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농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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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수상 및 감독 경력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2
(감독)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파일:김진 감독 프로필.jpg

이름
김진
金鎭
출생
1961년 1월 22일 (63세)
강원도 춘천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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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춘천초등학교(졸업)
춘천중학교 (졸업)
신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 / 학사)
신체
신장 186cm|체중 75kg
직업
농구 선수 (가드/ 은퇴)
농구 감독
가족
아내, 아들 김성윤, 김윤
본관
김녕 김씨
실업 입단
1984년 삼성전자 농구단
소속
선수
삼성전자 농구단 (1984~1995)
감독
대구 동양-오리온스 (2001~2007)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02)
서울 SK 나이츠 (2007~2009)
창원 LG 세이커스 (2011~2017)
코치
상무 농구단 (1995~1996)[1]
동양제과-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6~2000)
프런트
서울 SK 나이츠 (2010 / 기술 고문)
행정
KBL 재정 위원 (2017~2021)
KBA (2017~2020 / 이사)
국가
대표

ABC
출전: 1990 아르헨티나

1. 개요
2. 선수 시절
4. 코칭 스타일
4.1. 장점
4.2. 단점
4.3. 작전
4.3.1. 더블팁과 로테이션 수비
4.3.2. 2002 아시안 게임 중국전 격파
4.3.3. 속공 및 얼리오펜스 중심의 전술과 전략
4.3.4. 모션 오펜스의 선구자
5. 비판
5.1. 코트의 신사? 1994 한기범 폭행사건
5.2. 상위 드래프트 픽을 위한 탱킹 의혹
5.3. 외국인선수 뒷돈 의혹 및 주전고집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꿈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습니다."[2]

"선수들이 준비를 잘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잘 따라와 주면서 서로 신뢰가 쌓이면서... 그 부분이 마지막까지 힘을 낸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3]


대한민국의 농구인.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의 감독이자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으며 중간에 2007년과 2009년까지 서울 SK 나이츠의 감독이었고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이었으며 농구계의 국민감독으로 불리기도 한다.

별명은 코트의 신사이자 코트의 스님이며 KBL의 제리 슬로언이라 불리기도 한다.

감독 퇴임 이후 대한민국농구협회 이사와 KBL 재정위원으로 활약을 하기도 했다.


2. 선수 시절[편집]


신일고등학교[4] 시절 주목받는 가드로 고려대학교(80학번)에 진학해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실업무대에 데뷔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삼성전자 농구단에서 10년 넘게 활약했다. 1984년에 입단하여 1년 선배인 김현준과 더불어 삼성전자의 가드진을 이끌었다.

쟁쟁한 선배들인 진효준, 신동찬, 안준호, 박인규, 임정명과 함께 1984/85 및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각각 두 번 트로피를 들었다. 특히 1987 코리안리그 우승 시절 김현준과의 우승기념 사진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현대전자의 모교 대선배 이충희의 전성기 시절에 함께했던 후배 중 하나다. 모교 재학 시절 및 대표팀 시절 백업 가드를 맡았다.

선수 시절엔 득점력이 좋은 슈팅 가드로서 팀의 에이스 김현준, 입단 동기 오세웅[5]과 함께 삼성전자 특유의 활화산 같은 외곽포를 지원사격하는 역할이었다. 1986-8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장신 포인트 가드 신동찬, 슈터 박인규, 포워드 진효준, 센터 임정명 등 기존 주전들이 한꺼번에 은퇴하면서 3년차때부터 주전으로 올라선 김진은 신동찬이 맡던 리딩 가드 역할까지 맡아야 했고,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에이스 김현준을 지원하면서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의 두번째 우승[6]을 이끈다. 특히 1987-1988 농구대잔치 결승에서의 더샷은 올드 농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승을 딱 한 번 했으니까 콩라인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 우승 문턱에서 밀려 많이 좌절했다.

충격과 공포의 중앙대학교 출신이 있는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창단과 함께 전성기에서 내려오게 된다.

당초 기아자동차는 방열 감독을 시작으로 유재학정덕화의 연세대 색이 있었지만 중앙대 출신으로 기존의 강정수를 시작으로 한기범김유택에 이어 허재의 입단으로 예전 현대전자와 삼성전자를 뛰어넘는 역대급 팀으로 바뀌게 된다. 김진-김현준-오세웅 트리오의 삼성전자는 분전했지만 88~90년 농구대잔치까지 3회 연속 3위(3성전자;;), 91~92년 2연속 준우승에 머물며 기아 독주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33세의 노장이 되어 참가한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는 비록 예선에선 연세대와 고려대라는 사학 최고 두 라이벌 대학세에 밀려 5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르긴 했지만, 예선 4위로 모교인 고려대[7]와 만난 8강전에서 김대의, 김진, 김현준 등 30대 노장들이 투혼을 보여주며 2승 1패로 역전, 4강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는데, 8강전 마지막 경기 동점 상황에서 결승 3점슛을 꽂은 선수가 바로 김진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다른 부분보다 선배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뛰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삼성은 4강전에서 서장훈의 연세대에 패하여 탈락한다.

