 김효범이 공을 잡으면 드리블을 치는 상황 자체를 파울로 끊어버리거나 혹은 용병선수로 하여금 전담마크나 트랩을 가게 하는 등 고강도의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54]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에서도 스킬 트레이닝이라는 개념이 많이 통용되게 되었는데 김효범은 이를 10년도 더 이전부터 실전에서 선보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나간 선수였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김효범이 자주 구사한 유로스텝, 헤지테이션무브, 포켓 드리블, 행잉 크로스오버 등은 편법이나 겉멋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잦았고[55]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엄한 캐링더볼 판정의 희생량이 되었고 다양한 옵션을 가져가는데 족쇄가 되었다.


5.1.1.1. 리딩과 안정감의 미흡함[편집]

그는 그 뛰어난 페이스업 스킬들을 온전히 가드의 덕목으로 승화시키지 못하였다. 슬래셔형 선수답게 본인이 찢어서 패스를 찔러주면서 픽앤롤, 픽앤팝에는 감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료와 유기적으로 2,3차적으로 주고 받는 리턴 동작을 동반한 투맨게임, 가드로서 기본적인 덕목인 엔트리 패스에 관해서는 결코 준수하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가끔씩 그가 리딩을 잡을 때는 템포는 올라가지만 팀원들이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일류급인 돌파 드리블에 비해서 볼키핑 드리블은 전형적인 슈팅가드 수준이었다. 포스트업 동작 역시 골을 넣을 때나 어느정도 발을 뺄 줄 아는 정도지 선발 리딩가드로서 안정적으로 볼을 간수하고 운반하기에는 다소 불안하며 본인의 테크닉이나 운동능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물론 김효범의 경우 캐링더볼 콜의 가혹함의 희생량이 된 점을 감안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몇 년째 반복됨에도 리그 풍토에 맞춰서 드리블을 개선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본인의 스타일을 잃고 특유의 리듬감이 쇠퇴하였다.[56]


5.1.1.2. 오프더볼 무브의 결점[편집]

김효범의 가장 큰 단점이다. V컷 L컷 등 의식적으로 구사하는 훼이크 동작은 약하지 않으나 2차 3차를 넘어 부지런히 수비를 따돌리고 스크린을 받거나, 혹은 스크린을 우회하는 파이트스루 동작에서 김효범은 매우 곤욕을 치렀다. 사람을 공략하는데 능한 대신 공간을 보는 눈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공을 잡고 기세를 타면 막을 수 없지만 파울작전이나, 볼을 잡지 못하거나 잡더라도 영리하게 끊는등 발빠른 선수가 끈적하게 길을 차단하는 경우 자멸하거나 기복에 빠지곤 했다. 이는 역대 최고의 개인기와 하드웨어를 지녔음에도 안정성이 필요한 1,2옵션을 오래 잡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3~4옵션으로 있다가 전술이 어그러질 때나 개인기를 허락받는 클러치슈터로 역할이 한정되게 만들었다.


5.1.2. 리듬슈터[편집]


뛰어난 원온원 테크닉과 훼이크를 기반으로 김효범은 스크린이 걸리지 않은 상황에서도 온볼 무브로 수비를 제치는, 역대 최고 수준의 풀업 능력을 보여줬다. NBA를 기준으로 더 먼 거리를 연습해온 그는 어엿한 롱3라고 할만큼, 혹은 하프라인이 더 가까운 위치에서도 시원하게 수비수를 무시하고 슛을 꽂아 넣었으며 원조 슬래셔 스타인 허재가 장포로 인정하며 눈여겨보았다고 할 정도다. 여기에 릴리즈가 빠른데다가 타점이 높아서 슛 컨테스트도 하기 힘들었으며 비중이 적긴 해도 미드레인지 점퍼나 스텝백의 완성도도 상당히 뛰어나다.

자유투는 허리부상 후유증으로 적응을 못하던 데뷔 초 이후에는 상당히 꾸준한 편이지만 수비를 피하고 소위 말해 ‘예쁜 농구’를 하는 스타일 상 자유투 획득은 많지 않던 편이었다.


