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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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파일:김영삼_초산테러.jpg

사건 당시 기사
발생일
1969년 6월 20일 22시 05분
사고일로부터 20006일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자택 근처 골목길
유형
산 테러
가해자
불명
피해자
김영삼

1. 개요
2. 배경
3. 사건 개요
4. 사고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1969년 6월 20일에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이던 국회의원 김영삼(당시 41세)을 암살하기 위해 승용차에 괴한들이 질산병을 투척한 사건이다. 1960년대의 대표적인 미제사건 중 하나이자 정치 테러다.

1969년 6월 21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사건 기사.

"20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3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

길 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1]

야당 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괴한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더라면 아찔한 일이었다. 얼굴에 공적 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적 상처가 났을 것이 뻔했다." -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


참고로 당시 신문 보도 등을 통해 질산의 일본식 표현인 "초산()[2]테러 사건"이라고 알려져서 초강산(超强酸)[3] 또는 아세트산(醋酸)[4] 테러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2. 배경[편집]


김영삼은 당시 박정희가 장기집권하기 위해 헌법을 바꾸려는 3선 개헌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질산 테러 사건이 발발하게 된 연설을 6월 20일 국회[5]에서 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요, 잡으라는 공산당은 안 잡고[6]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정보부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다.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충고한다.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짓 하지 말라. 총리는 정보부장 파면을 건의할 생각 없는가?"



3. 사건 개요[편집]


그런데 그 날 저녁 김영삼이 저녁식사 후 자신의 승용차상도동의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작업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골목길을 가로막고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며 김영삼의 차량을 막아선 사이 다른 1명이 차문을 열려 하였으나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다. 이전에 김영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차량 이동 시엔 항상 차문을 잠그는 습관을 들인 덕분이었다. 위협을 느낀 김영삼이 운전기사에게 "분명 나를 해치려는 놈들이다. 치어 버려도 상관없으니 밀어붙여라!" 라면서 차를 출발시키게 하여 기사는 경적을 크게 울리며 전진하자 괴청년 중 한 명이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을 던져 차량 후미의 유리창에 맞고 박살났다. 병 깨지는 소리가 워낙 커서 김영삼은 처음엔 수류탄을 던진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다행히 유리창은 깨지지는 않았고 김영삼은 다치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보니 심한 악취와 함께 차량 도색이 우글우글하게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또 범행 현장을 조사해 보니 아스팔트 일부도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의 감식 결과 질산으로 판명되었는데 당시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었던 터라 박정희 정권의 테러로 추측되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4. 사고 이후[편집]


흔히 이런 테러를 당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데 도리어 화가 폭발한 김영삼은 바로 그 다음날 국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7]

"이 독재국가를 끌고 가는 원부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은 민족반역자다. 이건 날 죽이려는 정부의 음모다."

그러나 이러한 김영삼과 야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이 사건 이후 야당에 대한 테러가 10월 유신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5. 여담[편집]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김충식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나중에 김영삼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며 사과도 곁들였다고 한다. 참고

이런 면을 본다면 방사능 홍차와도 양상이 꽤 비슷하다. 테러의 재료가 일반인이 입수하기 조금 어려운 것[8]이라는 점과 높으신 분들이 뒤에서 손을 댔다는 점, 정적에게 독을 먹여서 은밀하게 처리하는 점에서 말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4년 뒤에는 양김 중 다른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 터졌고, 김영삼은 이 사건 역시 박정희의 짓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안 그래도 박정희와 대립관계였는데 테러까지 당한 김영삼 입장에선 납치 사건의 배후에도 박정희가 있다고 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에 얼굴을 베이는 테러를 당했는데 김영삼이 병문안을 와서는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초산 테러 등의 여러 일을 겪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김영삼이 한나라당과 매우 가깝긴 했지만[9]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만큼은 여전했고[10] 이 때문에 이명박, 이재오, 정병국, 김용태, 김문수친이계, 비박계 정치인들과 친하게 지냈지[11] 친박하고는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이후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뒤로는 새누리당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심지어 박근혜에 대해 "칠푼이"라고까지 비판했으니 차남 김현철이 2012년 총선 공천에서 배제되자[12] 대놓고 박근혜를 비난하고 탈당하는 한편 김덕룡[13], 문정수, 심완구, 강삼재, 김정수, 박희부, 노병구, 최기선(열린우리당 소속) 등 상도동계 정치인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을 정도였다.

다만 상도동계 중 새누리당에 남았던 사람들은 서청원김무성, 정병국이었는데 서청원은 친박계 좌장이 되었고 김무성과 정병국은 비박계로 있다가 바른정당으로 나갔는데 김무성은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였으며, 정병국은 바른정당국민의당이 합쳐 만들어진 바른미래당에서 활동하다가 2020년 초 새로운보수당 창당을 거쳐 미래통합당으로 복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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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이야 차가 일정 속도로 달리면 자동으로 잠기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으며 차량 문을 일부러 잠그는 일이 잘 없었다.[2] 질산의 원료였던 초석(硝石)을 유래로 하는 어휘임[3] 질산이 강산인 건 맞지만 초강산은 황산보다 강한 산을 일컬으므로 질산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4] 발음이 초산으로 같다. 이 경우는 식초(食醋)에서 유래한 어휘이다. 아세트산은 약산이라 테러에 적합하지 않으나, 일단 산은 산이라 오래 접촉할 시 피부가 상할 수 있고 원액을 그대로 마시면 소화기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킨다.[5]서울특별시의회 본관.[6] 알다시피 김영삼은 어머니가 공비에게 살해당해서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며 실제로 문민정부 시절에는 남북관계가 굉장히 나빴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과 김일성의 급사 탓이 컸지만.[7] 애초에 김영삼의 성격 자체가 호탕하고 한 성깔 하는지라 이런 일에 위축될 사람은 아니었다.[8] 염산은 용도가 묽은 경우 하수구 청소용 등으로 동네 약국에서도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고 황산도 산업용으로 쓰이는 곳이 많아서 위험성에 비해 일반인이 구하는 게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질산은 강산이라는 점에 더해 폭발물을 만들 수 있는 재료라는 특성이 있어 더욱 엄격하게 관리되는 편이고 일반인이 구하기 쉽지 않은 편이다. 즉 질산이 테러 도구라는 점 자체가 뒤에 무언가 뒷배가 있는 사건임을 암시한다.[9] 다만 YS는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적은 없다. 신한국당 시절인 1997년 10월 탈당했기 때문이다.[10] 어느 인터뷰에서 DJ와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YS는 사망할 때까지 박정희에 대한 반감을 결코 풀지 않았다.[11] 친이계는 이명박부터 운동권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서라도 운동권 출신들이 많았다. 특히 이재오는 자신이 독재정권 시절 고초를 당했던 것 때문에 친박(민정계도 일부 있었다.)과 박근혜를 매우 증오한다는 점을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정병국과 김용태 역시 운동권 출신이었다. 다만 김문수는 노동운동의 레전드였지만 2017년 초반 친박으로 갈아탔다.[12] 이 때는 박근혜가 비대위원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김현철은 새누리당에서 비박계 당원 중 한 명으로 꼽혔다.[13] 심지어 김덕룡은 친이계 원로로 꼽히는 이명박의 최측근 정치인이었다.