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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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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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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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36대, 41대, 43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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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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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 코끼리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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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정병탁
(1970)

김정남
(1970~1971)


박이천
(1972)


김정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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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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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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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1970 · 1971


김정남의 기타 정보






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news/201002/08/newsis/20100208174508218.jpg
이름
김정남
金正男 | Kim Jung-Nam
출생
1943년 1월 28일 (81세)
평안북도 자성군
(現 자강도 자성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신장 170cm
직업
축구 선수 (수비수[2]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선수
양지 축구단 (1967~1970)
한국외환은행 축구단 (1971~1974)
감독
대한민국 대표팀 (1975~1980 / 감독 대행)
대한민국 대표팀 (1980~1982)
유공 코끼리 (1982~1985 / 감독 대행)
대한민국 대표팀 (1985~1986)
유공 코끼리 (1985~1992)
대한민국 대표팀 (1988)
산둥 루넝 (1998)
칭다오 중넝 (1999)
울산 현대 (2000~2008)
국가대표
66경기[3] (대한민국 / 1964~1973)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2.2. 성인 시절
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4. 감독 이후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1960년대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 김호와 함께 한국 국가대표 센터백 듀오. 감독으로서는 한국을 32년만에 다시 월드컵 본선[4]으로 이끌며, 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기록한 명장[5]

고려대학교 법학과(61학번) 학사, 前 축구 선수, 前 축구 감독. 前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現 한국OB축구회 회장.


2. 선수 경력[편집]



2.1. 유소년 시절[편집]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으며, 당시 좁은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연습하곤 했다. 이 덕택에 키핑과 기술이 좋아서 두각을 드러내 중학교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학원축구는 1부, 2부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김정남은 동아리 느낌인 2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던 김정남은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경쟁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하게 되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양공고가 운동장도 좁은 편이라 3:3, 4:4 등 소규모 인원의 보충훈련을 즐겨하며 계속 수비력과 기술이 발달했는데, 어느 날 주전선수가 아파서 대신 경기에 출장하게 된 이후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된다. 에 먼저 19세 대표팀에 선발됐고, 이어 그 해 여름에 성인 대표팀에도 선발된다.


2.2. 성인 시절[편집]


원래는 풀백 출신이었으나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이 유행하자 김정남은 스위퍼의 역할을 맡았고, 김호는 스토퍼의 역할을 맡아 대단히 성공적인 국가대표 경력을 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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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 김호와 달리 냉정하고 침착하게 플레이했다고. 부상으로 고생하다 71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는데, 축협 회장의 권유로 호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으나 알고 보니 플레잉 코치였다. 이렇게 선수생활을 연장한 김정남은 1974년 외환은행에서 은퇴한다.


2.3. 플레이 스타일[편집]


1960~1970년대 한국 최고 수비수였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수비를 했으며 원래 공격수였는데 경쟁자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했다고 하며 풀백보다 센터백이었을 때 더 뛰어났다.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으로 인해 김정남 본인이 스위퍼, 센터백 듀오였던 김호가 스토퍼 역할을 했으며 당시 최고의 센터백 듀오였다. 뛰어난 수비력과 좋은 키핑력,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선수 은퇴1980년대 초, 함흥철 감독을 보좌하며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수행했다. 이 때 이미 전술적인 부분은 김정남이 담당했다고 한다. 1983년부터는 유공 코끼리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1986년에는 멕시코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954스위스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 32년만에 86멕시코월드컵 24강 본선으로 이끌었다. 사실 대표팀이 출범할 때는 수석코치였는데, 지역예선 도중 문정식 감독이 말레이시아전 패배로 경질되면서 그 자리를 승계한 것이었다.