5.1.3. 운동능력, 아트덩커, 행타임 퍼포머[편집]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2m 장신으로 가드포워드에 근접한 주력이나 1m에 육박하는 점프력을 가진 자원이 여럿 등장하면서 이제 이승준을 제외하고는 역대급 운동능력이나 피지컬을 말할 때 과거의 선수들이 명함 내밀고 언급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김효범은 그 이상의 운동능력이었다는 이견을 합당하게 제기할 수 있는 정도다.[57] 허리디스크가 터져서 상당한 감퇴를 겪고 데뷔했지만 부상 후를 기준으로 해도 가드 포지션에서는 근처에 오는 운동능력도 역대 전무할 정도고 전 포지션을 뒤져도 역대 한 손 안에 넉넉히 꼽힐 운동능력을 보유했다. 특히 탄력은 유명하지만[58] 근육질 몸에서 나오는 순발력이나 파워 역시 절륜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FCkMSfHX5Mo
특히 리즈시절부터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덩크슛은 흉내낼 수 있는 선수조차 찾기 힘들다.[59] 김효범의 일화나 소문을 찾아보면 덩크가 빠진 것을 듣기 힘들 정도로, 한국에서 아트덩커라는 수식어가 붙은 원조이기도 하다. 국내선수치고는, 동양인 치고는 잘한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당시 미국을 기준으로 해도 트랜드에 떨어지지 않는 상당한 레벨의 덩커였다.[60] 한국에 와서도 종종 NBA 덩크대회에 나오는 덩크들을 연습하여 팬들에게 보여주곤 하였다.

그는 단지 퍼포먼스 덩커나 노마크 속공에 한정된 덩커가 아니었다.[61]가드 포지션에서 유일하게 세트오펜스 상황과 노마크 상황에서의 덩크 시도에 거의 차이가 없었으며 컷인은 물론이고, 현란한 테크닉을 섞은 드라이브인에 이어 덩크를 꽂아넣거나 앨리웁, 리버스 덩크 등의 고난도 덩크도 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실전에서도 블락커를 누르는 무기로써 인유어페이스를 구사한 인유어페이스 덩커였다. 스킬이 뛰어나다보니 억지로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상황이 거의 없이 올려넣거나 던져넣는 등 기존 선수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KBL 역대 가드 포지션에서 1번째, 빅맨까지 포함해도 10번째로 많은 덩크를 기록했다.[62]

하지만 허리 디스크 파열로 운동능력을 상당부분 상실한 채로 한국에 데뷔하였고, 한국에서는 국내선수의 화려한 덩크를 달갑게 보지 않고 지양시키는 분위기였으며 속공이나 덩크 찬스 때 파울로 끊는 경향이 심한 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빈약한 오프더볼 무브와 속공 능력의 미흡함까지 문제가 되어 리즈 시절의 퍼포먼스에는 많이 미치지 못했다.

대신 공중에서 수비수를 제치는 더블클러치는 여전히 김효범의 장기로 빛을 발했다. 김선형이라는 차세대 스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수준의 행타임 무브를 구사했으며 심지어 용병들이 버티고 있는 골밑이라도 다양한 각도로 핑거롤, 플로터, 더블클러치, 훅슛 등으로 림어택을 하곤 했다.

5.1.3.1. 지나치게 예쁜 농구, 박스아웃의 미흡[편집]

하지만 그는 그것을 다방면적으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63] 당장에 양희종을 보면 양희종 역시 슈터 출신이고 김효범과 하드웨어적으로는 무엇 하나 비교할 수 없이 차이나는 조건이지만 인사이드에서의 영향력은 오히려 압도적이다.

끈적한 농구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이며 박스아웃의 미흡함이 두드러진다. 마음먹고 리바운드를 주문을 받으면 보조리바를 통해 5개 이상 잡아채는 경기가 종종 있지만 한두경기가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곤 하였고 동급에서 매우 낮은 수치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64]

이러한 성향은 공격에서도 단점으로 발현되었다. 상대와의 컨택을 통한 공격을 극도로 피하는 성향에 따라 그의 공격옵션은 돌파와 3점의 양극화, 제한적인 킥아웃 등으로 편식이 생겼고 자유투 성공률이 무색하게 자유투 시도율도 매우 낮은 편이었다. 또한 점퍼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매우 어색할 정도로 미드레인지 게임의 비중과 완성도 모두 낮은 편이었다. 이는 파생력이나 기복없는 꾸준함에 있어서 매우 큰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65][66]

가장 날카로운 선수기는 한데 가장 안정적인 선수는 아니랄 수 있다.


