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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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개요
2. 상세
3. 전국대리기사협회?
4. 생애
5. 대리운전 현장 보고서
6. 공정사회와 약자동행


1. 개요[편집]


김종용은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 회장이다. 그리고 바로민생연구회(가칭)을 준비 중이다.

2. 상세[편집]


김종용은 2011년 어찌어찌하다가 대리기사가 되었다.
당시 진행 중이던 사업이 흔들리며 하루하루 피말리는 아픔 속에서 무엇이건 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게 대리기사, 꼬옥 한달만 하겠다고 아내에게 굳게 약속했건만....

하지만 그에게 대리운전시장은 신세계였다. 뭐 좋은 의미의 신세계가 아니라, 노동운동도 하고 깜빵생활도 겪은 그로서도 50인생의 절반을 잘못, 또는 모르고 살았다고 할 만큼 대리운전시장의 형편은 터무니없었다.
20퍼센트가 넘는 고율의 수수료에 콜취소벌금, 프로그램비, 이중삼중의 대리보험료, 업자들의 일방적 배차제한 등의 횡포를 겪으며
어찌어찌해서 소위 대리기사 권익운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자식이 당장 밥 굶고 쫓겨날 처지에 놓여있건만 이 철없는 김종용은 어느덧 대리 권익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만큼 되버렸다.
물론 본인이 던져버리고 나가면 그만이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3. 전국대리기사협회?[편집]


김종용은 자신들 싸이트에 다음과 같이 전국대리기사협회를 소개하고 있다.

3.1. 협회 탄생[편집]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는 대리기사권익운동과 함께 탄생 성장해왔습니다.
2010년대 초반, 고율의 수수료와 각종 기사장사, 일방적 배차제한 등, 대리운전시장의 부당한 풍토에 맞서 헌신적 활동을 펼쳐가던 대리기사들은 그 성과를 모아 2012년 전국대리기사협회를 결성하였고, 그 활동을 인정받아 업계 최초로 당국으로부터 사단법인과 비영리민간단체 인가를 동시에 받아냈습니다.

3.2. 협회 활동과 성과[편집]


협회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회의 활동 및 각종 정무사업, 대리운전업법 제정과 대리운전뉴스 발간 등, 각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아가며 대리운전시장의 현실을 공론화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과 해법을 추구해왔습니다. 또한 법정투쟁을 통해 업자들의 부당한 방해를 막아내고 렌터카대리보험문제도 해결했습니다.

수년간의 활동을 통해 드디어 이동노동자쉼터사업을 성사시키고 대리기사마스크 배포확대, 고용안정지원정책 추진 등, 대리기사의 복지와 사회안전망 강화라는 유례없는 성과도 이뤄냈습니다.
또한 유튜브등 각종 온라인사업을 통해 홍보와 조직확대사업도 꾸준히 전개하고 있고, 협회 온라인뉴스레터인 전국대리운전뉴스는 2023년 현재, 250호까지 발간되면서 대리업계를 대표하는 플랫폼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비맥주와 다트협회 등 사업체들과 매년 음주운전방지캠페인을 벌여나가며 대리운전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협회활동은 물론, 대리기사의 권익과 업무환경은 열악하기만 합니다.
법적사각지대와 불합리한 풍토에 놓여있는 현실은 소비자와 대리업체, 그리고 대리기사 간 끝임없는 시장의 분규를 낳고 있고 업계 종사자 모두의 사회 경제적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묵묵히 꾸준히 실천해가며 공정시장과 처우개선, 그리고 사회안전망강화와 양질의 대국민 서비스를 위한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저희는 고대합니다. 보내주시는 배려와 응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4. 생애[편집]


김종용은 1958년 인천 부평에서 4남2녀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경찰악단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4.19 후 퇴직하고 서울 금호동 산동네로 이사와 살면서 그의 고달픈 가정생활은 시작되었다.

고3, 형이 사고사 당하고, 금호동 시장바닥에서 노점상을 하며 살림을 꾸려온 어머니가 고3 추석날 새벽에 돌아가시는 등 집안 형편은 다 무너졌지만 다행히도 그는 어찌어찌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사실 당시 수의학이나 수의사란 그리 인기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가난에 찌들던 집안의 그로선 더없는 행운이었다.
어쨋건 그의 형들이 공부는 다 잘해서 서울대를 다니는 것을 보면서, 어려운 집안환경이지만 금호동 산동네에서도 공부를 잘하면 대학을 다닐 수 있구나 하는 꿈을 가질 수 있었다. (글타고 뭐 사실 공부를 열심히 했거나 썩 잘하진 못했다 ^^)

당시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을 접하며 부평에서 야학을 시작, 노동운동의 길목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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