1994-9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삼성전자는 기존의 서동철강양택이 있지만 전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인 New 에이스 문경은과 중앙대 4강 신화의 주역 터보가드 김승기를 보강했고, 거기다 상무에서 제대한 센터 이창수까지 가세하면서 전대회 우승팀 연세대, 절치부심한 기아자동차와 함께 우승 후보로 꼽혔고, 김진과 김현준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거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구대잔치를 한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대회 결승전 삼성전자:기아자동차 경기에서 한기범에게 폭력을 휘두른 김진[8]은 3개월 출장정지를 받게되고 이후 징계가 경감되어 1994-95 농구대잔치 중반부터 뒤늦게 참여하게 된다. 삼성전자가 악전고투끝에 8강전에서 연세대를, 4강에서 SBS를 꺾고 결승에 오르면서 김진 또한 커리어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하게 되나 싶었지만, 결승전에서 기아 허재마이클 조던급 활약을 막지못하면서 1승 3패로 또다시 패배했고, 이후 김진은 김현준과 함께 은퇴식을 가지며 정들었던 코트를 떠났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김진 LG 감독 헤드.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진(농구인)/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코칭 스타일[편집]


2-3 존 디펜스와 사이드 라인 트리 오펜스 그리고 패스트 브레이크 오펜스를 보면 마치 NBA의 마이크 댄토니처럼 평균득점 100득점을 찍고도 남는 엄청난 공격력을 선보이면서 KBL에서도 공격농구의 향수를 통해 흥행을 유도했다. [9]


4.1. 장점[편집]


감독으로서 최고의 장점은 2-3 존 디펜스(한글로 2-3 지역방어)를 KBL에 가장 잘 녹였고 오펜스에서도 패스트 브레이크와 세컨 브레이크를 잘 살리는 전술 겸 전략가의 모습을 보였다.

오펜스 패턴 중 사이드 라인 트리와 혼(혼즈 오펜스) 그리고 기브 앤 고 및 컷인 전술은 명장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김진 감독의 작전타임은 강을준처럼 어록가지고 장난치지 않은 건 엄청난 일이다. 가드 출신 중에도 김태환과 대스승인 김동광도 이랬으며 대신 김진 감독은 간단한 영어를 바탕으로 선수단에게 이해를 쉽게 했다.

설명을 들어보면 "셋(숫자 3이 아닌 세트 오펜스의 줄임말)"을 하거나 다른 가드 출신 감독이 주로 사용하는 "헤드" 같은 용어로 포인트 가드와 슈팅 가드에게 오펜스를 출발하게 한다. 실제로 3점 위주의 고집이 나오면 자신도 슈터인지 선수단에 "컷(커트인의 줄임말)을 해라" 또는 "슈터를 봐줘"와 "너(슈터인 김병철과 오용준 그리고 김영환) 여기 있어"는 말을 항상 한다.

심지어 선수들이 급한 나머지 3점만 쏘거나 패스로 에러를 하면 타임아웃을 절묘하게 부르면서 해당 선수에게 짖궂은 쓴소리를 하되 패턴으로 방향을 제세한다.

"지금 게임이 포인트야. 공격적으로 해야돼. 태술이, 성윤이, 민수, 자시(클라인허드) 그리고 경은이가 여기있어. 니(경은)가 해."

쓴소리를 하되 상대의 매치업과 팀의 문제점을 같이 본 전술과 전략을 통해 패배할 수 있는 경기를 뒤집으면서도 선전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동양 오리온스와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을 보면 더블팁과 로테이션 디펜스 이후 패스트 브레이크는 상대가 알고도 못 막을 정도로 전술과 전략에서도 뛰어났으며 LG 세이커스에서도 런앤건이 나오면서 당시 2년간의 전성기였던 창원은 마치 6년간 대구의 모습 그대로 절정이었다.

추가로 가드 라인을 유형을 보면서 키울 듯 하나 창조적인 모습을 배려를 한다.

김태환 감독도 런앤건이지만 다른 경우였으며 슈터인 조성원조우현만 쓰고 강동희가 오기전까지 포인트 가드를 잘 쓰는 편이 아닌데 김진 감독은 자신도 김병철과 같은 슈팅 가드 출신이지만 포인트 가드에 대한 소중함을 가지고 재임기간 중 하나의 장점이 있으면 그 부분을 살리며 선수가 신이 날 수 있도록 달리면서 넣은 농구를 좋아했고 큰 에러가 없으면 포인트 가드슈팅 가드든 외국인 또한 스코어러든 공격이 필요할 때는 배려를 많이 해주시는 스타일이다.

김승현김시래는 김진 감독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KBL 올스타 레벨의 리딩 가드로 성장을 했다. 스스로 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감독의 배려 없이 창조적인 경기가 나오지 못한다. 사실 김승현의 패스와 김시래의 스피드를 따라갈려면 남은 선수들도 집중을 해야하는데 에러를 해도 김진 감독님의 배려와 함께 코트에서도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두 선수 모두 어시스트 왕 출신으로 KBL에서 몇 안되는 올스타 리딩 가드로 판타지 플레이어다.