5.1.4. 탑 수준의 대인수비, 부족한 팀 수비[편집]


오프더볼 무브가 뛰어나고 영리한 스타일, 끈적하고 부지런한 선수들의 커팅에 클러치샷을 내주는 모습이 매우 두드러진다. 무수한 스크린을 짜고 술래잡기를 하는 유기적인 지역방어에 결점을 가졌고 로테이션에 구멍을 내주거나 간단한 백도어에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터프하게 맨투맨으로 온볼러들을 치고받는 스타일에 편중된 농구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67]

그럼에도 슈팅가드 포지션에서 김효범만한 수비수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스킬을 잘 아는 선수답게 스킬을 잘 읽고 운동능력이 용병들에게 뒤지지 않기 때문에 사이드스텝으로 잘 따라가고 수비를 하다가 중심을 잃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유의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백코트진의 온볼러들을 압도하고는 했으며 파워에 있어서는 현주엽, 웬델화이트, 빈센트 그리어 등이 김효범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블락에 참여하지 않고 공중 볼 경합을 극도로 피하는 편이지만 크리스 알렉산더와 같이 220cm에 육박하는 센터부터 김주성이나 서장훈, 이승준, 헤인즈 같은 2m대의 선수들이나 윤호영 등 장신 선수들을 상대로 시원한 블락을 시전하기도 하는 등 가드 포지션에서는 1위의 블락커로서 종종 명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뛰어난 대인 수비력이 부족한 부분을 상쇄하여 모비스 시절 후반기에는 동포지션 최고라는 평을 듣기에 이르렀으며 은퇴하기 직전에도 수비력만큼은 동포지션에서 탑급의 기량을 보여주어 최전성기 이정현이나 조성민 등을 락다운시켜버리기도 했다.


6. 여담[편집]


  • 7학년,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나이 때 처음 덩크를 했다고 한다.[68]
  • 유명 연예인 줄리엔 강과는 고교 시절 농구를 같이 하던 사이라고 한다.
  • 선수 중에 보기 드물게 공부도 잘해 고등학교 시절 올A를 받았다고[69]
  • 국적에 걸맞게 SNS토익 만점 성적표를 인증하기도 하는 등 영어에 능하고 시험 머리도 있는 편이다.
  • 등번호 34번은 폴 피어스에게서 따온 번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용해왔다.
  • 미술이랑 음악 쪽에도 어느정도 재능이 있어서 팀 동료인 양동근에게 피아노 과외를 하기도 했다.
  • 대학 시절까지 인종차별에 시달려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인종차별이라고 한다. 김효범이 굳이 NCAA 1부가 아닌 하부리그 NAIA, 거기서도 상위권인 콘코디아가 아닌 중위권 뱅가드로 전학한 이유가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는 감독과의 상담으로 감명을 받아서이다.
  • 데뷔 몇 년 전, 잠깐 한국에 놀러왔다가 선수들이 훈련 중인 삼성 홈구장에서 온갖 고난도 덩크를 처박아대면서 선수들의 기를 죽였다고 한다. 이 때 깜짝 놀란 서장훈주희정이 뭐하는 놈이냐고 물어봤다는 후문이었다.
  • 길거리 농구 대회도 종종 나갔는데 포틀랜드나 밴쿠버 일대에 코트 잡아주는 것은 자기가 다 했다고 한다.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학살을 해대니 김효범이 출몰하는 동네에는 한국인이라는 말만으로도 코트를 비워주는 일도 생겼다. 한국 와서도 종종 길거리에 출몰하는데 덩크를 그렇게 난사한다고.[70]
  • 낙생고 선수들이 본인 앞에서 잘난 척을 하길래 학살하고 덩크로 골대까지 부숴 놓고 도망간 적이 있다.[71]
  • '난 리얼이다'[72], '드웨인 웨이드보다 내가 슛은 잘 쏜다'[73] '내 가족은 누가 먹여살리냐'[74], '(창원) 세이커스가 아니라 레이커스라도 이기자는 각오' 등 어록이 은근히 되고 꼬투리 잡히는 경우가 많다. 인터뷰하는 아나운서조차 SNS를 통해 디스할 정도. 말을 아끼고 하는데 있어서 생각은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스타일이다.[75]
  • 나이키 농구화 줌코비4의 애용자다.[76]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사는 것은 물론이고 지인들까지 전국 매장을 수소문, 주문 제작, 한정판 구매까지 해서 긁어모았다. 지금은 다 떨어져서 다른 것을 착용한다고 한다.


