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 사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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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2. 상세
3. 시신 발견
4. 사후
5. 가해자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3.15 의거에 참가했던 마산용마고등학교(구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관통해 즉사한 사건이다.

2. 상세[편집]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발생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이를 목격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김주열과 김광열[1]에게 시내에 나가 보라고 했다. 김주열 형제는 시위에 합류해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와 함께 전진했지만 경찰이 최루탄을 쏘았고 김광열은 집에 돌아왔지만 김주열은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김주열의 어머니인 권찬주 여사는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마산으로 달려왔지만 아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김주열이 살해당해 경찰이 도청 앞 저수지에 시신을 투기했다는 소문을 듣고 시민들과 저수지 에서 물을 퍼냈지만 끝내 김주열을 찾지 못했고 결국 권찬주 여사는 아들의 행방을 찾지못하고 4월 11일 고향으로 돌아갔다.


3. 시신 발견[편집]


그런데 같은 날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처참하게도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바로 김주열이 실종되었던 그날 시위 중 경찰이 최루탄을 시위대를 향해 쐈는데 경찰이 쏜 최루탄이 맨 앞에서 시위를 하던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것이었다. 경찰은 시신을 몰래 시신의 돌을 메달아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27일 만에 밧줄이 풀리면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이걸 본 마산시민 들은 분노하여 4.19 혁명으로 이여졌다. 주열이의 시신은 부패 조차 되지 않았고 이 사건의 범인인 박종표는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4. 사후[편집]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바다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5. 가해자[편집]


가해자 박종표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들을 모지게 고문했던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다. 해방 이후 철도청 부산공작소에서 일하다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검찰은 박종표에게 공민권 3년 정지라는 가벼운 형을 구형했다. 근데 그마저도 재판부는 아예 무죄를 선고하며 박종표를 풀어줬다. 당시 박종표는 재판정에선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마산에서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를 했지만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박종표는 김주열이 죽었다는 소식을 확인하자 시신을 지프차에 싣고 마산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에서 큰 돌을 여러개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박종표는 4.19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시신 유기와 최루탄 발사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며 박정희 정권의 사면으로 최종적으로 7년으로 감형됐다. 3.15 의거사 편찬 위원장이자 지역 신문 언론인 홍중조의 증언에 따르면, 박종표는 출소 후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 1994년까지 부산의 서면에서 식당을 운영했으며, 그와 동료 지간인 마산 경찰들도 자주 왕래를 했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전무하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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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주열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