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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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장관 (1990~2001)


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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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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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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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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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4대 문교부 장관
김옥길
金玉吉 | Kim Ok-gil


파일:김옥길 총장.png

출생
1921년 4월 17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
사망
1990년 8월 25일 (향년 69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본관
풍천 김씨
재임기간
제24대 문교부 장관
1979년 12월 14일 ~ 1980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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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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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관료, 정치인이다. 김동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누나이기도 하다.[1] 본관은 풍천(豊川). 종교개신교이다.


2. 생애[편집]


1921년,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에서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의 딸로 태어났다.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하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갔다. 여기서 기독교문학을, 템플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행정을 공부한다. 1952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조교수, 부교수, 문과 학무과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에 취임하였고, 동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였다.

1979년 12월, 박찬현의 뒤를 이어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교복자율화와 두발자유화를 처음으로 지시했었고,[2] 동시에 교복디자인의 다양화도 지시하여서 이때부터 일본식 교복에서 서양식 교복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몇몇 학교에서 교복을 없애기 시작했다.[3]

1980년, 5.17 내란 때 무장 군인들이 중앙청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중앙청을 포위하는 상황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반대하였으나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주영복이 밀어붙여서 해당 반대는 무산되었고 이후 문교부 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유신반대 시위 때도 학생들의 맨 앞에서 시위대를 보호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더불어 이때 총학생회장이 숨을 곳이 없자 김옥길 총장이 나서서 숨겨주었는데, 그에 감동받았던 총학생회장은 후에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이 된다. 이 총학생회장이 바로 제14대 김선욱 총장.

대강당 채플이 끝나자 4,500여 학생들이 "유신 결사반대!!" "구속 학우 석방!!"을 외치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 초겨울임에도 엄청나게 추운 날씨였다. 김 총장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 서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전해 10월 대규모 시위에서도 그는 정문을 뚫고 나가려는 학생들에게 "나가려거든 먼저 나를 밟고 나가라!!"고 소리쳤었다. 이화사(史)에 '남기고 싶은 말'로 기록된 이 한마디는, 학교 밖으로 맹진하려던 행렬의 속도를 일시에 중단시켰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민주화를 쟁취하는 일은 민족 감정의 분출이었고, 이를 이룩하려는 학생들의 각오는 목숨을 건 사투였다. 시위 행렬은 순식간에 이화교[4]

를 벗어나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내달렸다. 학생들이 기승을 부릴수록 경찰은 난폭하게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러대었다. 총장은 경찰의 진압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벌써 5시간째 학생들의 아우성과 격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대강당으로 가서 철야기도를 하자."고 학생들을 달랬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서야 지칠 대로 지친 긴 대열을 이끌고 학교로 돌아왔다. '철야기도'를 내세운 총장의 순발력은 벼랑 끝에 서 있던 학생들에게 돌파구를 찾아준 것이었다.


1989년, 직장암이 발병해 수술과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나빠져 1990년 7월 23일, 퇴원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92번지에 위치한 자택으로 돌아왔으나 1개월 뒤인 1990년 8월 25일 숙환으로 인해 사망한다. # 김옥길이 여생을 보낸 대신동 자택은 개축되어 현재 김옥길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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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매가 모두 독신이다.[2] 박정희때는 통제정책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교복착용이 일제의 잔재 및 리베이트 문제로 사회문제가 지적되어 논쟁거리가 되었던 상황이었다. [3] 교복 자율화 및 두발자유화는 정통성이 약한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어받아서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학교장 재량으로 교복을 입힐수있도록 하고, 두발단속도 학교장 재량으로 실시할수있게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진보교육감이 당선되기 이전까지 두발자유화는 머나먼 일이 되었다. [4] 정문 앞에 있었던 다리. 이 밑으로 기찻길이 있고, 경의선 기차가 지나다녔다. 2003년경 복개된 후로는 기찻길이 보이지 않고, 이화교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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