7. 역대 프로필 사진[편집]


서울 삼성 썬더스

파일:김효범2021-22.png

2021-22 시즌 (코치)

[1] 대학 시절 벌크업을 하여 드래프트 때까지만 해오 95~100kg의 웨이트였지만 디스크 수술 이후 근육이 빠졌다. 프로에서도 96kg까지 증량하기도 했으나 여러모로 운동능력 유지가 안 되는 모습을 보였고 대개 90 안팎을 유지한다고 한다.[2] 밴쿠버에서 자동차로 약 40분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3] 한국에 와서는 허리수술을 해서 점프력이 많이 낮아졌지만 리즈 시절에는 105cm에 이르는 가공할만한 점프력을 자랑하여 시합 중에도 윈드밀이나 더블클러치 덩크 등을 종종 구사했다. 드래프트 직후 워크아웃 때는 림 위에 작은 네모를 손목으로 치는 것을 시연하여 관중을 놀래켰을 정도로 이게 이게 어느정도냐면 현재 한국 배구 최고의 탄력을 자랑하는 전광인의 타점보다도 10cm 정도 더 높다.[4] 포틀랜드 파일럿츠, 김효범이 입학하기 직전에 190위 정도 하는 NCAA 1부 리그 중하위권 팀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외국파 선수 출신인 이승준, 이동준, 김효범 셋이 차례로 포틀랜드 대학을 거쳐갔다는 것이었다. 이승준이 전학 가니 이동준이 들어오고, 이동준이 가는 해에 김효범이 들어온다. 원래 서로 아는 사이라서 이승준이 김효범에게 진로를 선택하는데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5] 원래 대학 진학 때 이야기가 있었던 big west 컨퍼런스의 롱비치 스테이트로 전학을 간다는 계획이었으나 훗날 그의 에이전트가 되는 존 김이 '네가 어디서 뛰든 NBA 스카우터를 꼭 보내주겠다'라고 설득하여 NAIA 리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NCAA 규정상 리그 내의 전학생은 1년간 출전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미 2001년부터 포틀랜드에서 공백이 길었던 김효범으로서는 더이상의 공백이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국내 팬들에게 NCAA 1부 경험자라는 사실은 잘 기억되지 않고 마치 길거리 동아리 출신인양 폄하를 당하기도 했다.[6] 재미있게도 당시 wcc 컨퍼런스 신인왕이자 올 컨퍼런스 팀에 들었던 테런스 존슨 역시 같은 리그, 같은 컨퍼런스로 전학을 가면서 다시 매치업을 하게 되는 기묘한 인연을 연출하기도 한다.[7] 당시는 단순한 원핸드, 투핸드, 백덩크 정도만 깔끔하게 성공시켜도 덩크왕을 노려볼 정도의 수준이었고 기껏해야 연습 때 360도, 앨리웁 정도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허니딥, 비트윈더렉, 윈드밀, 크레이들, 더블클러치 덩크, 211cm 수비 위로 덩크 등 운동능력이 현저히 좋아진 지금 선수들조차도 엄두를 못 내는 덩크를 구사하는 한국인의 존재에 대해 쉽사리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 많았고 이후에도 관련 주제에 언급되면 종종 미국 시절은 약을 한게 아니냐는 드립이 종종 나온다.[8] 미국에서 훈련을 하면서 하승진과 함께 지내며 훈련을 했었고 방성윤과도 연습경기에서 몇차례 안면을 틔웠다고 한다. 하승진이 말하길 '한국인 빈스 카터로 방성윤보다 3점이 좋고 덩크는 흑인들보다 잘한다.' 라는 코멘트를 하면서 기대감을 증폭이었다.[9] 용병급 플레이어가 온다는 과대평가성 루머가 돌고 극성 팬들이 기존의 선수들을 폄하해서 눈총을 받는가 하면 아직 선수급조차 아니라는 의견마저 있었는데 스타일상 예나 지금이나 항상 고평가와 저평가의 온도차가 극심한 편이다.[10] 리그, 컨퍼런스, 토너먼트 등을 구분하지 못하고 리그, 자체리그, 동아리 등으로 오인하고 있다.[11] 굳이 NCAA D3을 택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건 상위권 대학 간판을 위해 굳이 명문대 분교를 택하는 일부 수험생들의 심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2] 반대로 JUCO, NJCAA 등 하위는 NCAA D3 수준이나 최상위권 재능은 메이저 컨퍼런스로 합류했다.[13] NCAA D2의 브리검영 하와이 분교가 대체적으로 한국 국가대표와 대학 선발 사이의 전력이라 한국과 미국 농구의 수준을 비교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동준 이승준 김효범 이대성 김경언 등 이쪽 경험자들이 KBL에서 하는 활약이 대학 시절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14] 이 컨퍼런스에서 NCAA D2 서부 지역으로 편입된 대학이 많은데 한국 농구와 교류가 많은 브리검영 하와이 분교, 바이올라 등이 대표적으로 모두 거기서도 종종 최상위권에 들곤 하며 칼 밥티스트의 경우에는 D2에서 적응기를 거친 후 NCAA D1로 편입 예정이다.