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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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亨律
1970.07.28 ~ 2005.05.29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1]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보통 사람에게는 단순한 소망이 내게는 너무 힘든 것이 되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작은 소망조차도 이루기 힘든, ‘원폭2세 환우’라는 내 상황이 한 개인의 꿈마저, 한 인간의 의지마저도 담보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것은 한 원폭2세 환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2,300여 명의 한국 원폭2세 환우들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이 가지는 꿈을 이루고 싶다.

수기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1. 개요
2. 일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반핵운동가, 시민운동가. 원폭 2세 환우(患友)[2]들을 지원하고 돕는 시민운동에 평생 헌신했다.


2. 일생[편집]


김형률은 1970년 7월 28일 부산광역시에서 어버지 김봉대와 어머니 이곡지 아래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늘 몸이 약했고, 병을 달고 살았다. 폐렴, 기관지 확장증, 객혈, 객담 등의 온갖 병들이 그를 괴롭혔다. 이런 사정이기에 김형률은 학업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했고, 결국 검정고시로 동의공업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그는 2001년 병원에서 의학 논문을 보다가[3] 자신이 '면역글로불린 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의 면역력은 신생아 수준 밖에 되지 않아 각종 질병에 시달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질병과 함께 자신의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던 것을 떠올렸다.[4] 또 자신의 쌍둥이 형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일도 떠올렸다.[5] 마침내 김형률은 자신이 걸린 병들이 원자폭탄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고, 스스로를 '원폭 2세 환우'로 정의했다. 이후 그는 책과 인터넷 등을 통해 원자폭탄과 피폭 문제 그리고 피폭자들에게 주어지는 지원 등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 말고도 다른 원폭 2세 환우들이 있음을 알고 그들을 위한 사회운동에 동참하리라 결심했다. 2002년 3월 22일 김형률은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에서 자신이 원폭 2세 환우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결성하여 전국의 원폭 2세 환우들을 찾아다녔다.[6]

2003년에는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포함하여 여러 시민단체를 종합하여 '원폭 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에서 김형률은 국가인권위원회에게 원폭 2세 환우에 대한 실태 조사를 진정하여, 2004년 원폭 2세 환우들에 대한 건강 검진과 조사를 시행시켰다.[7] 또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와 원자 폭탄 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평화를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서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2005년 5월에는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한국인 원폭 2세 환우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몇 년에 이어진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가뜩이나 약했던 김형률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한 후 귀국한 지 5일 만인 5월 29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추모사업회를 만들고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일생을 다룬 책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와 그의 유고집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가 나와있으니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싶은 분은 한 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제목은 리틀보이이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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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인들에게 보내는 이메일마다 마지막에 쓴 어구.[2] 환자를 완곡해서 이르는 말[3] 1995년 그가 3번이나 폐렴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혈액을 체취해서 의사들이 그가 특이한 병에 걸린 것을 파악하여 논문에 쓴 것이다. 의사가 고지하지 않았기에, 김형률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4] 김형률의 어머니 이곡지는 10살 때 히로시마에 있다가 원자폭탄을 맞았다. 이 일로 그녀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해방 후 합천으로 돌아와 아버지 김봉대와 1960년에 결혼했다.[5] 김형률은 형 '김명기'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은 안타깝게 태어난지 1년 6개월 만에 사망했다.[6] 그러한 그의 노력으로 이 단체의 회원 수는 처음 2명에서 2005년 경에는 67명으로 성장했다.[7] 이 조사에서 원폭 2세 환우들의 건강 실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들은 일반인에 비해서 심장계통 질환에 걸릴 확률이 89배, 빈혈에 걸릴 확률이 88배,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71배 높았다. 또 10세 이하 조기사망률은 52%에 달했다. 이는 일본에서 조사된 원폭 2세 환우들의 실태와 비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