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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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
金海松


파일:음악가김해송.png

본명
김송규(金松奎)
출생
1910년[1]
평안남도 개천군
사망
미상[2]
학력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졸업)
토요대학 (법학 / 학사)
가족
배우자 이난영
아들 김영조, 김영일, 김상호, 김태성, 딸 김숙자, 김애자, 김영자
5남 7녀 중 막내
데뷔
1935년 오케레코드사 입사

1. 개요
2. 음악세계
3. 친일 행적
4. 사생활
5. 이후 행적, 만요족과 그 이후 재즈밴드들
6. 음악에 대한 재평가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중음악인이다. 1911년에 태어났고 사망연대는 미상이며, 평안남도 개천군이 고향이다. 김해송은 예명이며 본명인 김송규로도 알려져 있다. 여가수 이난영의 남편이다. 밴드에서 주로 작곡, 기타를 담당했다.


2. 음악세계[편집]


주로 만요(漫謠)를 작곡했는데 익살과 해학을 담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발생한 코믹송이다. 그의 부인 이난영 여사를 보컬로 내세웠으며 본인이 직접 노래한 작품들도 있다. 이외에도 박향림[3], 손목인, 김정구, 박향림, 백년설, 박시춘, 손석우, 엄토미 등 만요족 등의 당시 뮤지션들과 교류했다. 당시에 한반도에는 일제강점치하에 있었으며 만요 이외에도 신민요, 일본 엔카, 왈츠, 폭스트롯, 클래식, 재즈 등 수 많은 장르의 음악들이 잡탕처럼 섞여 있었고 전부 통틀어 재즈송이라고 했다. 엔카 리듬에 민요를 결합한 트로트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고, 그의 음악 중 상당수는 트로트(당시 유행가)이다. 그리고 외국곡을 번안한 번안곡들이 상당수였다.

일단 친일논란을 재쳐두고라도, 월북을 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행적 때문에 북한의 음악으로 알려져 그의 음악은 알게 모르게 매장되어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예전 일제 당시 그가 작곡한 음악을 들어보면 번안곡이 아닌 그의 창작곡이며 굉장히 세련되고 혁신적인 음악을 작곡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해송은 행방불명되기 직전인 해방 직후까지도 뮤지컬 및 음악 활동을 했는데 한 클럽에서 낸 신문 광고에 그의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을 스윙재즈로 소개하는 문구가 남아 있어 그의 음악적 색깔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천재', '조선 쟈스(Jazz)의 귀재' 라고 불렀다. 대한민국 재즈 0세대의 사실상 시작점이 되는 인물이다.

주요 작품에는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역마차〉, 〈울어라 문풍지〉, 〈화류춘몽〉, 〈선창〉, 〈울어라 은방울〉, 〈청춘계급〉, 〈개고기 주사〉, 〈모던 기생 점고〉, 〈청춘삘딩〉, 〈전화일기〉, 〈다방의 푸른꿈〉 등이 있다. 이 곡들의 상당수는 신민요, 트로트이며 일부만 재즈이다. 그러나 해당되는 트로트들도 오늘날 대중들이 알고 있는 구수한 느낌의 일반 트로트와는 사뭇 다른[4] 예술 작품 급이며, 리듬은 스윙리듬(싱코페이션)을 차용하거나 중간 중간에 서양악곡 가락을 집어넣는 등 끊임없는 혁신을 고민한 흔적들이 보인다. 위 상당수 곡들을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연로하신 분들은 '젊을 때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들인데 신기하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80년 전, 100년 전 음악이 왜이리 세련되었죠' 등이 반응들이 섞여 있는 신기한 댓글들을 볼 수 있다.