[15] NBA 문서의 "NBA를 향한 험난한 여정"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북미에서 NBA가 아닌 하위리그 선수들이 농구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든 수준을 넘어 불가능에 가깝다. NbA 공식 하위리그인 G리그의 경우 우리 돈으로 연봉 2,000만원 정도 주는데, 물론 시즌이 몇개월에 불과해서 부업을 할 수 있다지만 미국 물가를 생각하면 이걸 믿고 선수생활하긴 어렵다. 선수생명이 끽해야 20년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괜히 미국선수들이 멀쩡한 자국의 하위리그들 두고 해외를 떠도는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선수들이 G리그에서 뛰는건 오직 NBA에 대한 열망 때문에 눈물젖은 빵을 먹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해진 선수 즉, 김효범 수준의 선수들은 해외에서 뛰는게 대부분이다. 김효범보다 몇수 위인 피트 마이클같은 선수들조차 커리어 초반에 NBA 진출이 몇년간 좌절되자 현실에 안주하고 해외에서 스타급 선수로 뛰었다.[16] KBL 역대 드래프티 면면을 봐도 김효범의 훨씬 열악한 조건에도 상위픽에 지명된 이들이 꽤 있다.[17] 2007년, 2009년에 올스타전 덩크왕을 두 번 차지하기는 하는데 원래의 탄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꽤나 아쉬운 모습이었다.[18] 지금도 김효범을 길거리, 동아리 농구 출신으로 프로 와서 드리블이나 슛 등을 배웠다는 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19] 사실 허리디스크 수술로 6개월의 재활을 거친 이후 점프력이 20cm 가까이 줄어들고 웨이트도 10kg 가까이 빠진 데다가 몸의 밸런스, 농구 감각까지 잃어버린, 말 그대로 차포 모두 떼고 가는 상황에서 제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다.[20] 유재학 감독은 인터뷰에서 2~3년 정도 보고있다, 2년 안에 국가대표에 들어가도 손색 없을 정도의 기량, 특히 한국농구에 적응이 끝나면 전술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유일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등의 평가를 하여 기대감을 보였다.[21] 비시즌 미국 전지훈련 동안 연습경기에서 NBA에서도 뛰어난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리키 데이비스 위로 인유어페이스 슬램덩크를 꽂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용병으로 새로 들어온 브라이언 던스톤과의 덩크 대결은 KBL 용병 덩크 컨테스트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시합 직전 모비스 경기 직관 재미거리 중 하나였다.[22] 전성기 드웨인 웨이드가 20%, 데릭 로즈가 8% 정도의 비중이었다.[23] 하지만 우연인지 국가대표 귀화 논란이 불거지자 갑자기 활약도가 급추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시즌 후반기 들어서 롤이 축소되는 모습마저 보이면서 MVP레이스에서 멀어진다.[24] 그리고 2년 후 올스타 MVP까지 수상하여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3점, 덩크, 올스타 MVP를 석권한 선수가 된다.[25] 레더는 팔꿈치로 김효범이나 김두현을 가격하는 등 모비스 팬들의 공분을 샀고 이상민은 감퇴하는 기량을 헐리웃 액션을 통해 메우려 들었으며 강혁 역시 80년대에나 볼 법한 담그기 기술로 클러치 상황을 더럽혔다. 특히 3차전, 2파울인 김효범이 토마호크 덩크를 꽂고 점수 차를 좁혀가며 기세가 오르자 교묘한 일리걸 스크린으로 접근, 헐리웃 액션을 통한 연속적인 파울콤보를 먹여 순식간에 퇴장시킨 장면은 4강 플레이오프의 분수령이었다. 이후 삼성과의 경기 때는 관중석에서 물병이 날아오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26] 참고로 이 플레이오프를 망친 이상민은 다음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도 전주 KCC의 전태풍에게 같은 짓을 해서 재미를 보려했는데 흥분한 전태풍이 평정을 찾고 무시 전략으로 차분하게 나오면서 오히려 이상민 혼자 자멸해버린다.