김병철김영환을 보면 김진 감독을 닮은 점이 있다. 3점슛이 포함된 공격력이 강하고 해결사 본능도 있다. 영웅심리[10]가 강한지 4쿼터 막판에 맡기면 꼭 해내는 슈터들이다. 체력이 뛰어나면서도 집중력도 강했다. 이들은 김진 감독보다 더 뛰면서 빛나게 했고 실제로 영웅이 되었다. 두 선수 모두 주장으로서 선수단의 단합과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김진 감독님의 리더쉽이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아이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함과 함께 인터뷰를 하는 편이며 실제로 눈앞의 이득보다 제자들에게 승리가 중요하지만 성장을 자신도 부족해도 유도를 한다.

외국인 또한 포스트(골밑)가 중요한지 아이솔레이션(고립공간)이 중요한지를 보고 토종 선수들이 어려울 때 외국인들의 기술과 해결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외국인 스카우트에는 역대급 장점을 보여주었다. 동양 창단 코치 시절을 보면 박광호 감독이 작전지시를 했는데 보통 코치들은 감독 밑에서 정중동이다. 당시 기아의 최인선 감독과 실업 삼성 시절 대선배인 박인규 코치는 마치 총감독과 감독처럼 서로의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추가로 나래의 최명룡 감독도 코치들과 의견조율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김동광 감독은 자신이 1인 3역을 한다. 당시 강정수 코치는 간단히만 설명하고 전술과 전략 앞에 얼음이었다. 하지만, 김진 감독의 경우 코치 시절부터 외국인들과 영어로 토킹을 하거나 혹은 흥분할 때 자제할 수 있도록 달래기도 했다. 외국인을 영어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데 사실상 1인 3역(외국인 스카우터-외국인 코치-외국인 통역) 이상을 한 격이다. 그 덕분에 외국인들과의 격이 없는 소통이 가능했다. 현재 KBL 지도자 중 영어를 잘하는 지도자를 보지 못했는데 고려대 출신만 기준으로 보면 모교 대선배이신 김동광 감독의 경우 직설적으로 영어로 토킹 및 보드 랭그리지까지 했다. 자세한 건 김동광의 코칭스타일이 포함된 해당 문서 참고.

그 동안 해왔던 외국인으로 코치 시절 토니 매디슨과 키이스 그레이를 시작으로 키넌 조던, 무스타파 호프, 루이스 로프튼, 토드 버나드, 토시로 저머니[11]와 함께했다. 32연패 시절 그렉 콜버트와 존 다지도 포함되었다. 과거 영상을 보면 외국인들을 영어로 소통했다.

감독 시절에는 마르커스 힉스를 시작으로 라이언 페리맨, 바비 레이저, 아티머스 맥클래리, 네이트 존슨, 아이라 클라크, 리 벤슨, 피트 마이클, 자시 클라인허드, 테런스 섀넌, 사마키 워커, 올루미데 오예데지, 애런 헤인즈, 데이본 제퍼슨, 크리스 매시[12], 트로이 길렌워터, 샤크 맥키식, 마리오 리틀, 제임스 메이스까지 KBL에서 한가닥 했던 외국인들이 모두 김진 감독의 영향과 함께 KBL의 역사를 빛내기도 했다.

팔색조 전술과 전략 및 선수의 성격과 유형을 통해 신뢰의 모습으로 기적같은 명승부를 만들면서 주인공을 선수로 만든다. 가장 중요한 건 선수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보다 자존심을 지켜기 위해 선수단에 쓴소리를 하지만 자신도 그만큼 책임을 진다. 어떻게 보면 유연성을 가진 것이다.

4.2. 단점[편집]


단점으로는 요리사로 말하면 재료를 잘 모으지만 정작 요리솜씨가 부족한지 쓰는 것만 그냥 쓴다. [13]

포인트 가드와 슈팅 가드에서 권한을 주지만 이들의 능력이 평균치 미만이면 경기력이 딴판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KBL 드래프트에서 어중간한 포워드와 센터 대신 가드들은 어중간해도 웬만하면 뽑고 간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과 기술 및 세밀함을 잘 못 올리는 약점도 있었다.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포인트 가드슈팅 가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외국인에 대한 과한 의존도로 인해 가끔씩은 패장 때 인터뷰를 보면 "졸전"을 계속 말했다. 원래 남탓을 안하는 성향인데 당시 경기력의 선수단에 짖궂은 소리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초점을 잠시 잃었는지 해석하기 쉽지는 않으며 마지막으로 골밑 농구을 생각보다 잘 못한다.

명장이라면 골밑을 강조하는데 선배인 최인선 감독과 김동광 감독은 높이가 낮아도 센터형 외국인으로 골밑을 제압하면 경기력이 더 좋았다. 스크린 전술과 전략이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라이언 페리맨과 크리스 매시를 잘 활용한 편은 아니었다. 최인선 감독과 김동광 감독의 경우 외국인들이 키가 크든 작든 수비든 공격이든 골밑을 제압하면 스크린과 파워를 통해 승리하는 법칙을 밀고 갔다. 그러나, 김진 감독은 높이를 높여도 골밑형 외국인보다 기술형 외국인을 선호하면서 골밑을 일정부분 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건 토털 농구의 신선우 감독도 그랬다.