이후 24강 본선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한 조가 되는 어려운 조에 속했다. 사실 당시 월드컵은 32강이 아닌 24강 본선 진출이기 때문에 아시아는 월드컵 진출 티켓이 단 2장이었고, 24강 조별리그 체제까지는 북중미,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팀들이 서로 같은 조에 편성되기가 어려웠던 만큼 지금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디펜딩챔피언,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 우승팀, 불가리아는[6] 이 대회 16강 15위팀이라서 운이 없었다.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김정남은 일단 적응하기 위해 30분간 수비적으로 운영하라는 지시를 했으나, 선수들이 긴장한 나머지 수비적으로 운영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비에만 일관하고 몰려다니며 포메이션을 붕괴시키는 등 전혀 경기 운영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2실점을 했다. 이후 후반전에는 오히려 이판사판으로 하자면서 경기력이 좋아졌졌고, 대한민국 월드컵 첫 골을 기록했다. 불가리아전에서는 수중전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대한민국 월드컵 첫 승점을 획득, 이탈리아전에서는 멕시코 언론마저 심판이 도와줬다고 할 정도로 불리한 판정 아래 3:2 패배를 했지만 대한민국 첫 다득점을 기록하며, 월드컵 24강 최종순위에서 EPL멤버 북아일랜드를 제치고 승점 1점 1무 2패 월드컵 20위를 기록하였다. 이 때 조 3위도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김정남은 이탈리아전의 1골만 더 기록했으면 다득점에 앞서서 진출 할 수 있었던 패배를 많이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 해 당시 A대표팀 대회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강팀 사우디를 2:0으로 격파하며, 금메달 우승을 차지한다.[7]

그리고 마지막 A대표팀 대회였던, 88서울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에서도 다시 감독을 하였고, 비록 8강에는 실패했지만, 이 대회 금메달팀 소련에 0:0 클린시트 승점 1점 획득, 미국전 0:0 무승부 승점 1점도 기록하였으나, 아르헨티나에 1:2로 아쉽게 패하여 대회 11위로 선전하였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도 역임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다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K리그 울산 현대 호랑이의 감독을 맡았고, 2006년 한중일 챔피언 대결이었던 A3 챔피언스컵 도쿄에서 J리그 우승팀으로 올라온 감바 오사카를 이천수해트트릭으로 6:0으로 격파하였다.[8]







그리고 중국 슈퍼 리그 챔프인 다롄 스더를 4:0으로 각각 떡실신 시키며 우승을 차지하는가 하면, 사우디 챔피언 알 샤밥을 2006년 AFC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6:0으로 발라버리며 '아시아의 깡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울산의 짱짱한 스쿼드를 가지고 수비 축구를 한다는 비아냥을 사곤 했지만, 언제나 팀을 상위권에 올리곤 했기 때문에 울산현대의 팬들 입장에서는 단어 그대로 "시원섭섭" 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한창 이름을 날리 시절에는 허정무와 함께 재미없는 축구의 대명사로 군림했었는데, "그래도 김정남은 재미없어도 결과보면 이겨있잖아, 근데 허정무는 아니잖아(...)"라며 무승부에 취한 전남 팬들이 울산 팬들을 부러워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K리그뻥축구에 수비축구라는 편견을 일반인들이 가지는데 한몫한 감독 중 하나. 이후 울산은 어떻게 된 건지 감독이 바뀌어도 팀컬러가 수비지향이 되어 버렸다.그리고 아예 철퇴축구로 진화했다(...). 그래도 이 분이 무능하지는 않기에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팀 상태만큼 성적을 내 주는 감독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K리그에서 유일하게 별 탈 없이 이천수를 제어했던 감독이었다. 전남, 수원, 인천, 스페인, 네덜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팀 프런트, 감독, 선수들과 온갖 잡음이 있었지만, 김정남 감독 아래에 있던 시절에는 정말 순한 한 마리의 양이었다. 김정남 감독이 이천수를 제대로 제어한 덕택에 2005 시즌 울산은 K리그 우승을 비롯 탄탄대로를 걸을 수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유상철, 최성국 등 한 성격 한다는 선수들도 손쉽게 제어하는 등 그야말로 선수 기강을 잘 잡는 감독이었다.