[27] 이 시즌 모비스는 정규리그 우승 + 4강 플레이오프 1차전 승리를 챙기고도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지 못하는 최초의 팀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28] 매경기를 첫드리블은 무조건 파울로 끊는 모습이 보일 정도[29] 유재학은 훗날 '효범이는 흥분하면 오바해서 개인플레이가 나오기 때문에 다잡아줄 필요가 있다'라고 술회한다. 하지만 클러치 타임 때 감이 좋았음에도 그를 벤치로 보내 리듬을 끊어 시합을 내주는 경우도 있었고, 대부분의 용병들보다도 능한 덩크를 자제시키는 등 다소 지나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SK로 떠나고 김효범은 '다른 농구를 해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했고 유재학은 2014년 우승 직후 문태영과 김효범을 비교하면서 '성실하지만 농구 스타일이 안 맞았다'라는 말을 남겨 둘 사이의 어느정도 스타일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30] 유재학은 이런 김효범을 두고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이대성이라는 차세대 스타를 발굴하는데도 참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1] 사실 외국 국적 취득에 의한 군 기피는 유승준의 예에서 유명하듯 처벌 대상이지만 김효범의 국적 취득 시점은 만 12세이기 때문에 들어맞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방송을 탈 때도 사전에 국적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체크하거나 상무 입영 가능 시기가 끝나자마자 국적 관련 인터뷰가 나오는 것을 보면 행보에 군대를 의식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32] 여기에 대해 일부 선수들은 군대를 가지 않는데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33] 그리고 2005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참가자 30명이 집단으로 거부하는 파행이 일어났는데 사실 이 집단퇴장 및 무마는 국적이나 병역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1~3순위로 지명된 방성윤 김효범 한상웅 모두 국내 대학, 트라이아웃을 거치지 않거나 국내 리그 출전이 불투명한 선수들이었고 그런 선수들에게 밀리는 국내 대학들의 파이 문제였기 때문이다.[34] 이는 당시 대리인으로 참석한 아버지의 국내지명시 반드시 국내에서 뛰겠다는 지명소감, 모비스의 추가 지명 등으로 무마된다.[35] 이들은 현 소속팀과 재계약이 안 되고, 3년이 지나면 무조건 드래프트 대상이 되어 무조건 팀을 옮겨야 한다. 반대로 귀화를 안 한 김효범은 KBL 드래프트 출신이라 그런 거 없다.[36] 유재학이 '넌 이제 수비로도 최고니까 양동근이랑 다 밀어버려!'라는 주문을 할 정도였다.[37] 전태풍이 유일하게 맞불을 놓을 정도였다.[38] 막상 입찰에 나선 것은 SK였으나 삼성, LG와 물밑경쟁에 들어가면서 좀 더 뛰었다고 한다.[39] 한 팀으로 합류하게 된 주희정은 과거에 같이 뛰어보고 싶은 선수 중 하나로 김효범을 꼽았고 김효범은 화보 촬영 인터뷰에서 MVP 도전을 종용받았다는 귀띔을 한다.[40] 아이러니한 것이.. 유재학 감독이 김효범을 공수에서 완벽한 최고의 선수로 키워서 구현하고자 하는 플레이에 근접한 모습을 모비스를 상대로 보여줬다. 이상하게 모비스 상대로는 공격력은 물론이고 수비, 리바운드 참여 등에서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41] 하지만 이 MVP는 문태종이 받았어야 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4쿼터에 활약을 시작하는 문태종의 특성상 3쿼터까지 끝날 즈음에 선정하는 방식이 불리하게 작용했다.[42] 시즌 후반에는 피로골절까지 달고 뛸 정도였고 이 시절 디스크 재발, 무릎 부상 등으로 커리어가 꺾이는 계기가 된다.[43] 근데 지나고 보면 다른 고액연봉자들의 활약상을 감안했을때 평타는 넘는 수준이다. 원래 논란이 많은 선수에다가 연봉 급상승이 너무 튀었고 가드 첫타로 뭇매를 맞은 것이 컸다.[44] 사실 다른 케이스를 찾아봐도 포지션 탑급 활약을 펼치고도 김효범처럼 삭감을 시도하는 사례는 없다시피하다. 이후 유사한 사례의 후속 케이스들을 봐도 동결 정도고 이정현이 KCC로 이적하면서 9억 찍은 연봉을 이듬해 7억으로 삭감되긴 했지만 서로 공감이 있던 상태였지 김효범에게 하듯이 밑도 끝도 없는 50% 삭감을 주장하지는 않았다.[45] 구단 측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량화된 수치를 근거로 김효범의 기여도가 떨어진다 주장했지만 김민수, 방성윤 땜빵에 혹사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고 그의 장단점은 영입 당시 견적이 나온 상황이었다. 