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수(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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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찰
김해수


출생
1924년 9월 6일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사망
1950년 7월 8일 (향년 26세)
강원도 영월군 녹전리
학력
경찰전문학교(경찰간부후보생 3기)
소속
강원도 경찰
전투경찰 제8대대
최종계급
경감[1]

1. 개요
2. 생애
2.1. 영월발전소 탈환작전
3. 사후
3.1. 녹전전투 추념제전



1. 개요[편집]


대한민국경찰관. 6.25전쟁 참전 용사. 영월발전소 탈환작전을 지휘하였으며, 작전 중 전사하였다.


2. 생애[편집]


1924년 9월 6일 태어났으며, 1948년 경찰간부후보생 3기로 입직하였다.

2.1. 영월발전소 탈환작전[편집]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북한의 기습 남침 직후였던 7월 1일경, 적의 대대적 공세에 강원도 경찰은 대부분 남하하였지만 영월 지역은 반드시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영원을 10만 kw의 전력을 생산하는 화력발전소가 있을 뿐 아니라 중석광산 등이 위치해 있고 함백, 마차 등의 탄광지대에 인접해 있어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강워도 비상경비사령관 윤명운 경무관은 즉시 강원도경찰학교장 김인호 총경을 영월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경 제8대대와 홍천, 인제의 병력 100여 명으로 영월 방어부대를 편성하였다.

영월지구전투부대의 투혼으로 영월지역은 7월 2일부터 수차례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일시 영월 점유에 성공하였으나 5일, 중원과 삼옥 방면에서 우회한 적의 침입으로 영월을 포기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영월탈환의 집념을 버리지 않고 7일 아침, 상동으로 철수한 전경 제1중대에 영월 공격을 명령하였고 중대는 김해수 당시 경위가 중심이 되어 47인의 결사대를 편성, 8일 오후, 영월 녹전리 송현치로 기동하였다.

14시, 결사대는 송현치에서 적을 만재한 트럭과 맞닥뜨려 선제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현장으로 몰려드는 적은 대규모로 아군 특공대를 포위하였고 전투는 육탄전으로 돌변하였다. 이 와중에서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작전을 지휘한 김해수 결사대장은 적이 발사한 박격포탄의 파편이 관통해 전사하였고 이어 석상익 경위의 지휘하에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석 경위마저 전사하여 결국 전투는 24명 전사, 7명 부상의 기록을 남기고 종결되었다.

강원도 전투경찰대는 이 패배의 치욕을 갚고자 3중대, 5중대 등을 증원하여 영원을 재탈환하고자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2] 그러나 김해수 경감의 살신성인적 전투 자세를 비롯한 강원도 전투경찰의 활약으로 적의 진공을 지연시키는 데는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3. 사후[편집]


전쟁기념관은, 2016년 4월의 호국인물로 김해수 경감을 선정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18년 7월의 영웅으로 김해수 경감과 석상익 경위를 선정하였다.

강원도지방경찰청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 '김해수 경감 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중이다.#


3.1. 녹전전투 추념제전[편집]


전투가 벌어진 영월군 녹전리에는 호국경찰전적비가 우뚝 서서 매년 추념제전이 성대히 열리고 있다. 비록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하였지만 부족한 전력과 화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든 김해수 경감과 47인 결사대의 용맹은 오늘날까지 경찰의 자랑이자 강원의 자랑으로 널리 칭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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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 추서, 생전 최종계급은 경위[2]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의 총반격으로 수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