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일(웨이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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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용일 (金龍一)
출생
1976년 1월 1일 (48세)
데뷔
1996년 UP 1집 <1024(10월 24일)>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경력
2.1. 가수
2.2. 웨이크보드 선수



1. 개요[편집]


前 UP 출신 웨이크보드 선수.

가수 UP의 리드보컬이었으며, 가창력은 상당히 좋았으나[1][2] 본인이 연예인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면서 UP를 탈퇴하고 옵션 그룹에서 활동을 하다가 가수를 그만두고 웨이크보드 선수로 전향했다.


2. 경력[편집]



2.1. 가수[편집]


1996년 강현, 김용일, 이해정으로 구성된 3인조 혼성그룹 UP를 통해 "1024(10월 24일)"이라는 곡으로 데뷔했으나, 1집의 반응은 그렇게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요 순위에서는 10위 권까지 갈 정도로 선전했다. 당시 멤버들은 1970년대생으로 당시 20대였다.

그 뒤 1997년의 2집에서 이미지 변신을 꾀하면서 강현이 빠지고 박상후, 이정희가 가세했다. 이들은 1982년생으로 당시 16세의 중3이었다. 이렇게 해서 멤버구성이 20대 남녀 2명과 중3 남녀 2명으로 구성된 4인조 혼성그룹으로 변모했다.[3] 그리고, 2집에서 "뿌요뿌요"와 "바다" 등을 히트시키며, UP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참고로 뿌요뿌요 이후 컴파일 코리아로부터 레어 한정품 뿌요인형과 뿌요뿌요2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뿌요뿌요 팬들이라면 네이버 등지에서 검색하다가 "뿌요뿌요"라는 제목의 곡은 이름이라도 본 적이 있을 듯. 그런데 이 2집의 수록곡 중에 "아프리카"는 이미 1집에 실렸던 노래를 그대로 재탕해서 다시 실었다.

같은 해, 3집을 내서, "밝은 세상"(發斤世上)을 타이틀 곡으로 했으나 반응이 별로였는데, 사실 김용일은 가수로서 적성이 아예 안 맞았다. 가창력은 뛰어났지만 김용일 자신이 별로 가수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4][5] 하지만 그가 몸담은 UP가 워낙 인기가 있었기에 억지로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뒤 인기가 사그라들자 UP에서 탈퇴했다.[6] 탈퇴 직후 구피의 박성호, 영턱스클럽의 지준구와 함께 낸 프로젝트 앨범 '옵션'이 그의 마지막 가수 활동이었다.

그렇게 가수로서의 활동을 접고 지내던 중 2016년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복원 슈가맨 특집에 출연해 뿌요뿌요와 바다를 불렀고 가수 활동을 그만뒀음에도 활동 당시보다 훨씬 발전한 가창력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 뒤 2021년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달려가겠어 가왕석으로 가겠어! 런투유로 출연했다.


2.2. 웨이크보드 선수[편집]


연예계를 떠난 후 그는 스노보드 선수가 되었는데, 여름에는 스노우보드를 할 수가 없다는 점 때문에 웨이크보드로 한 번 더 전향했다. 이후 각종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이런 저런 상을 수상했다. 웨이크보드 세계랭킹 3위, 아시아2회 챔피온, 웨이크보드 대한민국 랭킹 1위 경력이 있다. 지금은 후학 양성을 하며 강원도 홍천군에서 웨이크서핑 샵을 운영 중이다.

피지컬갤러리 '우리 아이가 말라졌어요' Ep. 12에서 웨이크보드 강사로 출연했다. 영상

TEMPEST 유튜브 자체 컨텐츠 ‘TEMFLIX' EP 10에서 웨이크보드 강사로 출연했다. 영상

여담으로 소유, 유세윤, 박소진, 엄정화, 강균성의 전담 서핑 선생님이라고 한다.

[1] 무시하기 쉬운 사실인데, '뿌요뿌요'는 생각보다 부르기 만만치 않은 곡이다. 애초에 김용일 파트의 보컬톤이 높게 잡혀있다. 거의 김현정의 '혼자한 사랑'과 동급으로 빡센 노래다.[2] 아이돌들이 모여서 부르는데 김용일 부분은 어색했었다. 예전에는 쥬얼리에서 가창력이 좋은 편에 속했던 박정아마저도 쇼 프로에서 뿌요뿌요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힘들어하면서 퍼지기도 하였다.[3] 여담이지만 이정희는 당시 남자아이같은 외모로 '쟤가 여자애였어?'라고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4] 정확히 말하면 가수라기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적성이 맞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딱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기 보다는 연예인 생활에 회의가 많았던 걸로 보인다. 겉보기엔 화려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당시 대부분의 어린 신인 가수들이 그러하듯 제작사의 주먹구구식 수익분배로 인해, 경제적인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으니 회의감이 안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링크[5] 당시 기획사(조선음향)에 Y2K, 써클 등도 있었다. 신주학 현 스타제국 대표도 조선음향에서 일한 적이 있다.[6] 이후 그 자리는 이켠이 영입되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팀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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