이런 문제로 인해 KBL 감독 재임시기에는 특정선수에 의해 경기력이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기복을 드러냈다. 리빌딩을 하지만 전술과 전략을 내세우기보다 선수를 과도하게 믿는 고집으로 인해 선수역량에만 의지한다. 김승현과 김시래의 덕과 마르커스 힉스와 데이본 제퍼슨을 보면 의지면이 너무 큰 비판이 있기도 했다. 비슷한 면을 보면 서동철 감독도 포함된다.

이 부분으로 인해 전창진유재학보다 명색이 KBL 통합우승과 아시안게임 금메달 감독이었는데도 평가는 높지 못했다. 통산승률이 5할 1푼 7리였다. 통산 성적은 415승 388패였지만 동양 시절 197승 149패 이외는 패가 더 많았다. LG에서도 11-12 시즌을 제외해도 12-13 시즌 재건으로 인해 쉴드지만 15-16 시즌과 16-17 시즌의 쇠락기로 인해 157승 167패에 그쳤다. 명장들은 통산승률이 5할 4푼이 넘어가는데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 전창진유재학에 밀린 비판이 있는 신선우의 경우 자신의 슬럼프였던 SK 나이츠 시절을 제외하면 통산승과 승률이 더 높았다. 실제로 추일승이상범의 경우 리빌딩에 희생이 컸는지 통산승률이 5할도 되지 못한점을 보면 위안거리 중 하나다. 추가로 신선우가 만든 유도훈은 선수-코치로 우승했으나 감독으로 우승을 못하며 명장 자체가 아닌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14]


4.3. 작전[편집]


농구는 전술의 게임이다. 김진은 감독으로서의 등락이 컸지만, 리즈시절 그의 전술을 짚어볼 만하다. KBL에서 한 시즌을 통합우승을 포함해서 2년 연속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 20년만에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을 이긴것과 전성기가 끝난 비판에도 불구하고 KBL 무관의 팀에서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한 것은 선수덕으로 치유하기에는 부족하며 놀라운 전술이 숨어있었다.


4.3.1. 더블팁과 로테이션 수비[편집]


당시 KBL에서는 (이충희 감독이 처음 선보였던) 더블팁 수비와 전면 강압 수비가 서서히 도입되는 중이었다. 농구는 조던이 하늘을 날아도, 슛성공률은 샤킬 오닐이 월등히 높다. 즉 누가 뭐래도 골밑 슛이 성공률이 높고, 그에 대비되어 골밑 공격을 더블팁으로 막는 수비가 도입되는 중이었다.

더블팁의 공략은 골밑 선수를 2명이 막게 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가드가 3점을 쏘는 식으로 수비를 무너뜨리는데, 김진 감독은 외곽 가이드 수비를 옆 선수가 함께 막음으로써, 공이 돌아가는 것에 맞추어 수비수도 마크맨을 돌아가면서 막음으로써 로테이션 수비가 탄생하게 된다. 물론 동양에서 김진 감독에 의해 처음 도입된 것.


4.3.2. 2002 아시안 게임 중국전 격파[편집]


20년만에 넘은 만리장성이다. 사실 중국은 NBA 스타인 야오밍까지 포함되어 있었지만 서장훈의 천적인 왕즈즈가 불참하였었다. 또한 홈콜의 이점을 크게 누린 대회였기도 하다. 어쨌건 중국을 비슷하게 경기를 이끌어가다가 마지막 이긴 것은 감독의 작전을 빼고는 논하기 어렵다.

  • 야오밍: 더블팁과 로테이션 수비.
야오밍은 큰 키임에도 더블팁 수비로, 로테이션 수비( 2명의 선수 중간에서 패스를 봐가며 선수를 막는다)에 상당히 당황하며 공격이 무뎌지고, 인터셉트도 상당히 당한다.
  • 전면 강압 수비: 중국은 제대로된 강압 수비를 처음 겪어본듯하며 후반 막판 실책을 남발하여 또 다른 패인
  • 스크린: 당시 한국의 외곽 슈터들이 마음 놓고 3점을, 골밑 돌파를 가능하게 한 것은 동료들끼리의 스크린의 덕이다
  • 커팅 플레이: 야오밍을 밖으로 끌어내고, 순식간에 골밑으로 패스를 받아서 득점을 한다 (대부분의 선수들끼리, 고른 커팅 득점은 감독에 의해서 충분히 많은 연습을 해서 준비해 온 것)

또한 김승현을 꽁꽁 숨기고 있다가 최대한 늦게 투입하였고 그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중국은 김승현의 압박 수비와 패스에 많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기의 모든 작전이 중국전에 다 나왔다. 그로 인해 장신의 중국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 다만 김진은 그 많은 작전들이 선수들 모두에게 전달되어, 다음 시즌부터는 몸에 익힌 선수들이 여러 팀에서 고루고루 상기 작전을 쓰며 동양의 우승에는 악재로 작용했다.