그는 재즈송 뿐만 아니라 하와이안 기타에도 능했다고 한다. 손석우 구술채록문에 의하면 그의 기타 연주 공연장면을 실제로 현장에서 보았는데 그에게서 광채가 느껴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는 조선에 오케 레코드, 콜롬비아 레코드, 빅터 레코드 등의 레코드사가 지사 형태로 설립되었는데 레코드 회사별 전속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는 방식이 많았다. 그는 1944년 이철 단장이 별세하면서 조선악극단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실질적인 단장이되었다. 당시 뮤지션들을 모아 전국 및 일본까지 투어를 하며 공연을 하였다. 트럼페터 현경섭의 유품 서류에 보면 김해송이 갑, 현경섭이 을로 되어 있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김해송에게 돈을 빌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가 행방불명되기 직전까지도 부인 이난영의 음악활동을 계속 도울 수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며 당시에 자신이 음악활동은 물론 음악 비즈니스에도 능했고 당시 음악계에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해방 후에도 K.P.K 악단까지 창설하고 활동할 정도의 여유가 되었던 것이다.

K.P.K악단[5]와 김해송 선생님의 모습
파일:K.C.K밴드.jpg

3. 친일 행적[편집]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이난영과 남인수가 함께 부른 〈이천오백만 감격〉, 〈참사랑〉, 〈봄날의 화신〉, 〈그대와 나〉, 〈총후의 기원〉과 같은 친일 가요 작곡 사실이 알려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김해송을 손목인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작곡가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


4. 사생활[편집]


당시 만요를 같이 작곡 및 연주 등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 증언에 있다면 굉장히 폭력적이었다고 한다. 김해송 뿐만 아니라 동료들끼리 음악활동을 하다 서로 거칠게 때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밴드리더의 권위도 있었던 지라 더 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도 그럴 것이 폭압적인 일제강점기였던 지라 불행한 시기였고 제정신이 아니고 심리상태가 불안했을 것이다. 또한 시대적 의식이 낮아 폭력에 대한 민감도 역시 낮았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유학도 다녀왔으며 그 시절에 음악을 했을 정도면 굉장히 부유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음악적인 재능이 훤칠한 끼로 인해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았는데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부인 이난영이 자택에 있는데도 외부 여인과 같이 들어와 잠을 자 이난영이 눈물바람으로 밤을 지세웠으며 수시로 부인을 때렸다고 한다. 심지어 이난영 여사는 소양강 댐에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동료 음악가 손목인이 '부인을 소중히 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6] 그 여인들 중에서는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인 홍청자도 있었는데 홍청자와 이난영 둘 다 조선 최초의 걸그룹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였다.

나중에 해방 후 김해송이 납북인지 월북[7]인지 모를 북한 지역으로 갑자기 실종되면서 마지막까지 부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일제강점기 시절 7남매를 낳았으며 이중 딸 두명은 훗날 김시스터즈가 된다. 김시스터즈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난영 혼자 한국전쟁통에 7남매를 키우기 시작했으며 김 시스터즈를 미국에 보내기 전까지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했는데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었다고 한다.


5. 이후 행적, 만요족과 그 이후 재즈밴드들[편집]


해방 이후 자발적 월북인지 김일성 정권에 의한 납치인지 알수 없으나 북한 지역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다만 북한에서도 행적이 없는걸 보면 납북 중 사망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 걸로 추정된거나 혹은 서대문 형무소에 잡혀 있다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비행기 공습으로 사살되었다는 측근의 증언도 있다. SP판(돌판)과 사진 기록만 있을 뿐 그의 영상 기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김해송, 이봉룡, 이난영의 자녀들인 김시스터즈는 미군정 당시 미군 클럽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그 재능을 인정 받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에드셜리번 TV'쇼에 출연하는 등 거대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맴버 중 일부는 별세 하거나 현재 해외에서 결혼해 교민으로 살고 있다.

한편 재즈뮤지션 엄토미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재즈 1세대분들과는 연결고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만요족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김해송 선생 뿐만 아니라,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많은 만요족들을 포함한 예술인들이 북한으로 끌려가거나 실종되었고 혹은 미군정 중심의 1세대 후배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음악적 성향도 스윙재즈 중심에서 모던재즈로 한국재즈의 사조가 많이 바뀌어 만요족과 그 이후 세대와 음악적 성향도 완전히 다르다.