2000년대 K리그에서의 김정남 감독을 본 축구팬들은 거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모습만 봤기에 상상이 가기 힘들지만, 2013년 방송된 '태극전사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1986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정남 감독이 선수들을 강하게 다그치는 모습과 함께 그 당시 선수였던 축구인들이 별명이 '광기'였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울산 현대 감독을 맡았던 2001년에는 선수단에게, 외국인 선수도 예외 없이 포함해서 해병대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 그렇긴 해도 본래 축구계에서 부드러운 성격이었긴 한 것 같다.[9]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유공 코끼리의 감독 재임 중에 1989년에 한번 우승컵을 들어올렸고[10],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울산 감독 재임 중에 2005년에 한 번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4. 감독 이후[편집]


2008년 12월, 울산 감독직을 사임한 후 울산 현대 기술고문, 프로축구연맹 기술고문 등을 거쳐 2010년부터는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직을 맡았으며, 2012년에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한국OB축구회 회장직 출마를 위해 2013년 12월 31일 부로 사임하였다. 2014년 1월 16일, 유효표 21표 중 12표를 획득해 한국OB축구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2023년 K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탄생한 K리그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 6인[11]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다만 최근에는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진 탓인지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본인이 참석하지 못하고 손자를 대신 보냈다.

5. 여담[편집]


  • 집안이 그야말로 축구 집안이다. 5형제의 맏이인데, 동생인 김강남, 김성남, 김형남 모두 축구선수였다.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인데 김강남과 김성남은 동시에 국가대표를 뛰면서 쌍둥이 국가대표로 유명했다.[12]


  • 축구계는 영어구사가 가능한 축구인들이 많은데, 이 김정남은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축구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 인터뷰나 언행을 보면 상당히 부드럽고 겸손하고 신사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축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와의 라이벌 관계는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인지 2000년대에 접어들고도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납득이 안 가는 판정에 거세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하고 벌금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엄청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 시대를 대표하는 축구인이라면서 국가대표 경기수가 의외로 60~70경기밖에 되지 않는데, 사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는 축구팬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늘어난 것이다. 아마도 자료 미비로 인해 상당수 경기의 존재가 묻혀 있어서 피파에 의해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 당시는 외국의 클럽팀이나 브라질 무슨무슨 주의 대표팀, 혹은 대표팀 2진을 상대로 경기를 자주 치르다 보니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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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링크[2] 센터백(스위퍼) [3] (1964년 올림픽 예선, 본선 3경기. 1967년, 1971년 올림픽 예선 7경기 포함)[4] 54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5] 본선 24강 조별리그에서 우승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월드컵 첫 골, 대회 15위팀 유럽 불가리아에게 월드컵 첫 승점,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에게 월드컵 첫 다득점을 기록하며 86월드컵 20위를 기록[6] 유럽예선에서 프랑스를 2:0으로 승리하였고 유고, 동독을 제치고 1986년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하였고, 1차전에서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와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며 이 대회 16강 15위를 기록했다.[7] 사우디 아라비아는 당시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의 팀이었다. 1984년 올림픽 본선 진출, 1984년 아시안컵 우승, 1988년 아시안컵 우승, 1992년 아시안컵 준우승, 1994년 월드컵 16강 12위, 1996년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아시안 게임은 성인 대표팀 출장 무대였는데, 이런 아시아 최고의 팀을 상대로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홈경기에서 우승한 것이다.[8] 한일전 모든 축구 매치 최다점수차 경기이며, 당시 감바 오사카 감독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일본 대표팀을 이끈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었다.[9] 김호 김정남과 동세대인 이세연이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 펀칭을 하면서 주먹으로 동시에 공격수의 얼굴을 쳐서 치아를 날렸다는 시대였다.[10] 유공-부천 SK-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의 K리그 우승 기록이다.[11] 최순호, 홍명보, 신태용, 이동국, 김정남, 박태준[12] 배구에도 비슷한 사례로 이재영, 이다영이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를 동시에 뛴 바 있고, 이 두 선수의 어머니는 88 올림픽 배구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김경희다. 다만 이들은 배구계를 넘어 대한민국 예체능계 전체를 흔든 대형 사건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