4.3.3. 속공 및 얼리오펜스 중심의 전술과 전략[편집]


동양의 통합 우승을 달성하기 이천 창단 코치로 사실 초창기 때 초대 박광호 시절부터 전희철과 김병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포인트 가드가 약한 평에서 드래프트에서 김승현을 지명한 뒤 FA에서 디펜스 위즈의 식스맨들(대표적으로 LG에서 박훈근과 현대에서 이지승)을 영입할 때도 우려를 표시했고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시절에도 2년전 전임 강을준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포지션 중복으로 인해 조직력이 실종되었지만 시행착오 끝에 김영환과 양우섭을 중심으로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유도하면서도 김영환을 중심으로 문태종과 김시래 및 김종규로 고비를 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숨은 전술과 전략이었다.

바로 패스트 브레이크(번역으로 속공)와 얼리 오펜스였다.

실제로 리즈 팀이었던 동양과 LG에서 2-3 존 디펜스를 통한 박스아웃 이후 킥아웃 패스(소위 속공 또는 2차 속공을 위한 빠른 패스)는 김진 농구의 완벽한 팀컬러였다. 시행착오 끝에 베스트 5와 식스맨들의 단합과 희생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스타 플레이어들이 무리한 디펜스 소위 맨투맨 대신 존 디펜스와 로테이션 디펜스 이후 패스트 브레이크에 힘이 되었다.

속공 특징 중 과거 최인선 감독과 허동택만의 기아나 김동광 감독과 강혁,주희정,문경은,이규섭의 삼성에 이어 그리고 전창진 감독과 허재,김승기,양경민,신기성,김주성의 TG 삼보처럼 골밑을 노린게 아니라 완전 찬스(소위 와일드 오픈) 때 3점을 간간히 노리기도 했다.

패스트 브레이크가 여이치 않으면 패스 로테이션 혹은 얼리 오펜스로 찬스를 빠르게 만들기도 하면서 재미를 보았다.

아무튼 리즈 시절 김진의 전술과 전략에 이은 작전을 정말 탁월하다고 부를 만하고 동양 오리온스와 LG 세이커스에서 시련 끝에 해낼 정도로 농구인들의 신뢰를 받기도 한다.


4.3.4. 모션 오펜스의 선구자[편집]


모션 오펜스는 말 그대로 베스트 5의 선수들이 서로 희생하면서 단합해야 하는 어려운 전술이다. 사실 전술이라기 보다 선수들의 신뢰가 필요한 작전 중 하나다.

이외 김상식도 모션 오펜스를 어록처럼 달고 살지만 빛을 보지 못했는데 그 정도로 어려운 농구 전술 중 하나다.

김진 감독의 포지션을 보면 후배인 전창진을 비롯해서 김상식서동철을 보면 모션 오펜스를 자주 쓴다.

리즈 시절이었던 동양 오리온스 시절에도 김승현 선수와 마르커스 힉스가 아이솔레이션을 하지만 실제로 패스 로테이션 포함 스크린을 했던 벤치자원들의 희생이 있었다. 전희철과 박재일은 스크린과 몸싸움을 통해 김병철과 김승현 그리고 외국인들을 빛냈다.

한 때 공백기 때 NBA 최고 명가인 LA 레이커스의 연수 때도 당시 필 잭슨 감독과 코비 브라이언트파우 가솔이라는 슈퍼스타들을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 낸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그 부분을 LG 세이커스에서 만들어냈다.

물론 초창기에는 김현중,문태영,서장훈으로 실패를 했으나 김영환,김시래,김종규,문태종으로 재미를 본 점도 스타 플레이어들의 능력을 끄집어 내는게 감독의 역할 중 하나인데 해낸 것을 참고해야 한다.


5. 비판[편집]



5.1. 코트의 신사? 1994 한기범 폭행사건[편집]


1994-9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삼성전자는 전 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인 New 에이스 문경은중앙대 4강 신화의 주역 터보가드 김승기를 보강했고, 거기다 상무에서 제대한 센터 이창수까지 가세하면서 언론에서는 연세대, 기아자동차와 함께 삼성전자를 강력한 농구대잔치 우승 후보로 꼽았다.

농구대잔치를 한 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대회[15]에서부터 확 달라진 삼성전자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김승기-김현준-문경은-이창수-박상관의 강력한 주전 라인업에 김진, 김대의, 허영, 서대성, 서동철, 강을준 등 탄탄한 벤치까지 갖춘 삼성은 예선리그 6연승을 달렸고 언론들은 이번 코리안리그에서 '젋어진 삼성'이 '노장들 중심인 기아'를 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기아--은 늙지도 않는지 여전히 삼성전자를 압도했고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삼성을 압도하며 두 팀이 나란히 6승 1패가 되어[16] 결승에서 재격돌하게 되었다.