그나마 남한지역에 남아 생존한 만요족들 중에 일부는 재즈라는 음악을 버리고 당시 대중이 좋아하는 트로트로 전향하였다. 한편 대중음악계와 재즈계에서는 그가 전쟁이후에도 살아남아 더 활동했더라면 어떤 작품들이 더 나왔을 까 하는 아쉬움이 다소 남아있다. 그래도 손목인, 엄토미, 손석우 등 그들의 생존 모습을 증언해줄 분들이 1990년대 까지 몇 분이 계셨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의 1930년대 ~ 60년대 초창기 재즈 유튜브 영상 모음들이며 김해송의 영향력이 끼친 음악동료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정작 영상 속에 김해송 본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중간에 예전 조선악극단의 모습과 박시춘, 이봉룡, 이난영, 김시스터즈 초창기 모습, 엄토미 악단의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일부 트로트도 섞여 있다.




6. 음악에 대한 재평가[편집]


친일, 복잡한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최근 김해송의 음악에 대해서 만큼은 재평가 받고있다. 그가 놀랍게도 미국에서 발생한 스윙재즈(Swing Jazz)와 래그타임 리듬을 완벽히 차용하고 브라스 밴드[8]를 활용하여 굉장히 세련된 재즈블루스 음악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보컬은 발음이 굉장히 정확하고 당시 미국 스윙밴드 보컬이 활용하던 스캣 리듬까지 완벽히 구사한다. 가사도 단순히 외국의 것을 번안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 민요가락을 섞어 신문물이 들어오던 당시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려낸 한국적 재즈 음악을 만들어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재즈 음악이 자유롭게 연주되고 작곡되었으나 후반에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적성국가의 음악인 재즈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재즈가 점차 힘을 잃어갔으며 대중음악 작곡가들에게 친일가요 작곡을 강제화 했다. 김해송의 음악은 잠시 스쳐지나가듯 지나간 스윙 시대에 당시 음악을 완벽히 구현해낸 것이다.

그의 음반은 상당수가 축음기 기반의 SP판으로 발매되었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지금은 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최근에는 신나라 레코드 복각 프로젝트, 장유정 교수, 김국찬과 귀재들 [9], 군함도(영화) O.S.T등 후배 재즈뮤지션들이 그를 기리고 현대 재즈리듬에 맞춰 재해석해 복각판을 제작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들을 '대한민국 재즈 0세대', '한국의 초창기 재즈 스탠다드'로 보고 잃어버린 음반을 찾거나 현대적인 음원으로 복원 작업을 시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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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1년생이라는 설도 있다.[2] 1950년6.25 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되었고, 납북되는 도중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만약 김해송이 1950년에 사망한 게 확실하다면 향년 39~40세이다.[3] 오빠는 풍각쟁이로 유명하다. 이 곡도 김해송이 작곡한 곡이다.[4] 실제로도 70년대 이후 트로트와 60년대 이전 트로트는 다르다. 일제강점기 부터 60년대까지 트로트는 유행가로 불리웠으며 작곡가들이 '예술성'을 추구했다면 70년대 이후 트로트는 '대중화'와 '보급'이 목표였으므로 출발 지점부터가 다르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트로트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5] 조선악극단의 후신이다.[6] 손목인은 평소에 상당히 가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부인 오정심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부부싸움을 하려해도 그냥 씽긋이 웃으며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고 하니 김해송에게 그런 조언을 했을만도 하다.[7] 납북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저 이름도 유명한 국민고자 빨갱이 연예인인 심영황철이 당시 남한에 있던 연예인들을 닥치는대로 납북시키고 있었고 최은희 역시 납북 당했다가 청천강 인근에서 탈북한 바 있다.[8] 당시 조선의 서양 악기 연주 실력은 일본 보다 떨어졌기 때문에 금관악기 기반의 재즈 브라스 밴드를 제대로 꾸릴 수 없었고 손목인, 김해송 등이 작곡 및 보컬을 하고 실제로는 일본 밴드에 연주를 의뢰했다는 의견도 있다.[9] 질풍가도의 코러스를 맡으신 그분. 2021년 북두의권 실사판 오프닝곡을 리메이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