평균 1.x어시의 슈터를 데려와놓고 주희정, 김태술이 들어가도 안 되는 팀플레이의 책임을 지우면서 '넌 2억 5,000만원짜리' 드립에 본인만 연봉 절반 가까이 후려치는 것은 누가 봐도 군색하다.[46] 김효범의 KBL 공헌도는 동포지션 리그1위, 팀에서는 눈곱만큼 차이로 3위, 한 쪽만 1억 5,000만원 삭감을 뒷받침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47] SK 시절 기록과 합산되어 눈에 띄지 않지만 자유투율은 리그 1위, 득점은 리그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48] KCC로 이적하고 첫 승을 거둔 때의 인터뷰에서 그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쏟음으로 그의 농구에 대한 간절함과 그것이 무너져 내려가는 스트레스를 보여줬는데 안티들도 차마 그날만큼은 까임이 좀 덜했다.[49] 이게 참 결과론적인 것이지만 모비스에서 계속 있었더라면 연봉을 몇 억은 더 받았을 것이고 우승 반지 서너개는 더 챙겼을지도 모를 일이니 본인으로서도 아쉬웠을 것이다. 혹사로 부상당할 염려도 덜했을 것이고 2011-12 시즌 4강 플레이오프 모비스의 상대인 동부의 트리플 타워를 슛과 돌파로 공략할 수 있는 김효범이 있었더라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50] 유망주 송교창 김지후 등을 밀어준다는 여론 때문에 상대적으로 미운 털이 박혔는지 슛이 상당히 불안하다는 폄하가 좀 많았다. 참고로 당시 김효범의 3점 성공률은 42%였다.[51] 김효범만큼 급격한 피지컬 저하를 여러번 겪고도 재기한 것, 슛 매커니즘을 여러번 바꾸고도 리그 수위권의 슈터로 재기한 것 모두 각각이 프로 레벨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한 케이스로 엄청난 자기관리가 있었음을 방증한다.[52] 엄청난 기량에 비해서 초라한 커리어인 것이지 전성기 3시즌동안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 커리어 말년 2시즌 동안은 리그 정상급 3&D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받았다.[53] 이에 대하여 김효범이 아마시절에 안정적으로 정교한 농구를 배우지 못한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김효범은 NCAA에서는 리빌딩 시즌을 겪으면서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고 고교나 NAIA에서는 원맨팀이었다. 김효범의 단점은 아마 시절 원맨팀 에이스 출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54] 포스트업 플레이어에 대해서 이런건 흔한 일이지만 3점라인 바깥에서 플레이를 시작하는 드리블러에 대해 이정도 견제는 상당히 강도 높은 수준의 대응이다.[55] 물론 오늘날 스킬 트레이닝이 발전한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평이지만 실제로 당시 아마 농구인들 사이에서 김효범에 대하여 편법적인 스텝과 엉성한 드리블, 단조롭고 빈약한 스킬, 비효율적인 훼이크 등을 사용한다는 지적을 적잖이 볼 수 있었다.[56] 이런 경우 이대성이나 김선형처럼 듀얼가드로 전향을 꾀하거나, 이정현처럼 1번의 롤을 상당부분 차지하여 스텝업을 하는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김효범은 KBL 최고의 1번 양동근, 4번 함지훈의 전성기와 겹쳤고 그들 사이에서의 롤 배분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그의 단점 개선(=리딩 경험치)는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고 이후에는 본인이 가진 장점이 쇠퇴할수록 더 부각되었다.[57] 하지만 워낙 이질적인 수준의 운동능력이기도 하고 해외파, 국적 문제에 의한 불편함 등으로 무시하거나 일종의 논외로 하는 불편함이 팬들 사이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고 있다.[58] #### [59] 2023 덩콘에서 렌즈 아반도는 360이나 윈드밀덩크를 제대로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NBA급, 역대급이라고 난리가 났지만 김효범은 360윈드밀을 아반도보다 높이서 파워풀하게 구사했으며 아반도의 필살기인 더블펌프 리버스덩크를 자유투라인 서클에서 멀리뛰기로 구사할 정도다.[60] 데뷔 이전 김효범이 널리 알려지게 만든 덩크대회 영상과 동시기의 NBA나 NCAA 덩크대회 영상들을 동시에 놓고 틀어봐도 일부 규격 외 정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쳐짐이 없을 정도다.