결승전 초반엔 삼성이 10점차 이상으로 앞서나갔지만 후반부터 역시나 이 경기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조바심이 난 삼성전자 선수들은 거친 수비를 하며 기아 선수들을 자극, 여기에 기아 선수들도 맞대응하며 게임은 1994 NBA 파이널 뉴욕 닉스-휴스턴 로키츠 경기 저리 가라할 만큼 거칠어졌다. 경기 막판 삼성전자 센터 이창수가 기아 한기범의 팔꿈치에 맞아 눈밑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는데, 이창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눈밑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한기범에 달려들었고 양팀 선수들은 난투극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후 경기가 기아의 승리로 끝나고 한기범이 자신에게 (고의든 아니든) 맞은 이창수에게 사과하려고 삼성 선수단 쪽으로 갔는데, 악수를 청하려 손을 내민 한기범에게 김진이 죽빵을 날려버렸다!!! 평소 '코트의 신사'라고 띄워주던 김진의 행동에 당시 SBS 중계진도 벙쪘고, 맞은 한기범이 더 대응하지 않은 채 휴지로 쌍코피를 틀어막으며 벤치에 앉아있던 게 전국에 그대로 생중계되었다.[17]


5.2. 상위 드래프트 픽을 위한 탱킹 의혹[편집]


앞서 2012-2013 시즌 김종규를 픽하기 위해 탱킹을 했다는 게 농구 팬들 사이에선 정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그 이전 자신의 동생과 같은 전창진은 이미 더 영리하게 줄을 섰고 전창진 사단에 있는 허재강동희도 같이 줄을 섰는데 모든 비난을 뒤집어 쓴 아픈 스토리도 있다. 그래서 2014년 드래프트부터는 3~10위까지 동일한 확률로 드래프트 제도가 변경이 되어 드래프트 운이 없기로 유명한 전자랜드kt의 팬들은 김진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안 좋다.

실제로 2012-2013 시즌 경희대 10학번 트리오인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의 경우 KBL 10년을 좌우할 스타 플레이어라는 점에서 보통 3년 계약기간의 감독들이 자신의 목을 내놓고 소신있게 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김진 감독은 물론이고 전창진 사단도 함께 탱킹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KBL의 문제점을 함께 드러냈다.

추가로 이상범 감독의 경우 KGC 재임 시절 당초 리빌딩을 생각하지 않았으나 당시 사무국장의 참고 견뎌달라는 요청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리빌딩에 성공했다. 당시 이상범 감독은 사표를 품고 있었다. 원조 탱킹이라는 비난은 사실 이상범에 더 해당된다. 김진 감독이 SK 감독 재임 시기에 주희정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김태술을 내준 것도 연관이 있다. 이상범 감독은 결국 김태술을 공익근무로 보내고 양희종은 상무에 입대시키면서 2년간 KBL 드래프트를 영리하게 노렸다. 2010 KBL 드래프트에서는 박찬희와 이정현을 모두 지명했고 2011 KBL 드래프트에서도 중앙대 52연승을 이끈 황금세대 콤비인 오세근과 김선형 중 극적인 1순위로 오세근을 지명하며 KGC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을 이끌었다. 어떻게 보면 2년 전도 탱킹이었는데 아픔을 홀로 안고 간 격이었다.

한편 2016년 드래프트에서 모비스가 극적으로 1픽이 걸리면서 이종현을 지명하자, KBL이 또 드래프트 제도를 바꾸면서 2017년 드래프트 로터리 픽으로 급부상할 허훈을 뽑기 위해 또 탱킹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한줄 알았는데 정작 그 픽은 kt가 가져갔다. 최형길 단장이 있는 KCC가 영구제명에서 구제한 전창진,이미 영구제명된 강동희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코트에서 모범적이라는 농구인들의 평을 얻은 김진을, 일부 극성 농구팬들이 농구판에서 영구제명을 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좀 이상한 모양새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과거 신선우 시절처럼 이어진 탱킹 논란의 희생이 컸다.


5.3. 외국인선수 뒷돈 의혹 및 주전고집[편집]


창조적인 가드들과 뛰어난 외국인과 함께 런앤건이자 신바람 농구를 했지만 그림자도 따른다.

대구 오리온스 시절의 마지막 외국인이었던 리 벤슨과 피트 마이클을 시작으로 테런스 섀년과 애런 헤인즈데이본 제퍼슨 시절에도 때도 그랬지만, 트라이아웃 제도로 회귀한 이후 드래프트에서는 그저 그런 선수를 뽑아 퇴출시키고, 그 다음에는 A급 선수를 뒷돈 주고 데려오는게 아니냐는 의혹이 최근 생기고 있다. 2015-16 시즌 , 길렌워터의 무리한 출전이 있었고 대처 외국인이었던 샤크 맥키식은 그저 교체 선수가 잘하는거 같으니 타 팀 팬의 입장에서도 수긍할만 했지만, 2016-17 드래프트에서도 제임스 메이스라는 특급 선수를 영입하는 등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자 아예 대놓고 트라이아웃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자유계약 시절 수준의 용병을 데려오는게 아닌가하는 의혹이 돌고 있는 것이다. 탱킹과 같은 드래프트 비화를 놓고 비판적 의견이 많은 만큼 외국인 문제와 관련해서 구설수가 많이 생겨난 감독은 SK 5대 감독 겸 LG 6대 감독SK 6대 감독 겸 LG 4대 감독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에이스 선수를 지나치게 혹사시킨다는 의견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역시 가드 출신이었는지 김승현, 김태술, 주희정, 김시래 였다. 특급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의지만 더해지는 모습이 간혹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자신도 믿는 선수를 끝까지 믿는 고집이 있는데 팬들도 이 고집은 명장이지만 지적을 했다. 실제로 A급 또는 S급 포인트 가드가 없으면 대구 동양 시절부터 보았듯이 경기력에서 고전했다. 자신의 포지션 외에도 이런 좋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동양 창단 코치-감독 시절 코치로 함께했지만 떠나게 된 전희철을 시작으로 SK 감독 시절 그 이전 감독그 이후 감독 시절에도 뜨거운 논란의 주인공이었던 방성윤김민수에 이어 LG 시절에도 그 후임 감독이 더 혹사시켜 쓴 김종규는 열외로 둔다. 물론 벤치 멤버들을 그래도 고르게 쓰는 편이지만 올인할 때의 강약조절은 아쉬움을 남겼다.


6. 여담[편집]


  • 그의 아들은 전직 농구선수였으며 2017년 현대모비스에 입단했지만 2019년 1군에서 뛰지도 못하고 은퇴한 김윤이다.
  • 동명이인의 배우 때문에 '좌회전 킴' 이라는 별명도 있다. 최초로 별명을 고안한 사람은 블로거 겸 기자 이준목.[18]
  • 김진 감독의 현역 시절 별명은 ‘코트 위의 신사’였다. 말끔한 외모에 플레이가 깔끔하고, 심판에게 항의하는 일도 거의 없어 붙여진 별명이다. 감독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 ‘스님 진’이다.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나왔다.
  • 가정에서는 빵점짜리 아버지라는 소리가 있었다. KBL 프로농구 코치-감독으로 오래하면서 모든 KBL 감독들이 가정을 돌보기 어려운데 2001-2002 대구 동양 오리온스 감독으로 KBL 통합우승 이후 자신도 인정을 하면서 가족에 미안해했다. 가장 안타까운 건 김윤 선수의 뒷바라지를 못해준 점. 이건 대학 대선배로 김동광 감독의 아들인 김지훈도 그랬다. 동양 김진 감독 농구장에선 1등 집에서는 빵점, #
  • 자신의 대학-실업 후배였던 전창진 감독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모교와 실업 선후배 사이다. 하지만, KBL 감독이 된 이후 치열한 경쟁관계를 보여주었다. 전창진 감독은 김진 선배를 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고 신경전도 치열했다.
  • 자신의 대학-실업 후배였던 강을준 감독과는 닮은꼴로 유명하다. 모교 시절이었던 고려대 재학 시절 강을준은 식당 이모로부터 "진이(김진의 애칭) 왔냐?"며 황당해 한 후문이 있다. 한 때 대구 동양 오리온스 수석코치직까지 나올 정도였는데 당시 명지대 감독 재임중으로 정중히 고사했다. 강을준은 자신이 LG 감독에서 3년 연속 6강으로 인해 재계약 요청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챔피언 실패에 대한 책임과 선배에 대한 예의와 기회를 주면서 코트의 선비로 평이 좋다. 그 시절 실직자가 될 선배에 기회를 주어야 하며 당시 허병진 단장에 추천한 후문이 있다. 추가로 강을준 감독이 KBL 감독직인 LG 감독에 데뷔할 때 김진 감독을 원했고 본인도 명지대를 떠나면서 LG 감독이 될 때 고백했다. 강을준은 김진을 훌륭한 선배라며 존경을 표시했다.
  • 자신의 대학-실업 후배였던 서동철 감독과는 현역 시절 방장과 방졸이었다. 실제로 서동철 감독은 감독으로 우승경험은 없지만 농구스타일이 양궁농구다. 실제 원조 양궁 농구는 김진 감독이다. 추가로 현역 시절 표지션도 슈팅 가드로 동일하다.
  • 자신을 명예회복 해준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재임 시절 13-14 시즌 창원 홈 개막전에서 300승을 달성한 이후 가슴을 울리게 한 인터뷰가 있었다. 김진 감독 300승 기념 영상
  • 2001-2002 동양 오리온스의 KBL 통합우승과 2002-2003 동양 오리온스의 KBL 정규리그 우승 이후 12년뒤인 2013-2014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이후 감격의 인터뷰.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 시절 제자였던 신기성 해설위원이 함께하셨다. 신기성은 비록 LG에서 선수와 지도자를 하지 못했지만 향후 방송해설 때도 이런 멘트를 했다. "이것이 창원 LG의 농구입니다." 우승으로 이끈 창원 LG 김진 감독 인터뷰
  • KBL 감독으로 떠난 2년 뒤 한 농구잡지 미디어의 장문 인터뷰가 나와있다. 코트의 신사 김진, 농구는 제 인생입니다
  • KBL 감독 퇴임 이후 인스트럭터로 농구유망주를 지도했고 저소득층의 어려운 농구동호회도 지도를 했다. 전술집으로 플레이북을 저서했다. 이 부분은 모교 대선배이신 김동광 감독의 농구이론저서인데 농구로 모든것을 공유하는 테이크 케어로 농구팬들에게는 추천하는 농구전술저서다. 추일승 감독의 경우 위닝디펜스 현지 영어를 번역했고 KBL 감독 재임시기에 농구로 심장을 뛰게하라라는 저서를 냈다.
  • 현역 시절부터 공부하는 농구인으로 유명한지 세계최고의 농구리그인 NBA의 팬이기도 하다. KBL의 제리 슬로언[19]이라는 별명과 함께 선수단의 신뢰를 얻는 잰 마스터다. 추가로 코비 브라이언트의 팬 중 하나로도 알려졌다. 자신의 선수-감독을 함께했던 강양택도 NBA의 팬으로 알려졌다.
  • 감독재임 및 퇴임 이후 추일승 감독이 만들었던 농구매체인 바스켓코리아에서 인터뷰 및 농구 패턴 소개를 맡고 있다. 공식은 아니지만 바스켓코리아 자문을 맡고 있다.