[61] ## [62] 은퇴 후 김현민, 장재석, 최진수에 의해 역전되었고 이후 최준용, 송교창 역시 역전할 것으로 보인다.[63] 다만 이점은 김효범이 고질병인 허리디스크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64] 유재학은 김효범을 두고 평균 5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을 능력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65] 조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미드레인지 게임은 일류 스윙맨들의 히어로볼을 하는데 있어서 상징과 같은 기술이며 더맨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지표이기도 하다. 코비가 역대 스윙맨들과 차별화되는 점이자 조던에 미치지 못하는 가장 큰 점 중 하나가 바로 미드레인지 게임의 파워 차이이다. 웨이드는 부족한 외곽 능력으로도 돌파와 미드레인지 게임으로 말 그대로 섬광 같은 전성기를 누렸고 르브론은 인사이드 플레이의 지배력을 길러 부족한 미드레인지 게임을 벌충하여 마이애미에서 반지를 손에 넣었다.[66] 용병판인 KBL에서도 미드레인지에 능하느냐는 중요한 요소이다. 서장훈, 추승균, 김주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양동근, 함지훈, 문태영, 문태종 역시 뛰어난 미드레인지 능력을 바탕으로 큰 게임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KBL의 정상을 차지했으며 급격한 하락세가 없는 꾸준한 능력을 보였다.[67] 물론 미국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NCAA 출신의 국내선수 중에 문태종 정도가 예외로 모두 같은 문제를 한국에서 겪었다.[68] 이 때 키가 170 조금 넘는 정도였다고 한다.[69] 이외에 우리나라로 치면 고대, 연대 정도에 해당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에도 무난히 갈 정도였고 대학 시절에도 NAIA all American scholarship athletic에도 선정되기도 한다.[70] 미국 유학 시절 러커파크에도 몇 번 농구를 했다고 하는데 길거리 스타일로 하다가 털리고 정석 플레이로 나갔다는 소문도 있다.[71] 모비스 시절 팀 동료인 던스톤과 덩크 시합으로 박아대니 골대 높이가 바뀌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한 몸을 풀던 동네 체육관이나, 학교 골대를 부숴먹었는 등 은근히 골대 부순 목격담이 많다.[72] 사실 이건 특별히 문제되는 발언은 아니고 미국에 있을 당시 프로에서도 잘 할 자신 있다는 표현이었는데 초창기 부진하면서 거품에 대한 조롱으로 인용된 것 나중에는 'xx는 리얼이다', '리얼 xx선수' 등 칭찬 쪽으로 바리에이션이 많다.[73] 데뷔 전에 메신저로 인터뷰 하면서 나온 말이다. NBA 진출에 대한 포부를 밝히면서 본인의 스타일을 웨이드에 비유하고 거기에 '저보다 슈팅은 떨어지기 때문에 조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응원해 주시는 여러분들과 한국이 제 뒤에 든든히 서 있기 때문에 뭐 드웨인 웨이드 쯤이야' 등의 발언을 한 것. 이렇게 보면 웨이드를 무시하는 것 같지만 단순한 포부 밝히기+ 농담조라고 밝히고 실제로는 롤모델로 웨이드를 꼽으며 가장 닮고 싶고 존경한다고 한다.[74] 하필이면 연봉 5억 대박이 터지고, 군대 및 국적 문제가 조용해져 갈 시점에 국적 관련 인터뷰에서 나온 발언이라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팬들도 차마 옹호해주지 못 하고 심지어 이 발언을 계기로 팬에서 안티로 전향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75] 교포이다 보니 언어 구사능력과 별개로 의사 표현에 있어서 정서적으로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한데다 무엇보다 안티 팬이 워낙 많기에 그냥 말을 해도 이리저리 꼬투리 잡혀 밉보이는 경향도 강하다.[76] 2009년에 나온 코비 농구화다. 발볼이 좁다는 단점은 있지만 편안한 착용감과 가벼운 무게, 쫄깃한 쿠션 등으로 6년이 지난 서술 시점에도 비길만한 신발이 없을 정도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코비 농구화 최고의 명작으로 취급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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