7. 관련 문서[편집]



[1] 감독 병행[2] 2001-2002 KBL 통합우승 이후 인터뷰[3] 2013-2014 KBL 정규리그 우승 이후 인터뷰[4] '신일고에도 농구부가 있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창단한 야구부에 투자가 집중되면서(창단 1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했으니. 2009년 자율형 사립고 전환 후에는 투자가 줄어들었지만...) 농구부는 관심에서 멀어졌고, 결국 해체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재창단해 주태수, 최윤호 등을 배출하기도 했으나 이내 다시 해체되었고, 그 반대급부로 대진고등학교가 농구부를 창단했다. 그러나 이 팀도 몇 년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5] 오세웅은 1992-93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다소 일찍 은퇴했다. 은퇴 후 일선 지도자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2010년대 농구 팬들에게는 인지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편.[6] 삼성전자의 농구대잔치 마지막 우승이었다. 결승에서 유재학, 김유택, 한기범이 이끌던 기아산업을 2승 1패로 꺾고 우승했다.[7] 정규리그 맞대결에서 삼성전자는 고려대에 패했었다. 당시 고려대는 김병철-양희승-이지승-전희철-박재헌 등이 주축이었다.[8] 아래 "비판" 항목 참조.[9] 00년대 초 향후 자신이 맡았던 정규리그 우승팀인 LG 세이커스는 00-01 시즌 김태환 감독을 중심으로 조성원과 조우현의 일명 조조쌍포와 백인 스코어러인 에릭 이버츠와 함께 KBL 역대 유일의 팀 평균 103.3점이라는 역대급 공격력을 보였다. 그 부분으로 인해 팀 공격력이 2위 아니면 3위였는데 김태환이 이끄는 LG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03-04 시즌에는 KBL 유일의 팀 평균득점 90점대 돌파를 하게 된다. 대구 동양(이 시즌부터 명칭은 대구 오리온스지만 팬들과 지도자들은 동양을 더 언급한다) 03-04 시즌 팀 평균 90.7점으로 당당히 팀 공격력 1위를 달성했다. 03-04 LG는 팀 평균 87.5점으로 팀 공격력 3위. 이후 LG 세이커스에서 14-15 시즌에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달성했는데 KBL의 제도문제 및 수비농구가 득세하는 가운데서도 런앤건을 이어갔다. 팀 유일의 평균 80점대 돌파와 함께 14-15 시즌 LG는 팀 평균 80.1점으로 팀 공격력 1위를 달성했다. [10] 이건 강을준이면 영웅이 나올 수 없음.[11] 02-03 동양 감독 시절 대처 외국인 포함[12]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인 리오넬 메시는 아니다.[13] 대표적으로 야구로 보면 쓸놈쓸인데 이건 형제사 야구에서 같이 감독이었던 양상문과 같다. SK 감독 시절에 선수를 살리려고 하나 조급증이었는지 몰라도 다양함이 떨어지는 지적 및 선수를 잘 못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김경문은 제외하자. 더 심한 고집이었다.[14] SK 감독 자진사퇴 이후 한 때 농구포털 사이트의 투표를 보면 전창진과 유재학의 두 감독만 최고투표 후보였다. 신선우의 경우 원채 골밑만 고집하기 보다 토털 바스켓볼의 신봉자로 포지션 개념을 파괴했으니 스타일 상 김진과 비슷해서 최고명장 투표는 열외였다.[15] 실업 8팀(기아자동차, 삼성전자, 현대전자, SBS, 상무, 기업은행, 산업은행, 한국은행)의 풀리그 이후 상위 2팀간이 결승전을 펼치는 방식이었다.[16] 기아는 첫 게임에서 한국은행(!!)에게 패했다. 허재가 술 먹고 뛰다 금융팀에 졌네 하는 이야기들의 예시로 꼽히는 대회긴 한데, 실제로 술 마신 것 같진 않았고 다들 엄청 방심한 데다 한은 김상준, 김재득의 3점이 워낙 잘 터졌다.[17] 그리고 결승전에서 파울트러블로 오래 뛰지 못한 한기범은 코리안리그 2차대회 MVP가 된다.[18] 참고로 배우 김진은 가명이고 본명은 김경진이며 배우 이전에 좌회전이라는 3인조 댄스 그룹에 속했다. 예행연습이라는 노래가 좌회전의 대표곡이다.[19] 이 별명을 지은 게 이준목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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